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에 다녀오기를 잘 했다. 소련연방국이 붕괴한지 사반세기가 넘었고 그로 인해 소련에 묶여있던 여러 연방국가들이 독립해서 떨어져 나갔지만 아직도 러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큰 땅 덩어리를 차지하고 있다. 세 대륙에 걸쳐 펼쳐져 있는 이 나라는 상트 페테르부르크가 있는 유럽 쪽 부터 극동지방 블라디보스톡 까지 11개의 시간대(time zone)가 있다. 극동, 한국 인천 공항에서 세시간이면 갈 수 있는 사할린에는 일제 강점기가 끝난 후, 조국으로 돌아 오지 못한 우리 조상들의 후예들이 아직도 많이 살고 있다. 너무 나라가 크므로 이번에는 서쪽 유럽쪽에 있는 도시들만 2주간 다녀왔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니 ‘빅토리 데이(V-Day)’를 며칠 앞두고 있었다. 곳곳에서 퍼레이드를 준비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치는 1945년 5월 8일 야밤에 베를린에서 항복문서에 싸인했는데 모스크바 시간으로는 5월 9일 새벽이었다. 그래서 러시아의 ‘V-Day’와 다른 유럽국가들의 ‘V-Day’ 기념일은 하루 차이가 있다.
러시아의 문학, 발레, 미술, 음악은 지구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어왔다. 나도 음악을 예로 들자면 클래식 차이코프스키 작품들 부터 대중가요 ‘백학(The Cranes)’, ‘백만송이 장미’도 좋아한다.
‘백학’은 ‘모래시계’라는 한국 드라마의 주제곡으로 쓰였던 곡인데 나는 그 드라마를 보지 못한 터이다. 라술 감자토프라는 다게스탄 출신 시인이 히로시마에 있는 평화의 공원에서 사다꼬 사사끼 (원폭 희생자: 2살 때 원폭을 맞고 12살 때 백혈병으로 죽었음) 동상과 거기에 걸려있는 종이백학들을 보면서 소름끼치도록 깊은 감명과 아픔을 경험했다한다. 여행 후 그의 모국어인 아바르 말로 그가 쓴 시에 얀 프렝켈이 곡을 붙인 노래이다. ‘때로/ 피멍든 전장에서 돌아오지 못한 병정들이/ 우리의 땅에 묻히지 못하고/ 새 하얀 학이 된 것 처럼 보이네…../ 머나 먼 그 때로 부터/ 그들은 창공을 나르고/ 우리는 그들을 듣는다…..’ 이 시는 아바르 말에서 러시아 말로, 러시아어에서 영어로 번역됐다. 영어에서 한국말로 내가 번역 해 본 것인데 뜻을 많이 상실 했을 지도 모르겠다. ‘백만송이 장미’도 라트비아 원작이 러시아 말로 번역된 노래이다.
지금 러시아에서는 전사한 병사들을 백학으로 표현할 정도로 ‘백학’이라는 노래는 깊이 대중의 가슴에 스며들어 있다고 한다. 침범하고 침범당하면서 숱한 전쟁에 참여했던 나라이어서 전사자의 숫자는 어마어마하다. 이차대전만을 보더라도 이천 육백만의 사상자가 있었다.
‘V-Day’가 되었다. 집안의 전사자들 사진을 확대해서 들고 행진하는 러시아 국민들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보고 무척 감명을 받았다. 흑백 사진 속에 있는 젊은이들의 모습들… ‘영원한 불멸의 연대(聯隊) (Immortal Regiment)’라는 풀뿌리 운동이 ‘V-Day’ 행사로 퍼진 것이었다. 3년 전 세 명의 청년들이 전사한 조상들을 기억하고 존경을 표하자고 시작했다. 워낙 전사자를 많이 낸 나라라서 거의 모든 가정이 이 행사에 참여하다 보니 행진이 볼만하다. 푸틴 대통령이 자기 아버지의 사진을 들고 모스코 행진 대열에 끼어 있는 모습도 뉴스로 보도되었다.
이 러시아 국민운동에 다른 나라가 동참했다는 뉴스가 있었다. 러시아가 소수민족을 합병하면서 저지른 잔행을 묵살하는 행위로 보일 수 있기 때문에 본 뜻을 오해시키는 위험한 동행이라는 지적이다. 또 흥미로운 것은 이 풀뿌리 운동을 러시아 정부가 애국심을 부추기는 하나의 정책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새로이 비판이 대상이 되고 있다.
엘에이에 돌아와 메모리얼 데이, 모국의 현충일을 지냈다. 우리도 오늘을 있게 한 전사자들을 잊지 말고 그들의 사진을 들고 ‘영원한 불멸의 젊은이들의 날’로 만들 수는 없을까 생각해 본다.
미주 중앙일보 열린광장 2017.7.1. 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