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을 여는 사람들

▲ 류모니카 한국어진흥재단 명예 이사장 ©울산광역매일

새벽은 아름답다. 캄캄하고 신비스럽다. 살고 있는 로스앤젤레스의 겨울 새벽은 춥지 않고 선선하다. 정적을 깨는 아침 새들의 대화가 시작되려면 아직 어둠이 얇아질 때까지 좀 더 기다려야 한다. 물론 야밤에 노래하는 부엉이도 있고, 신경질적으로 소리 질러 소견을 전달하는 새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새벽은 여전히 침묵하고 있다. 오늘 새벽하늘은 어둠 속에 짙푸르다. 반달과 오리온 좌가 총기(聰氣) 바랜 흐린 빛을 보내준다. 

나는 새벽에 관한 것들에 익숙하다. 새벽 시간, 새벽 소리, 새벽바람, 새벽하늘, 새벽 별자리, 새벽을 열며 일하러 가는 사람들, 그들의 헤드라이트 행렬, 새벽에 올리는 분심(分心)으로 갈리어진 나의 묵주기도까지. 그리고 새벽에 일하는 내 자신에도 익숙하다.

나는 글도 새벽에 쓰고 행정적인 일도 대부분 새벽에 시작한다. 글을 쓰기 전에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앞마당을 걸으면서 묵주기도(默珠祈禱)를 하는 것이다. 묵주기도란 불교에서 염주를 돌리며 하는 기도처럼 구슬을 이용해서 예수의 생애를 기억하며 주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을 반복하면서 묵상하는 방식의 기도이다. 문제는 되풀이하는 기도라, 잡념이 들기 십상이라는 점이다. 

이 기도는 가톨릭 신자들이 애호한다. 그 원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수용하는 설은 이렇다. 글을 읽을 줄 모르던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성서를 읽지 못했고, 따라서 성서에 준 한 기도를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단순하고 간단한 기도를 반복하는 방식을 전수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구슬을 굴리면서 묵상하는 기도’라는 뜻에서 묵주기도라고 부른다. 서구권에서는 ‘로자리(rosary)’라고 하는데 장미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이 로자리에 대한 설도 많다. 예수의 생모인 성모 마리아를 아름답고 순수한 장미로 표현한 것에서 나왔다는 설이 있다. 또 종교탄압으로 그리스도교인들을 공공장소, 주로 콜로세움 같은 운동장에서 처형하면서 생기게 된 것이라고도 한다. 굶은 사자를 풀어서 신자들이 잡혀서 먹히도록 했는데, 그들은 머리에 장미로 만든 화관을 쓰고 광장으로 행진했다는 설에서 나왔다고 한다. 인체는 먹히고 장미 화관만 남기었다는 것이다. 

나보다 하루를 더 일찍 시작하는 사람들이 주위에 많다. 새벽에 일터를 향해 가는 사람들이 그중의 한 부류이다. 집 앞마당에서 캘리포니아의 중요한 동맥 역할을 하는 405번 프리웨이가 약 반 마일 정도 보인다. 405 프리웨이는 5번에서 파생한 고속도로로, 북서쪽 방향을 커버해 주는 약 72마일 구간이다. 미국 내에서 가장 많은 차가 오가는 고속도로다. 북쪽 실마(Sylmar)와 남쪽 엘토로 와이(El Toro Y) 사이를 연결한다. 이 길을 따라 깜깜한 새벽에, 남쪽으로, 북쪽으로 헤드라이트, 백라이트들이 줄지어 움직인다. 일터를 향해 가는 새벽 사람들이다. 

오늘도 앞마당에는 배달된 신문들이 널브러져 있다. 신문 배달원은 도대체 몇 시에 우리 집에 다녀간 것일까. 그는 신문을 배달하고 또 다른 직장을 향해 서둘러 갔을지도 모른다. 신문 배달로 버는 돈만으로는 생활이 어렵다는 걸 누구나 안다. 신문 배달원뿐만 아니라, 나와 남편이 젊었을 때 그랬던 것처럼, 큰딸도 어둠을 헤치고 환자를 돌보러 병원으로 향한다.

처음으로 ‘산다는 것이 일이나 공부보다 더 엄숙한 것’이라는 심오한 뜻을 깨달았던 때가 있었다. 그때 나를 일깨웠던 것은 가난도 아니고, 전쟁의 상흔도 아니었다. 당시 나는 10대 끄트머리의 소녀시기를 지나 막 여성으로 성숙해지는 길에 첫발을 내디디던 때이었다. 사르트르, 톨스토이, 카뮈 등등의 꽤 어두운 사회론자들의 글을 읽고 친구들과 ‘개똥철학’을 토론하던 때이기도 했다. 

