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조력 사망 입법화는 타당한가?

초겨울은 입원실 병동에서 잠깐 만나고 세상을 떠난 환자들을 생각하게 한다. 이곳 엘에이가 아열대성 날씨라 뼛속까지 시린 한국의 겨울 날씨가 주는 아름다움이 없다. 그래도 나름대로 엘에이만이 줄 수 있는 특수함이 있다. 어떤 길에는 한국 못지않게, 꺽다리 가로수가 색색으로 물든 이파리를 내리고 있다. 나무는 낙엽으로 세상과 작별하지만, 봄이 되면 다시 새 생명을 세상으로 내어 보낸다. 나의 환자들은 환생하였을까.

의과대학을 갓 졸업하고, 타교에 가서 인턴을 했다. 권력과 부(富)의 배경이 없던 나에게, 외과 교수님께서 모교보다 큰 의과대학 부속병원을 추천하여 주셨다. 인턴들은 상급 레지던트 밑에서 배당 병동의 환자에 대한 모든 사항을 점검하고, 그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 환자들에게 급히 해야 할 피검사나 엑스레이 촬영이 필요하면, 제일 하급자인 인턴이 심부름꾼이 되어 랩(lab)과 영상의학과에 달려가기도 하고, 결과가 빨리 나오도록 귀여운 뇌물도 약간은 먹여야 했던 때였다.

어느 날 회진 준비를 하고 있던 나에게, 선배 레지던트는 간호사 스테이션 옆에 붙어 있는 병실에 입원 된 환자에게는 신경 쓰지 말라고 일렀다. ‘그 환자는 곧 운명할 것이에요.’라고 말했다. 죽음을 못 본 것도 아닌데, 왜 그런 명령 아니면 배려를 해 준 것인지 의아했다. 그 환자는 20대 초반의 젊은 청년이었고, 병실을 지키던 그의 형은 20대 중반인 내 나이 또래였다. 얼마 안 있어, 그 환자는 운명했다.

간호사 스테이션을 떠나지 못하고 있던 나를 붙들고 형은 절규했다. ‘세상이 왜 이리도 불공평합니까…’ 임종이 가까웠던 그 젊은 환자는 증상 완화 조치가 필요했을 터인데, 그 당시 의학계에는 종말 치료나 완화치료에 대한 행정적 방침이 없었다.

불치병 환자들을 위한 ‘의사 조력자살(PAS: physician assisted suicide)’법이 1942년에 스위스에서 처음 만들었다. 그 후 유럽, 미국, 카나다, 호주등에서 허락하고 있다. 한국은 지금 입법화를 제의하고 있다. PAS 는 허락해도 ‘안락사’는 허락하지 않는 나라도 있다. ‘안락사’는 의사가 직접 치사제를 투약하는 것이고, ‘의사 조력자살’은 의사의 처방을 받아 환자 자신이 약을 먹어 임종을 앞당기는 것을 뜻한다.

불치병은 말기 종양 이외에도 완치할 수 없는 양성 질환을 통틀어 칭한다. 정신질환, 후천성면역결핍증 등과 어떤 종류의 선천성 불구 같은 것이 이에 속한다. 불치병이 환자를 금방 죽이는 것은 아니다. 불치병을 갖고 오래 사는 경우도 허다하다.

인위적 죽음이 가능한 나라에서도, 이러한 방법을 택하여 죽는 권리(?)를 행하게 될 때까지 여러 절차를 거치도록 한다. 혹시 의료진의 잘못된 진단과 부족한 치료가 있었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고, 시스템을 부적절하게 악용하는 예도 배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어린이를 포함한 취약층 환자들에게는 신경을 더 써야 한다. 네델란드와 벨지움에서는 한 살 미만의 유아와 나이든 어린이까지 조력 사망을 허락한다. 운전면허를 18세가 되어서야 받을 수 있는 나라에서 12살에 죽음을 선택하게 한다는 것은 이론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국제적으로 많은 비난을 받고 있다.

극단적인 결정을 내리기 전에 환자와 가족들은 충분한 상담을 받는 것이 옳다. 극단적인 선택은 미루거나,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극심한 고통이 있다면, 투약으로 또는 신경 마취 방법 등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인명 경시 풍조가 있고 자살률이 높은 한국 사회이다. 평소에 생명의 중요함과 건전한 윤리관을 가정에서부터 조성해 나가면 가정이라는 공동체가 모여 이루는 사회도 변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내가 속수무책으로 젊었던 때 보았던 그 청년 환자가 다시 돌아와 아프다면, 이젠 충분한 리소스를 알려주고, 그중에서 가정방문 호스피스 서비스와 전문 상담 서비스를 추천해 줄 것이다. 그가 편안히, 아파하지 않고, 자신이 자랐던 집에서, 그리고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편안한 마감을 할 수 있게 말이다.

