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움직이고 있는 반도체의 나라, 타이완

풍화암

蔣介石(장개석) 총통 동상 중정(中正) 기념관

                                                                                             

오랫동안 벼르던, 대만 여행을 다녀왔다. 짧은 수박 겉핥기식이었지만, 대만이 중화인민공화국(중국)과 만든 역사와 문화 그리고 지리적, 지질학적 특수성을 조금 알게 되었다. 타이완은 한국과 꽤 가까이 있어서 비행기로 한국에서 약 3시간 정도밖에 안 걸린다. 한국에 살던 학창 시절에 지리적으로 가까운 섬나라 타이완을 가보지 못하고, 반세기가 흐른 후에야 모국의 반대편 미국에서 지구의 반 바퀴를 돌아서 다녀왔다.

중학교 때 정규과목이었던 한문을 배운 덕분에 타이완의 표시판들이 익숙해 보이기는 했는데, 50% 정도도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많이 잊었기 때문일 것이다. 참고로 인민공화국 중국은 1964년부터 간소화한 한문, 간체자(簡體字)를, 타이완은 홍콩, 마카오처럼 전통 한자인 번체자(繁體字)를 아직도 쓰고 있다. 대만의 건물, 동상, 박물관 등은 그들의 역사와 연계가 있는 변방 나라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원래는 청나라의 섬이었던 대만은 청일전쟁에서 일본에 패하면서 펑후(澎湖群島 포르투갈말로 Pescadores)와 함께 일본으로 할양되었다. 이차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까지, 50년 동안 우리 한국보다 공식적으로는 더 긴 세월을 일본 치하에서 살았다. 한국은 을사늑약 29년 전,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이미 식민지의 길로 들어섰다고 보면, 비공식적으로는 사실상 대만보다 더 일찍부터, 일본의 침략 하에 살았다는 견해도 틀린 것 같지 않다.

타이완은 남한 면적의 1/3 정도로 작고, 동쪽에 두 개의 산맥이 뼈대를 이루고 버티어 주는 한국과 비슷한 형태의 섬이다. 중국 본토 해변에서 약 100마일(160킬로미터) 동남쪽으로 떨어진 곳에 있다. 섬의 숫자로 따지어 보면, 인도네시아 (17,000여 개), 일본 (14,000여 개), 필리핀(7,600여 개)에 비해 훨씬 적은 수의 섬, 168개를 갖고 있다. 그러나 섬들이 퍼지어 있으므로, 해상 권리 지역이 꽤 넓다. 유엔해양법협약에 의하면, 국가의 본토에서 제일 가장자리에 있는 섬에서부터 약 370km까지 국가의 주권이 미치기 때문이다. 이렇게 육지처럼 눈에 금방 띄지는 않지만, 바닷속에 움직이고 있는 해물과 해저에 깔리어 있는 광물, 석유, 가스등이 부여하는 천연자원을 생각해 보면, 최선을 다해서 아무리 작은 섬이라도 지켜야 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한국이 독도를 일본에서 보호하는 것처럼, 타이완은 그들 통치하에 있는 많은 섬을 인민공화국 중국, 일본, 필리핀, 말레이시아, 브루나이, 베트남 등 주변 국가들에서 보호해 왔다.

대만의 자연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 지질, 지각구조로 인해서 특유의 산, 폭포수, 강, 온천을 이룬다. 지금, 이 순간에도 움직이고, 변하고 있는 그야말로 젊은 땅이다. 약 오백만 년 전후해서, 북서쪽 유라시아 바다와 동남쪽 필리핀 바다의 바닥층이 서로를 향해서 움직이다가 어느 시점에 부딪혀서 타이완이라는 땅덩어리를 물 위로 솟게 했다. 지금도, 일 년에 약 2~5mm씩 계속 공중으로 밀리면서 솟아오르고 있다고 한다.