사회의 부조리함, 어두움을 논하던 나의 눈에 강의실 곳곳을 열심히, 성실하게 닦고 있던 청소부 아저씨의 맑고, 진지하고, 겸손하고 평화로운 얼굴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 아저씨의 존재가 나를 일깨웠다. 그를 통해 가난과 노동 그리고 그로부터 받는 엄청난 긍정적이면서도 부정적인 대가는 우리의 행복이나 희망과는 별 개라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다.

나는 ‘노동의 숭고함’이라는 사치스럽고 아이러니한 문구를 기억한다. 현대 사회는 일과 노동을 구분한다. 18세기 후반 산업혁명 당시 6억이었던 세계 인구는 2024년 82억으로 늘었다. 세계 총생산은 199배가 늘어난 173조 달러에 이른다. 그런데 빈부의 차이는 극(極)과 극이다. 일과 노동이 뒤얽힌 결과다. ‘신성한 일’이 아니라 ‘먹고사는 노동’에 매일 끌려다닌 것이다

그 중년의 청소부 아저씨는 노동의 숭고함에 신경을 쓰며 일했을까. 자식들을 먹이고 키우느라 수고하셨던 우리 아버지, 어머니들은 ‘노동의 숭고함’이라는 이상을 갖고 일을 하고, 품을 팔았을까. 누군가의 말대로, 우리는 현재 노동을 정당화하고 미화하고 있을지 모른다. 새벽을 가르는 현대인들처럼. 

울산광역매일 2026.2.11

박수근과 빈센트



그날은 부슬비가 내렸다. 지난달 5월 중순 무렵에 남편과 나는 박수근 전시관을 방문했다. 박수근의 여러 작품은 박수근 전시관 이외에도 국립현대미술관, 리움에서 관람할 수 있지만, 그가 출생하고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강원도 양구에 가보고 싶었다. 박수근의 소박한 표현, 단순한 듯 보이는, 그러나 많은 이야기를 함축한 판화를 남편도, 나도 좋아한다. 담배 피우는 남정네들의 뒷모습을 그린 판화 한 장을 소장하고 있다. 돌아앉아 담배를 피우는 그 남정네들이 나의 아버지, 아저씨들이 아니었을까.

미국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서울에서 양구 갈 길이 쉬울 것 같지 않아 염려되었지만, 챗지피티가 가르쳐 주는 효율적인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해서 쉽게 잘 다녀왔다. 서울에 우리가 묵고 있는 호텔에서 지하철로 고속 터미널에 가서, 양구 행 버스를 타고, 양구역에서 내린 후에, 터미널에서부터는 한 시간여 걸어서 전시관에 도착했다. 

버스로 이동하면서 비를 맞고 있는 경기도와 강원도의 짙은 녹음을 보았다. 한국은 나 자랄 때와 달리, 산과 들이 진녹색 나무들로 울창하고 건강하다. 논, 밭, 산은 풍요롭고, 고즈넉해 보였다. 비는 양구에 도착한 후에도 그치지 않았다. 우리는 마치 젊었을 때, 데이트하던 때처럼, 우산 하나를 함께 쓰고 천천히 걸었다. 

박수근 전시관에 가기 전에, 우선 버스 터미널 근처에 고 안병욱 교수, 김형석 교수 전시관이 있는 양구 인문학 박물관에 들렀다. 친구의 부친인 안병욱 교수의 생애가 잘 정리되어 있는 전시관은 친구가 ‘아버지의 작은 공간’이라 했던 것과 달리 결코 작은 공간은 아니었다.  ‘김형석·안병욱 철학의 집’은 두 분 죽마고우의 가르침이 전시되고 있었고 많은 유물을 소장하고 있었다. 안병욱 교수의 ‘인생론’과 교수님이 만났던 다섯 분의 이야기가 걸려 있었다. 그 중, 윤동주 시인과의 만남의 이야기는 새삼 그 두 분이 같은 어려운 시대에 사셨다는 사실에 그 울림이 멈추지를 않았다. 

