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향살이 추수감사절

11월도 저물고 있다. 11월 추수감사절로 시작해서, 미국은 달포 이상의 홀리데이 시즌으로 들어간다. 가족과 친구들이 함께하는 따뜻하고 즐거운 시절이다. 한 해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마감할 수 있다면 더더욱 은혜로울 것이다. 행여 코비드-19 사태로 경제상태와 건강이 악화되어 어렵다면, 마음을 가다듬고 들여다보기를 권한다. 작은 보석이 어딘가 숨어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을 찾아내어, 가족들과 나누면 좋겠다.

어제 우리 부부는 홀로 있는 조카, 다른 주에서 이날을 함께 하려고 온 사위의 부모님들과 함께 큰 딸네 가족과 지났다. 내가 젊었을 때는 큰오빠와 언니네가, 내가 중년이 되었을 때는 내가, 추수감사절 상을 차렸었다. 몇 년 전부터, 이 축제의 의무가 자연스럽게 큰딸에게로 넘어갔다. 추수감사절 상 준비에 딸 내외, 손주들, 조카, 사돈들이 투자한 시간과 노동은 엄청나다. 11 살짜리 손녀는 사과 파이, 호박파이, 피칸 파이, 로즈머리 빵을 굽느라 온종일 일했다고 한다. 다행히 그 손녀는 요리와 빵 굽는 것에 흥미가 많아서 불평이 없다. 간혹 국적이 애매한 음식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나는 이때가 되면, 갓난아이 큰 딸과 우리 부부가 맞이했던 미국에서의 첫 추수감사절이 생각난다. 남편과 나는 거의 반세기 전에, 미국 의과대학에서 수련 과정을 이수하고 싶어서 도미했다. 매칭프로그램으로 첫 번째 파견된 병원이 실망스럽게도 뉴욕 주에 있는 존슨 시티라는 시골이었다. 서울에서 태어나고 서울에서 자란 도시 출신인 나에게 미국의 시골 생활은 상상했던 멋진 미국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또 친구나 친지가 가까이 없었다. 지식으로 잘 알고 있었던 추수감사절이었지만, 칠면조고기, 호박파이는 만들 줄도 몰랐고, 덩그러니 우리 식구 셋이 맞이했던 첫 추수감사절은 서러울 정도로 쓸쓸했다. 그때 경험한 타향살이의 외로움은 뼛속 깊이까지 골을 팠던 것 같다.

추수감사절이 되면 노숙자들에게 칠면조고기와 으깬 감자 요리를 제공하는 기관이 많다. 그러나, 길에 나 앉지는 않았지만 가난하기 때문에, 또는 가족 없이 홀로 살기 때문에 명절 음식을 함께 만들고, 또 나누면서 지나지 못한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명절 때 오는 외로움은 타향살이 이민자들과, 사회적으로 소외되는 부류에게 많다. 우리 가족 중에도 객지(!)에 나가 있는 조카네와 둘째 딸네가 타향살이 중이다. 마음에 걸렸다. 이들과 함께 지내려 추수감사절 이전에 더블린과 바셀로나를 다녀왔다. 코비드 상태가 염려되는 여행이었다. 아일랜드와 스페인 코비드 감염 정도는 미국보다 약 0.5% 가 낮은 인구의 10% 정도이기는 하였다.

두 곳을 방문하기 위해서, 미국 출발 전, 더블린에서 바셀로나로 가기 전, 바셀로나에서 귀국하기 전, 이렇게 세 번 코비드 테스트를 받았다. 의외로 국제 여행객이 많았다. 비행기는 거의 만원이었다. 마스크를 하고 있어도, 비행기 안에서의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천한다는 것은 이론적으로 어렵다. 접종 증명서를 여권과 함께 보여 주어야 하는 것 이외에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여행객들은 이동하는 것 같았다.

더블린을 방문했을 때, ‘EPIC’이라는 뮤지엄에 들렸다. 이민역사를 테마로 만든 곳인데, 내가 봉사하고 있는 한국어진흥재단이 새로 만든 이중언어(영어와 한국어) 교과서 이름과 같아서 반가웠다. 괜스레 우연 같지는 않았다. 이 방문 중에, 더더욱 놀란 것은 더블린 정규학교에 한국어 클래스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한국어 반을 이끌고 계시는 교사 선생님을 만나 뵈었다. 7개의 정규학교에서 400여명에게 한국어를 세계언어로서 가르치고 계셨다. 참으로 한국인들은 어디에서든지 우뚝 서는 기상이 있다. 깊은 감명을 받았다.

나라가 힘을 잃고, 속국이 될 때, 지배국이 속국의 말과 글의 사용을 금지하는 것이 통상이다. 말과 글은 민족의 얼이기 때문에 말과 글을 말살시키면 얼은 빠지고 허수아비가 된다. 자체성은 흔들리고, 지배국의 통제는 쉬워진다. 한국민은 일제 강점기 때 이에 저항해서 참 끈질기게 싸워왔다. 광복 이후 우리는 우리의 글과 말을 자유로이 쓰고 발전시키면서,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 지금은 한글을 세계화할 때이다. 이 미국에 있는 디아스포라들의 노력은 정규학교에 한국어 클래스를 넣는 일이다.

유럽에서 타향살이하는 가운데,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한민족의 언어도 습득해야 한다는 테스크를 안고 있는 그들이지만, 이민 일세들이 칠면조 굽는 문화를 익혔던 것보다, 더 쉽고 효과적인 방법으로 혈통 언어, 한국어를 습득해 나갈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그들은 아일랜드에서, 스페인에서 외로워 하는 것 같지 않았다.

2021년 11월 추수감사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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