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여성 교육을 생각하다

`톡 튀는 인물이 없는 졸업생들로 구성된 학년이라고 알려진 우리가 졸업한 지 어언 60년인 돼 함께 모였다. 환영한다!` 거액을 자선단체에 기부하였거나, 어떠한 단체를 만든 인물, 또는 장관급 리더로 쓰였던 특출한 동문이 우리 기(期)에는 없었다는 뜻일 것이었다. 그러나 가장 많은 인재들이 곳곳에서 전문직을 갖고 활동해 왔으며 동문회 이사 직함도 받고 있다고 했다. 이 별 볼 일 없는 클래스 출신이 2025~2027년 모교의 총 동창회장으로 선출된 바 있다. 학창 시절 대대장이었던 그녀가 재상봉 개막 파티에서 한 환영사의 일부이다. 

모국에서 있었던 `졸업 60주년 재상봉` 잔치가 지난달 한국에서 있었다. 우리는 비수기(非需期)인 4월에 모였다. 참석한 대다수가 한국에 살고 있었고 타국에 거주하는 디아스포라 동문은 참석인원의 약 25%였다. 미국이 워낙 커서 그런지, 미국에 정착한 동문도 60년 만에 처음으로 본 경우가 적지 않았다. 영국, 독일, 캐나다에서도 왔다. 80살을 바라보는 노파들의 진지했던 모임은 활기차고, 유머러스하고, 때로는 심각하기도 했다. 우리는 많이 웃었다. 

대형버스 다섯 대에 나누어 타고, 영동, 동해, 양양 세 개의 고속도로를 달려 사흘에 걸쳐 동해 쪽에 있는 오대산, 발왕산, 설악산과 추암해변, 바다부채길, 경포호 둘레길, 수타사 산소길을 탐방했다. 그리고 산속에 자리 잡은 몇몇 사찰에 들렀다. 차가운 동해의 시퍼런 파도가 밀려와서 때리고, 할퀴고, 밀치고 간 흔적을 숨기지 못한 돌 절벽을 보았다. 돌 절벽은 우리들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으면서, 우리에게 등을 비스듬히 돌리고 있었다. 뼈대를 드러낸 돌산 틈틈이 화려한 꽃이 얼굴을 내민 길을 걸어 색 바랜 붉고 푸른 둔탁한 기둥이 받치고 있는 사찰에 도착했다. 코끝이 하늘을 향한 날렵한 사찰의 처마는 오랜 옛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애수가 고요 가운데 훈습이 되어 영과 육을 흠뻑 적신 듯 느껴질 때, 옛사람들이 행여 기다리고 있나 싶은 생각에 대웅전으로 향했다. 금을 칠한 여러 형태의 작은 불상들 앞에는 과일, 떡 같은 음식이 놓여있었다. 이생을 떠난 사람들로 보이는 이들의 빛바랜 사진들도 진열되어 있었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을 법한 사진 속의 사람…참선하는 이 몇 안 되는 고즈넉한 대웅전은 나에게 무릎을 꿇리었고, 무념의 시간으로 나를 묶어 두었다.

버스로 이동하던 우리 그룹은 운전사만 빼고, 여인천하이었다. 계급제도와 남존여비 사상이 사회를 단단히 걸어 잠그고 있던 조선 말기에 세워진 모교에서 4ㆍ19 학생의거가 있었던 해부터 6년을 우리는 함께 수학했다. 세상을 변화시킨 것은 여성 교육을 단행했던 우리 선조들의 뜻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변화를 향한 열망 속에서, 더 좋은 세상, 공평한 세상을 꿈꾸었을 것이다. 

여기서 잠깐 한국 여성 교육에 대해 들여다보자. 한국의 서구적 여학교의 모체는 미국 선교사가 행한 기적이었다. 여자아이 한 명에게 배움의 문을 열어주었던 것이 140년 전, 1887년이었다. 이화학당의 전신이다. 기록을 보면, 그로부터 11년 후인 1898년에 조선 사람이 처음으로 사립학교 `순성 여학교`를 세웠다고 하는데, 이 학교는 약 5년 후에 폐교했다고 한다. 이어서, 1906년에 고종황제의 계비 순헌황귀비가 귀족 출신 여아 5명을 데리고 지금의 숙명여고를 세웠고, 2년 후에는 관립으로 현재 경기여고의 전신인 한성 고등여학교가 세워지었다. 한국의 여성 교육 기관의 설립 역사는 시대적으로 조금도 뒤처지지 않음을 증명한다.