오랫동안 일어났던 지각구조의 변화를 예류(野柳) 지질 공원에 가면 맨눈으로 볼 수 있다. 모래가 쌓여서 굳어진 바위는 석영과 탄산칼슘의 분포도에 따라서, 또 바람에 의한 풍화작용과 바다의 해식(海蝕) 과정에 따라서 여러 형태의 멋있는 조각 예술품을 만들어 왔다. 단단한 윗부분은 침식에 강한 주로 둥근 돌 형태로 남고, 지층은 상대적으로 부드러운 모래-돌 사암(砂巖)으로 바람과 파도에 쉽게 침식된다. 어떤 바위는 촛대 모양이고, 어떤 돌은 머리를 틀어 올리고 왕관을 쓴 영국 여왕 옆모습 같고, 어떤 돌들은 키 작은 버섯 모습이다.

타이완 하면 잊을 수 없는 인물, 손문과 장개석이 있다. 청나라 자체 내의 부패와 외세의 침략은 신해혁명(1911년)으로 청나라가 무너지는 전환점이 된다. 삼민주의 정치 이념을 가진 의사이자 혁명가인 손문(1866-1925)이 주동이었다. 삼민주의는 민족주의, 민권주의, 민생주의의 사상인데, 미국의 에이브러햄 링컨의 정치 철학을 떠오르게 한다. 손문의 젊은 추종자들이 장개석(1887-1975)과 마오쩌둥(1893-1976)이다.

한가지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서로 동료가 되었다가, 목표를 이룬 후에 갈라지어 적이 되는 것을 반복한 그들이다. 중국 통일을 위한 첫 번째 ‘제일차 국공합작(국민당+공산당 합작)’과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했을 때, 다시 힘을 합쳐 항일 운동에 함께 한 ‘제2차 국공합작’이 그것이다. 그 중간에 그들은 국민당, 공산당으로 다른 노선의 활동을 했다.

일본 육사 27기 졸업생인 장제스 총통은 중국 대부분을 통일하고, 새 정부를 만들었다. 그 후, 이념 차이에 의한 내란이 일어나고, 공산당에게 패한 국민당은 결국 본토를 떠나서 타이완에 정착하여 중화민국을 설립한다.

그러한 역사적인 배경과 이에 따른 영토 분할은 타이완이 국가인가 아닌가 하는 과제를 만들었고, 근방의 나라들은 그들의 이해타산(利害打算)에 따라서, 다른 의견을 내어놓고 있다. 타이완을 빼앗지 못해서 애타는 시진핑이 이끄는 중국은 대만이라는 국가는 없다고 단언한다. 그러나 우리들이 잘 알고 있듯이 대만은 건재하다. 중화민국(Republic of China), 중화 대만(Chinese Taipei), 또는 대만(Taiwan)이라는 세 가지 이름으로 불린다. 슬프게도 유엔은 1971년에 상임 국가 자리를 대만에서 공산 체제인 중화인민공화국 (PRC: People’s Republic of China)에게 이양시키었다.

대만을 홀대하는 국제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천연자원 이외에도 세계 반도체 생산의 중심지에 있으므로 대만은 건재하다. ‘타이완 반도체 생산 공장 (TSMC)’은 세계 최대의 반도체 위탁생산회사로 스마트폰, 자동차, 컴퓨터, AI 서버에 들어가는 부품을 생산 판매한다. 수출, 고가 인력 창출, 외국 자본 유치, 장비, 화학 물류 등 관련 산업도 성장시키어 막강한 경제 체제를 이룩한 타이완이다. 그들이 만드는 반도체를 ‘타이완의 실리콘 방패’라고 부를 정도이다.

깨끗한 대만, 수려한 산과 강을 자랑하는 대만, 또 반도체를 갖고 있어 부럽기만 한 대만에서, 찐만두 전문 맛집, ‘딘 타이 펑’ 원조레스토랑에 들려 그들의 정갈하고 은은하게 ‘맛 부리는’ 찐만두, 양배추 요리, 오이 요리로 방문을 끝 마감했다.

