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는 그렇게 떠난다 ’ 2019.8. 중앙

 

친구는 자신의 장례미사를 어떻게 하면 멋있을까 궁리중이라고 말하면서 웃었다. 장례식에 올 친지들을 생각해 보면서 기분이 좋아진다고 했다. 그들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상상해 본단다. 친구의 얼굴은 순수하고 맑았다. 장례식에 올 하객 중에 나도 있느냐고 물었더니, ‘아니…’라고 짧게 답했다.

지난 달 한국을 방문했을 때, 어릴적 함께 몰려다니며 놀았던 두 친구들과 짧은 시간을 함께 했다. 그 중 한 친구가 말기 암 투병중이다. 우리 셋이 어떻게 친구가 됬는지는 잘 모르겠다. 우리들은 다른 환경의 산물들이었고, 고교를 졸업한 후 다른 길을 걸어왔다. 투병중인 친구에게 나는 가끔 이런 이야기를 하곤 한다. 우리들이 조선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친구될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이다. 친구는 조선 말기 부원군 양반집안의 후손이다. 중인 출신과 친구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친구가 투병에 성공하지 못하고 먼저 세상을 뜬다면 나는 무척 아파할 것이다. 아쉽고 안타깝고 아깝기 때문이다. 내색하지 못하는 나의 짙은 친구의 연명에 대한 바램은 가슴을 답답하게 했다. 영어로 죽는다는 것을 ‘die’라고도 하지만 ‘pass’라고도 한다. ‘패스’란 이동하다, 건너가다, 합격하다라는 뜻이 있다. 그래, 죽음이란 ‘건너가는 것’이라 보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친구가 죽는다 해도, 그는 내가 갈 그곳으로 먼저 ‘건너가는 것’일 것이다.

방사선 암치료학을 전공한 나이지만, 나는 친구의 암투병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어디 이 친구 뿐이랴. 주위에는 적지 않은 지인들이 지금 이 시간에도 항암제 약물치료를 받으면서 여러가지 부작용으로 힘들어 하고 있다. 이 미국만 해도 일년에 십만명 인구에 약 440명이 발암하고, 약 164명은 명을 달리한다. (저자 주: 2011-2015 통계로 2018년 4월 발표된 것)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영원할 수 없다는 진리 앞에 의사들은 이를 처절히 머리로 터득하고 있다. 그러나 이 진리는 자신이 겪을 때 비로소 가슴으로 온다. 이에 대한 경험은 한번으로 해탈할 수 없다는 또 하나의 진리 앞에서 혼돈스럽다.

영원한 이별은 사람끼리만 나누는 것이 아니다. 어제 내가 안식처를 마련해 주었던 메미라고 이름 붙여 주었던 홈리스 고양이가 우리와 10여년을 살다가 죽었다. 메미라는 이름은 녀석이 구제 되었을 때, 다섯마리의 새끼들과 함께 있었기에 엄마라는 뜻에서 붙여준 이름이다. 새끼들도 성공적으로 입양되었다. 메미의 생명력은 처음 발견 되었을 때 어미로서 사나웠던 것 처럼, 세상을 떠나는 과정에서도 끈질겼다. 한달 이상을 서서히 허물어져 가던 녀석이 드디어 숨을 멈추었다. ‘메미가 오늘 오후 세상을 떠났음…’이라는 문자를 아이들에게 보냈다. 열한 살이 되는 큰손녀는 아파서 힘들어 했는데 잘 떠났다고 했고, 아홉살 짜리 손녀는 울었다. 여섯살 손주는 나와 말하고 싶다고 전화를 주었다. 손주의 음성은 낮았고 대화의 내용은 매끄럽지 못했다. 녀석은 진지했던 것이다. 어떻게 죽었는지…말해 달라고 했다.

죽는 다는 것과 그 과정을 처음 알게 된 어린아이들에게 삶은 과연 어떤 변형된 모양으로 비쳐질가 궁금하다. 보았지만, ‘우리 모두는 그렇게 떠난다’는 사실을 진정 깨달았을까 싶다. 그리고 죽음의 해석이 ‘패스’라면, 이동 또는 다른 세상에 합격한 과정이 아니겠는가.

그렇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이 세상을 떠나 이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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