소양강 길을 따라 형성되어 있는 보도를 따라가니, 양구시(市)를 대표하는 사람, 박수근의 동상이 서 있었다. 환영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왼손에는 스케치북을 들고, 오른손에는 연필을 든 실제 인간의 다섯 배 정도 되는 크기의 박수근은 고개를 약간 숙인 사색하는 모습이다. 

우리 이외에는 아무도 길을 걷는 사람도, 차를 타고 가는 사람도, 전시관을 향해 가는 사람도 없었다. 박수근의 동상에서 도보로 한 시간 정도 천천히 걷다 보니, ‘박수근’이라는 말에서 ‘박’자를 뺀 ‘수근’이라는 글자를 반복하여 만든 단어인 듯한 ‘카페 수근수근’이라는 커피숍을 발견했다. ‘수근수근’ 하면 우리말로 ‘수군수군’처럼 들릴 수도 있어서 재미있는 구상 같았다. 손님 한 사람 없는 커피숍에는 노란 얼룩 고양이가 밖을 내다보고 앉아 있었다. 주인 여인은 젊지도 늙지도 않은 지성인처럼 보였고, 자기 나름의 절제된 멋진 삶을 추구하는 듯 보였다. 겸손하고 친절했다. 찻집에는 그녀가 우려 만든 차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벽에는 오래된 책들과 레코드 엘피판들이 꽂혀있었다. 보슬비·정적·인기척 없는 길· 고요한 세상과 잘 어울렸다.

박수근의 판화들은 비 맞으며 걸었던 회색빛 양구 길, 소리 없이 흐르는 소양강과 잘 어울리는 듯했다. 나에게 다가오는 그의 판화들은 직선과 직선이 연결하여 과일 파는 여인네들을 만들었고, 벌거벗은 나무를 광야에 세우고 있었다. 쪽진 여인들, 머리에 광주리를 이고 있는 여인들, 그네들은 모두 흰색의 한복 차림이었다. 광목으로 지은 옷이 아닐까 싶었다. 모두 말을 붙이지 않고 묵묵한 가운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그의 가난에 대한 성찰과 민족적 표현은 존엄해 보였다. 

박수근 하면, 왠지 빈센트 반 고흐를 생각하게 된다. 그 두 화가 그림의 스타일, 살았던 시기가 다르지만, 두 사람 모두가 생전에 가난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 박수근도 빈센트 반 고흐도 밀레를 좋아하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빈센트는 생전 겨우 한 점의 그림을 판 것으로 알려지어 있다. ‘붉은 포도밭’이라는 작품으로 당시 400프랑 정도 받았다고 추정한다. 그가 남긴 2,100여 점의 작품 중에는 860여 점의 유화가 있고, 나머지는 스케치, 드로잉 등이라 한다. 나치 점령 시절, 많은 유대인의 빈센트의 작품은 강제로 나치에게 빼앗기었고, 등록되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살아 생전 한 폭의 그림을 팔았던 빈센트, 가난과 정신병으로 힘들었던 그의 작품 중에는 8천250만 달러로 경매에 팔린 작품(Dr. Gachet 초상화)도 있다. 세상이 그와 그의 그림 세계를 몰라보았다는 것인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빈센트와는 달리 박수근은 여러 번 미술전에 입상하였고, 1960년대에는 30~100달러에 작품을 팔았다고 한다. 400여 점의 드로잉, 삽화, 판화, 초상화 중에, 250여 점이 유화라고 한다. 최근에 그의 그림 중에, 최고 낙찰가는 45억 2천만 원이었다는 소식이다. 역시,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현대를 살고 활동하는 화가들과 그들의 작품이 적절한 대접을 받았으면 좋겠다. 

2026.6.4 울산광역매일

아베 아트꿰 발레…오빠들이여 영원히 안녕!

‘안녕, 오빠들, 그리고 이제는 영원히 빠이빠이 하자!’ 한국이, 가족이, 친척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짧디짧았던 오빠들의 젊은 시절의 나날을 일본 게이오 기주쿠 대학이, 평양고보가 그리고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이 기억하고 있을까. 그들의 청춘대(靑春代)를 품었던, 부모와 형제가 놓치고 보지 못한 아픔, 고난, 어쩌면 가슴 깊이 숨기고 있었던 소망까지도 그들은 갖고 있을지 모른다. 대학 연혁에 한 줄의 글로 입학, 졸업 연도 정도랑 사진이 기재되어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것은 기적일까.

‘아베 아트꿰 발레(ave atque vale), 오빠들이여!’ 나는 올해 현충일이 6월의 빛을 푸르게 물들이었기에 ‘안녕, 오빠들, 그리고 이제는 영원히 빠이빠이 하자’라고 말하려 한다.