울산광역매일, 미주조선일보 6. 2026

한국의 여성 교육을 생각하다

`톡 튀는 인물이 없는 졸업생들로 구성된 학년이라고 알려진 우리가 졸업한 지 어언 60년인 돼 함께 모였다. 환영한다!` 거액을 자선단체에 기부하였거나, 어떠한 단체를 만든 인물, 또는 장관급 리더로 쓰였던 특출한 동문이 우리 기(期)에는 없었다는 뜻일 것이었다. 그러나 가장 많은 인재들이 곳곳에서 전문직을 갖고 활동해 왔으며 동문회 이사 직함도 받고 있다고 했다. 이 별 볼 일 없는 클래스 출신이 2025~2027년 모교의 총 동창회장으로 선출된 바 있다. 학창 시절 대대장이었던 그녀가 재상봉 개막 파티에서 한 환영사의 일부이다. 

모국에서 있었던 `졸업 60주년 재상봉` 잔치가 지난달 한국에서 있었다. 우리는 비수기(非需期)인 4월에 모였다. 참석한 대다수가 한국에 살고 있었고 타국에 거주하는 디아스포라 동문은 참석인원의 약 25%였다. 미국이 워낙 커서 그런지, 미국에 정착한 동문도 60년 만에 처음으로 본 경우가 적지 않았다. 영국, 독일, 캐나다에서도 왔다. 80살을 바라보는 노파들의 진지했던 모임은 활기차고, 유머러스하고, 때로는 심각하기도 했다. 우리는 많이 웃었다. 

대형버스 다섯 대에 나누어 타고, 영동, 동해, 양양 세 개의 고속도로를 달려 사흘에 걸쳐 동해 쪽에 있는 오대산, 발왕산, 설악산과 추암해변, 바다부채길, 경포호 둘레길, 수타사 산소길을 탐방했다. 그리고 산속에 자리 잡은 몇몇 사찰에 들렀다. 차가운 동해의 시퍼런 파도가 밀려와서 때리고, 할퀴고, 밀치고 간 흔적을 숨기지 못한 돌 절벽을 보았다. 돌 절벽은 우리들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으면서, 우리에게 등을 비스듬히 돌리고 있었다. 뼈대를 드러낸 돌산 틈틈이 화려한 꽃이 얼굴을 내민 길을 걸어 색 바랜 붉고 푸른 둔탁한 기둥이 받치고 있는 사찰에 도착했다. 코끝이 하늘을 향한 날렵한 사찰의 처마는 오랜 옛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애수가 고요 가운데 훈습이 되어 영과 육을 흠뻑 적신 듯 느껴질 때, 옛사람들이 행여 기다리고 있나 싶은 생각에 대웅전으로 향했다. 금을 칠한 여러 형태의 작은 불상들 앞에는 과일, 떡 같은 음식이 놓여있었다. 이생을 떠난 사람들로 보이는 이들의 빛바랜 사진들도 진열되어 있었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을 법한 사진 속의 사람…참선하는 이 몇 안 되는 고즈넉한 대웅전은 나에게 무릎을 꿇리었고, 무념의 시간으로 나를 묶어 두었다.

버스로 이동하던 우리 그룹은 운전사만 빼고, 여인천하이었다. 계급제도와 남존여비 사상이 사회를 단단히 걸어 잠그고 있던 조선 말기에 세워진 모교에서 4ㆍ19 학생의거가 있었던 해부터 6년을 우리는 함께 수학했다. 세상을 변화시킨 것은 여성 교육을 단행했던 우리 선조들의 뜻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변화를 향한 열망 속에서, 더 좋은 세상, 공평한 세상을 꿈꾸었을 것이다. 

