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셀로나에서 만난 아버지

지난달,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에 있는 바셀로나에 다녀왔다. 이 층에 있는 오래된 아파트에 머물렀다. 아파트에 딸린 길 쪽에 있는 좁은 발코니에서 내려다본 디아고날(Av de la Diagonal) 아침 길은 분주했다. 광장 쪽 방향으로, 한 중년의 남자가 누런색 마닐라 봉투를 옆구리에 끼고 서둘러 걸어가고 있었다. 짙은 남색 양복에 넥타이 없이, 말끔한 흰 셔츠를 받쳐 입은 남자는 적당한 숱의 반백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고 있었다. 갑자기 그 남자는 아버지의 환영(幻影)과 겹쳐졌다.

그 행인은 남아있는 듯한 젊음을 갖고 있었고, 그의 걸음걸이는 단단해 보였다. 나를 낳고 나를 기를 때, 아버지에게 잔해(殘骸)의 젊음이 있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늦둥이로 태어난 나는 늙은 모습의 아버지를 기억한다.

폐기물처럼 나에게 덤핑 되었던 사진들 속에서 아버지를 우연히 만났었다. 거의 백 년 가까운 세월을 아우르는 흑백 사진들은 이어지지 않는 가족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한 사진에서, 아버지는 옛 광화문 시청을 배경으로 팔짱을 낀 편한 모습으로 웃고 계신다. 사진 뒷 면에는 ‘환도(還都) 후(後)’라고 적혀있다. 1·4 후퇴 때 부산으로 피란 갔던 가족들이 서울로 돌아왔던 때인 모양이다. 옛 시대 사람치고 작은 키가 아닌 중년의 사나이는, 소매를 반쯤 걷어 올린 흰 와이셔츠 차림으로, 홀쭉하지도, 뚱뚱하지도 않다. 작고 까만 태의 동그란 안경을 끼고 있다.

아버지의 반듯한 이마는 적당히 넓고, 올백으로 빗은 반백의 머리숱은 너그럽다. 부리부리 한 눈, 뾰족한 콧날, 그리고 콧잔등 양미간 부분은 주저앉았다. 어머니는 아버지 코의 양미간, 코 부릿점이 낮아서, 액운(厄運)이 많다고 자주 넋두리하였었다. 마치 집안의 불행이 아버지의 코 때문인 것처럼 그랬다.

그렇긴 하다. 내가 자란 집안에는 불행한 사건들이 많았다. 아버지의 큰아들이 육이오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사건은 참으로 슬픈 비극이었다. 그의 죽음은 고집스런 먹구름이 되어, 바람이 불어도 물러가지 않고 늘 해님을 가렸다. 집안은 어둡고, 추운 채로 우리를 둘러쌌다. 거대한 검은 구름은 우리에게 웃거나, 울거나, 불평하는 것은 사치라고 가르쳤다. 뒤돌아보니, 엄마의 바닥이 보이지 않은 슬픔과 우울은 뼛속 깊이까지 스며있는 아버지의 아픔이 소리 되어 나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아버지는 늘 말이 없었다. 남은 우리 형제들에게 자신의 견해를 나누거나, 비판조차 한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늘 그러려니 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아버지라고 생각했다. 디아고날 길을 바삐 걸어가던 그 남자처럼, 아버지는 나날의 생계를 위해 말없이 바삐 걸으셔야 했고, 때론 누런 서류 봉투를 잃지 않으셨을까?

대로(大路)인 디아고날 길을 또 다른 큰길인 그라시아 길(Passeig de Gracia)이 대각선으로 가로지른다. 스페인의 복잡한 역사의 일부를 보여주는 80여 년 된 23m 키의 오밸리스크가 서 있는 원점을 중심으로 아름다운 광장이 형성되어 있다. 이 사각진 회색 뾰족탑은 내 모국의 역사처럼 민주주의를 이룩할 때까지, 싸우고, 빼앗기고, 포기하고 때로는 항복해야 했던 카탈루냐 지방과 스페인 간의 과거를 잊으라고 선언하는 듯 보인다. 꽃과 관목, 행인이 앉아 쉴 수 있는 벤치가 평화롭다. 노란색이 회색이나 갈색보다 더 많이 섞인 자연석 화강암 옛 건물들은 중앙에 자리 잡은 오벨리스크를 중심으로 360도 방사형으로 지어져 퍼져 있다. 광장을 면한 건물의 부분은 중심에서 거리가 먼 곳에 있는 건물 뒷부분보다 좁다.

