20대 후반의 백인 청년환자가 나에게 보내졌다. 젊은 남성들에게 흔치 않은 고환암으로 진단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터였다. 늘 하듯이 환자의 과거 병력, 가정 병력을 진찰실로 들어가기 전에 검토 했더니 젊어서그런지 병력이 무척 간단했다. 청년은 진찰실로 들어서는 나를 보더니 무척 당황해 했다.
옷을 벗고 가운으로 갈아 입으라 했더니 “성서에 의하면 남자의 몸은 여자가 만지도록 할 수 없다고 쓰여 있다”면서 진찰을 거부했다.
그는 극단 기독교 종파에 속한 사람으로 엄격한 종교의식을 하면서 살아 온 모양이었다. 그는 그 때 까지 여자가 남자 몸을 만질 수 없다고 배웠기 때문에 여자 의사인 나를 보고 난감해 했던 것이다.
이때 나는 문득 나 자신이 하나의 피해자(?)가 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가 갖고 있는 극단적인 편견의 대상이 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병을 고쳐야 하는 의사인 나로서는 나에게 편견을 가한 가해자(?)를 어떻게 납득시키느냐가 문제였다. 의사와 환자의 벽이 높게만 느껴졌다.
나는 지혜로우려고 침착히 생각 할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말했다. “나는 여자가 아닙니다.” 이 말은 말 그대로 볼 때 이상할 뿐 아니라 대단한 비밀을 선포한 것처럼 들린다. 그는 깜짝 놀랐다. “내가 오늘 당신을 보는 것은 여자의 입장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 청년은 한 동안 말없이 나를 바라 보았다. 나는 설명이 더 필요함을 느꼈다. “내가 환자를 볼 때는 나는 여자가 아니고 의사라는 뜻이지요.” 청년은 그제서야 옷을 벗고 가운을 갈아 입었다.
이와 비슷한 예로 나의 맏딸이 초등학교 2학년일 때 “엄마 제시카가 그러는데 미세즈 노블은 굉장히 무섭고 동양아이들을 싫어한데!” 하며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 제시카는 학년이 하나위인 한국 아이로 딸의 친구였다. 딸아이는 미세즈 노블에게 수학만을 배우게 되어 있었고 한 해 뒤에는 담임으로 될 확률도 높은 선생님이었다. 딸아이에게 선생님이 동양인에게 편견이 있다면 너는 동양인으로 선생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학생으로 만나는 것이라는 점을 보여 주어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그리고 “무슨 일이든지 자신이 겪어 보지 않고 남의 말만 듣고 미리 판단하는 것은 자신에게 손해”라고 말해줬다.
편견 때문에 혼돈스런 사고방식이 내 안에서 자라고 비정상적인 대인관계를 초래하기 쉽다. 이것은 의사와 환자 뿐아니라 어린 딸처럼 학교 그리고 사회 구석구석에서 발생한다. 편견은 상처를 주거나 받게 하고 치유되는데 시간이 걸리기도 하고, 잘 안 될 수도 있다. 법정싸움이 되는 경우도 있다.
편견이 우리의 마음을 좀 먹기 전에 빨리 교정을 보는 것이 좋다. 살아보면 이같은 선입견때문에 스스로 불필요한 에너지를 낭비하고 손해를 본다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편견은 진실과 멀다.
자녀를 기르는 부모들에게 특히 부탁하고 싶은 말이다. 어른인 우리들은 자신이 겪지 않으면 좁은 세계에서 벗어나기 어려울지 모른다. 다시 말해서 여러가지 핑게를 갖고 우물안의 개구리로 그냥 그렇게 살아가기 쉽다. 부모인 우리들이 그렇게 살면서 우리의 자녀들에게는 넓고 좋은 세상, 많은 길을 보여 주고 싶어하는 아이러니가 있다. 편견과 선입관에 물들여지지 않고 자신의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도와주자. 그래서 그들은 자신있게 그들의 길을 갈 수 있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