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름은 태양

‘45세 남성 · 4· 첫 발생 장기 : 모름 · 넓적다리뼈 골절 사흘 전 핀으로 고정했음 · 극심한 아픔을 호소함 · 방사선 치료 가능 여부를 의뢰함.’

의뢰되어 온 남자 환자는 휠체어에 앉아 진찰실에서 의사가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에겐 그가 한국인으로 보였다. 햇볕에 그을린 진흙 색 피부, 벌어진 어깨, 소매 없는 러닝셔츠 상의에 반바지 차림으로 앉아 있었다. 무릎 위쪽까지 내려오는 반바지 바짓가랑이 한쪽이 터질 듯이 팽팽하였다. 넓적다리를 동여맨 하얀 붕대가 바지 틈새로 보였다. 수술받은 쪽 다리 종아리와 발은 퉁퉁 부어있고 일본식 조리 슬리퍼를 신은 맨발에는 자르지 않은 발톱 밑에 검은 때가 박혀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야외에서 일하는 노동자 같았다. 표정이 없었다. 양 볼과 목은 늘어져 있었다. 굵은 주름, 튀어나온 입술, 내리 앉은 입매, 면도하지 않아 들쑥날쑥 자란 희끗희끗한 턱수염 때문인지 그는 45세가 아닌 70세로 보였다.

혹시 한국분이세요?”

실례인 줄 알면서도 나는 대뜸 그에게 한국어로 물었다. 미국에서는 상대방의 국적이나 인종을 확인하지 않고 영어가 아닌 외국어로 말을 걸면 실례가 된다. 그날 나는 평소의 내 의례대로 환자를 대하지 못했다. 보통은 아무개 씨, 나는 의사 아무개입니다.’라고 먼저 나를 소개하면서 악수하고, 면담을 시작한다.

“No, I am not a Korean. Are you a Korean, Doctor?”

내 짐작대로 그는 내가 한국말로 첫마디를 건넸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계속해서 영어로 말했다.

“I was born in Korea. My American folks adopted me when I was three years old.”

“Do you understand Korean though?”

“No, I do not know Korean.”

“My apologies that I spoke in Korean.”

그날 내 클리닉에는 많은 환자가 약속되어 있었고 제시간에 봐 주어야 할 환자들이 자꾸 뒤로 밀리는 판이어서 나는 서두르고 있었다. 나는 의뢰서에 적힌 부분만 대강 훑어보고 급히 진찰실로 들어갔던 터였다. 환자와 대면하기 전에 차트에 쓰인 사항을 꼼꼼히 읽어 보았더라면 그의 이름이 한국 이름이 아닌 것과 가족관계를 쓰는 칸이 비어있다는 것을 인지했을 것이었다.

챠트에 그의 이름은 타일러(Tyler)’라고 쓰여 있었다. 그의 성()A로 시작되는 유대계통의 성씨였다. 타일러라는 이름은 영국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다. 그 어원은 타일을 붙이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왔다고 한다. 그의 가족력 칸이 비어있는 것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나는 타일러 씨에게 언제부터 아팠는지, 어떻게 입원하게 되었는지 물었다. 그의 대답은 짧고 퉁명스러웠다. 그를 낳은 생모와 생부, 친척들이 걸린 병에 대해서 알고 있는지 물을 차례가 되었다.

혹시 양부모님께서 생부모님에 관해서 이야기해 준 적이 있나요?”

…….”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혹시 양부모님은 타일러 씨의 출생에 대한 정보를 갖고 계셨나요?”

모릅니다.”

그는 잘라 말했다.

다른 친척들에 대한 병력도 들은 적이 없으신가요?”

전혀 없습니다.”

…….”

제가 알고 있는 것은 나를 낳은 생모가 십 대, 미혼모이었다는 것뿐입니다.”