광장을 면한 한 건물 얼굴에 ‘우리는 우크라이나와 함께합니다’라는 구호가 쓰여있는 4, 5피트 길이의 푸른색 배너가 걸려있는 것이 보인다. 구호를 중심으로, 배너의 한쪽 편에는 우크라이나 푸른색과 노란색의 위아래로 양분된 국기가, 오른쪽에는 유럽 연합(EU)을 상징하는 12개의 노란 별이 원형으로 그려져 있다. 배너의 중앙쯤에는 EU 깃발이 펄럭이고 있다. 유럽의 27개 회원국이 EU의 정치 경제 동합체를 이루지만 12개의 별은 참여국 숫자와는 특별한 관계가 없다고 한다.

올해 2월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해서 발발한 전쟁은 223일째,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세계에서 제일 큰 땅을 차지하고 있는 러시아와 그에 비하면 약소하기 그지없는 우크라이나 간의 전쟁(군인 숫자 1,350,000: 500,000)으로 1천 3백 4십만 명 우크라이나인들이 조국을 떠나 피란길에 올랐다고 유엔이 보고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이 전쟁의 사상자 통계는 확실하지 않지만, 러시아는 9년 전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였던 전쟁에서 잃은 자국 군인들의 306%를 현재 진행 중인 전쟁에서 잃었다고 한다.

미국 출신 군인 33,600여명과 137,800여명의 한국 군인을 전쟁터에서 잃은 나의 조국이다. 나는 항상 어머니들, 미망인들, 자식들의 슬픔에 눈을 두었었다. 왜 똑 같이 아팠을지도 모르는 아버지들을 보지 못했을까? 미국과 한국의 171,000여명의 아버지들은 내 아버지 처럼 아들을 잃고 아파 신음하며 늙어갔을 것이다. 그런 아버지들이, 바셀로나에 갔을 때 까지, 왜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또 얼마나 많은 아버지가,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에 나간 아들을 기다리며 살아가야 할 것인가? 얼마나 많은 아버지가 울음을 참고 나날을 견디어 나가야 할 것인가? 나의 아버지처럼.

내조(內助), 외조(外助), 협조(協助)

‘너 이렇게 나돌아다녀도, 네 남편이 뭐라고 하지 않아?’

‘무슨 뜻이야?’

‘너~~가 집에 붙어 있는 날이 없는 것 같아서.’

‘나는 붙박이장이 아닙니다요~~!’

질문하였던 그 친구와 나는 같은 중, 고교를 6년 동안, 또 전문학과(college)는 다르지만 같은 대학(university)을 다녔다. 남가주에서 동문회를 통한 동아리 활동 중에 다시 만나, 왕래하는 친구이다. 동아리 활동은 고교 동문회원들이 취미 생활을 위해 만든 것으로, 음악, 미술, 사진, 문학 등이 있다.

이렇듯, 모국을 떠나 살지만, 한국인들은 외로움을 뒤로하고, 활발한 사회활동을 병행하면서 특수한 이민자의 삶을 반영하는 예술, 문화 활동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 같다. 곳곳에 세워진 한인회, 한글학교, 한국어로 만들어진 신문, 한국어로 방영되는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을 생각해 본다. 정치계, 교육계에도 입성한 분들이 많다.

다시 나의 이야기로 돌아간다. 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동아리 활동들은 이민자라는 커다란 공통분모가 바쳐주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내가 무척 어려워하면서도, 하고 싶어 하는 글을 쓰는 것과 합창반에서 노래하는 것이 그 예이다. 노래하고 싶은 마음이 많았음에도 시간을 맞출 수 없어서 합창단원이 되지 못하다가, 큰마음을 먹고, 처음으로 출석한 날, 나를 반겨주던 친구는 한마디 꼭, 짚어서 말했다. 그리고서 친구는, 덧붙여, 한마디를 더 하였다.

‘네 남편의 외조가 크다!’

외조라니!

