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게릭 병과 싸우는 여인 2011

여름밤이 무척이나 울적하다. 오랜만에 틀어 놓은 CD에서는 옛날 가수가 오래된 노래를 눈치없이 열창하고 있다. 왜 이렇게 울적함을 털어 버릴 수 없을까. 쉬이 잊혀지지 않는 무거움이 있다.

그렇다. 그것은 내가 오늘 •루게릭(Lou Gehrig)병에 걸린 환자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여인이 나에게 온 것은 •루게릭병 때문이 아니었다. 여인에게 유방암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루게릭병을 지난 2년간 앓아온 여인의 남은 생은 약 2년으로 보고 있었다.

제법 덩어리가 큰 암 때문에 유방 절제 수술을 받았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외과 의사는 모두 떼어내는 것을 피하고 환자가 힘들지 않을 정도 만큼만 수술을 했다. 가슴을 도려 낸 공간에 실리콘 백을 넣고 봉합을 했다. 옷을 입으면 유방 절제를 한 것처럼 보이지 않게 하는 수술까지 동시에 한 것이다.

그녀는 비록 휠체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자신을 잘 가꾸고 있었다. 옅은 화장이 보기 좋았다. 목에는 간단한 목걸이가 걸려 있고 입고 벗기 쉽게 성글게 짠 보라색 상의를 걸치고 반바지에 샌들을 신고 있었다. 페디큐어도 했지만 마비된 두 다리는 혈액순환이 잘 안 되어 그녀가 입은 보라색 상의처럼 붉고 푸르렀다.

그녀의 눈은 정결하고 애가 타거나 욕망이 있어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는 가끔씩 눈물이 고이는 듯 하더니 그냥 사라지곤 했다.

진찰이 끝난 후 나는 그녀와 그리고 그녀의 딸과 함께 마주 앉았다. 루게릭병이 꽤 빨리 진행되고 있어서 6개월 전에는 다리만 약했었는데 지금은 손에도 마비가 오는 중이어서 글을 제대로 쓸 수가 없다고 했다. 그래도 요리는 그럭 저럭 가끔씩 하고 남편과 아이들이 집안의 일과를 대부분 담당하고 있다고 했다. 욕조에 앉혀 주면 목욕도 스스로 하고 대소변도 실수가 없다고 했다.

나는 유방암에 대한 방사선 치료를 추천하지 않았다. 살아 있을 날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그녀에게 남은 시간을 유용하게 보내면 좋겠다고 말했을 뿐이다.

그녀는 거부하지 않았다. 또 남은 시간을 이용해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나처럼 그녀를 잠깐 보았던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글로 적어 보내겠다고 했다. 그 말을 하면서 비로소 그녀는 울었다. 곁에 있던 딸도 울었다.

암에 걸린 많은 사람들은 암에서 살아 남을 수 없다고 스스로 단정해 버린다. 그것은 옳지 않은 정보의 결과이다.

그러나 이 여인이 겪는 것처럼 조직학적으로 지극히 양성인 병이 암보다 훨씬 급성적이고 악성일 경우가 있다. 유방암보다 •루게릭병이 오히려 그녀의 생명을 단축시키고 나날의 기능을 좀먹고 있는 것이다.

루게릭병. 한국말로 ‘근(筋) 위축성(萎縮性) 측생(側생) 경화증(ALS)’으로 번역된다. 1939년 뉴욕 양키스 야구팀 선수인 루 게릭이 이 병으로 쓰러진 것에서 유래된 병명이다.

보통 정신도 멀쩡하고 대소변 보는 것에 지장이 없고 감각신경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지만 운동신경이 죽어서 결국 2~3년의 투병 끝에 환자는 삶을 마감하게 된다.

진찰실을 떠나는 그녀에게 “허그해 주고 싶은데 괜찮아요?”하니까 “아이구 선생님 ALS에 전염되시려고요!” 한다. 우리는 농담했고 웃었고 포옹을 했고 그리고 헤어졌다.

이 저녁 마음이 자꾸만 깊이 가라 앉는 것은 저 처량 맞은 음악 때문인가. 내일 오피스에 가면 그녀에게 안부 전화를 걸어 보리라.