타일러 씨는 내가 한국 출신 이민자라는 것을 알았지만 반가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한국계 환자가 드물게 오는 병원이었다. 대개 평범하고 순탄한 삶을 사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내가 한국 이민자 출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한국에 관한 관심을 보여 주는 것이 보통이었다. 나의 개인사에 관해서 궁금해하기도 했다. 한국이라는 말을 들으면 과거에 가난한 나라라거나 고아 수출국으로 사촌이 고아를 입양하였다거나 삼촌이 육이오 전쟁 때 참전했던 나라라고 말하는 것을 종종 들었다. 별로 유쾌하지 않았지만, 그 내용은 어느 정도 사실이던 때였다. 타일러 씨의 양아버지는 당시 하와이에 살고 있던 군인이었다. 한국에 주둔한 적은 없었다고 한다. 군인가정으로 하와이에 살았으므로 특별히 환경적 요소로는 마음 쓰이는 점은 없었다. 그러나 양부모, 양부모 친척들의 병력에 대해서는 물을 필요가 없었다. 그가 겪고 있는 암과 생물학적인 관련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대답은 짧고 퉁명스러웠다. 툭툭거리는 말투여서 화가 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의 마음은 읽을 수가 없었다. 말 없는 환자들이 그렇듯이 타일러 씨도 속으로 분노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또 나야? 왜 내가 암에 걸려야 해? 인생은 너무나 불공평해!’ 만약 그가 그런 분노를 누르고 있다면 그는 치료를 거부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노파심이 들었다. 나는 권하는 치료를 내동댕이치는 환자들을 심심치 않게 보아왔다. 대개 분노를 누르고 살아왔거나 스트레스를 풀지 못하고 살아온 환자들이었다. 가까운 부모 또는 배우자를 향한 분노가 대부분 이었다. 일종의 복수라고 생각하고 하는 행위이다. 간혹 자긍심이 없는 환자들도 치료받는 것을 거부한다. 자신이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굳게 믿는 사람들이다. 타일러 씨를 보면서 내가 전공의 때 만났던 어떤 여자 환자가 기억났다. 그 여자 환자는 자기는 암 치료를 받을 가치가 없다고 치료를 거부했다. 아버지를 무서워했던 그녀는 공포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어 무진히 노력했지만, 아버지의 반복되는 힐난은 결국 그녀가 참으로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확신시켰던 것이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 50세가 넘었는데도 머리에 깊이 새겨진 비하된 자신에 대한 열등감과 공포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었다.

치료를 거부하는 환자를 많이 본 곳이 내가 전공의를 하던 뉴욕주립대학 업스테이트 메디컬 센터였다. 시라큐스에 있는 그 대학병원에는 꽤 알려진 종양 방사선학 전공의프로그램이 있었다. 비교적 백인 위주의 시대였던 1970년대에 나는 도미했다. 미국의 대학병원에서 세계 최고의 의학 수련을 받고 귀국해서 후배양성에 전념할 수 있다는 것은 매력적인 아이디어이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많은 의대생과 의사들이 도미 준비를 하는 것이 유행처럼 의학계를 지배하고 있었다. 한국의 의학은 발전하는 중이었고 한국은 가난했다. 그래서 나는 도미했지만 잠자는 시간과 집에 있는 두세 시간을 빼고 영어만 쓰는 나날은 외롭고 힘들었다. 생소하기만 했던 미국의 의료 시스템을 익히고 새로운 의학상식을 흡수해야 하는 스트레스는 컸다. 영어에 익숙하지 않아 이해력이 낮았고 내가 쓸 수 있는 어휘는 적어서 세 살배기 어린이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환자들이 하는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고 대충 넘어가는 경우도 흔했다. 교수님에게 환자에 대한 병력을 보고해야 하는데 난감했던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뿐인가? 모든 매개체는 영어로만 전달되고 있었다. 그 당시 한글로 된 신문은 시라큐스 까지 배달이 되지 않았고 한국어 라디오, 텔레비전 방송은 그곳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한국에 대한 뉴스는 친구를 통해서 전화로 듣거나, 가끔 미국 방송국에서 다루어 주지 않는 한 알 수 없었다. 또 병원 전공의 식사 메뉴는 어떠했나. 샐러드, 짓이긴 감자, 또는 감자튀김, 밍밍한 미트 로프나 소금만 들어간 동그랑땡이 자주 반복돼서 서브 되었다. 먹은 후에도 먹은 것 같지 않아 늘 허기가 지었다. 된장국, 총각김치가 너무도 그리웠다. 시라큐스에는 외식을 할 만한 동양음식점이라고는 중국집이 하나 있었지만 내가 한국에서 먹던 스타일의 매콤한 중국 음식을 만들어 내지 않았다. 한국식품점은 물론 없었다. 김치가 먹고 싶어서 배추처럼 단단한 채소라고 찾아낸 것이 브로콜리였다. 브로콜리 김치는 실패로 끝났다. 가난했던 유학생 신분으로 잠깐이라도 한국을 다녀올 수 있는 처지는 더더욱 아니었다. 한국은 멀고 먼, 갈 수 없는 그리운 내 고국이었다. 나는 우울했다.

