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세상에 있어요’ : 의료 가부장적 태도의 부작용

‘아직 이 세상에 있어요. 텔마 올림.’

이 연말 카드는 매년 12월이 되면 소식을 보내오는 텔마에게서 받은 것이다.
텔마는 다른 어떤 이야기도 카드에 쓰지 않는다. 매년 똑같은 소식을 한 줄 써
서 보낸다. 요 몇년사이 점점 카드가 도착하는 시간이 늦어져서 일월이 되기도
한다. 나의 답장도 자꾸 늦어져서 올해는 봄에야 보낼판이다.

텔마는 유방암을 이긴 환자다. 이젠 환자가 아니고 ‘유방암을 이긴 여인’이
랄까. 발병 당시 갱년기를 지나고 있었다. 분주한 LA에서 은퇴 주민들이 많이
이동해 가서 사는 한적한 곳으로 이사간다고 찾아 왔던 것이 십수년 전이다.
텔마는 유방암 진단을 받은 후 첫 번째 상담했던 동료 종양학 전문의사와 충
돌이 있어 나를 찾았던 여인이다. “당신이 내 아내라도 나는 유방 완전 절제를
추천할 것입니다”라는 소견을 주었다고 했다.

내가 듣기에도 강력한 표현이었지만 진솔한 점도 있었다고 생각되었다. 텔
마의 암은 유방 완전 절제가 아닌 일부 절제 즉 암 덩어리만을 도려내고 나머지
남은 조직을 방사선으로 치료하는 방법을 쓰기에는 암 덩어리가 좀 큰 편이었
다. 요즘은 약물치료로 암 덩어리를 우선 줄여주고 적어진 암덩어리만을 절제
하는 방법을 많이 쓰는데 당시는 그런 방법을 생각하지 못하던 때였다.
텔마가 원하는 방법을 쓰면 유방의 모양이 일그러지고 다른 쪽과 차이가 눈
에 띌만큼 작아질 판이었기 때문에 첫 번째 상담 전문의는 텔마의 요청에 찬성
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내 의견으로는 생명에 지장이 없는 한 치료때문에 생기는 몸 모양의 변화
를 염려해서 더 극단적인 수술을 추천할 필요는 없었다. 치료로 인해서 기능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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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를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인 경우에도 미리 설명해서 환자가 이해하면 치료
를 받아들이는데 문제가 없는데 하물며 모양이 만족스럽지 않을 것이라는 사
실을 이해하지 못 할 사람은 드물것이다. 또 미(美)에 대한 관점은 극히 주관적
인 것이므로 모양새가 나빠질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의견을 고집하는 것은 미
성숙한 견해이다.

때로 의사들도 너무 깊이 감정적으로 휘말리다보면 치료 결정 과정에서 과
격해지기도 하고 혼동이 생기기도 한다. 여기서 의사들이 경계해야 하는 것은 ‘
의료 가부장적 태도(medical paternalism)’이다. 과거의 아버지들이 가족들의
의사에 아랑곳 없이 아버지 마음대로 매사를 결정하였다는 뜻에서 유래된 말
일 것이다.

21세기 의학에서는 경계하는 행동이다. 의사는 환자의 의견을 존중
하고, 최종결정은 환자가 내린다.

이 달이 가기 전에 텔마에게 답신을 보내야 하겠다. 예전처럼 ‘소식을 주셔
서 감사합니다. 잘 계신 것 같아서 기쁩니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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