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무김치를 담그며

이 수필은 2021년 8월 8일 중앙일보 문예난에 발표됨.

오늘 오후 열무김치를 담그는 대대적인 행사를 치렀다. 내가 ‘작이’가 되는 날이었다. 많이 만들던, 조금 만들던, 김치를 만든다는 것은 나에게는 큰일이다. 담구어 놓은 김치를 사서 밥상에 올리면 쉽겠지만 만들어 먹는 습관이 된 지 오래된 터라 단순한 내 김치 맛에 길들여진 나와 식구들이다.

나는 새색시이고 남편은 풋풋한 청년이었던 시절에 우리는 한국식당, 한국 식품점이 없는 뉴욕주 북쪽 대학촌에서 쉽지 않은 미국 생활을 시작했다. 영어와 관습에 서툴러 눈치 보며 위축되는 경우가 많았던 때였다. 수련의 중에, 악센트는 있어도 의사소통이 원만한 인도나 필리핀, 중동 출신들에게 밀리는 기분이 자주 들었다.

중동사람들은 늘 당당해 보였다. 그들의 음식점은 대학가에 몇 군데 있었고, 중동 문화와 음식에 친근감을 나타내는 교수도 있어서 부러웠다. 이차대전 후, 일본이 패망했다 해도 미국과 일본이 엮인 역사가 미국인들이 일본인을 무시하지 않게 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주류 백인들은 비록 스시는 안 먹어도 템푸라 맛에 호들갑을 떨곤 했다. 중국과 국교는 단절되어 있던 때이지만, 중국 음식은 이미 세계에 알려져 있던 터였다. 고린내 나는 치즈를 먹으면서도, 인도사람들이 풍기는 카레 체취, 극동 사람들에게서 스며나오는 마늘 냄새를 공공연히 불쾌하다 해도 되는, 문화적으로 둔감하던 시절의 미국이었다. 그런 새 세상에 사는 우리 부부에게 반드시 있어야 하는 음식은 밥과 김치였다. 갓 난 장이 큰 딸아이에게 김치를 씻어 먹이곤 했다.

김치는 한국말과 같이 항상 우리와 함께 있어 왔다.

그때까지 나는 김치를 담가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음식을 만들어 본 경험이 없었다. 맛은 잘 기억하고 있었기에 추억 속의 맛을 찾아가면서 김치와 여러가지 음식을 만드는 실험이 시작되었다. 그 실험은 50여 년 가까이 된 미국 생활 안에서 지금껏도 지속되고 있다. 뭐 대단한 연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 레시피가 복잡하니까 내 식대로 재료를 생략하거나, 미국 특유의 식재로 바꾸어 넣는 실험을 해 본다는 의미이다. 당시 그곳에는 한국인들이 먹는 배추가 없어서 단단한 편에 속하는 브로콜리나 양배추 같은 것을 썼던 것이 첫 실험이었다. 브로콜리 김치는 그런대로 맛이 좋았다. 그러나 브로콜리 값이 너무 비싼 것이 흠이었다.

오늘 오후, 열무를 상처 나지 않게 살살, 조심히 씻었다. 그러고 나서 소금을 뿌렸다. ‘작이’가 하던 대로 나는 ‘작이’ 처럼 열무를 씻고, 소금도 ‘작이’ 흉내를 내면서 뿌렸다. ‘작이’는 승무를 추는 여승처럼, 팔을 위로 뻗고 공중에서 원을 그렸다. 엷은 바람결에 흔들리던 여승의 옷자락처럼 작은 손에 움켜쥔 소금을 흔들어서, 열무 위에 뿌렸다. 마당에서 진행된 ‘작이’의 여름 열무김치를 담그는 특별 공연은 그랬다. 그렇게 ‘작이’가 담그던 열무김치는 싱그럽고 담백했다.

‘작이’는 열무가 절여지는 동안 물 폭탄을 쏘면서 마당을 구석구석 청소하곤 했다. ‘작이’는 외로운 마음을 물로 씻어 내버리면서 달래었는지도 모르겠다. ‘작이’에게는 크고 작은 생각하기 싫은 티끌들이 많았을지 모른다. 어린 나이에 집안의 생계를 도와야 했던 꼬마 ‘작이’. 고향을 떠나와 번잡한 서울에서 겁 없이 시작했던 더부살이 직장이 힘들었을 것이다. 때로는 외롭고 슬펐을 것이다.

‘작이’. ‘작이’는 내가 어렸을 때 우리와 함께 살던 가사도우미였다. 작은아이라는 말을 줄여서 ‘작이’라 불렀다.

내가 어렸을 때, 한국은 가난했다. 농촌은 더 가난했다. 작히 부유하다고 할 수 없는 우리 집 같은 가정에서도 도우미를 쓰며 살았다. 도시 사람들은 ‘작이’네 고향 사람들보다 상대적으로 부자였다. 1960년대에는 한 집 건너 가사도우미를 고용하던 시대였다. 자신의 주린 배를 채울 수 있고, 무능한 부모에게 쥐꼬리만 한 모은 번 돈을 보내어 식구들을 먹여 살릴 방법이라고는 도우미가 되는 길밖에 없었다. 도우미 고용주를 입맛에 맞게 선별, 선택할 옵션은 상상조차도 할 수 없던 시절이었다. 열악한 환경도 마다하지 않고 일했다는 연구 보고서를 읽었다. 그 보고서에는 가사도우미 소녀들의 한 달 월급이 주인아저씨 담뱃값 정도였다고 한다. ‘작이’네를 도와주지 못했던 내 부모님들의 가정, 내 모국의 슬픈 역사이다.

한국을 떠난지 거의 반세기가 되어간다. 긴 세월이 흘렀건만, 여전히 나는 김치를 먹고, 김치를 좋아하고, ‘작이’가 가르쳐준 대로 김치를 담근다. 내 나이 도래이었던 ‘작이’도 나처럼 할머니가 되었겠지. 이젠 편히 살고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손주들에게 맛깔나는 여름 열무김치를 담가 먹이면서, 어려서 견디어내든 힘들었고 외로웠던 여름날들을 이야기해 주겠지. ‘작이’는, 그러면서, 제 손주들을 축복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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