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픈 업] 세대를 연결해 주는 고리

이른 여름이다. 두어 달 지나면 대부분의 초, 중고 학교들은 여름 방학에 들어간다. 한 학년을 끝낼 준비를 해야 하는 4월과 5월은 아이들뿐 아니라 교사들에게도 바쁜 달이다. 영어, 미국 역사, 세계 역사, 세계 언어, 수학, 화학, 물리 같은 정규 학과목은 요구되는 커리큘럼을 질적으로, 또 양적으로 완수해야 한다. 미비한 부분이 있다면, 여름 방학을 이용해서 보충해야 할 경우도 있다. 학과목 외에 좋아하기 때문에, 또는 흥미가 있어서 시작한 과외 활동반도 유종의 미를 거두어야 한다.

이때쯤에 조부모의 날 행사가 있다. 행사에 덧 붙여, 학교 행정가들은 학교 운영을 위한 기금모집에 조부모들을 초대하는 것이다. 사립학교가 학생들이 내는 학자금만으로는 충분한 교육을 제공하는 운영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지난 몇십 년 동안 교육비는 급상승했지만, 일반 시민의 소득은 이를 따라갈 수 없어서 학비를 큰 폭으로 올릴 수 없다 보니, 학자금과 교육에 들어가는 비용 사이의 차액이 크게 생긴다. 이를 어디에서든지 끌어다가 메꾸어야 하프로 모금 운동이 불가피하다. 경제적으로 부유한 가정에서 그렇지 못한 학생을 무명으로 돕는 식이다. 대부분의 사립학교는 비즈니스 담당 전문 부서를 두고, 큰 기업이나 일반 기부자와 소통하면서 부족한 경영비를 연구비 형식으로 따오기도 한다.

여러 행사를 치러서 자녀들이 훌륭한 전인 교육을 받고 있다는 확신을 종강 때에 간접적인 방법으로 나누면서, 모금 운동을 맞물린다. 이때, 학교가 잊지 않고 초대하는 대상이 조부모들이다. 늙은 세대가 경제적으로 월등한 위치에 있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물론 기부 가능성만을 감안해서 조부모를 초대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조부모의 날’을 열어 조부모들이 손주들과 함께 등교하고, 하루를 교실과 교정에서 보낼 수 있게끔 프로그램을 짠다. 우리 부부는 세 손주가 다니고 있는 학교의 ‘조부모의 날’ 행사에 참여했다.

이 학교를 방문하기 몇 주 전에, 조부모들에게 돌린 음악반 숙제가 있었다. 조부모는 손주 나이 때에 어떤 음악을 들었는지, 어떤 음악을 좋아했는지, 왜 좋아했는지, 지금은 달라지었는지 등의 질문에 답하는 것이었다. 질문들은 꽤 신선한 과거로의 여행이었다. 답을 써서 보내 주었는데, 조부모의 날, 기타 선생님은 답안지를 분석해서 조부모들, 학생들과 나누었다.

조부모 대다수가 봅 딜론과 비틀즈 음악을 좋아했던 모양이었다. 클래스는 비틀즈의 ‘러브 미 두’를 연주했다. 몇몇 조부모님은 눈을 감고 들었다. 이어서 선생님은 300년이라는 긴 시간을 뛰어넘어, 바흐의 샤콘을 듣고 있는 조부모님은 손 들어 달라고 하며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이올린곡을 기타로 편곡한 바흐의 샤콘 테입을 틀어 주었다. 기타로도 아름답고, 슬프고, 평화롭게 연주됨에 감동했다. 왜 내가 그 곡을 좋아하는지 손주 기타반 클래스와 조부모님들과 나누어 달라고 했다. 내가 읽어서 알고 있는 바흐의 슬픈 가족사, 바흐의 아픔, 그리고 궁극적으로 도달하는 평화로의 귀의 내용을 나누었다.