여기서 잠깐 한국 여성 교육에 대해 들여다보자. 한국의 서구적 여학교의 모체는 미국 선교사가 행한 기적이었다. 여자아이 한 명에게 배움의 문을 열어주었던 것이 140년 전, 1887년이었다. 이화학당의 전신이다. 기록을 보면, 그로부터 11년 후인 1898년에 조선 사람이 처음으로 사립학교 `순성 여학교`를 세웠다고 하는데, 이 학교는 약 5년 후에 폐교했다고 한다. 이어서, 1906년에 고종황제의 계비 순헌황귀비가 귀족 출신 여아 5명을 데리고 지금의 숙명여고를 세웠고, 2년 후에는 관립으로 현재 경기여고의 전신인 한성 고등여학교가 세워지었다. 한국의 여성 교육 기관의 설립 역사는 시대적으로 조금도 뒤처지지 않음을 증명한다.

뭣 모르고 입학하고, 그곳에서 세상과 나라를 남의 일처럼 담장 넘어 봤던 나는 지난 114년 동안 이곳에서 수학하고 떠난 46,000여 명의 졸업생 중 하나다. 그리고 한국을 떠나 살고 있는 7백만 한국 출신 디아스포라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언젠가 동료 의사가 한국 사람들에게는 학연이 무척 중요해 보이는데, 그 이유를 알고 싶다고 했다. 디아스포라 삶이라서, 이민자들은 어떤 공통 분모를 찾으려고 그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지만, 그것은 정답이 아닌 것 같았다. 모국에서도 동창회는 중요한 공동체 모임이다. 한국인의 동창 모임은 졸업생들이 설계하는 소셜 한 것이라면, 미국의 동창 모임은 주로 모교 자체가 주관하고, 졸업생들에게 모교를 향한 관심을 요구하는 일종의 구애(求愛) 활동인 경우가 허다하다. 모교 발전을 위한 모금 운동이 자연스레 편승한다.

학교 발전을 위한 모금 활동은 `필란스로피`로 구분된다. `체리티(charity)`와 다른 형태의 모금이다. 한국어로 둘 다 자선활동이라고 번역하지만, 그 목적이 다르다. 따라서 수익자와 수익단체가 다르다. `체리티`는 단기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단체나, 개인에게 물질적 도움을 주는 것이다. 즉 급한 불을 끄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반면에 `필란스로피`는 `사랑하는`이라는 뜻의 필로스(philo)와 `인간`이라는 뜻의 안쓰로포스(anthrophos)란 그리스말의 복합어로 문화, 예술, 교육 분야를 기본적으로 도와줌으로써 궁극적으로 더 좋은 사회를 만드는 뚜렷한 목적이 있다.

필란스로피나 자선 모임이 아니었던 졸업 60주년 재상봉은 순수한 우정의 재확인이었다. 이 우정의 공통 분모 가운데 톡 튀는 동문은 눈에 띄지 않았지만, 자선활동을 해 온 든든한 사회의 버팀목인 동문이 많았음을 안다. 어쩌면 머지않아 필란스로피스트 서열에 들어갈 인재가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모교 동문뿐 아니라, 여러 세대를 이어온 한국의 여성 교육의 수많은 산 증인 인 한국의 증조할머니, 할머니, 어머니들에게 감사하는 재상봉 여행이었다.

울산광역매일 2026.5.5

손주들과 소울푸드 김치

미주 중앙일보 5.14

봄방학이라고 스페인과 뉴멕시코에 살고 있는 두 딸 가족 8명이 지난달에 다니러 왔다. 아이들은 사춘기 이전의 12살짜리부터 사춘기를 경험하고 있는 16살까지 좀 다양한 나이대이다.


로스앤젤레스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친 나의 딸들은 대학 시절부터 우리를 때때로(!) 떠났다.
딸들은 대학 졸업 이후에 잠시 귀향하였다가, 대학원과 수련의(修鍊醫) 과정, 박사과정을
타지에서 하면서 집을 떠났어야 했다. 막상 안정적인 직업인이 되었을 때, 딸들은 제 아이들,
그러니까 나의 손주들 교육환경과 사회적, 경제적 편안함을 이유로 고향인 로스앤젤레스가 아닌 타주(他州)와 타국(他國)에 정착하였다. 딸들이 제 아이들의 봄방학에 맞추어 고향에 다니러 왔다.


