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푸르른 가을날 늦은 오후, 나는 누나를 만났습니다. 누나는 동작동 현충원 근방에 있는 한 에어 비엔 비에 머물고 있었어요. 현충원 근방에 있는 달마사로 오라 했지요. 내가 열 살 때, 미네소타라는 곳, 어느 대학원으로 유학을 떠났던 누나는 지금껏 미국에 살고 있습니다. ‘국군의 날’이나 ‘현충일’이 되면 잠깐씩 현충원을 다녀가곤 하던 누나는, 지난 삼 년 동안 아버지를 만나러 오지 못했어요. 매부가 아팠기 때문이지요. 매부는 편안하게 삶을 마감했다고 해요.
누나는 가톨릭 신자입니다. 그런 누나가 올해는 절에서 만나기를 원했습니다. 누나는 얼어붙은 마음을 달마사에서 우선 녹이고 싶다고 했습니다. 새하얀 화강암 비석들이 단정히 줄지어 기다리는 모습이 뼛속까지 시려온다고 했습니다. 돌 비석들은 소리 없이 울고, 가슴은 신음을 끌어안고 있다 했어요. 돌 비석 주인들의 주름 없는 얼굴들을 볼 자신이 없어서, 오랜 세월, 매일 세 끼를 먹고, 얼굴에 주름을 달고 살다가 영생을 찾은 이들의 흔적을 우선 보고 싶다 했습니다. ‘달마사에선 목탁 소리를 들을 수 있겠지?’ 하고 전화에서 묻던 누나는 이젠 이 세상보다 저세상에 친구가 더 많다며 킥킥 웃었습니다.
누나는 만나기로 한 대웅전 앞에 보이지 않았어요. 한참 어둠에 익숙해지고 나니, 부처님상에서 떨어져 있는 곳에, 눈을 감고 꿇어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어요. 누나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누나, 부처님한테 기도한 거야? 하느님한테 혼나려고?’
‘하느님은 그렇게 옹졸하지 않아. 어디서나 당신을 생각하는 것이 기도거든’
‘누나, 이젠 한국 오면 우리 집에 머물자! 매부 없이 혼자 올 테니, 그게 쉽지 않을까?’
‘말은 고마운데, 너의 집은 대전에 있으니까 동작동에서 너무 멀어.’
‘아버지 묫자리는 성묘가 필요 없잖아. 그리고 아버지가 거기에 계신 것도 아닌데……’
‘그래, 그렇지. 빈 무덤이지.’
‘매형 돌아가셨을 때, 장례 미사에 참석 못 해서 정말 미안해. 그 때 난 아프리카 우간다에 있었어. 우간다에서 미국까지 하루 이상이 걸리고, 비행기도 두어 군데에서 갈아타고, 그것도 매일 뜨는 것이 아니거든. 또 그때 중요한 계약을 따내어야만 했어.’
‘괜찮아. 예상했던 죽음이었는데 뭐.’
나의 많은 질문에 누나는 소리없이 빙그레 웃으면서 싫어하지 않고 대답했어요.
누나는 50여 년 전 나를 업어주던 때보다 더 작아 보였어요. 나를 등에 태웠던 누나의 좁은 어깨는 언제나 나를 불안하게 했었지요. 어렸을 때, 누나 등에 업히면 왠지 더 슬펐어요. 누나는 나를 업고 강의를 들으러 간 적도 있었어요. 누나가 대학생일 때이었어요.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할께요.
쭈글쭈글한 주름이 누나의 뺨을 가로지르기도 하고 세로로 오르내리기도 했어요. 맑았던 얼굴엔 검버섯이 피었고, 청색이 날 정도로 까맣던 머리카락은 흰 눈에 덮인 까만 기와지붕처럼 추워 보였어요.
나는 아버지를 본 적이 없어요. 아버지는 한국전쟁 때 전사하셨어요. 71년 전, 누나가 세 살 때이었데요. 스물 몇 살 나이에 과부가 되고, 가장이 된 엄마는 어려운 집안 살림을 꾸려나가느라 많이 고생하셨어요. 그래서 그랬는지 자주 아파 누워 계셨던 것을 기억해요. 바쁘고 옹색한 살림을 꾸려가면서도 고아원에서 봉사하시곤 했데요. 거기에서 겨우 걸음마를 띄기 시작한 나이의 나를 만났다고 해요. 전쟁이 끝나고 십 오년 정도 지난 후였다고 해요. 나는 전사하신 아버지의 가정으로 입양되었지요. 아버지의 성씨를 받았고요. 나는 유복자(遺腹子)라기보다 유복(遺腹) 입양아(入養兒)인 셈이었어요.
나를 업어 데리고 갔던 엄마……. 퀴퀴한 땀내가 배인 엄마의 적삼, 그 가슴에 안겨 잠들곤 했던 나는, 지금도 엄마 냄새를 맡을 수 있어요. 엄마의 냄새는 끝없는 평화를 약속하는 것이었어요. 엄마는 쌀이 부족하면 죽을 만들어 누나랑 형과 저를 먹이셨어요. 나를 때리는 사람이 없는 것이 이상했어요. 과학을 잘하던 형은 엔지니어가 되는 대학에, 책을 많이 읽던 한 누나, 이번에 잠깐 귀국한 그 누나는 문학을 전공했어요. 나는 엄마가 원하시는 경영학을 공부하였어요. 우리 모두는 장학금을 받았습니다. 엄마는 아르바이트 대신, 그 시간에 공부에 열중하고, 장학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하라고 말씀하시곤 했어요.
가난한 살림, 엄마가 가장인 우리 집에, 나를 데리고 오셔서 입적 시키셨던 엄마는 배짱이 컸거나 바보 같은 신념으로 사셨던가 봐요. 누나는 엄마가 늘 하시던 말이 ‘하느님은 산 입에 거미줄 치지 않는다’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엄마는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만나지 못한 아버지이지만 아버지는 나에게 당신의 성(姓)을 주셨고 아버지의 이름은 엄마만큼이나 나에게 튼튼한 성채가 되었어요. 두 누나와 형은 자주 편찮으셨던 엄마 대신 나를 돌보아 주었어요.
‘누나, 누나는 비 오는 날이면 나를 업고 산에 지렁이 잡으러 갔었지?’
‘그랬지.’
‘누나, 학교는 빼 먹고 간 것이었어?’
‘응. 당연히……….’
‘누나, 낙제를 어떻게 면했어?’
‘겨우, 겨우. 그래서 너를 업고 학교 간 적도 있었지. 출석 일수 미달이라고 하였을 때, 어떤 비오는 날은 지렁이 잡는 일을 포기해야 했어. 지금 생각하니까 우습다!’
‘그랬구나. 그런데, 누나, 왜 지렁이를 잡으러 다녔어?’
‘엄마한테 고깃국을 끓여드릴 돈이 없었거든. 고기에 있는 단백질이 지렁이에 많다고 해서.’
‘누나, 그럼 우리가 먹던 국이 지렁이 국이었어?’
누나를 만나고 온 날 밤 꿈속에서, 지렁이가 소고기로 변하는 국을 맛있게 먹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