한 손녀는 중국어를 택하고 있기에 그 애와 함께 수업에 참석했다. 선생님은 중국이 침략해서 속국을 만든 티베트 분이었다. 중국어의 억양이 노래처럼 높고 낮아 아름답게 들리는 것을 처음 깨달았다. 중국집에서 짜장면 먹으며 듣던 중국말과 무척 달랐다. 그런데, 손주네 학교에서는 한글이 선택과목 중의 하나가 아니었다. 세계 언어의 하나로 미국 정규 학교에 한글을 진흥하고, 문화를 알리는 비영리 단체의 일을 하는 할머니로, 한국어 또는 한국문화 과외반에 대한 의견을 제시할 수밖에 없었다. 좀 늦은 감이 없지 않아 있는 것이, 이 학교에는 이미 스페인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중국어, 일본어, 아메리칸 사인 랭귀지까지 7개의 언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엘에이로 돌아오는 길에, 세대 간의 교량 역할을 하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삶의 모든 것들, 즉 외국 태생 조부모나 부모가 가져온 언어와 음식이 포함된 가풍, 함께 읽는 소설과 듣는 음악, 기본적인 과학, 수학, 그리고 아이들이 열렬히 좋아하는 스포츠는 훌륭한 교량 역할을 해 오고 있다 것, 삶의 모든 것은 DNA를 넘어서서,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중앙일보 2025.4.24

[어른이 읽는 동화] 낡은 책상

아빠가 나를 깨우셨어요. 나는 텔레비전 앞에서 자요. 우리 가족은 방 한 개짜리 아파트에 살아요. 방에서는 아빠랑 엄마가 주무세요. 나는 바닥에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다가 잘 시간이 되면 이불을 펴고 누워서 조금 더 텔레비전을 볼 수 있어요. 그래서 아주 좋아요. 엄마도 저녁밥 만드시면서 간혹 눈을 내 쪽으로 돌리셔요. 텔레비전 방과 부엌 사이에는 문이 없거든요. 눈 나빠진다고, 뒤로 물러앉아서 보라고 하시고, 때로는 텔레비전 많이 보면 머리가 나빠진다고도 하셔요. 우리 식구들은 텔레비전 앞에 놓은 네모난 작은 탁자에 둘러앉아서 식사를 해요. 탁자가 식탁이에요. 탁자에서 숙제를 하기도 했어요. 책상이 우리 집에 오기 전까지는요.

엄마는 부엌을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작은 냉장고가 있는 부엌을 항상 닦으세요. 부엌이 깨끗해야 내가 좋아하는 파파야 샐러드도 만들 수 있다고 하셔요. 파파야 샐러드랑 부엌 청소랑 무슨 상관이 있는지 나는 이해 할 수 없지만요. 또 바퀴벌레는 더러운 곳을 좋아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아빠는 학교 정문을 지나, 옆길을 돌아서 학교 뒤편에 있는 운동장이 멀리 보이는 쪽 행길에 나를 내려 주시고 가셨어요. 길 건너편 은행 시계탑이 7시를 가리키고 있네요. 정문은 아직 꼭꼭 잠겨 있어요. 아주 캄캄해 보였어요. 우리 학교 운동장은 무지 커요. 학교 마당은 닭을 가두어 두는 닭장의 담장처럼 철망으로 삐~잉 둘러쳐 있어요. 행길에서 운동장까지 작은 골목길이 있어요. 나는 이 골목길을 좋아해요. 아니, 이 길 밖에는 철망이 뚫려서 만들어진 개구멍을 지나 운동장에 들어갈 수 없어요. 개구멍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나 봐요.

행길에서 게처럼 옆걸음으로, 어떤 때는 뒷걸음으로 철조망 개구멍 쪽으로 걸으면 앞으로 걷는 것 보다 시간이 좀 더 걸려요. 아마도, 10분 정도는? 나는 이렇게 걷는 것이 아주 천재적이라 생각되어요. 친구들이 등교하려면 무지무지 긴 시간이 흘러야 하거든요. 아빠랑 엄마는 ‘금방’이니까 길가에서 학교가 열릴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씀하시지만, 아니에요. 난 뒷걸음으로 행길에서 부터 걸어서, 철망 개구멍으로 몰래 운동장에 들어가서, 볼 차기 하면서 친구들을 기다릴 거예요.

