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데미안은 누구인가?

남극을 다녀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책장 어딘가에 꽂혀있을 법한 헤르만 헤세가 쓴 책, ‘데미안’을 찾는 것이었다. 남극에서 보았던 알바트로스(한자 이름: 信天翁)라는 새 때문이었다. 이 책은 주인공 에밀 싱클레어가 십 대로 들어서면서 어렸을 때 그에게 주어졌던 밝고, 정돈되고, 규칙적이고, 도덕적인 환경과 관념에서 벗어나, 반대되는 삶의 이면을 스스로 경험하게 되면서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이야기로 헤세의 자서전적 소설이다. 핵심이 되는 친구 데미안, 알의 껍데기를 깨고 나오는 ‘새’, 그 ‘새’가 알바트로스라고 나는 착각하고 있었다.

이 새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려면, 우선 독수리, 참새, 까지, 까마귀, 벌새 정도밖에 모르던 나의 무식을 고백해야 한다. 온 세상이 코비드 바이러스 악성 전염으로 앓고 있었고, 따라서 여정도 쉽지 않았지만, 알바트로스라는 새를 볼 수 있고, 알게 된 것은 더 없는 행운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남극 서식 동물인 몇 종류의 팽귄을 보았고, 몰랐던 자연을 체험할 수 있었던 것도 빼어 놓을 수는 없겠다.

남극 대륙(Antarctica)은 여행객을 태운 비행기나 자동차가 갈 수 없다. 바닷바람과 파도를 핸들 할 수 있는 큰 배로 가야 한다. 크루즈 배는 보통 오스트레일리아나 아르헨티나, 칠레에서 출발한다. 우리 부부는 비행기로 로스앤젤레스를 떠나, 마이애미를 경유해서, 아르헨티나의 제일 남단 도시인 우수아이아(Ushuaia)에서 크루즈에 승선했다.

‘남쪽 지구 대들보(South Pole)’를 중심으로 형성된 막대한 얼음 덩어리인 남극 대륙은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는다. 주인이 없고, 군대가 없는 비무장지대(DMZ)이다. 기온은 화씨로 영하 15도에서 영하 80도에 이르고 4월부터 8월까지는 해를 볼 수 없다. 내가 갔던 3월은 이상기후였는지 온화한 한국의 겨울 날씨처럼 섭씨 0도를 오르내렸다. 일 년 중 이때쯤에 바다 얼음이 어느 정도 녹아서 깨어져서, 큰 크루즈 배로 조각난 얼음을 헤치면서 항해할 수 있다. 크루즈 배는 얼음해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정박하고, 해변에 갈 때는 조디악 고무 배를 이용한다.

지구의 ‘일곱번 째 대륙(大陸)’인 남극 대륙은 바다에 떠있는 거대한 얼음산이라고 보면 된다. 그러나 워낙 거대해서, 바다에 떠서 머무는 얼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해상에 떠 있는 부분은 빙산의 일부, 빙판 또는 얇은 어름 쉬트였고, 수면 아래에 빙산(iceberg)의 큰 몸이 잠겨있었다. 일 년 전 얼음산에서 떨어져 나온 A-76이라고 이름 붙여진 빙산은 자그마치 맨해튼의 80배 크기로, 길이 105 마일에 너비가 15.5 마일이었다고 한다. (참고: 빙산에 이름을 붙이는데, 작년 이전까지 가장 컸던 빙산의 이름은 B-15이었다). 빙산의 색깔은 소금 농도에 따라 흰색, 엷은 하늘색, 진한 하늘색이었다.

이곳에는 사람이 살지 않고 단기간 머무는 연구 과학자들이 있을 뿐이다. 사람들에 의해서 길든 개, 소, 말, 고양이 같은 동물들은 없고 팽귄, 물개, 바다사자, 이빨 고래, 바닷새들이 살고 있다. 여러 종류의 새 중에, 내가 데미안이 스케치하던 ‘새’라고 착각했던 알바트로스는 여러 면에서 특이한 새였다. 편 날개 길이(익폭)는 평균 11피트로, 세상에서 제일 크고, 대서양만 빼고 모든 대양(大洋) 위를 나르고, 창공 필요한 높이에 다다르면, 에너지 소비를 하지 않고 떠 있으며, 날개를 펄럭이지 않고 여러 시간 동안 나를 수 있다고 한다. 남극해를 일 년에 세 바퀴 돌고(75,000마일), 평균수명이 50년 이상이며, 일부일처의 삶을 산다는 이렇게 특이한 새가 멸종 위기에 있다고 하니, 염려되고 슬프다.