뭣 모르고 입학하고, 그곳에서 세상과 나라를 남의 일처럼 담장 넘어 봤던 나는 지난 114년 동안 이곳에서 수학하고 떠난 46,000여 명의 졸업생 중 하나다. 그리고 한국을 떠나 살고 있는 7백만 한국 출신 디아스포라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언젠가 동료 의사가 한국 사람들에게는 학연이 무척 중요해 보이는데, 그 이유를 알고 싶다고 했다. 디아스포라 삶이라서, 이민자들은 어떤 공통 분모를 찾으려고 그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지만, 그것은 정답이 아닌 것 같았다. 모국에서도 동창회는 중요한 공동체 모임이다. 한국인의 동창 모임은 졸업생들이 설계하는 소셜 한 것이라면, 미국의 동창 모임은 주로 모교 자체가 주관하고, 졸업생들에게 모교를 향한 관심을 요구하는 일종의 구애(求愛) 활동인 경우가 허다하다. 모교 발전을 위한 모금 운동이 자연스레 편승한다.

학교 발전을 위한 모금 활동은 `필란스로피`로 구분된다. `체리티(charity)`와 다른 형태의 모금이다. 한국어로 둘 다 자선활동이라고 번역하지만, 그 목적이 다르다. 따라서 수익자와 수익단체가 다르다. `체리티`는 단기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단체나, 개인에게 물질적 도움을 주는 것이다. 즉 급한 불을 끄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반면에 `필란스로피`는 `사랑하는`이라는 뜻의 필로스(philo)와 `인간`이라는 뜻의 안쓰로포스(anthrophos)란 그리스말의 복합어로 문화, 예술, 교육 분야를 기본적으로 도와줌으로써 궁극적으로 더 좋은 사회를 만드는 뚜렷한 목적이 있다.

필란스로피나 자선 모임이 아니었던 졸업 60주년 재상봉은 순수한 우정의 재확인이었다. 이 우정의 공통 분모 가운데 톡 튀는 동문은 눈에 띄지 않았지만, 자선활동을 해 온 든든한 사회의 버팀목인 동문이 많았음을 안다. 어쩌면 머지않아 필란스로피스트 서열에 들어갈 인재가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모교 동문뿐 아니라, 여러 세대를 이어온 한국의 여성 교육의 수많은 산 증인 인 한국의 증조할머니, 할머니, 어머니들에게 감사하는 재상봉 여행이었다.

울산광역매일 2026.5.5

손주들과 소울푸드 김치

미주 중앙일보 5.14

봄방학이라고 스페인과 뉴멕시코에 살고 있는 두 딸 가족 8명이 지난달에 다니러 왔다. 아이들은 사춘기 이전의 12살짜리부터 사춘기를 경험하고 있는 16살까지 좀 다양한 나이대이다.


로스앤젤레스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친 나의 딸들은 대학 시절부터 우리를 때때로(!) 떠났다.
딸들은 대학 졸업 이후에 잠시 귀향하였다가, 대학원과 수련의(修鍊醫) 과정, 박사과정을
타지에서 하면서 집을 떠났어야 했다. 막상 안정적인 직업인이 되었을 때, 딸들은 제 아이들,
그러니까 나의 손주들 교육환경과 사회적, 경제적 편안함을 이유로 고향인 로스앤젤레스가 아닌 타주(他州)와 타국(他國)에 정착하였다. 딸들이 제 아이들의 봄방학에 맞추어 고향에 다니러 왔다.


막네 격인 손주네 가족은 비행시간만도 13시간 걸리는 곳에 산다. 공항에 머무는 시간까지
합치면, 거의 하루를 길에 있었던 셈이다. 중, 고교 생인 다른 세 손주는 학교 수업뿐 아니라
과외활동의 종류와 심도(深度)가 달라서 한 가족이 두 팀으로 나뉘어져서 도착했다.
손주들의 방학은 같은 달 3월에 시작했지만, 기간(其間)이 다르다 보니, 끝나는 때가 달랐다.
사촌끼리 함께 지낼 수 있는 날이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다. 미국과 유럽의 봄방학은 부활절을
전후(前後)해서 시작한다. 기독교회 달력으로 중요한 명절이 부활절이고 부활절은 북반구에서는 봄에 있다.