아버지는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셔요. 6시 반에는 친구 아저씨를 픽업해서 이삿짐센터에 일하러 가셔야 해요. 아빠의 친구 아저씨는 자동차가 없데요. 오늘은 늦었다고 무척 서두르셨어요. 엄마가 그러시는데, 아빠는 이사 나가는 집에 가셔서 물건들을 싸고, 트럭으로 일단 옮겨 실은 다음에 운전해서 이동하신데요. 이사해서 들어가는 집에 도착하면 짐들을 모두 내려 주인이 원하는 방에다가 날라야 한데요. 어떤 짐들은 큰 가구라서 무겁데요. 긁히지 않게 포장을 잘해서 날라야 하고, 아빠는 아빠의 친구랑 함께 들어야 한다고 하셨어요. 

오늘 아침에도 나는 옆걸음, 뒷걸음질로 등교합니다. 댕그랑댕그랑 열쇠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면, 아빠랑 비슷하게 생긴 벤추라 아저씨가 먼발치에서 걸어 오는 것이 보입니다. 7시 45분이 되었나 봐요. 홈 룸 시간까지 45분이나 기다려야 하지만, 친구들이 그 전에 올 것이라, 기다리는 것은 문제없어요.

아빠는 어깨랑 허리가 늘 아프다 하셨는데, 이젠 이해가 되어요. 얼마 전부터, 저녁 식사가 끝나고, 엄마가 설거지하시는 시간에, 나는 아빠 어깨에 파스를 붙여 드리고, 안마를 해드리기 시작했어요. 얼른 나을 병이 아니라 하셨어요. 그래도 내가 파스를 붙여 드리고, 안마해 드리면 무척 좋아하셔요. 아빠 등 뒤에서 안마하는 내 손을 아빠는 앞으로 잡아끄시고, 손등에 뽀뽀해 주세요. ‘아이고, 이 작은 손이 아빠를 고쳐주고 있네. 우리 미겔이 많이 컸구나!’

엄마는 새벽 6시까지 식당에 일하러 가셔요.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식당의 부엌에서 일하셔요. 멀지 않은 곳이라고 엄마가 그러셨지만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야 해요. 새벽 시간이라 버스가 자주 다니지 않는데요. 여섯 시 정각에 식당 부엌 앞에 도착하려면 매일 서둘러야 하셔요. 

출근하시기 전, 엄마는 아빠와 아빠 친구 아저씨의 점심 도시락도 싸 놓으셔요. 나는 학교에서 주는 점심을 먹어요. 엄마는 학교 점심을 하나도 남기지 말고 다 먹어야 한다고 매일 말씀하셔요. 그래야 내가 아빠보다 더 키가 크게 자라고, 건강하다고 하셔요. 아빠는 배가 많이 나왔다고 엄마한테 자주 잔소리 들어요.

어제는 텔레비전 앞 책상에 앉아 숙제를 했어요. 숙제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물건’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는 것이었어요. 다행히 내가 제일 좋아하는 물건, ‘책상’이 생긴 후에 받은 숙제여서, 아주 빨리 글을 쓸 수 있었어요. 

울산광역매일 신문 2025.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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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부분은 원본: 신문 지면 관계로 짤린 부분임

어제는 텔레비전 앞 책상에 앉아서 숙제했어요. 숙제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물건’이라는 제목으로 써 가는 것이었어요. 다행히 내가 제일 좋아하는 물건, ‘책상’이 생긴 후에 받은 숙제라서, 아주 빨리 글을 쓸 수 있었어요. 나는 이렇게 썼어요.

제목: 내가 제일 좋아하는 물건

이름: 미겔 산체스

날짜: 202543

내가 어렸을 때, 내가 제일 좋아하는 물건은 트랜스포머이었다. 세 살 때에 찍은 사진을 보면 나는 트랜스포머를 가슴에 안고 있다. 나는 잘 때도,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할 때도, 트랜스포머가 없으면 그것을 찾을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 나는 초등학교 2학년이다.

지금 내가 제일 좋아하는 물건은 책상이다. 아빠가 이삿짐을 나르러 가셨을 때, 집주인이 버려달라고 맡긴 책상이라고 한다. 집주인의 딸이 어렸을 때 쓰던 책상이라는데, 딸은 틴에이저라서 큰 책상이 필요하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저기 긁힌 상처가 많이 보인다. 모서리에 나무가 깨어진 부분도 있다. 그래도 나는 이 책상이 너무 좋다. 작은 의자도 함께 주셨다. 책상에는 서랍이 두 개나 있다. 붙박이 정리 수납장이 뒤쪽에 있다.