‘베를린 장벽’과 표현의 자유

몇 주 전에 한국을 다녀 왔다. 1가·2가·3가·4가…충무로·청계로·삼일대로…. 길 이름이 쓰여진 깨끗한 표시판들이 신호등과 함께 친절하게 가야 할 방향을 알려준다. 그런데도 어떤 때는 묵고 있는 호텔을 멀리 돌아서 찾아가기도 했다. 금방 눈에 띄고, 쉬이 보여야 할 반짝이는 하이라이즈 호텔이 내 눈에는 금방 보이지 않는 적이 많았다. 나의 인지도가 낮아진 것일까. 서울이 너무 번화해져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두 가지 이유 모두 때문이었을까.

청계천 흐르는 물은 바닥이 보일 만큼 맑고, 깨끗했다. 주위의 조경이 아름다웠다. 청계천을 따라 산책로를 만든 것은 좋은 아이디어인 것 같았다. 청계천과 평행하는 인도(人道)로 올라와서 길을 따라 걷다가 ‘베를린 광장’이라는 곳에 다다랐다. 세 개의 시멘트 판 ‘베를린 장벽’과 독일을 상징하는 곰, 100여 년 된 독일 전통의 가로등이 함께 비치되어 있었다. 눈여겨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쉬운 전시품이 두 개의 큰 길이 가로지르는 코너에 있었다.

화려한 한국 서울의 도심지에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약간 더럽고 지저분해 보이는 오래된 시멘트 판으로 어른 키의 두 배 정도로, 폭은 1.2m, 두께는 0.4m로 바닥이 L자형이었다. 둔탁했다. 미국 국무부 보고에 의하면, 원본의 어떤 부분은 5m 정도로 높다고 한다. 독일이 통일되었을 때, 길이 165Km 장벽을 잘라서 여러 나라에 선물로 보내거나 팔았다. 미국에는 워싱턴 DC에 있는 국립 박물관(National Museum of American Diplomacy)과 로스 안젤레스 카운티 박물관 마당에 전시되어 있다. 라스베이거스에 있는 어느 호텔의 남자 화장실에도 있는데, 왜 화장실에 중요한 역사 물품이 비치되었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베를린 장벽’은 이차대전 이후, 연방 소비에트가 관할하는 동독일(東獨逸)과 미국, 영국, 프랑스가 관할하던 민주주의 서독일로 양분되면서 생기게 되었다. 베를린 시(巿)는 동독 지역에 있는 큰 브란덴부르크주(州) 안에 자리하고 있는데, 연방 소비에트의 독재가 시작되자, 약 3백 5십만 명의 동베를린 주민들이 서독으로 이주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1961년부터 1980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서 시멘트 200만 톤과 강철 70만 톤을 부어 이중(二重)의 ‘베를린 장벽’을 세워서 탈출을 막았다. 두 벽 사이는 장갑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나는 ‘베를린 장벽’을 두 번 보았다. 5년 전에 ‘브란덴부르크 개선문’을 보러 갔다가 처음으로 개선문 옆에 설치된 장벽을 보았고, 이번에는 서울을 방문했을 때, 청계천 근방에 있는 ‘베를린 광장’이라는 곳에서 본 것이다.

함께 자리한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개선문’과 ‘베를린 장벽’의 일부는 역사적으로 관련이 없다. 분단의 극복과 평화통일의 염원을 상징하는 두 역사적인 전시물들은 각각 다른 세기에 세워졌다. 양분된 독일의 평화통일을 위해서 레오나르도 번스타인은 베토벤 심포니 9번을 그곳에서 연주했다. 케네디 대통령, 레간 대통령, 고르바체프 러시아 수석등이 냉전 시기에 이곳에서 역사적인 연설도 했다. 이러한 분단의 세상이 올 줄 모르고 JS 바흐는 ‘브란덴부르크 콘체르토’를 작곡했을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서독 쪽 벽면에는 분단되어 못 보는 가족을 그리워하는, 또는 평화를 염원하는 그라피디 낙서 메세지가 가득했다. 그러나 동독 쪽은 아무런 낙서 없이 깨끗한 벽면으로 남아 있었다.

