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필립 공(公)들에게

영국 여왕 엘리사벳 2세가 서거한 지 거의 6개월이 되어간다. 여왕은 71년이라는 긴 세월을 공인(公人)으로 보냈던 삶을 마쳤다. 정치적 결정권은 없었지만 한 나라 수장의 위치를 지키고, 세계의 관심과 우대, 그리고 존중을 받으면서 살았던 분이다. 아마 영국인들은 여왕을 사랑했을 것이다. 시대적, 그리고 세대(世代)적인 변화를 지구촌 일반 시민들처럼 겪었을 것으로 안다. 여왕의 친족이 전사했다는 뉴스는 못 들었지만, 국제 정세에 맞추어, 영국 지배 영역이 축소되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예를 들면, 대영제국 (British Empire)에 속했던 56개 나라를 차츰차츰 독립시켜야 했고, 이들과 연방(Commonwealth) 관계를 맺어야 했던 결정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지배영역이 전 세계 곳곳에 있어서, 근대(近代)의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던 대영제국의 위치를 여왕 시대에, 포기해야 했다. 참고로, 미국은 현대의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보는 경향이다.

엘리사벳 여왕 옆에는 항상 부군인 필립 공(公)이 있었다. 이 둘은 모두 빅토리아 여왕의 후손들로, 친척간이다. 그리스에서 태어난 필립 공(公)은 그리스, 덴막, 프러시아, 러시아의 로마노프 왕족과 피가 섞인 사람이다. 젊었을 때의 여왕 부부는 젊음의 티 없는 싱그러운 모습으로 세상을 열광하게 했다. 신경질적이거나, 권위의식을 갖고 군림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맑고, 간사함이나 비겁함이 보이지 않았다. 단정하고, 선하고, 가식이 없고, 진실하였다. 10대 공주 시절의 여왕, 결혼식 때의 여왕, 왕관의 쓰임을 받던 25세의 여왕을 세계가 환호하고 사랑하였다. 그녀가 여왕의 자리를 잘 지키도록, 영국이라는 나라는 그녀를 보호하였다고나 할까?

여왕에 관한 기사를 읽으면서, ‘필립 공(公)은 참 대단해. 앞장설 수는 없었던 입장이라 해도, 여왕인 부인 옆에서 함께 하는 모습이, 뒷전으로 밀려 보이는 것 같지않고, 멋있어!’ 라고 말하자, 남편은 손가락으로 자기 가슴을 가르키면서, ‘아키(aqui)!’라고 말하면서 웃었다. 아키(aqui)란 스페인 말로 ‘여기’ ‘이곳’, ‘저’라는 뜻이다. 나 자신을 가르키면서 말한다면 ‘나’라는 의미도 있다. 남편은 ‘나 같은 사람’이라는 뜻에서 그런 것이다.

아~~! 그러고 보니, 세상엔 훌륭한 필립 공(公)들이 많다. 외부 일을 담당하는 남편, 집안 살림을 하는 아내라는 오래된 가정의 프래임과 고정관념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오래되었다. 그 변화가 급작스럽지 않고, 느리게 일어났다. 지금 한국과 세계에 퍼져 있는 한국 민족 디아스포라 가정들에서도 역할이 바뀌고 있고, 이미 바뀐 가정도 많을 것이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역할이 바뀌었다기보다는 경계가 없어지고, 부부나 동거인들이 가사를 함께 해결하는 모습이다.

나는 여자 의과대학 졸업생이다. 의예과 때, ‘기독교 문학’이라는 과목이 필수이었다. 목사님이 담당하는 과목이었다. 중장년 정도 연령대의 목사님이 강의를 맡았다. 첫 강의가 있던 날, 그 분은 여자들이 집안 살림, 남편 보조, 육아 등을 뒤로 하고, 의사의 길을 간다는 것은 무리일 것이라고 말했다. 의사로서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어떤 그가 알고 있는 여의사는 새벽에 깨어 모든 가사를 준비, 해결한다는 예를 들었다. 또 한국 최초의 여자 변호사는 퇴근길에, 버스에서 내리기 무섭게, 입었던 외출복을 벗는 준비를 하면서, 귀가하고, 집에 들어서자마자 부엌으로 향한다는 것이었다. 반세기 전의 일이다.

지금은 어떤가? 한국과 세계의 노동시장은 꾸준히 변해오고 있다. 미국 의사 협의회(American Medical Association)는 2018년에는 의대생 지망인이 남성, 여성 분포가 동등했었던 것과 달리, 2019~2020년에는 53.5%가 여성이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실제 전선에서 의료활동 중인 여성의 분포는 36.3%에 지나지 않는다. 의과대학 입학부터, 의료인으로 활동 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을 감안해 보면, 이해가 된다.

한국에는 전업주부 남성이 2023년 올해, 21만 명 이상이라고 국가 통계국(KOSIS)이 보도했다. 육아, 가정 살림의 부담이 큰 경우, 남편과 아내 둘 중, 수입이 적은 쪽이 직장을 내려놓고, 이 변화는 잘 받아들여지고 있는 모양이다. 현대를 사는 한국인 필립 공(公)들이 많아졌다. 한국의 필립 공(公)들 화이팅!!!

내 아버지 세대에는 필립 공(公)들보다, 신사임당들이 있었다. 딴 세상에 가 계신 내 아버지는 여러 모자를 바꿔 써 가면서 살고 있는 나를 보고 무어라 하실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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