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에 날린 하얀 돌배꽃잎들이 아스팔트를 덮고 있는 이곳 엘에이의 겨울은 화창하고 따뜻해서 나무들도 혼동이 되나 보다. 어떤 집 앞마당에는 봄에 피어야 할 목련이 지금 활짝 피어 있다. 정원사들이 바쁘다.
우리집 정원사는 두명의 도우미 일꾼과 동행한다. 그 중 한 사람이 다리를 전다. 어렸을 때 다친 모양이다. 네살 손주와 시간을 보내던 지난 주 어느 오후, 손주는 일꾼의 걸음 걸이가 이상하다는 것을 보았다. 나에게 묻는다. ‘저 아저씨는 왜 저렇게 걷지?’ ‘쉬~~, 조용 조용 말해. 들리지 않게!’ ‘왜?’ 이 아이가 두가지에 대해서 ‘왜?’라고 묻는 것이었다. 왜 변형된 다리를 갖고 있는지, 왜 할머니가 조용히 들리지 않게 말하라고 하는 것인지를 묻고 있었다. 그러자 녀석은 ‘내가 가서 물어 볼께. 왜 다리가 그렇게 됐는지.’ 하는 것이 아닌가.
그 사람에게 가서 묻는 것은 무례한 짓이라고 말하고 우선 막아야 했다. 그 애는 또 물었다. 왜 무례하냐고 말이다. 그 애의 질문은 단순했고, 하고저 하는 행동도 순수했다. 아이에게 이론에 맞게 답을 해야 하는데 그게 너무 복잡했다. 모든 이유를 생략하고 그냥 ‘안돼!’라고 일축해 버렸다. 무척 찜찜했다.
몸의 일부가 망가지는 것은 웃음거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현대를 사는 우리는 안다. 차별이 있을 경우 불법이라는 것도 안다. 우리가 여기 까지 오는 데 오래 걸렸다. 이러한 내면을 이해 시킬 수 있었더라면, 나는 손주를 말릴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또 법적, 사회적 개선에도 불구하고 이 정원사가 차별대우를 안 받았다고 장담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손주의 순수한 질문은 왜곡될 수 있을 것이었다.
두 달 전 나에게 의뢰되어 온 히스페닉 계통의 23세 마리아가 생각난다. 5년 전, 십대이었을 때 골반 안에 희귀 양성종양 제거 수술을 받았다. 지난 해 12월 정규검사에서 골반 수술 흉터라고 보기에는 좀 큰 덩어리가 발견되어 방사선 치료 가능성 타진 차 보내졌다. 여러 모로 퍼즐이 잘 맞는 것 같지 않아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의사들은 이런 경우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서 재조사를 한다. 병리를 리뷰하고, 영상 검사를 머리부터 가슴, 배, 골반까지 모두 다시 했다. 이 환자는 유전병 신경 섬유종증 (neurofibromatosis)의 피해자/환자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마리아는 완치될 수 없고, 점차 나빠질 것이다. 피부에 양성 종양들이 생기면서 외모는 변할 것이다. 뇌나 척추 신경에도 혹이 생겨 청각을 잃거나 다리를 못 쓰게 될 수도 있다. 이번 주 다시 마리아를 만나 결과를 알려야 한다. 처음 처럼 담담할까…
손주가 자라면 정원사의 아펏던 다리, 그런 다리를 갖고도 일 할 수 있었던 환경, 마리아의 선천적 질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그들이 겪은 외모의 변화, 그들이 참아 낸 크고 작은 기능 장애와 일반인들의 시선에 대해서도 말이다. 사회정의를 풀이 할 수 있는 예리한 눈과 따뜻한 마음을 갖고 서로 토론 할 수 있게 될 것을 바란다. 손주는 자기의 세가지 질문에 대한 나의 한 종류의 답에 대해서 이해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