실상, ‘외조’와 ‘내조’의 개념은 이 미국 사회에는 없다. 그러나 한국 출신 이민자들의 삶은 한국문화를 기반으로 만들어져가고 있으니까, 이 개념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남아있을 것이다. 문화체육관광부 국립국어원 ‘온라인 가나다’라는 사이트에, 외조, 내조라는 단어를 남자, 여자라는 틀에 넣어서 올렸던 어떤 글에 대한 견해 내용이 생각난다. 현대 관념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내용/질문을 올린 어느 넷티즌에게 ‘온라인 가나다’는 다음과 같은 답글을 썼다. “예부터 바깥, 외(外)를 포함하는 단어는 보통 남편의 역할이나 위치를, 안, 내(內)를 포함하는 단어는 보통 아내의 역할이나 위치 등을 의미해 왔습니다. 과거가 묻어 있는 단어들로 볼 수 있지만, 이러한 단어를 해당 의미로 사용하고 있어서, 그 쓰임을 인정하여 사전에 담은 것입니다”. 아직도 쓰는 단어이지만, 내용은 변해왔으니 알아서 하라는 소리 같다.

그렇다. 그 표현대로라면, ‘외(外)’란 밖이라는 뜻으로, 남편의 역할, 위치를 뜻하면서 남편이 밖에서 안사람인 아내를 돕는다는 뜻으로, 여성의 사회활동은 이례적이라고 단정하고, 여성의 정체성이란 ‘집 안’으로 국한하는 시대적, 역사적 표현이다.

결혼문화가 급변하고 있다는 기사를 2018년에 매일경제 최경선 기자가 쓴 바 있다. 요즘 장가가거나 시집가는 신혼부부는 드물고, 결혼하자마자 독립해서 따로 사는 게 대세라고 했다. 한국이 그런데, 이곳 미국에 사는 디아스포라들에게는 내조, 외조란 더더욱 맞지 않는 개념이고 표현이겠다. 자녀 교육상 조심해서 사용하는 것도 현명할 것이다.

카말라 헤리스(Kamala Harris)가 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때, 그리고 케탄지 브라운 잭슨(Ketanj Brown Jackson)이 대법관으로 인준되었을 때, 미국 미디어는 남편들의 내조가 있었다는 말을 쓰지 않았다. 시대적, 역사적 요소들을 강조하고, 문화적인 부부들의 이야기를 올렸지만, 내조, 외조로 구분하지는 않았다. 이 두 여인의 역사적인 성공을 축하하고, 함께하는 남편들은 아내의 능력을 이미 젊었을 때부터 알았었고, 두 남자는 그들이 응원한 아내의 출세를 기뻐하고 자랑했다. 멋있게 보였다.

이 두 여성의 출세가 단순한 본인들의 노력으로만 이루어졌다고 볼 수는 없다. 남편들의 응원뿐 아니라, 그들이 성장할 때 그들이 보았던 부모들의 단련된 삶이었다. 그들은 부모들이 다져온 삶의 기반 위에서 성실하게 그들의 길을 갔던 것 같다. 이민자 일세인 부통령의 부모들과 노예의 5대 후손이었던 대법관의 아버지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자식들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식들과 함께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었던 사람들이었다.

잭슨 대법관이 했던 많은 명언 중에 마음에 와닿는 문구가 있다. ‘인종 차별이(역자 주: 흑인들을 백인과 섞이지 못하게) 우리(역자 주: 흑인들)를 분리했던 때부터, 흑인 여성이 대법관이 될 때까지는 한 세대밖에 걸리지 않았어요…!’라는 말이다. 이 말은 미국은 이민자와 노예 조상들이 쌓은 기반 위에서 쉼 없는 투쟁을 마다하지 않았던 후예들이 있었고, 과감한 개혁에 앞장선 선구자가 있었다는 뜻이 함축된 것일 것이다.

한국은 어떤가? 2009년 이후, 한국의 여학생들이 남학생들보다 대학 진학률이 높았지만, 여전히 전문분야에서는 여성의 분포가 뒤진다. 변호사의 약 19%, 의사의 24%, 교수의 23%가 여성이다. 2016년 한국 통계국(KOSIS Korean Statistical Information Service)은 일할 수 있는 연령대 남성의 74.7%, 여성의 52.7% 가 직업전선에 있다고 보고했다. 20% 이상의 격차를 보여준다.