역시 북반구의 농업국가에서 씨앗을 뿌리는 농번기에 일손을 충당하기 위해서
봄방학이 생겼다고 배웠던 것 같은데, 이 이론에는 근거가 없다고 한다. 이유나 역사가 어떻든
간에, 8월 말이나 9월에 새 학기가 시작하고, 5월 말 또는 6월에 학년이 끝나는 대부분의 현대
교육 시스템은 년 중 약 180일(165일~210일) 동안 학교가 열린다. 초, 중, 고, 대학교 등 그 교육
등급에 따라서, 또 지방과 국가에 따라서 차이가 있다.


손주들은 혼혈이다. 현대식 표현을 빌리자면 그네들은 다른 인종(multi-race)끼리 이룩한
다문화(mixed-culture) 가정에서 태어나 자라고 있다. 한국혈통인 엄마와 인종(race),
민족(ethnicity) 또 국가(nation)가 다른 출신의 후손인 아빠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이들은 동양적인 것, 한국적인 것들이 스스로에게서 스며 나오는 것임을 좋아하고, 자랑스러워한다.
내가 아메리카 반도에 발을 디디었던 반세기 전에는, 얼굴색이 노랗다고, 눈과 코가 작고
광대뼈가 높은 몽골리안 같은 모습이라고 언급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었다. 그래서 편치 않던
때가 종종 있기는 했었다. 그런데, 세상이 변했다. 기이(奇異)하다.


다민족의 나라인 미국은 혼혈의 분도(分度)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2010년에 3백만이었던
혼혈인구는 10년 후인 2020년에는 3천3백만 명으로 늘었는데, 이것은 현재 미국 인구의 10%에 해당한다. DNA 검사를 한다면 10%보다는 훨씬 높은 분포가 나올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따라서 언어도, 음식도 종류가 많다.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엘에이 교육구 학생 중에는 집에서 영어 아닌 언어를 쓰고 있는 경우가 꽤 많은데, 사용하는 언어의 종류가 자그마치 90개 이상이라고 한다.


내가 손주들에게 가르칠 만한 한국적인 것은 무엇인가? 그리 많지 않다. 아이들이 특별히
가르치지 않아도, 보고 배우기를 바란다. 한국의 역사, 한국인들의 예의, 손위 어른들을 존중해
주는 태도, 문턱을 넘어 집 안으로 들어갈 때 신발을 벗는 정갈한 생활 습관 등이 그 예일 것이다. 새해와 추석 정도의 명절을 함께 하면서, 한국 음식의 특이함, 아름다움, 맛깔스러움에
익숙해지고, 이에 대한 한국적인 것에 대한 임명장이 없는 민간 대사로서의 자격을 저절로 갖게 될 것이다.

아이들은 추억이 듬뿍 베인 소탈한 흰밥, 된장찌개, ‘할머니표 김치’를 원했다. 기뻤다. 조부모가 사는 집이 에피센터가 되어, 모두 모여서 북적대었다.


미국 대학의 봄방학 문화는 1930년대에 뉴욕주의 북쪽 지방에 있는 콜게이트 대학 수영팀이
겨울철 훈련을 미국의 베네치아라고도 불리는 따뜻한 플로리다주(州)의 포트 라우더데일(Fort
Lauderdale)에서 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고 한다. 그 후, 1960년대에 미국 5대호 주위를 감싸고
있는 8개 주(州)중의 하나인 미시간주(州)의 주립대학 글렌돈 스와토우트(Glendon Swarthout)
영문학 교수가 봄방학을 이용해서 영문학과 학생들의 활동을 이 같은 도시에서 했다. 이때의
경험을 책으로 썼다. ‘보이들은 어디 있어요(Where the Boys Are)?’라는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대중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고, 봄방학의 개념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학생들이 필요한 ‘쉼’과
즐겁고 건전한 사교활동의 필요성이 안정적으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그 영화는 2백5십만 달러제작비의 거의 두 배의 수입을 극장에서 올렸다고 한다.


사반세기 후 1990년대에, 흑인 학생들이 위주가 된 봄방학 이벤트가 있다. 영화 속이 아니고
실제로 거리로 나가서 춤추고, 노래하는 ‘길거리 파티’로 폭발적인 남부의 힙-합 파티
프리크니크(Freaknik)에 동승한 것이다.