한국에 기증된 ‘베를린 장벽’을 페인트 스프레이로 훼손한 사건이 있었다. 삼류 의류 회사 창업주라 했다. 이 행위가 과연 표현의 자유라고 볼 수 없다는 판례를 읽어 보았다. 요즘 환경보호단체가 루브르 박물관, 영국 런던 내셔널 갤러리 이외에도 호주, 독일 등 유명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명화에 음식을 끼얹어 세상의 관심을 얻고자 하는 것도 표현의 자유는 아니다.

‘브란덴부르크 콘체르토’를 쓴 JS Bach는 뭐라 말할까. ‘이건 아니지~~~!’ 할 것 같다.

슬픔, 보이지 않네

슬픈데,

그림으로 그려지지 않네

슬픈데

사진으로도 찍을 수 없네

슬픈데

눈에 보이지도 않네

손으로 만져지지도 않네

내 영혼 처럼

기억 속의 사람들,

기억 속의 동물들,

메말라 죽어간 플랜트들,

가슴에 있네.

방사선, 빛과 그리고 그림자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핵전쟁’이라는 단어가 뉴스를 통해서 자주 전파되고 있다. 원자폭탄 투하로 일본이 몰락했던 1945년 이후, 핵무기를 의도적으로 쓴 전쟁은 없었지만, 핵 때문에 발생한 두 개의 참상은 잘 알려져 있다. 원전 사고로 일어나는 재앙은 여러 대(代)를 이어 크고 작고 때로는 극심한 상태로 나타난다는 것을 우리는 확인했다. 1986년에 있었던 ‘체르노빌(Chernobyl) 원전 사고’와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지진으로 발생했던 사고가 그 근거이다.

그러니까 1986년, 지금부터 36년 전 어느 봄 날 아침이었다. 내과 동료 의사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그는 그날 새벽에 소련 영(領),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Chernobyl)이라는 곳에서 발생한 원전 사고에 대해서 물어왔다. 그 동료 의사가 종양 방사선학과에 전화한 것은, 종양 방사선학과는 방사선을 이용해서 암 환자를 치료하기 때문에, 방사선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별일 아닐 것이라고 단순하게 내 생각을 설명했다. 왜냐하면, 방사선에 관련된 모든 사항은 해당 정부뿐 아니라 국제적으로 지켜야 할 기준과 지침이 있고, 이에 따라서 방사선은 통제되고 조정되는 환경 안에서 쓰이는 것이기 때문에, 사고가 났을 때 빨리 대처했을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나의 대답은 원칙적으로는 맞는 말이었지만, 내 생각이 틀렸었다는 것을 세월이 지난 후에 알게 되었다. 많은 자료가 아직도 은폐되어 있지만, 실제 그곳에서 일어났던 사고는 의도적이 아닌 결함이 있는 원전(原電 nuclear reactor)에서 발생한 것이었는데, 이 사고에 대처했던 러시아 정부와 관리들은 무지했다. 그리고 이 사고를 방관했고, 심각성을 은폐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구출되지 못하고 희생되었다. 사실의 은폐는 주변 국가에서도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고, 냄새도 나지 않는 동위원소들이 공중에 발산되었을 당시, 70%의 방사능은 바람을 타고 벨라루스를 덮쳤다. 이러한 사실을 국민에게 알리는 대신, 소련 영(領)이었던 벨라루스는 방사선 사고에 대한 정보유출을 법적으로 금했다. 러시아는 겨우 0.5%의 방사선이 그들의 땅을 더럽혔을 뿐이었다. 많은 양의 방사선은 사람을 죽이지만, 주변에서 그보다 적은 양을 받았던 사람들과 그 후손들은 지금도 그 후유증-주로 비정상적 뇌 기능, 정신질환, 발암, 유산, 기형아 임신으로 고생하고 있다.