내조, 외조라는 단어를 배척하는 풋풋한 젊은이들이 있는 나라, 여왕이 있었던 나라, 미국은 하지 못했던 여성 대통령을 선출했던 나라가 나의 모국 한국이다. 딸들과 며느리의 사회활동과 사회 진출을 위해서 사위, 아들, 그리고 아버지, 엄마가 함께 노력한다면, 시간이 걸려도 여성이 차지하는 전문직의 분포도도 점차 시정되고 보수될 것으로 믿는다.

나의 삶을 뒤돌아본다. 긴 세월을 남편도 나도 다중작업하며 살았다. 우리는 그렇게 살면서, 서로를 응원해주는 협조자(協助者)이었다. 가정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동조(同調)가 아닌 협조를 하면서 살아왔다. 동조란 남의 주장에 자기의 의견을 일치시키거나 보조를 맞춘다는 뜻으로, 동조의 조(調)는 협조의 조(助)와 한문 글자가 다르듯이, 그 뜻을 달리한다. 협조(協助)에 쓰이는 조(助)는 ‘보조적인’ 또는 ‘버금간다.’라는 뜻이다.

참으로 산다는 것은, 쉽지 않다고, 새삼스레, 다시 생각해 본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협조하며 장점을 살려주면서 함께 걸을 때, 세상은 그런데로, 그럴듯하게, 살 가치가 있게 변해준다는 것을 믿는다.

수저계급론와 노블리스 오블리제

코비드 19사태는 끝날 듯, 끝날 듯하면서도 지속 되고 있다. 될 수 있으면 외출을 금하다 보니, 새로운 양상의 틀이 잡히고 있다. 예전에는 안 보던 TV인데, 요즘은 TV 앞에서 꽤 많은 시간을 보낸다. 이젠 넷플릭스 고객이 되었다. 한국 드라마에 맛 들이고, 새로운 모국의 문화를 배운다. 그런데, 가끔 이해되지 않는 신조어를 접한다. 어떤 경우에는 영어와 한국어를 합치고, 그 중 몇 자는 생략한 말들이 들린다. 안타깝기도 하다. 자꾸 한국말이 없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다. 내 노파심인가?

외국어 병합 신조어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웬일로 수저 타령이 그리도 많은지 모르겠다. 금수저, 은수저, 동수저, 나무 수저, 흙수저. 새로 형성되어 가고 있는 수저 계급제도가 새로운 한국인의 신분질서인 모양이다. 수저계급론은 경제적인 수직적 관계를 지칭하는 뉘앙스가 진하다. 그래서 빈부의 격차를 암시하고, 빈부의 차이는 교육의 균등을 침해하므로, 좀 침침한 이론이기는 하다.

계급이란 신분이나, 재산, 직업, 교육정도가 비슷한 사람들이 만드는 집단이라는 정의를 읽었다. 그런데 나는 한국의 계급제도는 일본인들의 강점기 때, 그리고 육이오 한국전쟁으로 모두 말살되어버린 것으로 알고 있었다. 좀 더 찾아보니, 계급이나 신분은 실상 불평등을 의미하는 단어로써, 계급은 법제적으로 정해진 사회의 불평등이고, 신분이란 법제적으로 정해지지 않은 의식적 불평등이라고 한다. 미국이나 한국은 법적인 불평등은 없지만, 의식적 불평등 속에서 아직 살고 있는지 모른다.

또 하나의 말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이다. 이 말은 프랑스 말로, 영어나 한국말로 번역되지 않은 채 한국에서 그리고 영어권 나라인 미국에서 자연스레 쓰이고 있다. 프랑스가 유럽에서 오랫동안 패권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 말과 프랑스 문화가 여러 나라 중, 특히 영국의 상류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쳤고 그러다 보니 이 단어도 그냥 원래대로 남아있게 된 모양이다.