막네 격인 손주네 가족은 비행시간만도 13시간 걸리는 곳에 산다. 공항에 머무는 시간까지
합치면, 거의 하루를 길에 있었던 셈이다. 중, 고교 생인 다른 세 손주는 학교 수업뿐 아니라
과외활동의 종류와 심도(深度)가 달라서 한 가족이 두 팀으로 나뉘어져서 도착했다.
손주들의 방학은 같은 달 3월에 시작했지만, 기간(其間)이 다르다 보니, 끝나는 때가 달랐다.
사촌끼리 함께 지낼 수 있는 날이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다. 미국과 유럽의 봄방학은 부활절을
전후(前後)해서 시작한다. 기독교회 달력으로 중요한 명절이 부활절이고 부활절은 북반구에서는 봄에 있다.

역시 북반구의 농업국가에서 씨앗을 뿌리는 농번기에 일손을 충당하기 위해서
봄방학이 생겼다고 배웠던 것 같은데, 이 이론에는 근거가 없다고 한다. 이유나 역사가 어떻든
간에, 8월 말이나 9월에 새 학기가 시작하고, 5월 말 또는 6월에 학년이 끝나는 대부분의 현대
교육 시스템은 년 중 약 180일(165일~210일) 동안 학교가 열린다. 초, 중, 고, 대학교 등 그 교육
등급에 따라서, 또 지방과 국가에 따라서 차이가 있다.


손주들은 혼혈이다. 현대식 표현을 빌리자면 그네들은 다른 인종(multi-race)끼리 이룩한
다문화(mixed-culture) 가정에서 태어나 자라고 있다. 한국혈통인 엄마와 인종(race),
민족(ethnicity) 또 국가(nation)가 다른 출신의 후손인 아빠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이들은 동양적인 것, 한국적인 것들이 스스로에게서 스며 나오는 것임을 좋아하고, 자랑스러워한다.
내가 아메리카 반도에 발을 디디었던 반세기 전에는, 얼굴색이 노랗다고, 눈과 코가 작고
광대뼈가 높은 몽골리안 같은 모습이라고 언급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었다. 그래서 편치 않던
때가 종종 있기는 했었다. 그런데, 세상이 변했다. 기이(奇異)하다.


다민족의 나라인 미국은 혼혈의 분도(分度)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2010년에 3백만이었던
혼혈인구는 10년 후인 2020년에는 3천3백만 명으로 늘었는데, 이것은 현재 미국 인구의 10%에 해당한다. DNA 검사를 한다면 10%보다는 훨씬 높은 분포가 나올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따라서 언어도, 음식도 종류가 많다.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엘에이 교육구 학생 중에는 집에서 영어 아닌 언어를 쓰고 있는 경우가 꽤 많은데, 사용하는 언어의 종류가 자그마치 90개 이상이라고 한다.


내가 손주들에게 가르칠 만한 한국적인 것은 무엇인가? 그리 많지 않다. 아이들이 특별히
가르치지 않아도, 보고 배우기를 바란다. 한국의 역사, 한국인들의 예의, 손위 어른들을 존중해
주는 태도, 문턱을 넘어 집 안으로 들어갈 때 신발을 벗는 정갈한 생활 습관 등이 그 예일 것이다. 새해와 추석 정도의 명절을 함께 하면서, 한국 음식의 특이함, 아름다움, 맛깔스러움에
익숙해지고, 이에 대한 한국적인 것에 대한 임명장이 없는 민간 대사로서의 자격을 저절로 갖게 될 것이다.

아이들은 추억이 듬뿍 베인 소탈한 흰밥, 된장찌개, ‘할머니표 김치’를 원했다. 기뻤다. 조부모가 사는 집이 에피센터가 되어, 모두 모여서 북적대었다.