봄방학은 학생들에게는 과도한 학교 공부를 잠깐 쉴 수 있는 필요한 브레이크 같다. 손주들, 딸들, 사위들이 함께 하는 그들의 봄방학에 에피쎈터가 될 수 있어서 감사했다. 영화가 보여주는
봄방학과, 프리크니크 식의 방학과는 그림이 아주 다른, 가족 중심의 브레이크이었다. 음식을
중심으로 하는 봄방학에, 김치가 한 가운데에 있었다. ‘할머니표 김치’를 동반하는 음식 파티는
좋았다. 우리 차세대 한국인의 소울푸드는 김치와 밥을 중심으로 만들어지고 변화할 것이다.
다음의 김치 파티를 기다리면서 김치에 관한 연구를 신중하게 하려고 한다.

김치의 힘

울산광역매일 2026.4.7

봄방학이라고 스페인과 뉴멕시코에 살고 있는 두 딸 가족 8명이 다니러 왔다. 아이들은 사춘기 이전의 12살짜리부터 사춘기를 경험하고 있는 16살까지 좀 다양한 나이대이다. 로스앤젤레스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친 딸들은 대학 시절부터 우리를 때때로 떠났다. 대학 졸업 후, 잠시 귀향하였다가, 대학원과 수련의 과정을 이곳, 저곳에서 하면서 그리되었다. 딸들은 아이들의 교육환경, 식구의 사회적ㆍ경제적 편안함을 이유로 결국 다른 주와 다른 나라에 각각 정착했다.   

이들은 봄방학 여행을 계획하고 멀다면 먼 길을 왔다. 막내 손주네 가족은 비행시간만도 13시간 걸리는 곳에서 왔다. 공항 상태가 순조롭지 않은 요즘, 출발시간 서너 시간 전에는 공항에 도착해야 한다. 거의 하루를 길에 있었던 셈이다. 중, 고교 생인 다른 세 손주는 학교 수업뿐만 아니라 과외활동의 종류와 심도가 달라 한 가족이 두 팀으로 나뉘어져 로스앤젤레스에 왔다. 손주들의 방학은 3월에 시작됐지만, 기간이 다르다 보니, 끝나는 때는 서로 달랐다. 그러다 보니 사촌끼리 함께 지낼 수 있는 날이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다.     

아이들은 패서디나에 있는 노르턴 싸이몬 박물관과 UCLA 근방에 있는 해머 박물관, 싼타모니까 바닷가에서 삼십여 년 동안 운영되어 온 해파리 연구 과학관을 방문하였다. 손주들은 혼혈이다. 현대식 표현을 빌리자면 그네들은 다른 인종끼리 이룩한 다문화 가정에서 태어났고, 자라고 있다. 한국혈통 엄마와 비한국계 아빠 사이에 태어난 손주들은 인종과 민족 또 국가의 차이점들을 어려서는 알지 못했다. 자라면서 차츰, 자기들의 복합적인 정체성을 자연스레 깨닫게 된 것 같다. 그리고 동양적인 것, 한국적인 것들이 스스로에게서 스며 나오는 것임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자랑스러워한다. 세상이 변했다. 기이하다. 내가 아메리카 반도에 발을 디디었던 반세기 전에는, 얼굴색이 노랗다고, 눈과 코가 작다고 놀림을 받는 경우가 간혹 있었다.   

다민족 국가인 미국은 혼혈의 분도(分度)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2010년에 3백만이었던 혼혈인구는 10년 후인 2020년에는 3천3백만 명으로 늘었는데, 이것은 현재 미국 인구의 10%에 해당한다. DNA 검사를 하면 이보다 훨씬 높은 분포가 나올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때문에 언어도, 음식도 종류가 많다.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엘에이 교육구 학생 중에는 집에서 영어 아닌 언어를 쓰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언어의 종류가 자그마치 90개 이상이라고 한다.    