‘노블레스’는 영어로는 ‘노블(noble)’이고, 귀하다는 뜻이다. ‘오블리주’는 ‘obligation’으로 책임이라는 뜻이다. 복합단어의 뜻을 풀이하여보면, 귀족 층은 일반인들이 누리지 못하는 여러 가지 특권을 누리면서 살기 때문에, 그 특권에는 의무가 따른다는 뜻이다. 알고 보면 멋진 말이다. 이 멋진 뜻은 기원전 600 년 경, 호머의 ‘일리아드’에 처음으로 등장했다고 한다.

귀족 계급이 없어진지 오래되지만 의식적 불평등 속에서 살고 있는 지금, 노블레스에 속하는 사람들, 계층은 누구일까? 여기에 나의 모국인들이 즐겨 쓰는 수저계급론을 접목해서 생각해 본다. 그런데 수저계급론의 시초는 미국이다. 아무개는 은수저를 입에물고 태어낳다는 표현에서 시작되었다. 중세기 유럽에서는 각자가 자기의 스푼을 주머니에 넣고 다녔고, 필요에 따라 꺼내서 썼다고 한다. 그러니 스푼이 나무인지, 은인지 금방 보였을 것이다.

나는 한국 사람들이 선호하지 않는 동수저가 좋다. 동(銅)은 사실 광물질 브라스 또는 커퍼를 뜻하는데, 동수저에서는 스테인리스 스틸을 뜻한다. 스테인리스 스틸은 인류가 발견하고, 발전시킨 물질 중 가장 획기적인 은 물질이다. 스테인리스 스틸은 약 110년 전에 영국인 헤리 브리얼리(Harry Brearley)가 총기가 녹슬고 단단하지 않아 우연히 크로미움을 철에 섞으면서 발명된 것인데, 철에 약 12%의 크롬을 섞은 것이다. 철은 고세대부터 쓰던 것으로 오래 쓰면 녹이 쓸지만 크롬이 들어가면 녹 쓰는 것도 방지하고, 단단하고, 오래가며, 섭씨 1200도 까지의 고열을 견디고 값도 싸다. 얼마나 위생적인가!

스테인리스 스틸은 의학기구, 쿡킹용기, 오븐, 자동차 부속품, 건축자제로 다양하게 쓰인다. 무엇보다도 의학기구의 대부분은 스테인리스 스틸로 되어있다. 스테인리스 스틸이 발명되자마자부터 의학기구를 만드는데 쓰였다. 그 후, 맥주 발효 통, 비행기, 잠수 TV, 세탁기등을 만드는데 쓰였다. 현재 중국이 최대 스테인리스 스틸 생성국가이고, 중국은 12년전 약 천 백만대의 세탁기를 만들었으니, 그들이 쓴 스테인리스 스틸의 양은 기하급수적이 아닐 수 없다.

다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수저 계급을 생각해 본다. 금수저와 은수저까지일 것 같지만, 동수저급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얼마든지 실천하면서 살수 있다는 생각이다.

‘호국 영령을 국민의 이름으로 추모합니다’

새끼 고양이다. 몇십 년 전에 내가 근무하던 병원 근방에 있는 홈디포에서 구조했던 까만 고양이 ‘네로’처럼, 작고 새까맣다. 새끼고양이는 101 프리웨이 길갓에 너부러져 있었다. 주위에 피가 없고 몸체가 흐트러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서, 차에 치인 것이 아니라, 달리는 차에서 내 던지어진 것 같았다. 언짢았다. 마음이 아프다고 하는 말을 돌아가신 어머니가 들으셨다면, 어머니는 말씀하셨을 것이다. 사람들도 전쟁터에서 죽어가기도 하는데, 그런 일로 상심해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그렇다. 엄마 말씀대로, 고양이 한 마리가 살생 되었다고 상심해서는 안 되겠지. 지금 대서양을 건너 6,400마일 떨어진 유럽에서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되고 있지 않은가? 어머니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아닌 한국전에 대해 말씀을 하고 계시겠다. 6·25로 많은 아픔을 겪어 내시고, 크게 웃지도 울지도 않으시고 평생 말이 없으시던 어머니가 가신지 이미 오래되었다. 어머니가 말씀하시는 6·25와 우크라이나가 겪고 있는 전쟁의 참상은 다를 바 없는 것 같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끝이 없는 인간의 욕심을 말해준다. 러시아는 1922년부터 1991년까지 70년 동안, 주변의 15개 국가를 점령하고 있던 슈퍼 파우어였다. 비록 10%의 땅덩어리가 쓸모없는 툰드라이고, 30년 전 15개국을 독립시킨 후에 영토가 줄었지만, 러시아는 아직도 세계에서 제일 크다. 아시아 동북쪽 끄트머리에 있는 캄차카반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서쪽 유럽의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무려 11시간의 시간대를 가진 나라이다. 그런 나라가, 2014년 크림반도 침공 이후, 올해 2월에 우크라이나 본토를 침범했다.