~! 정말 정말 멋지다.

친구가 준 여러 가지 딱지를 나누어서 정리하여 넣었다. 고모부가 주신 한국의 어느 대학에서 광고용으로 만든 학교 로고가 들어간 꼬마 메모 공책도 따로 넣을 자리가 생겼다. 수납장 위에 연필통도 놓았다. 그리고 내가 처음 태어났을 때 아빠, 엄마랑 찍은 우리 가족 사진도 놓았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물건은 이 낡은 책상이다. 나는 이 낡은 책상에 앉아 아빠의 이야기를 쓸 것이다. 그리고 내 친구들의 이야기, 고모부의 선물 이야기도 쓰려고 한다. 그런데 아빠랑 엄마는 하루에 한 줄이라도 괜찮으니까 일기부터 쓰는 습관을 들이라고 하신다.

아빠 엄마에게 화낸 날은 어떻게 해?’

그것도 사실이니까 사실대로 쓰는 것이 중요해. 오늘 나는 엄마가 아주 미웠다라고 써도 돼.

나는 나의 책상, ‘낡은 책상이 너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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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기획-동남아 여행기(4)> 콰이강의 나라 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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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모니카 수필가
기사입력 2025-04-06 [18:20]

▲ 류 모니카 수필가     ©울산광역매일

이번 동남아 여행은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시작해서 자카르타, 쿠알라룸푸르, 싱가포르를 거쳐 타일랜드 방콕에서 끝났다. 타일랜드가 동남아 나라 가운데 유일하게 유럽의 식민지 화염을 피한 나라라고 세계 역사 시간에 배웠을 때, 많은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궁금했다. 한국은 같은 시대 왜 일본 제국주의 확장의 시퍼런 칼날 아래에서 처참한 희생을 당하고 있었을까. 태국은 운이 좋았다기보다 유럽의 무역 거래상들에게 먼저 투자의 문을 열었고, 비즈니스 협상을 하면서 외교적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태국의 자원을 빼앗고자 하는 계획이 성숙해지기 전에 먼저 현명한 처리를 한 셈이었다. 그런 면에서 지도자의 지혜와 역량이 존경스러웠다.

이번 여행에서 또 알게 된 사실은 세계에서 쿠데타가 가장 많았던 나라 중 하나가 태국이라는 점이었다. 태국의 치앵마이 대학 폴 체임버스 교수에 의하면, 1932년 혁명 이후, 약 30번에 가까운 쿠데타와 17번 정도의 개헌이 있었다고 한다. 성공하기도 하였고, 실패한 적도 있었는데 이 교수의 의견에 많은 학자가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내 생각으로는 성공하지 못한 쿠데타는 반정부 시위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 국왕 부부의 사진이 들어간 빌보드 (사진=류 모니카 제공)


1932년 혁명 때, 절대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 민주주의 체제를 갖추었는데 여러 쿠데타 중에도 왕실은 지켰다고 한다. 길거리 곳곳에서 현 국왕 부부의 사진이 들어간 빌보드를 볼 수 있다(사진 참고). 국왕에게 불미스러운 발언을 하면 불경죄로 엄중한 처벌을 받는다고 한다. 21세기에 아직도 국왕 불경죄로 처벌을 받는다니 아이러니할 뿐이다. 

한국이나 미국의 대도시 중심가처럼, 태국 수도 방콕은 번잡했다. 교통체증이 심했다. 승용차, 오토바이, 툭툭이라는 휘발유로 움직이는 이 나라 특유의 신식 인력거가 거리를 메운다. 여러 민족이 섞여 사는데, 이곳에도 중국인들은 그들의 타운을 만들었다. 방콕의 차이나타운은 삼팽 지역 차이나타운이 유명하다. 한문으로 된 간판이 가게 대부분에 붙어 있다. 한자는 눈에 익고, 이해할 수 있어서 편했다. 개발도상국 당시에 한국이 그랬듯이, 이곳에는 정찰제가 없다. 부르는 게 값이다. 물건값을 부풀려 부르기 때문에 무조건 반절 정도 깍은 뒤 흥정해야 한다고 가이드가 귀띔해 주었다.