내가 손주들에게 가르칠 만한 한국적인 것은 사실 그리 많지 않다. 아이들은 특별히 가르치지 않아도, 보고 배울 것이다. 동양인들의 예의, 손위 어른들을 존중하는 태도, 문턱을 넘어 집 안으로 들어갈 때 신발을 벗는 정갈함 등등이 생각난다. 손주들이 알게 된 명절은 새해와 추석 정도이다. 하지만 한국 음식은 항상 아이들과 함께 있다. 그래서인지 이젠 미국인들도 김치 냄새와 발효된 마늘 냄새를 좋아한다. 우리가 꼬랑꼬랑한 치즈 냄새를 싫어하지 않게 된 것처럼 말이다. K-팝, K-컬처 등 `K`라는 글자가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K-푸드 한국 음식은 그들을 열광하게 한다. 아이들은 추억이 듬뿍 베인 소탈한 흰밥, 된장찌개,`할머니표 김치`를 원했다.  

미국 봄방학의 문화는 1930년대에 뉴욕주의 북쪽 지방에 있는 콜게이트 대학 수영팀의 겨울철 훈련 장소 이동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북부 추운 날씨를 피해서 미국의 베네치아라고도 불리는 플로리다주의 포트 라우더데일에 마침 새로운 올림픽 싸이즈 수영장이 만들어지었을 때이었다. 그 후, 1960년대에 미국 5대호 주위를 감싸고 있는 8개 주 중 하나인 미시간주의 주립대학 글렌돈 스와토우트 영문학 교수의 리드로 봄방학을 이용한 영문과 학생들의 활동이 같은 타운에서 있었다. 이때의 경험을 책으로 썼고,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대중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고, 봄방학의 개념은 세상에 알려지면서, 학생들이 필요한 `쉼`에 대한 아이디어가 안정적으로 자리 잡았다 한다.   

사반세기 후 1990년대에, 흑인 학생들이 위주가 된 봄방학 이벤트가 있었다. 영화 속이 아니고 실제로 거리로 나가서 춤추고, 노래하는 `길거리 파티`로 폭발적인 남부의 힙-합 파티 프리크니크에 같이 탄 것이다.   

봄방학은 학생들에게는 과도한 학교 공부를 잠깐 쉴 수 있는 필요한 브레이크 같다. 손주들, 딸들, 사위들이 함께 하는 그들의 봄방학에 우리집이`에피쎈터`가 될 수 있어서 감사했다. 영화가 보여주는 봄방학과, 프리크니크 식의 방학과는 그림이 아주 다른, 가족 중심의 브레이크이었다. 그런데 음식을 중심으로 하는 이번 봄방학에, 김치가 한 중심에 있었다.`할머니표 김치`를 동반하는 음식 파티, 그것이 `김치 파우어`가 아니겠는가. 한국인의 소울 푸드는 역시 김치이다. 다음의 김치 파티를 기다리면서 김치에 관한 연구를 더욱 신중하게 할 작정이다.

2026년은 별일 없으려나

2026.1.8. 울산광역매일



2026년 병오년(丙午年)이다. 60년 만에 돌아오는 화(火)의 년(年)으로 ‘태양과 말’의 해라고 한다. 갑·을·병·정…등 10개의 천간(天干)과 자·축·인·묘…같은 12개의 십이지(十二支)를 조합해서 만든 60개의 단위가 육십갑자(六十甲子)인데, 여기에 근거한 새해에 대한 해석은 두 종류의 불이 만나는 강렬한 불의 한 해로 기대된다는 것이다. 좋은 의미에서 보면, 빠른 속도로 변화가 이루어지는 시대가 될 수 있다는 뜻이란다. 나는 신문이나 잡지에서 ‘오늘의 운세’라던가, ‘한해의 기(氣)’ 같은 칼럼이 흥미로워서 읽곤 하지만, 사실 점성학이나 점술학에는 문외한이다. 
 
들여다보면, 육십갑자(六十甲子)는 우리 한민족에게 익숙한 풍습인 것 같다. 지금까지도 분리되지도 제거되지도 않으면서 우리 몸 깊숙이 뼛속까지 배어 있다. 그래서 그런지 육십갑자 예상치는 어떤 이들에는 간접적으로, 또 어떤 이들에게는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어 보인다. 또 나처럼 상관하지 않는 그룹도 있다. 
 
지난해 2025 을사년(乙巳年) 연초에 공개되었던 예측이 어느 정도는 맞았던 것 같다. 그저 우연일 수도 있겠다. 변화해 왔던 세상을 볼 수 있도록 한 을사년이었다면, 어긋났던 예상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나의 모국 한국은 세계 무역전쟁, 산불, 윤석열 대통령 탄핵, 울산화력발전소 붕괴 같은 어마어마한 일들을 겪었다. 디아스포라 미국인으로 살고 있는 나에게도 여러 이벤트가 있었다.
 