뉴욕 같은 대도시가 아닌 시라큐스에 가서 전공의과정을 하게 된 것이 후회되었다. 내가 그곳에 가게 된 것에는 나의 무지함이 한몫했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있던 때가 아니었다. 미 전국의 병원에 대한 정보는 삼백 페이지에 달하는 책으로 출판되고, 이 책은 대학교 도서실에서 빌려 보아야 했다. 귀찮은 일은 피해 가고 결정은 빨리하는 성격 때문에 벌어진 실수로 나는 시라큐스에 가게 되었던 셈이다. 적어도 미국 지도를 보고 지원서에 넣을 도시들을 찾아보았어야 했는데, 점검과정을 생략하고 뉴욕주 병원들은 뉴욕시와 가까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에 의존해서 병원지망 원서를 제출했던 곳이었다.

미국은 그때나 지금이나 71일에 전공의프로그램이 시작된다. 도착한 시라큐스는 후덥지근하고 흐렸다. 첫날부터 시라큐스는 맘에 들지 않았다. 그곳에는 의과대학 친구도 한국인 친지도 없었다. 시라큐스는 뉴욕주의 북쪽 지역 업스테이트에 있는 도시로 뉴욕시에서 7시간 정도 운전해야 도착할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한국에서 온 친구들을 만나러 자주 왕복하기에는 먼 거리였다.

그뿐 아니라 기후조차 맘에 들지 않았다. 일 년에 겨우 160일 정도가 맑을 뿐이니 기후에 의한 SAD (Seasonal Affected Disorder)라 불리는 우울증이 생기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해였던가, 옥상에서 한 전공의가 뛰어내려 자살한 겨울도 있었다.

맘에 들지 않던 시라큐스 날씨, 한국이 그리워 때로는 슬펐던 도시 생활에서 만났던 많은 사람 중에, 암 치료를 마다하던 몇몇 환자들에게서 삶의 여러 양상을 배웠다. 표면에 드러나지 않고 보호막이 쳐 있는 가정이라는 공동체, 사랑을 실행하는 텃밭이라는 가정 안에서 아이들은 의외로 트라우마를 받기도 하고, 아픔의 생채기가 없어지지 않아 흔적을 남기는 것을 보았다.

나는 타일러 씨가 아팠던 과거만을 보지 말고 오늘을 살고 앞날을 보아 주기를 바랐다. 남아 있는 시간을 다시 걸을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몰두했다. 많은 말기 환자들은 죽음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을 안다. 안다고 말하지 않을 뿐이다. 타일러 씨도 알고 있을 것 같았다. 그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고 싶었다. 타일러 씨의 마음에 평화가 오면 그는 경계심을 내려놓고 나를 위시한 주위의 간호사들, 테크니션들을 신뢰하고 좋은 상호관계를 만들 것이었다.

