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학생 시절, 인권과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고 의학 연구를 세계 어느 나라 보다 앞장서서 진행하는 미국을 동경했다. 베이비붐 세대들 (1946~1964년 출생)이 활발히 활동하던 1970년대에 도미했다. 그때는 보지 못했던 앓고 있던 미국을 이제야 본다.
넘쳐나는 자유와 부유함이 다져지지 못한 기반 위에 지어진 가정을 좀 먹고 있었던 것을 그 때는 인지하지 못했다. 우리는 크고 작은 사회 구성원들에게 마음을 주지 못하고, 번쩍이는 허상을 쫓고 있었던 것일까. 생명을 존중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가정이라는 공동체에서 참신한 시민이 되도록 차세대를 뒷받침하고 인도하지 못했기에, 이론적으로 해석하기 어려운 총기 사건이, 성스러워야 할 배움의 마당 안에서 연발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사건들은 우리 기존 세대를 향해서 부모로서의 자격은 미달이라고 손가락질하고 있다.
무시무시한 무기가 자동차 운전면허도 받을 수도 없는 연령대의 소년의 손에 쥐어지고, 소년은 이 무기의 방아쇠를 당기었다. 총알은 세상 밖을 나와, 동료 학생의 머리를, 허파를, 심장을 통과했다. 지난달, 미시간주(州)의 한 고등학교에서 일어났던 총기 살인 사건이다. 14살, 16살 그리고 두명의 17살 학생이 그야말로 개죽음을 당하였다. 그들의 빼앗긴 삶을 누가 보상할 것인가?
뉴욕 타임스는 이 사건의 뒷이야기를 12월 6일에 보도했다. 이에 따르면, 총을 쏜 15세 소년은 아버지와 함께 추수감사절 다음날인 블랙 프라이데이에 총기 쇼핑을 갔다고 한다. 총기를 구입한 아버지는 소년에게 그 총을 이른 크리스마스 선물로 건네었다고 한다. 이 아버지는 무엇을 하라고 그 총기를 아이에게 선물한 것일까. 더더욱 끔찍한 것은, 이 소년이 범행을 저지르는 동안 엄마가 아들에게 보낸 문자 메시지였다. ‘난 너에게 화나지 않았어.’, ‘너는 걸려들지 않는 방법을 배워야 해.’라는.
인간이 무기를 만든 것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초등학교 때에 배웠다. 이때의 무기란 화살이나 칼을 두고 선생님이 말씀하셨던 것 같다. 애초에는 동물이나 물고기를 잡기 위해 만들었을 것이다. 정말 무기가 생계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나 하는 의심이 많이 든다.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화살은 양궁 (archery) 이라는 하나의 운동 종목에서 볼 뿐, 우리를 위협하고 있지 않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시대의 변천과 합당한(?) 최첨단 살생(殺生)기구들은 사람을 성공적으로 죽였고, 다치게 했다. 죽이는 면허를 어디에서인가 받아서 대량학살을 한 사건들을 우리는 기억한다. 전쟁이 그것이고, 민간인 대량학살이 그것이다. 이 미국에서는 자유로이 총기 구매가 가능하고, 소유가 가능하다 보니, 그야말로 정신병자의 손에 의해서 총격 사건이 발생하고, 많은 희생자를 만들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기소유 금지법을 만들기란 불가능했고, 총기사건의 예방도 지금으로서는 불완전하다.
미국 인구를 약 3억 3천만 명으로 칠 때, 미국 내에 존재하는 무기는 사람 숫자보다 많은 3억 9천만 개라고 한다. 인구 100명당 120개의 무기가 있는 셈이다. 미국, 멕시코, 과테말라에서는 일반 시민이 총을 소유하는 것이 합법적 기본 권리(constitution)로 되어있다. 총기 폭력은 하루에 대략 300여 건이 있고 이 중에 약 100명이 목숨을 잃는다고 한다. 일 년에 약 38,000명이 죽는다. 이 숫자는 1950년에서 1953년 사이에 한국전(韓國戰)에서 전사한 미국 군인 33,686 명 보다 더 많은 숫자이다. 1/3은 의도적인 총기 폭력이고 ~20%는 총기에 의한 자살이다. 실수로 인한 경우는 1%도 되지 않는다.
GAO(Goverment Accountability Office 정부회계사무소) 는 일 년에 10억 불을 총기에 의한 일차적 치료에 썼다고 올해 7월에 발표했다. 이 금액은 재입원, 장기간 관리, 의사에게 따로 지불하는 금액을 포함하지 않은 것이다. 보험이 없는 경우라 치고 계산을 해 보면, 미국인 한 사람이 $250 정도를 이들의 치료에 지급해야 하는 금액이다. 응급치료 후, 장기간 동안 재활에 들여야 하는 나날, 찾아야 하는 적절한 치료방법, 치료 기구, 담당 전문의가 쏟아야 하는 시간, 피해자의 실업등을 계산해 보는 것은 우매한 일일까 싶기도 하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무기여 잘 있거라’라는 소설로 우리에게 친밀한 종군기자 출신으로 반전(反戰) 작가였고 노벨상과 퓰리처상 수상자였던 어네스트 헤밍웨이는 생을 권총 자살로 마감했다. 만약 그가 총을 소유할 수 없는 나라에 살았더라면, 다른 방법으로라도 생을 끝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총은 그와 함께, 너무나 가까이 있었다.
***edit 된 글이 2021년 12월 미주 중앙일보 [오픈 업] 칼럼에 기재되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