새해 초 캘리포니아 바닷가 도시 퍼시픽 팰리세이드에 불이 나면서, 엘에이(LA)는 혼돈에 빠졌다. 또 동쪽으로 약 32마일 떨어져 있는 샌 가브리엘  밸리에도 산불이 났다. 동시다발적 산불이었다. 산타아나 바람이 불씨를 빠른 속도로 주변 여러 곳으로 퍼뜨리었다. 우리 동네는 모두 경찰과 방위군이 지키는 가운데 대피 명령에 따라 모든 것을 두고, 집을 떠났다. 화재 영향을 받지 않은 엘에이 다른 지역의 호텔 방들은 이미 만원이었고, 같은 동네에 사는 조카도 갈 곳이 없었다. 우리들은 자동차로 13시간 걸리는 약 800마일 떨어져 있는 뉴멕시코 큰 딸네로 향했다. 그렇게 시작된 2025년이었다. 
 
산불이 잦아들고, 귀가한 후, 얼마 안 있어, 법원에서 출두하라는 통고를 받았다. 미국의 시민은 배심원으로 불리었을 때 이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 평소에 배심원 통보를 받은 적이 여러 번 있었어도 채택되지 않고 지나갔는데, 이번에는 좋아해야 할지, 재수 없다고 불평해야 할지 배심원으로 뽑히게 되었다. 법정에 두 달 반 동안 금요일만 빼고, 매일 출근하였다. 일곱 살짜리 여아 살인 사건으로, 피고는 생모와 생모의 남자 친구 두 명이었다. 배심원들은 검사가 제출한 영상과 증빙서류를 이해하여야 했다. 증인들의 진술을 들었다. 한국과 미국의 드라마에서 보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일곱 살 아이는 2,555일 동안, 매 맞고, 벗겨진 채로, 욕실에 감금되고, 고춧가루 고문을 당했다. 
 
육십갑자(六十甲子) 육갑 60년마다 반복되는 사이클이므로, 5천 년 한국 역사에는 을사년이 많았을 게다. 근대사에서 가장 심각하고 우울하였던 사건은 백이십 년 전 1905년에 맺었던 일본과의 을사늑약으로 한국의 외교권이 일본에 박탈당했던 사건이다. 일제 강점기의 시작이었다. 이보다 120년 전인 1785년에는 ‘명례방 사건’이라고도 불리는 ‘을사추조적발(乙巳秋曹摘發)’ 사건이 있었다. 정조 9년 때, 지금의 명동 지역에서 신앙집회를 열던 천주교도들이 적발된 것으로 조선의 성리학적 윤리 체계를 파괴한다는 죄목으로 신자들이 처형당했던 일이다. 이 사건 113년 후에 이 자리에 한국 천주교의 대표적이며 상징적인 명동 성당이 건립되었다. 만약 이때, 조선이 서학을 받아들이고, 개혁에 앞장섰다면, 한국의 역사는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을사년에 나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을사늑약 60년 후인 1965년에는 한일 기본 조약과 월남파병 준비로 경제개발의 본격화가 시작되었다. 내가 대학 입시 준비를 하고 있던 때이었다. 베트남에 파병되어 인천항을 떠나던 젊은 군인 무리 중에, 사촌오빠가 있었고 나는 오빠를 배웅하러 나갔었다. 여러 번에 거쳐 파병된 누계가 32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이 젊은이 중에는 전사하여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5천여 명이고, 11,000명이 부상하였다고 한다. 
 
어수선하게 시작된 을사년 2025년이었지만, 좋은 일도 많았다. 9년 만에, 나의 생애에 두 번째 책을 출판하였다. 이 책의 출판 기념회를 한국에서는 나의 모교 이화여대 의과대학 부속병원 안에 친구의 이름으로 명명된 이영주 홀에서 가졌고, 미국에서는 한국어진흥재단 세종홀에서 가졌다. 또 한국 창원대학에 초대되어 강의도 했다. 이러한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내 삶의 여정에 도반(道伴)의 친지가 함께해 주었기 때문이다.  
 