타일러 씨에게 그가 당시 겪고 있던 아픔의 정도, 아픈 부위, 먹고 있는 진통제 등에 관해 묻고 그를 조심스레 그리고 이번에는 충분한 마음의 여유를 갖고 진찰하였다. 진찰 후, 타일러 씨와 그의 부인을 의사 면접실로 초대하고 탁상을 가운데 두고 서로 마주 앉았다. 앞으로 받을 방사선 치료에 관해서 설명했다.

타일러 씨, 방사선 치료가 성공적으로 골절 부위를 아물게 하면 걸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생명이 연장되지는 못합니다.”

그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슬픔도 역정도 보여 주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의 부인이 물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살 수 있는지요?”

확실히 알 수는 없습니다만 이런 경우 삼 개월에서 반년 정도 삽니다.”

환자들의 종말을 알려야 하는 일은 의사들의 의무 중의 하나이지만 이러한 의무를 좋아하는 의사는 없다. 방사선 치료를 위해 입원할 이유가 없다는 것과 살아오던 익숙한 환경에서 지나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견해도 주었다. 그의 방사선 치료는 매일 하루에 한 번씩 통원해서 받으면 되는 것이고 정작 방사선이 쪼여지는 치료시간은 10분도 되지 않고, 부작용이 거의 없다는 것도 알려주었다. 그의 아내가 걱정하는 구토는 없다고 설명해 주었다. 내 설명을 듣고 있던 타일러 씨는 느닷없이 내게 질문했다.

왜 제게 가족력에 관해서 물어보았는지 궁금합니다.”

발암 원인을 찾아내는 데 도움이 될 때가 있습니다. 빠른 진단을 위해서 테스트의 방향을 잡아주기도 하고요. 개발되고 있는 실험 중인 약을 쓸 수 있는지도 알게 되는 경우가 있어요.”

가족력을 아는 것은 환자의 병을 알고 치료하는데 필수적인 부분이라고 보면 된다. 미스터리의 마지막 퍼즐 조각을 맞추고 완벽한 퍼즐의 형태를 완성할 수 있을 수도 있다. 특히 유전인자를 물려받아 생긴 병으로 의심될 때는 DNA에 암세포 추적 물질을 달아서 하는 치료 방법도 있고 미래를 준비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갖게 되어 도움이 된다.

타일러 씨의 병은 유전적 요소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해 주었다.

내가 가족력의 연관성에 관해 설명하는 동안 두 손을 비비며 잠자코 듣던 타일러 씨는 천천히 입을 뗐다.

저는 세 살 때 한국에서 하와이에 사는 백인 부부에게 입양됐습니다. 일곱 살쯤 되었을 때, 양부모는 나를 포기했습니다. 그 후 나는 여러 집을 전전하면서 위탁양육을 받았지요.”

그는 그가 파양되었었던 때의 자신의 과거를 차분하게 말했다.

나는 내가 싫었어요. 나를 좋아하는 사람은 내 주위에 아무도 없었어요. 새로 가는 집은 언제나 어설펐지요. 새어머니, 새아버지 때로는 나보다 먼저 와 있는 위탁 아이들이 있기도 했어요.”

새로 만난 가족들과 친해지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겠네요.”

좀 친해지면 다른 집으로 옮겨졌어요. 제가 고등학교 일학년이 되었을 때 마지막으로 살던 집에서 그냥 나왔어요.”

마지막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도 돼요?”

별일은 없었어요. 그냥 다른 집으로 가게 스케쥴이 되어 있다고 했어요. 짐을 싸라고 하더라고요. 다시 또 다른 위탁 가정에 던져지는 것 같아, 끔찍했어요.”

그는 태어났을 때 한국에서 버려졌고 일곱 살 때 미국의 양부모에게서 또 한 번 내쳐졌던 셈이었다. 그는 모든 제재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벗어났지만, 그의 삶은 고되었다. 그가 열여섯 살 되던 해였다. 작히 갈 곳이 없던 그는 그때부터 떠돌이가 되어 노동판을 전전하면서 살았다. 이십 대 후반에 들어섰을 때 그는 길에서 함께 지내던 친구들과 하와이섬을 떠나 캘리포니아로 왔다고 했다.