아베 아트꿰 발레는 라틴말로 ‘안녕하시오(Ave) 그리고(Atque) 안녕히 가시오(Vale)’다. 이 표현은 고대 로마 시절에 카툴루스 시인이 죽은 형을 추모하며 썼던 시의 마지막 구절이다. 침통한 이별의 엄숙한 표현이다. 뜻하는 바가 깊다. 나도 그러한 마음이기에 이 구절을 놓고 묵상했다. 

카툴루스 시인의 이 구절처럼 올해로 76년이 되는 한국 전쟁을 기억하면서 이제 나의 세 오빠를 떠나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억울하기만 한 제일 큰사람의 전사에 이어 그의 전사로 인한 연쇄반응으로 짧아져 버린 자신의 청춘을 뒤로하고 서둘러 어른이 돼야 했던 둘째와 그의 사촌 동생이 아니었나. 누군가는 나에게 물을 것이다. ‘왜, 뭐가 억울하냐?’고. 

큰오빠가 전사했을 때 그는 겨우 26살이었다. 그래서 억울하다. 전사했다는 137,889명 중 한 숫자가 아니라 알지 못할 전쟁터 고지에서 사라져 버린 그 젊은 몸을 그 젊은 영(靈)을 어찌 억울한 삶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나이 때문에 한국전에 참전하는 것을 피할 수 있었던 동생과 사촌 동생은 전쟁의 후유증으로 인해 대학 진학의 길이 막혔다. 그들은 갑자기 부모와 형제, 조카들을 부양해야 하는 새로운 의무에 당면했고 그것은 피할 수 있던 일이 아니었다. 

올해, 폭탄과 수류탄 사이를 걸었던 오빠들과 모든 전쟁에서 희생된 분들에게 속죄하자는 마음으로 내 나름대로 참회록을 쓰고, 그들을 기억하려 한다. 그들은 우리에게 무거운 마음을 내려놓아도 된다고 위로하고 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세대의 영웅이 됐다. 한국전도 마찬가지이다. 전쟁 기념일을 전후해 여러 기관들이 그들을 초대해 대접하는 내용들이 미디어에 보도되고 있다.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전사한 ‘젊은 그들’의 영들도 하나하나 초대하고 잊지 말자. 

젊은 그들이 이 지구에 남기고 간 어린 신부, 어린 자식들, 늙은 부모, 남루(襤樓)한 동생들은 거의 모두 그들이 기다리는 세상으로 떠나갔다. 몇몇 동생들과 조카들이 남아 있을 것이다. 내 큰오빠의 사연도 다를 바 없다. 그는 전사한 14만 군인 중 한 사람이다. 나의 직장 동료 미국 의료인의 삼촌은 40,670명 유엔 전사자 중 한 명이었다. 만여 명의 유엔군과 약 3만 3,000명의 한국군은 한국 땅 어딘가에서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그들의 유해는 지금까지도 찾지 못하고 있다.

아직도 떠돌고 있을지 모르는 큰 형제 오빠의 영(靈)에게 세상에 남기고 간 젊은 아내, 딸, 형제들과 부모님은 절제되고 검소하게, 당신의 죽음을 가슴에 담고 울지 않고 잘 견디며 살았다고 알린다. 큰형의 아우는 하늘을 나르고 싶은 희망을 버리고 미국 독지가의 도움으로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했으며, 당신의 외사촌 동생은 전쟁을 잘 치르고 헌병감까지 됐다가 12·12 군사 반란에 연루돼 예편되었다는 것까지. 

4년 전 2월에 우크라이나를 침범한 러시아는 5십만 명의 젊은이들을 전쟁에서 잃었다. 약 6만에서 14만 명에 이르는 우크라이나 청년들도 전사했다고 한다. 두 나라를 합쳐 보면, 백 8십만 명의 사상자가 생긴 셈이다. 왜 이토록 참담하고 처참한 전쟁이 한반도 반대편 저쪽에서 이어지고 있는가. 이제 남은 우리가 그들의 영혼을 달래 안식에 들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나도 이제 세 젊은이에게 ‘오빠들이여 안녕, 영원히 안녕’이라고 말씀 올려 드린다. 오빠들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 러시아, 태곳적 카툴루스 시대까지, 무모한 전쟁에서 전사한 모든 이들에게, 우리의 뜻을 알린다. ‘이제는 편안히 쉬십시오. 그래도 됩니다. 괜찮습니다, 우리들은요’ 

2026.6.30 울산광역매일

고국 방문기 II

이어서, 미국 행정가들을 초대한 곳은 아름다운 고궁들이었다. 고궁에서 한복체험을 하도록 한 것은 더운 날씨임에도 꽤 인기가 있었다.