빠른 속도의 변화를 예상한다는 2026년 병오년은 별 탈 없이 지나가려나? 일 년 후인 2027년이 되면, 육십갑자의 예측이 어떠했는지 알게 되기를 바란다

한국 디아스포라의 국기 게양식

울산매일 <해외기획 미 LA> 2026.1.1

국기 게양식이 있었다. 미국에서 웬 국기 게양? 

이 내용을 전하자면 미국 LA 비영리 단체인 한국어 진흥재단과 나의 개인사를 조금 나누어야 한다. 

한국어 진흥재단은 30여 년 전 창립된 미국의 비영리 단체로 한국어 모의고사가 막 시작됐을 무렵 한국어 대학 코스 레벨의 시험제도(AP Korean)를 만들기 위해 생겼다. 참고로 AP Korean은 지금까지 성사되지 못하고 있지만 제반 활동은 지속되고 있다. 나는 지난 8년 동안 재단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우리에게 한국은 모국(母國)이고 미국은 조국(祖國)이다. 재단 이사로 봉사하고 있는 젊은 디아스포라 한국인들의 헌신과 한국에 대한 열정은 남다르다. 내가 암 환자들로 하루하루를 채우면서 살고 있을 때, 이 재단의 이사들은 영어권 한국혈통 차세대와 비한국계 차세대가 스페인어, 프랑스어, 중국어, 일본어처럼 정규 학교에서 한글을 세계 언어 선택 중 하나로 채택될 수 있도록 게 하기 위해 한국어진흥재단을 만들었다. 내가 이 재단에 이사로 영입되면서, 그들을 통해 애국심이 무엇인지를 알게 됐고, 배우게 됐다.

많은 디아스포라 한국인은 한반도와 북미 사이를 실제로 또 정신적으로 오가며 산다. 그래서 미주 한인 교포들은 농담 삼아 우리는 ‘태평양에 사는 해족(海族)’이라고 표현 한다. 이런 ‘태평양에 사는 해족’들이 한글을 진흥하기 위해 한국 정부나 미국 정부의 도움 없이 자체적으로 사옥을 마련했고 일 년 전 사옥을 오픈했다. 사옥에는 ‘세종홀’이라는 회의장과 ‘집현전’이라는 과외 공부 방, 이층에 다도실을 갖추고 있다. 세종홀 회의장 벽에는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현 혜명 화백이 희사한 소나무 유화가 걸려 있고 한글 연구와 보급의 공로로 2018년 572돌 한글날 대통령상으로 받은 깃발이 장식되어 있다. 이층 다도실에는 성기순 화백의 화조화 민화가 한국에 대한 메시지를 전한다. 

이 사옥은 재단의 설립 목적대로, 여러 비영리 단체의 행사 때 수익을 내지 않고 빌려준다. 대면과 비대면 복합방법으로 재단 이사회, 한국어 교사 연수 등이 정기적으로 열리고, 교육적인 목적을 가진 다른 모임에도 사용된다. 디카시 설명회와 어느 고교의 동문회 북클럽 미팅이 그 예이다. 

필자의 디카 시집 ‘병원 밖 세상’ 출판기념회도 이곳에서 열렸다. 한국어를 디카시라는 장르를 정통교육에 접해 가르친다면 거부감 없이 한글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는 교육적 의미가 담긴 출판기념회이었다. 


출판기념회가 열리던 날, 사옥을 오픈할 때 게양대를 만들지 못해 미루었던 ‘국기 게양식’을 하객들과 함께 했다. 한국계 일 세 하객과 영어권 한국계, 미국인들 80여 명이 참석했던 행사에서 가진 국기 게양식은 큰 의미를 부여했다. 

한국어 진흥재단은 미국과 한국을 함께 품는 단체이기에 이날 미국기와 한국기를 나란히 게양했다. 태극기는 나를 포함한 기성세대 이민 일 세 세 명이, 성조기는 10살이 되기 전 부모를 따라 도미한 1.5세대 대표로 LA 시의원이 게양했다. 

하객들은 두 나라의 국가가 연주되는 가운데, 게양대를 타고 올라가고 있는 태극기와 성조기를 향해 경의를 표했다. 이날 게양식이 끝난 뒤 하객들은 ‘울컥했다’고 했다. 미국에 이민 와 현지에서 뿌리내린 뒤 살아가는 ‘한국인 디아스포라들’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한국과 미국이 모두 ‘내 나라, 우리나라’임을 느끼겐 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