파양이라니? 입양아는 물건이 아니다. 물건은 사고 다시 물리거나 바꿀 수 있다. 그러나 입양한다는 것은 부모 없는 아이를 내 아이로 받아들여 돌보아주고 보호하고 사랑을 나누면서 함께 살아가겠다는 법적 절차일 뿐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의미심장한 약속, 부모가 되겠다는 약속을 자신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낳은 자식에게 문제가 있다고, 말을 안 듣는다고 버릴 수 있는가? 버려서는 안 되고 또 법적으로 버릴 수 없다. 아이를 이해하려 노력하고 아이가 처신을 잘하지 못 하는 이유를 알아내고 싶어 한다. 교사와 면담도 한다. 아이의 친구들을 눈여겨본다. 때로는 부모 자신들이 가정상담소를 찾아 상담을 받기도 한다. 양부모라고 다를 것이 없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자식과 부모의 관계를 끊는 것을 허락하는 파양이라는 법적 제도는 참으로 비도덕적인 법이 아니고 무엇인가 싶었다.

“A”로 시작하는 성을 가진 부모가 법적으로 부모와 자식이라는 관계를 끊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양부모들은 무슨 이유에서든지 아이를 기를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때로는 정부 지원금이 생각보다 적을 때,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파양을 신청한다. 그 외에는 아이와의 원만하지 못한 관계 때문이다.

나는 그가 겪었을 어린 시절의 갈등과 고민을 상상했다.

미운 일곱 살로 접어들면서 고집이 나왔을 수 있어. 또 얼굴색이 노랗다고, 눈이 작다고 급우들에게 놀림을 받았나? 그 화풀이를 양부모에게 했을까? 자기가 부모를 닮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몹시 혼란이 왔을 거야. 내 얼굴은 왜 까맣지? 왜 내 코는 납작해?

밖에서 놀고 집에 돌아와 신발을 잘 닦지 않고 뛰어 들어오는 어린 타일러가 보인다. 양부모에게 야단을 맞는 어린 타일러, 반항하는 어린 타일러. 버려준 너를 데려와 키워주는 우리에게 감사할 줄도 모르는 녀석. 너 오늘은 저녁밥 먹을 수 없어. 네 방에 가서 나오지 마! 양 아빠가 바지 허리에서 굵은 가죽 혁대를 뽑는다……. 아냐, 아냐, 그렇지는 않았을 거야……. 좋게 생각하려 해도 분노가 서서히 내 가슴 깊은 곳에서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인간은 비도덕적인 법에 불복종할 도덕적인 책임이 있다.’라고 마틴 루서 킹 주니어 목사가 한 말이 생각났다. 그렇다. 얼마나 옳은 말인가!

미국에서는 입양된 아이들의 약 1~5%가 양부모에게서 포기 당한다고 한다. 그리되면 우선 정부 관리 기관으로 옮겨진다. 입양됐을 때 나이가 많을수록, 정서적으로 불안할수록, 또는 성적 학대를 받은 경험이 있는 아이들일수록 양부모와의 관계를 쉽게 이루지 못해서 결국 파양에 이르게 된다고 한다. 이런 과정을 겪은 아이들은 성장하여 어른이 되어서도 아무도 믿지 못하는 성격을 갖게 되기 쉽다. 타일러 씨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아무도 믿지 않게 되었다.

나는 나 자신이 싫었습니다.”

…….”

나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었어요. 세상에 미친 사람이나 나 같은 사람을 좋아했을 거예요.”

자신을 아껴 줄 수 없었고 자신을 괴롭혔다고 하였다. 마약도 하고 담배도 피웠지만 아무런 위안이 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거나, 생부나 생모를 찾고 싶지는 않았나요?”

아니요!”

그가 치료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방사선은 위험하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어떻게 치료에 쓸 수 있나요?”

암세포는 어리기 때문에 방사선에 약해요.”