또 우리들이 아무리 자랑해도 모자랄, 세계 최초 출판 문화의 선구지(先驅地)인 청주 직지 박물관이었다. 직지와 팔만대장경은 고려시대(918-1392)에 고려인들이 발명한 인쇄 기술로 만들어진 문서이다. 팔만대장경(1236~1251 제작)은 강화도에서 불교의 힘으로 나라를 지키어 달라고 불교 경전을 목판 인쇄한 것인데, 현재 합천 해인사에 있다. 

상ㆍ하 두 권으로 인쇄되었던 직지는 고려 우왕 때 (1377년) 때 백운화상이라는 스님과 비서 격인 석찬, 달잠 스님이 수행자들의 깨달음을 돕기 위해서 고승들의 가르침을 모아 만든 불교 서적이다. 현존하는 것은 상ㆍ하 중, 하권으로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직지 간행 장소인 청주 흥덕사를 지금으로부터 41년 전인 1985년에 청주대학교 박물관이 발굴했다고 한다. 그 후 그 자리에 박물관을 지었다. 1992년에 개관되었다. 참으로 대단한 금속활자 인쇄 기술을 개발했던 우리들의 조상들이다. 자랑스럽고, 감사하다.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은 그분들의 DNA를 받아 직지의 연속이라고 볼 수 있는 IT산업에 앞장서서 가고 있다. 그뿐인가! 우리가 받은 DNA는 고려 때 팔만대장경을 찍은 목판인쇄, 금속활자 인쇄 직지에 이어서, 조선시대 한글 창제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한국인들 모두는 글을 읽을 줄 알고, 한글이 컴퓨터에서 쉽게 사용되는 것은 단순한 영어알파벳이 따라 올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러니 한국의 문맹률이 거의 0%일 수밖에 없다. 지금, IT산업은 한글에 이어 세계를 놀라게 하고 있다. 

한글이 지식의 민주화 혁명을 일으키었다면, 직지는 지식의 전파 기술의 혁명에 앞장선 것이겠다. 이어서 IT 활용에 쉬운 한글이 기여하는 바가 얼마나 큰가! 이 연수를 통해서 고려시대 금속활자 인쇄 테크놀로지, 한글 창제의 역사와 활용도를 눈으로 보았다. 고려시대, 백제 지방에서 만들어지었던 단순하고도 수려한 예술품들에 대해 글로써 찬사를 보내기에는 역부족이다. 

백제시대를 재현해 놓은 공주 성 입구에는 백제 전성기를 이끌었다는 무령왕의 동상이 방문객을 환영하고, 성곽에는 백색 도마뱀 같은 문양이 새겨진 깃발과, 뱀이 얽혀 있는 것처럼 보이는 문양이 새겨진 또 다른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신하에게 배반당해 나라도 잃고, 포로가 되어 당나라에 바쳐 졌던 무령왕의 후손인 의자왕의 치욕은 지금을 사는 나를 울분하게 한다. 어디 백제시대에만 배반자가 있었으랴!

빡빡하게 짜인 스케줄 가운데, 역사적 뜻을 캘 수 있었다고 생각되는 한국 행정가 연수는 세종시 그리고 서울디자인 고등학교와 `한글`과 `교육`의 미래 사업 협업을 약속하는 업무계약(MOU) 체결로 더 큰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이 두 기관과의 협업 업무계약 체결은 미국에서의 한국어 정규교육ㆍ한글 창제와 한국 밖에서 편찬, 출판되는 한국어 교과서의 중요성과 역할ㆍ출판의 인연을 다시 한번 다짐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울산광역매일 2026.7.28

[디카시 산책] 여명 Dusk

누구에게나 쉼터가 있으리라 믿고 싶은

여명의 시간

태양도 달도 모습을 숨긴 채

어둠과 빛으로 다가온다.

침묵의 소리도 있으리라 믿고 싶은 여명의 시간.

A time I long to believe  

The existence of shelter for everyone

The light from the hidden sun and moon toward us at dusk.

A time I long to hear

Sound of silence.

2026.9.23 AI Venture Ti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