미국 대학의 봄방학 문화는 1930년대에 뉴욕주의 북쪽 지방에 있는 콜게이트 대학 수영팀이
겨울철 훈련을 미국의 베네치아라고도 불리는 따뜻한 플로리다주(州)의 포트 라우더데일(Fort
Lauderdale)에서 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고 한다. 그 후, 1960년대에 미국 5대호 주위를 감싸고
있는 8개 주(州)중의 하나인 미시간주(州)의 주립대학 글렌돈 스와토우트(Glendon Swarthout)
영문학 교수가 봄방학을 이용해서 영문학과 학생들의 활동을 이 같은 도시에서 했다. 이때의
경험을 책으로 썼다. ‘보이들은 어디 있어요(Where the Boys Are)?’라는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대중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고, 봄방학의 개념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학생들이 필요한 ‘쉼’과
즐겁고 건전한 사교활동의 필요성이 안정적으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그 영화는 2백5십만 달러제작비의 거의 두 배의 수입을 극장에서 올렸다고 한다.


사반세기 후 1990년대에, 흑인 학생들이 위주가 된 봄방학 이벤트가 있다. 영화 속이 아니고
실제로 거리로 나가서 춤추고, 노래하는 ‘길거리 파티’로 폭발적인 남부의 힙-합 파티
프리크니크(Freaknik)에 동승한 것이다.


봄방학은 학생들에게는 과도한 학교 공부를 잠깐 쉴 수 있는 필요한 브레이크 같다. 손주들, 딸들, 사위들이 함께 하는 그들의 봄방학에 에피쎈터가 될 수 있어서 감사했다. 영화가 보여주는
봄방학과, 프리크니크 식의 방학과는 그림이 아주 다른, 가족 중심의 브레이크이었다. 음식을
중심으로 하는 봄방학에, 김치가 한 가운데에 있었다. ‘할머니표 김치’를 동반하는 음식 파티는
좋았다. 우리 차세대 한국인의 소울푸드는 김치와 밥을 중심으로 만들어지고 변화할 것이다.
다음의 김치 파티를 기다리면서 김치에 관한 연구를 신중하게 하려고 한다.

김치의 힘

울산광역매일 2026.4.7

봄방학이라고 스페인과 뉴멕시코에 살고 있는 두 딸 가족 8명이 다니러 왔다. 아이들은 사춘기 이전의 12살짜리부터 사춘기를 경험하고 있는 16살까지 좀 다양한 나이대이다. 로스앤젤레스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친 딸들은 대학 시절부터 우리를 때때로 떠났다. 대학 졸업 후, 잠시 귀향하였다가, 대학원과 수련의 과정을 이곳, 저곳에서 하면서 그리되었다. 딸들은 아이들의 교육환경, 식구의 사회적ㆍ경제적 편안함을 이유로 결국 다른 주와 다른 나라에 각각 정착했다.   

이들은 봄방학 여행을 계획하고 멀다면 먼 길을 왔다. 막내 손주네 가족은 비행시간만도 13시간 걸리는 곳에서 왔다. 공항 상태가 순조롭지 않은 요즘, 출발시간 서너 시간 전에는 공항에 도착해야 한다. 거의 하루를 길에 있었던 셈이다. 중, 고교 생인 다른 세 손주는 학교 수업뿐만 아니라 과외활동의 종류와 심도가 달라 한 가족이 두 팀으로 나뉘어져 로스앤젤레스에 왔다. 손주들의 방학은 3월에 시작됐지만, 기간이 다르다 보니, 끝나는 때는 서로 달랐다. 그러다 보니 사촌끼리 함께 지낼 수 있는 날이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다.     

아이들은 패서디나에 있는 노르턴 싸이몬 박물관과 UCLA 근방에 있는 해머 박물관, 싼타모니까 바닷가에서 삼십여 년 동안 운영되어 온 해파리 연구 과학관을 방문하였다. 손주들은 혼혈이다. 현대식 표현을 빌리자면 그네들은 다른 인종끼리 이룩한 다문화 가정에서 태어났고, 자라고 있다. 한국혈통 엄마와 비한국계 아빠 사이에 태어난 손주들은 인종과 민족 또 국가의 차이점들을 어려서는 알지 못했다. 자라면서 차츰, 자기들의 복합적인 정체성을 자연스레 깨닫게 된 것 같다. 그리고 동양적인 것, 한국적인 것들이 스스로에게서 스며 나오는 것임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자랑스러워한다. 세상이 변했다. 기이하다. 내가 아메리카 반도에 발을 디디었던 반세기 전에는, 얼굴색이 노랗다고, 눈과 코가 작다고 놀림을 받는 경우가 간혹 있었다.   