암 치료에 쓰는 방법들을 찬찬히 말해 주었다. 그가 받았던 것 같은 수술이나, 앞으로 받을 방사선에 대해서 이해했다. 다시 걷게 되는 것이 치료의 목적임도 이해했다. 그는 방사선 치료를 받기로 동의했다. 치료를 두 주 동안 열 번으로 나누어서 하루에 많은 양의 방사선을 쪼여 주는 방법으로 가기로 했다. 치료 기간이 너무 길면 생명 연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 치료에 아까운 시간을 잃을 뿐이기 때문이었다. 나를 처음 본 날 그는 첫 치료를 받았다. 다음 치료 때부터는 나를 매일 볼 필요는 없고 치료 기술자, 간호사들이 돌봐 줄 것이라고도 일러 주고 헤어졌다.

그는 오래 살지 못할 것이었다. 며칠을 벌기 위해서 부작용이 심한 약물치료를 받는 것보다는 증상 완화에 초점을 맞추는 호스피스 치료가 그에게는 더 의미 있을 것이었다. 호스피스에서는 항암치료는 하지 않고 증상 치료만 한다. 만약 암 덩어리가 아프게 하면 진통제를 처방해 준다. 진통제 때문에 변비가 생길 수 있으니까 변비 예방약을 미리 주고, 입맛에 도움이 되는 합당한 약을 주기도 한다. 또 열량이 많이 들어 있는 주스를 권장해 주기도 한다. 종말 환자들은 음식을 씹는 것조차도 싫어하기 때문에 단백질과 필수 비타민이 들어 있는 음료수를 마시게 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환자를 굶어서 죽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타일러 씨와 그의 부인에게 호스피스 제도를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호스피스에 의뢰서를 보냈다. 종말 환자들만을 보는 정신과 서비스에도 의뢰서를 보내었다.

치료 시작 후 일주일쯤 지났을 때, 중간 치료 성과를 알아보려고 그를 다시 보았다. 아픔이 조금 나아졌고 정신과 의사도 보았다고 하면서 어느 정도 대화를 이어 갈 수 있었다. 고개를 돌려 방구석을 한참 보고 있던 타일러 씨가 말했다.

나는 나의 생모와 생부에 대해서 궁금해 졌습니다.”

그래요?”

나의 한국 성씨가 무엇이었는지 알고 싶어졌어요.”

입양기록에는 있었을지 모른다는 말도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의 뿌리를 찾을 시간이 없었다.

타일러 씨, 한국 이름을 만들어 보는 것이 어떻겠어요?”

좋습니다. 그 이름을 쓸 시간이 없겠지만요.”

이름은 타일러 (Tyler)이고 성()A로 시작되는 그의 이름을 놓고 재미있는 부분이 있다고 말을 꺼내었다. 타일러라는 한국말도 있는데 타이른다.’라는 동사로 쓰인다는 것을 말해 주었다. 말의 뜻도 설명해 주었다. 그렇지만 순수 한국말 타일러세 글자를 이름으로 쓰지는 않는다는 것도 이해시켜야 했다. 한국 이름은 성까지 합쳐서 대개 석 자로 되어 있고, 성은 그의 이름 ‘A’로 시작하는 것처럼 조상에게서 물려받는 것으로 한 글자라는 것, 이름은 대개 두 글자로서 부모나 친지가 지어 준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름은 뜻글자인 중국 글인 한문을 쓴다는 것도 알려 주었다. 좋은 뜻의 이름을 만들어 주기 위해 부모들이나 조부모들이 신경을 많이 쓴다고도 말해 주었다. 한국 풍속은 이름이 주는 뜻대로 인생을 살게 된다고 믿는다니까 그는 이해가 간다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모음, 자음의 한글 문법을 가르쳐 준다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남은 시간은 너무 짧았다. 우선 타일러의 이름이 ‘T()’로 시작하니까 티읕이 들어가는 첫 자를 생각해 보자고 제안했다. , , , , 툭 등의 소리를 낼 수 있는 글자를 우선 검토했다. , , 툭으로 시작되는 이름은 없는 것으로 기억되고 는 내 기억에 이라는 뜻이라서, ‘가 어떻겠냐고 물었더니 좋다고 했다. 이름에 들어가는 자도 여러 개의 한문글자가 있고 글자에 따라 다른 뜻이 있다. 쉽게 가는 것이 우선이어서 태양(太陽)’ ’, 영어로는 ‘sun’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을 제시했다. 그도 좋아했다.