우크라이나의 남부, 아조프 바다 쪽을 완전 장악하고 싶어서 그렇다고 한다. 2014년에 크리미아반도는 자치공화국이 되었지만, 사실상 러시아가 통치하고 있다. 아조프 바다는 흑해로 연결되고, 전략상, 국제 물물 교환 상 중요한 곳이다. 고대 비잔틴 시대부터, 20세기에 걸쳐 오토만제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의 사르데냐, 러시아가 이곳을 차지하려고 때때로 편을 달리 가르면서 싸웠다고 한다. 풍경이 수려하고 날씨 또한 좋아서 크리미아반도의 수도, 유파토리아(Eupatoria)는 러시아 제국의 짜(Tsar)가 휴양 차 머물곤 했던 곳이다.

크리미아전쟁이라면 기억나는 사람이 있다. 현대 간호론의 기초를 깔았던 영국 여인 ‘백의의 천사’,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다. 그녀는 크리미아전쟁 때 터키에 머물면서 부상병을 간호했다. 전쟁이 있었던 1854년부터 1855년 동안 전사자, 부상자, 다른 이유로 사망한 세 그룹의 군인들을 도표(graph)로 만들어 표시하고 세상에 알렸다. 그 도표가 장미 모양이라서 ‘장미 도표’라고 불렸다고 한다. 그 이후 통계학자라는 또 다른 명칭이 나이팅게일에게 붙여졌다.

70년 동안 러시아 속국으로 있다가 날개를 펴던 우크라이나가 당하고 있는 재침과 72년 전 있었던 6·25 한국전쟁이 자꾸 내 머릿속에서 겹쳐진다. 어쩌면 그것은 5월 마지막 월요일이 미국의 메모리얼 데이였고, 6월 6일은 모국의 현충일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미국과 한국의 호국 영령을 기리는 기념일이 일주일 상관으로 지나갔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로스앤젤레스 국립묘지’가 있는데도, 묘지를 방문하지 않았다. 6·25 때 그 젊은이들은 한국이라는 알지도 못했을 터이다. 그런 나라에 가서 안타깝게 전사한 젊은이들에게 보속(補贖)하는 마음으로 갔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서울 현충원에 있는 큰오빠의 빈 무덤에는 봉사자들이 태극기라도 꽂았을까?

큰오빠는 육이오 전쟁 때 전사했다. 집안에는 그의 전사에 관한 문서가 없었다. 집안의 역사를 알고 있는 부모님들, 올케언니, 둘째 큰오빠는 이 세상에 없고, 나는 실상 그들이 생존했던 당시에는 그의 전사에 관한 내용에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전쟁의 후유증으로 우울을 되씹고 살았던 부모님들의 침묵이, 늘 나를 무겁게 눌렀었던 것 같다.

그러던 중, 6·25전쟁 참전 용사 초청 기념식이 엘에이에서도 있을 것이라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이 기념식에 초청된 살아남은 사람들, 그것도 엘에이에 사는 분들이 몇 분이나 될지 궁금했다. 전쟁 당시 20대이었으면 지금은 90대의 노인들일 것이다. 그분들이 건강했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있다. 그 바램과 함께, 나는 큰오빠 전사에 대한 기록이 찾고 싶어졌다.

전쟁기념관 정보 사이트에는 전사자에 대한 간단한 기록이 올려져 있었다. 좀 놀랐다. 3년 전 전쟁기념관을 방문했을 때에는 전사자의 소속 부대를 알아야만 동판에 새긴 이름을 찾을 수 있었다. 나는 그때, 오빠의 이름을 찾지 못했다.

