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 ‘가을 날’의 일부분을 내 나름대로 번역해 보았다. ‘주님 지금이 (그) 때입니다. 거대한 여름은 갔습니다. 해시계를 당신의 그림자로 덮으십시오…(중략)…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영원히 집을 갖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홀로 있는 사람은 늘 고독하게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 시는 지금 우리들이 겪고 있는 삶의 어려움을 잘 표현 해 주는 것 같다. 릴케가 살던 시대나 지금이나 달를바가 없는 것인가? 가계부의 밸런스가 안맞는다고 식구처럼 함께 살던 애완용 개와 고양이를 길에 버린다. 중동과 아프리카지역에서는 전쟁이 계속되고 고아, 미망인, 상이군인이 늘고 있다. 그들이 겪는 정신적 고통은 정신과 전문의들의 평생 작업이 되어야 할 지도 모른다.
부슬 부슬 겨울비가 내리던 크리스마스 이브 나를 찾아 왔던 패트릭과 일일 노동자인 ‘팽키 아저씨’가 카운티 병원 응급실에서 12시간 이상을 기다려 치료를 받아야 했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패트릭은 5년전 36세 때 뇌종양 수술을 받고 나에게 보내졌던 환자였다. 그에게는 아내와 당시 여섯 살, 한 살짜리 두 아이가 있었다. 가족들을 깊이 가슴에 새기고 투병할 결심이 되어 있던 모습은 처절하기 보다는 숭고해 보였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뇌종양 치료에 대한 비관적 통계를 일단 뒤로 했다. 그리고 희망을 갖고 치료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5년전 일이다.
5년 동안 그는 아이들의 자상한 아빠로, 축구 코치로, 피아노 레슨하는 아이를 데려다 주는 운전기사로 행복하고 바쁜 시간을 가졌다고 말했다. 뇌종양은 다시 그를 찾아왔다. 그는 자신의 병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내가 제시한 실험적 치료에 대한 내용에 대해서는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청했다.
‘팽키 아저씨’는 체구가 왜소한 한국 사람이다. 오래 전 그는 세상을 방황하다가 이탈리아에 머문 적이 있었다고 한다. 굶은 상태에서 열이 난 그는 어느 대성당 앞의 벤치에 누웠다가 잠이 들었다. 누군가 어깨를 흔들며 깨워서 눈을 떠보니 한 젊은 이탈리아 신부가 빵과 포도주 한 병을 들고 그의 앞에 서 있더란다. 그 후 이 ‘팽키 아저씨’는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처지인데도 자신이 먹을 것만 남기고 노숙자를 찾아 다니며 더 가난한 이들을 도와왔다. 이렇게 살아 온 이 아저씨가 중병에 걸린 것이다.
보험이 있을리 없고 영어도 못해서 성당의 사회복지 담당하는 한 자매의 도움을 받았다. 카운티 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입원할 때 까지 하루종일이 걸렸다. 그 날이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그 자매님의 봉사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이 두 케이스를 보면서 삶의 어려움과 병고는 ‘문제(problem)’라기 보다 ‘과제(task)’로 받아들이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날의 일상사도 ‘문제’가 아닌 ‘과제’로 풀어나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가계부 밸런스를 맞추는 것이 ‘문제’가 아닌 ‘과제’라면 가족들은 서로 협력해서 소비를 기꺼이 또 즐거운 마음으로 줄일 수 있지 않을까? 가족같은 개나 고양이를 길거리에 버리지 않아도 될 것이다. 긴장되지만 희망적인 날을 맞이하고 성과를 이룬 하루를 마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지금 감원을 감행하는 많은 회사들도 마찬가지이다. 불경기를 ‘문제’로 본다면 마땅히 감원을 해서 적자를 해결해야겠지만 모두가 풀어갈 ‘과제’로 받아들이면 전직원이 봉급을 적게 받아가더라도 함께 어려움을 받아들이고 극복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문제’는 수동적 삶의 태도이고 ‘과제’라는 마음가짐은 능동적 삶의 관점이다.
나는 패트릭과 팽키아저씨 모두 그들의 질병을 과제로 잘 풀어갔다고 보고 싶다. 결국 그들의 세상과의 이별이 가족과 주위사람들에게 문제로 남아있을 지언정… 그리고 그 또한 그들이 과제로 풀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말이다.
문득 릴케에게 이렇게 기도하고 싶어진다고 알리고 싶다. ‘아닙니다 주님. 지금 집이 없는 사람도 언젠가는 따뜻한 잠자리를 갖게 될 것입니다. 또 지금 외로운 처지라도 ‘팽키 아저씨’처럼 남을 돕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