남은 일은 그의 성을 만드는 일이었다. 그의 성씨가 A로 시작하는데 한국말로 소리를 내면 에이가 된다. ‘에이라고 두 자가 들어가는 성은 없다. 그래서 에이의 첫소리 (이응)’으로 찾아보기로 했다. 한국 성씨 중에 이, , , , , 윤 등이 있는데 태양을 집어넣어서 발음을 해 보라 했다.

이 태양, 오 태양, 유 태양, 육 태양, 예 태양, 윤 태양···. 이렇게요. 어때요?”

···, ···, ···, ···, ···, ······?”

여러 번 그는 소리 내서 반복했다.

윤태양이 맘에 들어요. 윤태양이 좋아요!”

조선 시대 때에는 양반, 무인, 상인 등의 계급제도가 있었고, 양반 계급은 부자로 살면서 정치적으로 세도가 컸다는 것과 덧붙여 윤 씨는 조선 시대 때 양반의 성씨였다니까 처음으로 그가 빙그레 웃었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양반제도가 있었던 500년 조선 시대 때 대여섯 명의 황후가 윤씨 성을 가졌었다는 이야기도 해 주었다. 마지막 황후 순종 효 황후는 나의 어릴 적 친구의 고모(aunt)였다는 것도 자랑삼아 말했다.

타일러 씨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는 조선의 마지막 황후가 있었을 때는 반세기도 더 전의 역사라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덧붙여 설명을 해 주는 것이 좋을 듯했다. 나의 친구는 황후 친오빠의 두 번째 부인에게서 태어난 막내이었다고 말해 주었다. 그리고 내가 태어났을 때의 이야기도 덧붙여 해 주었다. 나도 늦게 태어난 막둥이였다는 것과 내가 간접적으로 알게 된 당시의 상황을 말했다. 내 어머니가 40대 중반에 나를 임신했고, 낙태시키고 싶었지만 임신 중절의 방법이 없던 때여서 내가 태어나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어머니가 누군가에게 말하는 것을 내가 우연히 들어 알게 된 원하지 않았던 임신과 출생에 대한 비밀은 무척 충격이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사실 나는 반항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느 날 어머니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나는 배 안에 있던 인 줄 몰랐었어.

무슨 말이야?

를 낳고 나니까 가 바로 였어.

타일러 씨는 내 출생에 얽힌 이야기를 재미있어했다. 그리고 다시 빙그레 웃었다.

, 타일러 씨, 당신의 이름은 윤태양입니다!”

그날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다.

타일러 씨가 한국에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것도 짧은 기간 동안 말이다. 그때쯤, 곳곳에 구멍 난 그의 마음을 한국적인 것으로 채워줄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욕심이 생겼다. 치료를 끝내는 날 그에게 선물을 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이제 그는 한국, 한국적인 것, 한국 사람, 한국 의사가 불편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한인 타운에 가면 쉽게 한국에서 수입한 물건을 살 수 있겠지만, 그의 이름과 관련된 선물은 없을 것이었다. 궁리 끝에 하늘에 날리는 연(kite)에 그의 새 이름을 그려 넣어 윤태양의 특별한 연을 만들어 주기로 마음먹었다. 연은 세계 어느 나라에 가도 나이와 관계없이 아이, 어른 모두에게 사랑받는 놀이기구가 아닌가? 나라마다 연의 모습도 다르다. 윤태양 씨만의 특수한 연을 만들어 선물하면 그가 기뻐할 것 같았다. 다리가 아물고 걸을 수 있는 윤태양이 한국 그림이 그려지고 자기의 이름이 쓰인 연을 바람에 태워 멀리 날리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실천할 수 있는 일이라는 자신감이 들었다.

