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가 선물한 바흐의 샤콘느 2016

새해라서 그런지 자꾸 지난 날을 되돌아보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분주하기만 했고 안정되지 못했던 초창기 전문의사 시절이 생각나 때로는 불편하다. 그때 나는 설익은 과일처럼 성숙하지 못했다. 그래서 도움이 필요한 환자들을 알아 보지 못했고, 도와줄 수 있는 기회를 놓친 적도 많았다. 그뿐이 아니다. 자식으로, 엄마로, 아내로서 실수도 많았다. 물론 실수를 통해서 배웠지만.

그래도 놀랍고 고마운 것은 주위의 사람들이 나를 참아 주었다는 사실이다. 이 글을 쓰는 이유도 감사하고 미안한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이다. 이미 고인이 된 사람들에게도 방법이 있다면 이런 마음을 전하고 싶다.

나에게 자신이 연주한 바이올린 곡이 담긴 테이프를 건네주었던 유대인 노인 환자가 생각난다. 생존해 있다면 100살은 넘었으리라. 그는 한 쪽 눈에 임파암이 생겨 나를 찾았다.

일반적으로 그냥 ‘눈’이라고 말하지만 의학적으로 눈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안구가 있고, 안구가 자리잡고 있는 안구집이 있다. 안구집에는 안구를 움직일 때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양쪽 눈을 각각 다른 방향으로 끌어주고 밀어주는 근육이 있고, 시신경, 눈물샘, 렌즈를 보호하는 막도 있다. 임파암은 안구에도 올 수 있고 안구집에도 생길 수 있다. 그 환자의 임파암은 방사선 치료로 완치됐지만 부작용으로 눈 주위에 있는 눈물샘과 예민한 조직들이 영향을 받게 되었다.

치료가 끝난 후 두번 째 나를 찾아 왔을 때 그 노인이 유대인이고 바이올리니스트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눈이 아프고 눈물이 많이 흘러서 악보를 보기 힘들어 연주가 어렵다며 나에게 테이프 하나를 건네주고 갔다.

그 테이프에는 환자 자신이 연주한 바흐의 ‘샤콘느’가 들어 있었다. 15분 분량의 슬프고 어려운 곡이었다. 바흐를 좋아했지만 당시 나는 음악이 전하는 고통, 슬픔, 영적 갈등을 껴안을 만한 능력도 여유도 없었다. 그후 다시 노 연주자가 병원을 찾아 왔을 때 나는 건성으로 감사를 표시했고 그후 테이프를 치웠다.

30여년이 지난 어느 날, 바흐에 대해 읽다가 우연히 ‘샤콘느’에 대한 글을 접하게 됐다. 바흐의 삶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 곡이 쓰여진 사연은 이랬다. 바흐는 그가 섬기던 레오폴드 왕자와 함께 여행을 다녀와야 했다.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내의 죽음을 알게 된다. 장례는 이미 끝났고 아내는 이미 땅에 묻힌 후였다. 그녀는 36세였다. 그때 바흐가 쓴 곡이 ‘샤콘느’라고 한다. 슬프고 아프다. 영적인 고뇌와 갈등이 복잡하게 얼켜있다.

지금은 이 곡이 나에게 말하려는 삶의 애환, 고통, 영적 갈등을 잘 이해한다. 더불어 나는 이곡이 주는 위로도 가슴으로 느낄 수 있다. 자꾸 듣고 싶을 정도로 좋아한다. 이 곡은 환자들이 알려주고 싶어하는 삶의 어려움에 대한 말 없는 호소를 들을 수 있게도 한다.

그 환자가 주었던 테이프를 찾아야겠다. 그리고 그의 연주를 다시 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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