이번에는 이름을 써넣으니까, 육군/제6사단 소속/중위/장교/6·25전쟁/군번 15348/생년월일 (빈칸)/출생지 서울/전사 일자 1950년 8월 21일/전사 장소 경북/연고자 (빈칸)/명비 위치 115-ㄴ-029라는 정보가 나왔다. 그가 속했던 부대와 그의 군번, 그리고 전사한 날짜…. 이 얼마나 귀중한 내용인가!

이 내용을 인쇄해 놓고 싶어서 프린트 앱을 눌렀더니 certificate가 컴퓨터 화면에 떴다. 사진이 들어갈 자리는 비어 있었다. 생년월일에 대한 기록이 없었는지, 이 역시 빈칸이었다. 아랫줄에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목숨 바친 호국 영령을 국민의 이름으로 추모합니다’라는 문구가 두 줄로 나뉘어서 쓰여있고, 제일 밑줄에는 빨갛고 큰 글씨로 ‘전쟁기념관’이라고 마감되어 있었다.

그의 짧았던 삶의 마지막을 한 페이지에 정리한 내용이다. 그는 육이오 전쟁에 출전한 후, 두 달도 되기 전에 전사했던 것이었다. 이제 나는 그의 기일(忌日)을 안다. 그를 위한 연미사 신청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큰오빠는 제나라를 위해서 싸우다가 전사했고, 나는 그 의미를 뒤로 한 채, 그저 그를 기억해 보려고 지금 애쓴다. 그런데 나는 거기서 그치지 말고, 위키백과가 전하는 16개국의 참전 군인들도 기억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도 오빠처럼 아내와 어린 자식들, 부모 형제가 있었을 것이다. 한 통계에 의하면 참전했던 미국 용사들의 나이는 평균 17세에서 24세이었다고 하지 않는가?

그들을 존경하고 기리는 뜻에서, 각 나라에서 파병되었던 젊은이들, 그리고 안타깝게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젊은 그들에 대해서 알고 싶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의 숫자로 다가올 뿐이다.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아서 답답하고, 마음이 무겁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모두 합쳐서 합산하기 전에, 일(1), 즉 하나라는 숫자를 들여다본다. 그 ‘하나’로 표시된 청년을 지금을 살고있는 우리가 알아볼 방법은 있는 것일까?

16개국 우호 국가에서, 총 1,719,597명의 군인이 투입되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한국 1,090,911명, 미국 480,000명, 영국 56,000명, 카나다 25,687명, 터기 14,936명, 오스트레일리아 8,407명, 필리핀 7,420명, 태국 6,426명, 네덜란드 5,322명, 콜롬비아 5,100명, 그리스왕국 4,992명, 뉴질랜드 3,794명, 에티오피아 3,518명, 벨기에 3,498명, 프랑스 3,421명, 남아프리카 826명, 룩셈부르크 83명이었다.

이들 중에 한국 군인 149,005명, 미국 군인 36,574명이 전사했다. 실종, 포로, 부상자를 합친 16개국 젊은이들을 합계하면 1백 5십만 명이 넘는다. 이들이 남긴 유족으로 아내와 한 명의 자식이었다고 치면, 총 3백만 명이 가장(家長) 없는 가정에서 아프고, 힘들게 살았다고 풀이할 수 있다. 또 부모까지 가족에 넣어서 계산해 보면 6백만 명이 된다. 이들의 고국은 북미, 남미,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 오스트랄리아 여섯 개 대륙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그 흩어져 있는 지구촌 곳곳에서 젊디젊은 미망인들이 어린아이들을 기르면서, 어떤 경우는 유복자를 낳고 기르면서, 힘든 세월을 보내었을 것이다. 그들이 가난하게 살지 않았기를 바란다.

그렇다. 마음이 아프고 우울해도 이젠 고만 접어야 하겠다. 큰오빠의 영이 쉬고 있었던 그가 떠났던 -후암동 집-을 오빠의 영이 아직 지구촌에서 떠돌고 있다면, 잊으라고 해야 하겠다. 그 집은 나의 집이기도 하지만, 나는 그곳을 아주 오래전에 떠나지 않았던가. 이제 큰 오빠와 한국에서 마지막 숨을 거둔 16개 나라의 젊은 영령들을 위해서, 슬프고 무거운 마음일랑 떨쳐내고, 감사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연미사를 신청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