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비드 19사태는 끝날 듯, 끝날 듯하면서도 지속 되고 있다. 될 수 있으면 외출을 금하다 보니, 나날이 새로운 양상으로 틀을 잡고 있다. 평소에는 안 하던 체조도 하고, TV를 보거나, 유튜브를 통해서 요리하는 법을 보고, 때로는 용기를 내어서, 조리 실험도 해 본다.
TV 앞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다 보니, 이젠 넷플릭스 고객이 되었다. 한국 드라마에 맛 들이고 있다. 아름다운 시골 경치, 두바이를 능가하는 화려한 서울의 하이라이즈들, 서울의 야경 등에 감탄한다. 다인종 가족과 성 소수자를 포용하는 종류의 드라마 내용은 참신해 보인다.
그런데, 가끔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는 외국어, 한국어와 영어를 합친 신조어들이 TV와 신문에 등장하곤 한다. 때로는 합성 후 몇 글자를 생략한 예도 있다. 이해하기 힘들기도 하고 자꾸 한국말이 없어지는 것 같기도 해서 안타깝다. 내 노파심만은 아닐 것이다.
생소하기도 하고, 자주 쓰이는 말로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있다. 이 말은 프랑스 말인데,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은 채 한국에서, 그리고 영어로 번역되지 않은 채 영어권 나라인 미국에서 자연스레 쓰이고 있다. 프랑스가 유럽에서 오랫동안 패권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 말과 프랑스 문화가 영국의 상류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면서, 이 단어도 그냥 쓰이고 세월이 지난 지금도 원래대로 살아 남아있다.
‘노블레스’는 영어로는 ‘노블(noble)’이고, 귀하다는 뜻이다. ‘오블리주’는 ‘obligation’으로 책임이라는 뜻이다. 복합단어의 의미를 풀이하여보면, 귀족 층은 일반인들이 누리지 못하는 여러 가지 특권을 누리면서 살기 때문에, 그 특권에는 의무가 따른다는 뜻이다. 알고 보면 멋진 말이다. 이 멋진 뜻은 기원전 600 년 경, 호머의 ‘일리아드’에 처음으로 등장했다고 한다.
외국어와 외국어+한국어 병합 신조어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순수한 한국어로 ‘수저’에 관한 단어들이 사회 계급층을 지칭하는 뜻으로 많이 쓰이고 있다. 금수저, 은수저, 동수저, 나무 수저, 흙수저. 수저 타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은 새로 형성되어 가고 있는 수저 계급제도가 새로운 한국인의 신분질서로 부상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수저계급론은 경제적인 수직적 관계를 지칭하는 뉘앙스가 진하다.
계급과 신분이 우리들의 삶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계급이란 신분이나, 재산, 직업, 교육 정도가 비슷한 사람들끼리 만드는 것이 집단이라고 하는 정의를 읽었다. 그런데 한국에는 계급제도가 없지 않은가? 계급제도는 일본강점기 때에 한번 말살되었고, 육이오 한국전쟁을 치루면서 완전히 바닥으로 허물어져 없어졌던 것이 아닌가?
계급이나 신분은 사실상 불평등을 의미하는 단어로써, 계급은 법제적으로 정해진 사회의 불평등이고, 신분이란 법제적으로 정해지지 않은 의식적 불평등이라고 한다. 미국이나 한국은 법적인 불평등은 없지만, 우리의 의식 속에서는 불평등의 관념이 아직도 몸 사리고 있는지 모른다. 수저 계급제도가 그것이다. 수저계급론의 시초는 미국이다. 아무개는 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났다는 표현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과연 어느 수저 계급에 속할까? 어디에 속하던지 상관없이, 나는 동수저가 좋다. 동(銅)은 광물질 브라스(brass) 또는 커퍼(cupper)를 뜻하는데, 여기서 한국 사회에서 쓰는 동수저라는 말 속의 동은 스테인리스 스틸을 뜻한다. 스테인리스 스틸은 인류가 발견하고, 발전시킨 물질 중 가장 획기적인 물질이다. 약 110년 전에 영국인 헤리 브리얼리(Harry Brearley)가 녹슬지 않고 단단한 총기를 만들려고 우연히 크로미움(동위원소 Cr)을 철에 섞으면서 발명된 것이다. 철은 기원전 고(古)시대부터 쓰였던 것으로 오래 쓰면 녹이 쓴다. 여기에 약 11% 분량의 크롬을 섞으면 녹 쓰는 것도 방지하고, 단단하고, 오래갈 뿐 아니라, 섭씨 1200도 정도까지의 고열을 견디며, 값도 무척 싸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물질이 무척 위생적이라는 것이다.
스테인리스 스틸은 의학기구, 쿡킹용기, 오븐, 자동차 부속품, 건축자제로 다양하게 쓰인다. 그 뿐 아니라 스테인리스 스틸은 맥주 발효 통, 비행기, 잠수 TV, 세탁기 등 어떤 물질을 장시간 동안 저장해도 부식하지 않는 유용하고 좋은 물건이다. 무엇보다도 의학기구의 대부분은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든다. 그 예로 자궁암 근접치료를 하기 위해 자궁과 자궁경부에 넣는 기구를 들 수 있다. 오랫동안 수 천 명의 환자들을 위해서 사용하고, 고열 소독을 한 후에도 휘지 않고, 견고하며 위생적이다. 이 물질은 발명되자마자부터 의학 기구를 만드는데 쓰였다. 현재 중국이 최대 스테인리스 스틸 생성국가(1,000 million)로 2위인 인도보다 10배를 만든다.
귀족 계급이 없어진지 오래되지만 의식적 불평등 속에서 살고있는 지금, 어떤 사람들과 계층이 노블레스에 속할까? 여기에 나의 모국인들이 즐겨 쓰는 수저계급론을 접목해서 생각해 본다. 이들 중에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수저 계급은 누구일까? 금수저와 은수저까지일 것 같고 그래야만 한다. 그렇지만, 동 수저급, 나무 수저 계급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얼마든지 실천하면서 살수있다. ‘노블리스 오블리주’는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경제적으로 나보다 힘들게 사는 사람들을 도울수 있으면 의무의 완수가 될 것이다.
한국전쟁을 겪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미국에 사는 한국인 교민들은 우크라이나를 돕는 데 적극적이다. 일부에서는 우크라이나에 사는 한국 교민들을 돕고, 나의 모교 고등학교 동문회는 크게 작게 성금을 모아서 미국에 유학중인 우크라이나 출신 학생들에게 생활보조금을 모아 주면서 돕고 있다. 많지도 않고, 영구적인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72년 전, 육이오 전쟁으로, 공부할 시기를 놓치고 대학 진학이 불가능했던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미국 유학의 길을 열어 주었던 미국의 시민들이 실행했던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같다. 그들은 거부가 아닌 우리들처럼, 평범한 미국 시민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