콧수염의 달 11월

미주 LA 중앙일보 2016년 11월 24일 목요일,                                                                                                                                                             추수감사절

삼 주간 오피스를 비우고 돌아오니 동료 의사들이 콧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아니, 콧수염은 왠 일?” “모벰버 운동의 달이니까! 어때, 우리 멋있지?” 내가 일하고 있는 카이저 병원에서는 올해 처음으로 11월이 ‘남성 건강의식 고취의 달’ 운동에 동조하는 의미에서 남자 의사들이 콧수염(또는 턱수염까지도) 을 기르고 11월 말에는 투표로 가장 멋진 수염쟁이(!) 의사를 선정한다고 이멜이 돌았다.

새로 생긴  합성단어 ‘모벰버(movember)’ 란 모스타쉬(moustache 오스트리아 영어. 미국 철자는 mustache ) 에서 따 온 “mo” 에  November(11월) 에서 가져온 “vember” 가 합쳐진 단어이다. 1999년 남 오스트렐리아에서 시작됬고 2004년에 ‘모벰버 자선단체’가 생겼다. 여러나라에서 동참하는 이 운동은  전립선암, 고환암에 대한 경각심을 일으키고 일반적인 남성건강에 대해서도 올바른 태도를 고무하기 위한 것이 목표이다.

소수의 뜻이 있는 사람들이 의견을 모아 만든 동아리 활동이 세계적인 운동으로 퍼지는 것을 보면서 이번 여행에서 감명을 받았던 어쩌면 일맥상통 할 지도 모르는, 내가 새로이 알게 된 두가지 역사적 사건을 나누고 싶다.

네델란드, 독일, 오스트리아, 항거리, 체코 공화국 어디를 가도 예술품들이 널려있었다. 예술품을 전쟁에서 보호하기 위해 만든 ‘예술품 저장 창고’를 독일 뉴렘베르그 성(城) 지하에서 구경했다.  사암층을 까고 중세기 때 24 미터 지하에 만든 맥주 저장 창고를 이차대전이 터진 지 일 년 후 1940년 부터 과학기구, 조각품, 예술품, 교회의 스테인드 글라스들을 옮겨 공습을 피했던 곳이다.

몇몇 사람의 아이디어가 역사적인 일을 해 냈다는 점에서 존경스러웠다. 그렇지만 대학살이 저지러 지고 있을 때 생명을 구하는 작업에 손대지 못했다는 점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다못해 대 성당 앞 성모와 아기예수 상이 있는 바로크식 분수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들은 나무로 집을 짓고 시멘트 지붕을 덮어서 이 예술품도 살렸던 사람들이 아닌가?

어느 날 황금색, 붉은색으로 물든 낙엽들이 너부러져 비 맞고 있는 길을 걸었다. 구르몽 (Remy de Gourmont 1858-1915) 의 ‘낙엽’이라는 시를 기억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축축히 어둡게 젖은 코블스톤 작약길에  ‘스텀블링 블럭(stumbling block)’이라 불리우는 작은 동철판이 비에 씻기어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허리를 굽혀 동판에 쓰인 글을 읽는다.  ‘ 이곳에 (아무개) 살다….생년월일…(날짜)끌려나가다…학살당하다(캠프이름)’

‘스텀블링 블럭’이라는 말의 일반적인 의미는 우리가 하고저 하는 일을 방해하여 멈추게 하는 일이나 사물을 뜻하는데 이 경우도 아마 그런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그저 무심코 제 갈 길을 걸어가고 있다가 우연히 발에 밟히는 작은 동판이 우리가 가던 길을 멈추게 하니까.

독일은 국가차원에서 유대인과 세계에 대학살의 만행을 이미 사죄했다. ‘스텀블링 블럭’은 일반 시민들이 만들어 개인적인 사죄를 하고 희생자들을 기억하자는 운동이다.  끌려나갈 당시 살았던 집 앞 길에 가로, 세로 10센티 동판을 작약돌위에 얹어 작약돌을 대치한다. 건터 뎀닉(Gunter Demnig)이라는 독일 미술가가 1992년 시작한 일이 지금은 유럽 18 나라에 약 5만 개의 블럭들이 코블스톤을 대치한 바 있다고 한다.

내가 ‘예술품 저장고’에 이견을 갖고 있듯이 ‘스텀블링 블럭’에 대한 이견도 있지만 어떤 작은 희망과 용기가 커다란 물결이 되어 우리를 변화시킨다. ‘모벰버’이다.

추수감사절에 감사할 일들이 많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