하얀색 한지로 앞면에는 한글로 내 이름은 윤태양이라고 파랑과 빨간색 마커 펜으로 쓰고 밑에는 한자로 윤(尹)(太)(陽) 세자를 까만색으로 토를 달아 장식했다. 뒷면에는 알록달록한 색동저고리 한복 입은 남아, 여아의 그림과 태양(sun)’을 뜻한다는 영어 주석을 쓴 종이를 오려서 붙였다. 한지는 얇아서 잉크가 퍼졌기 때문이었다. 연을 완성하고, 질기고 가벼운 긴 끈을 달았다. 연은 다이아몬드 모양이었고 꼬랑지 끝쪽에 같은 한지로 가늘고 긴, 맵시 나는 꼬리를 만들어 달았다. 하지만 마지막 치료를 받아야 하는 날 윤태양은 병원에 오지 않았다. 윤태양만의 연은 윤태양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삼 개월이 흐른 후, 호스피스 간호사에게서 이메일이 도착했다.

타일러 A 씨가 OOOO00OO00OO분에 운명한 것을 알립니다.”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호스피스 통고를 받고 난 지 몇 달 후 그의 아내는 짤막한 사연을 쓴 카드를 보내왔다. 그는 죽기 한 달 전부터 걸을 수 있었고, 그의 마지막 날들은 아프지 않고 편안했다는 내용과 함께.

윤태양 씨를 치료했던 때는 시라큐스에서 로스 안젤레스로 이사 온 지 7년 정도 지났을 때였다. 지금도 나는 로스앤젤레스에 살고 있다. 뉴욕 업스테이트와는 달리 나 같은 동양인들과 히스패닉, 흑인들이 많아 위축되지 않고 당당히 가슴을 펴고 활보할 수 있는 곳이다. 내가 합류한 메디컬 그룹 동료 의사들은 거의 백인들이다. 간호사들은 필리핀 사람들이 많고 테크니션들은 역시 백인이 많지만, 인종차별의 기색이 없다. 거의 반세기가 흐른 지금 미국은 다문화를 받아들이고 여러 외국말을 외국어 ‘foreign language’라고 하지 않고, 세계언어 월드 랭귀지(world language)’라고 할 정도로 바뀌었다. 정규 학교에 한국계, 비한국계, 한국계이지만 한국말을 못 하는 학생들에게 한국어 선택과목이 주어지는 중고등 학교도 전국에 2백 개에 육박하고 있다. 나도 자연스레 타국에서 온 백색 타 인종들과 유색 타 인종들에 대해서 알아가고 있다. 또 나의 모국인 한국에 대해서도 더 많은 관심을 두게 되었는데 그것은 윤태양과의 만남이 한몫을 했다고 생각된다. 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백인 양부모에게 입양되어 동양인이 별로 없던 미국 도시에서 삶을 시작했던 청년의 외롭고 힘들었던 짧은 생애는 내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 잊혀지지 않는다.

어느 누구의 태양이 될 수 없어 아팠던 윤태양, 짧게 있었던 지구라는 땅에서 태양을 찾아 헤맸던 윤태양, 보이지 않는 태양이었기에 자신을 짐짝처럼 구박하던 윤태양은 오늘도 구름 한 점 없는 로스 안젤레스의 푸른 하늘에서 태양으로 떠올라 온몸을 태우며 우리를 비춰 주고 있다. 윤태양은 태양을 찾지 못해 헤매었던 자신처럼, 또 ‘짐짝’이라 학대하던 아팠던 자기처럼 외로운 아이들의 가슴에 온몸을 아끼지 않고 따뜻한 볕을, 밝은 빛을 비춰 주고 있다.

제 22회(2020년) 해외동포재단 수상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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