다민족 국가인 미국은 혼혈의 분도(分度)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2010년에 3백만이었던 혼혈인구는 10년 후인 2020년에는 3천3백만 명으로 늘었는데, 이것은 현재 미국 인구의 10%에 해당한다. DNA 검사를 하면 이보다 훨씬 높은 분포가 나올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때문에 언어도, 음식도 종류가 많다.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엘에이 교육구 학생 중에는 집에서 영어 아닌 언어를 쓰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언어의 종류가 자그마치 90개 이상이라고 한다.    

내가 손주들에게 가르칠 만한 한국적인 것은 사실 그리 많지 않다. 아이들은 특별히 가르치지 않아도, 보고 배울 것이다. 동양인들의 예의, 손위 어른들을 존중하는 태도, 문턱을 넘어 집 안으로 들어갈 때 신발을 벗는 정갈함 등등이 생각난다. 손주들이 알게 된 명절은 새해와 추석 정도이다. 하지만 한국 음식은 항상 아이들과 함께 있다. 그래서인지 이젠 미국인들도 김치 냄새와 발효된 마늘 냄새를 좋아한다. 우리가 꼬랑꼬랑한 치즈 냄새를 싫어하지 않게 된 것처럼 말이다. K-팝, K-컬처 등 `K`라는 글자가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K-푸드 한국 음식은 그들을 열광하게 한다. 아이들은 추억이 듬뿍 베인 소탈한 흰밥, 된장찌개,`할머니표 김치`를 원했다.  

미국 봄방학의 문화는 1930년대에 뉴욕주의 북쪽 지방에 있는 콜게이트 대학 수영팀의 겨울철 훈련 장소 이동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북부 추운 날씨를 피해서 미국의 베네치아라고도 불리는 플로리다주의 포트 라우더데일에 마침 새로운 올림픽 싸이즈 수영장이 만들어지었을 때이었다. 그 후, 1960년대에 미국 5대호 주위를 감싸고 있는 8개 주 중 하나인 미시간주의 주립대학 글렌돈 스와토우트 영문학 교수의 리드로 봄방학을 이용한 영문과 학생들의 활동이 같은 타운에서 있었다. 이때의 경험을 책으로 썼고,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대중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고, 봄방학의 개념은 세상에 알려지면서, 학생들이 필요한 `쉼`에 대한 아이디어가 안정적으로 자리 잡았다 한다.   

사반세기 후 1990년대에, 흑인 학생들이 위주가 된 봄방학 이벤트가 있었다. 영화 속이 아니고 실제로 거리로 나가서 춤추고, 노래하는 `길거리 파티`로 폭발적인 남부의 힙-합 파티 프리크니크에 같이 탄 것이다.   

봄방학은 학생들에게는 과도한 학교 공부를 잠깐 쉴 수 있는 필요한 브레이크 같다. 손주들, 딸들, 사위들이 함께 하는 그들의 봄방학에 우리집이`에피쎈터`가 될 수 있어서 감사했다. 영화가 보여주는 봄방학과, 프리크니크 식의 방학과는 그림이 아주 다른, 가족 중심의 브레이크이었다. 그런데 음식을 중심으로 하는 이번 봄방학에, 김치가 한 중심에 있었다.`할머니표 김치`를 동반하는 음식 파티, 그것이 `김치 파우어`가 아니겠는가. 한국인의 소울 푸드는 역시 김치이다. 다음의 김치 파티를 기다리면서 김치에 관한 연구를 더욱 신중하게 할 작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