나치 대학살로 619개의 마을이 파괴되었던 벨라루스는 이 핵사고로 485개의 마을이 없어졌고, 70개는 영구히 땅에 묻혔다. 전쟁 때는 4명 중 한 명이 죽었지만, 이 핵사고로 인해서 5명 중 한 명이 핵으로 더럽혀진 땅에서 살고 있다. 약 2 백 만 명에 달한다. 그중 7십 만 명이 어린이들이었다. (2006년 통계)

방사능에 더럽혀진 체르노빌에는 아직도 남아 있는 방사능이 테스트 기계에 잡힌다. 그곳은 사람이 살지 않는 폐허이다. 올해 우크라이나를 침범한 러시아 군대가 2월에서 4월까지 체르노빌에 주둔했었다고 한다. 트랜치를 파던 군인들이 방사선 중독에 걸렸고, 한 명은 사망했다는 보도이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에 대한 뉴스는, 당시 종양 방사선의학과에 의뢰된 암 환자들의 불안 수위를 높였다. 이러한 사고가 없었던 때에도, 의뢰되어 온 환자들은 ‘방사선’이라는 단어에 예민했다. 어떤 환자들은 방사선의학과 전문의사를 만나기도 전에 치료거부를 결심하기도 했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는 사람을 죽였는데, 어떻게 방사선 치료가 환자는 죽이지 않고 암세포만을 죽일 수 있느냐는 질문을 했다. 좋은 질문이었다. 정답은 있는데, 정답에 도달할 때까지 여러 단계의 정보를 이해시켜 주어야 해서 그 태스크는 쉽지 않았다.

방사선 치료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미국 암 환자의 약 50%가 암 치료 과정 중에 수술, 약물 이외에도 방사선이 필요하다. 이 세가지 방법을 때로는 따로, 때로는 함께 쓴다. 방사선은 잘 못 쓸 경우, 부위에 따라서, 방사선량(量)의 정도에 따라서, 부작용의 종류와 정도가 다르다. 생명을 앗아갈 수도 있다.

방사선은 암 치료뿐 아니라, 병이 의심될 때, 진단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쓰인다. X-ray가 그것이다. X-ray는 127년 전에 빌헬름 뢴트겐 (Wilhelm Roentgen)이라는 독일 사람이 발견했다. 비슷한 시기에 마리 큐리, 피에르 큐리 부부가 동위원소 라듐(Radium)을 발견했다. 동위원소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동위원소를 이용한 치료가 효과적이고 절대적인 질병들이 있다. 그 예가 자궁암이다. 자궁암의 경우 동위원소를 근접치료 방법으로 사용해서 막강한 방사선을 질병 부위에 쏘아 주고, 주위는 보호하는 방식이다. 이 위대한 발견으로, 인류의 의료는 획기적인 발전 도상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참고로 마리 큐리는 폴란드 사람으로 프랑스에 유학 갔다가 동료 물리학자인 피에르를 만나 결혼했다. 우리처럼 디아스포라였던 마담 큐리는 역사상 최초로 노벨상을 받은 여성이다. 그녀의 딸 아이린, 사위, 남편과 함께 5개의 노벨상을 거머쥔 역사에 남은 인재(人才) 가정이다.

원자폭탄을 만들어 한국을 일본으로부터 해방하는데 간접적인 이바지를 한 미국인,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노벨상을 받지 못했다. 위대한 발견을 한 천재 오펜하이머가 제외된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122년 동안 노벨 물리학상은 116번, 222명에게 주어졌다. 이 중 한 명은 두 번 수상했다.

그렇다. 방사선은 우리가 암에서 회복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치료 방법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방사선의 어두운 면을 잊어서는 안 된다. 무차별적으로 방사선 연구에 집중했던 큐리 부인과 그녀의 딸, 아이린은 각각 악성빈혈, 백혈병으로 죽었다. 마차 사고로 40대에 사망한 피에르 큐리도 오래 살았더라면, 방사선으로 인해 발암했을지도 모른다.

러시아는 핵무기를 써서 전쟁에 이기려는 망상을 버려야 한다. 당시 그들의 땅이었던 체르노빌에서는 의도적이 아닌 사고로 많은 사람이 죽고, 병들고 자연이 파손되었지만, 지금, 의도적으로 핵을 사용하는 전쟁은 있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과연 우리는 염려하지 않아도 될까. 비록 지난 100여 년 동안 방사선에 대한 방대한 지식이 쌓였고, 그러므로 방사선 의료사고를 예방할 수 있다. 그러나 핵전쟁이라면, 날아오는 핵무기를 막을 길이 없다. 지금, 이 순간, 누군가가 핵무기를 분해시키는 방법을 알아내려, 연구하고 있으리라 믿고 싶다. 우리는 안전제일의 세상에 살아야 할 권리가 있지 않은가.

그리고 방사선은 우리에게 필수적인, 보이지 않는 빛이고, 그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