알바트로스 새를 데미안 책에서 이리저리 찾아보다가, 결국 책을 다시 읽게 되었다. 다시 읽으니 좋았다. 무엇이 좋았느냐고 묻는다면, 내가 이번에 느낀 헤세는 많이 평범하고, 또 많이 비범한 인성의 소유자였다는 점이었다. 우리 모두가 겪는 외로움, 공포, 열등감과 이를 잊기 위해 애쓰는 우리들의 어설픈 허세나 회피 과정을 정신학자처럼 잘 다루고, 표현했다. 목사가 되려고 신학교에 입학했다가 퇴교했던 헤세는, 그의 신이 조물주이었음을 부인하는 것까지도 매끄럽게 잘 표현했다.

알껍데기를 깨고, 세상으로 나오는 새의 모습은 대문 앞쪽, 길을 접한 곳에 있는 현관 입구, 여기에 세워진 돌로 된 아치, 아치 중간 지점 바로 윗쪽 벽에 붙어있는 오래된 문장(紋章)에 조각되어 있었고, 이는 덧칠한 페인트에 가려서 형태가 정확하지 않았다는 것.—바로 이 새를 나는 찾아내야 했다. 그 새는 알바트로스가 아닌, 매(sparrow hawk)였다. 이론적으로도 헤세가 살았던 유럽, 대서양으로 알바트로스가 날아간다는 과학적인 근거가 없다는 점이, 문장(紋章)의 새, 데미안의 의식과 영(靈)을 뜻하는 새가 알바트로스가 아닌 매라는 것을 반증 했다.

다시 읽은 데미안 책은 삼 십 육 년 전에 2불 95전에 값이 매겨진 반탐 책(Bantam Book) 회사가 출판한 것으로 종이는 누렇게 변했고, 책 커버는 너덜너덜하다. 지금 다시 들여다보니, 영역본 33판이었다. 토마스 만이 1947년 4월에 쓴 소개문으로 영역본은 시작된다. 큰아이가 제일 앞장 빈칸에 나의 이름 Monica C. Ryoo 라고 첫 줄에, 그리고 6/86이라고 그 밑줄에 써 놓았다. 딸은 그 때 11살이었을 게다. 멋 부려서 쓴 딸의 글씨체가 좀 낯설다. 지금 40대 중반을 넘어선 그 애는 멋 부린 글씨를 쓰지 않는다. 그 애의 글씨는 아주 작고, 버러지가 기어가는 것 같은 형태를 하고 있다. 바빠서, 성격이 소심하게 바뀌어서, 완벽주의자가 되어서 글씨체가 변한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위의 모든 것’ 아니면, ‘위의 아무것도 아님’이 정답일까?

딸의 사춘기, 청춘기가 데미안과 싱클레어, 지나간 전(前) 세대들의 그것과 다를 바 없이, 때로는 우울하고, 외롭고 그래서 혼란스럽고, 아프고,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요구되는 행복이라는 방안에서 창살 틈으로 빠져나가 버린 희망의 빛을 되찾으려고 방황했을까. 방황의 광야는 어떠했을까. 희망의 빛은 방에서 떠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을 광야를 지나 되돌아 왔을 때, 알게 되었기를 바란다.

남극을 떠나 쉬지 않고 지구를 돌다가, 다시 남극으로 돌아가는 알바트로스가 되지 않아도 된다. 매서운 눈으로 세상을 간과하는 매가 아니어도 된다. 위험이 주위를 둘러쌀 때, 악이 무섭게 달려들 때, 우리는 친구를 부르면 된다. 우리는 우리 속 깊은 곳에 친구가 함께함을 알게 될 것이다. 딸과 우리들의 데미안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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