필자가 세계 역사를 배울 즈음에 `콰이강의 다리`, `007 황금 총을 가진 사나이`라는 영화와 `왕과 나`라는 뮤지컬이 크게 인기를 끌었다. 모두 태국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이었다. 콰이강의 다리는 1962년쯤 한국에서 처음 개봉됐다. 일본의 남방작전…콰이강과 강을 안고 있는 두 계곡…두 뭍을 잇는 다리…다리를 만들고 철도를 깔아야 하는 영국인 전쟁 포로들…뙤약볕…노역…. 태국에서 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주제로 한 영화가, 어린 우리들을  감동케 했었다. 우리 조상들이 일제 강점기를 겪었고, 그들이 겪은 후유증이 그대로 우리들에게 전달되고 있던 시절이었다. 특히 영화가 한국에서 상영될 당시 한국은 반일 사상이 팽배했던 때이어서 더욱 공감했을지도 모르겠다.  

당시 일본의 남방작전을 통해 소위 `대동아 공영권`을 꿈꾸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선 궁극적 목적지 인도에 도착하기 위해 병력과 고무, 석유 같은 보급품을 인도 근방 버마 (현재 미얀마) 북쪽까지 날라야 했다. 이 때문에 일본은 약 400킬로미터에 걸쳐 철도를 건설해야 했다. 이를 위해 일제는 약 6만명의 전쟁포로와 일반인들을 부역시키었다. 그 과정에서 약 1만3천명이 죽었다고 한다. 

콰이강은 기차 노선의 동쪽 땅에 있다. 남쪽으로 흐르는데, 바다로 흘러 들어가기 전, 방콕 근처에서 방향을 급격히 튼다. 기차가 이 지점을 통과할 수 있게 하려면 먼저 다리를 건설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영국군 포로들이 노예처럼 착취당했다. 그 비참한 이야기를 프랑스 작가 피에르 불가가 썼다. 그는 인도차이나 고무공장을 운영했던 사람인데 자유 프랑스 의용군으로 싱가포르, 미얀마, 중국 쿤밍, 인도에서 근무하다가 2년 동안 일본군 포로로 잡혀 살았다.

한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아카데미상과 골든 글로브 상을 모두 휩쓸었던 `왕과 나`라는 영화와 뮤지컬의 내용이 역사적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태국에서는 출판 금지이고, 뮤지컬이나 영화 상영도 역시 금지되어 있다.  

어렸을 때 영화를 통해 연결됐던 태국과의 인연은 뉴욕주에서 공부를 마친 후 엘에이에 정착하면서 다시 시작됐다. 태국 출신 암 환자들은 필자가 한국 사람이어서 좋다고 했다. 동양인이라는 공통 분모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태국산 알록달록한 스카프를 선사하거나, 닭고기를 찹쌀과 바나나 껍질에 싸서 쪄서 만든 태국산 만두를 건네곤 했다. 나는 그들의 음식에 매료되었다. 쌀로 만든 국수를 코코넛 주스와 카레에 비벼 만든 파타이, 이란식으로 카레를 섞고 변형해서 만든 마싸만 카레 접시가 맛있었다. 

아름답고, 푸르고, 귀해서 보관함에 다시 넣어두고 싶은 기억들이다. 이를 다시 들여다보게 한 태국 여행은 지구 반대편이라는 먼 거리라는 단점과 습하고 무더운 기후라는 악조건들을 뛰어넘게 했다. 다녀오기를 잘했다. 태국은 나에게 인연이 깊다면 깊은 나라이다.

<해외기획-기행문(3)> 동양의 용(龍) 싱가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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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모니카 수필가
기사입력 2025-03-30 [17:19]

▲ 류 모니카 수필가     ©울산광역매일

인도네시아에 이어 싱가포르 여행에 나섰다. 치과 의사인 조카가 10여 년 전에 중국계 싱가포르 청년을 만나서 정착한 곳이기도 하다. 조카사위 부모님들은 오래전 젊으셨을 때 싱가포르로 이주해 그곳에서 가정을 이루고, 2세를 교육한 중국계다.  

싱가포르 인구의 약 75%가 중국계이고 9% 정도가 인근 인도 출신들이다. 한국 면적의 약 3%밖에 안 될 정도로 작고, 천연자원도 거의 없다. 63개의 작은 섬들에 둘러싸인 싱가포르는 동남아시아 인접 국가인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와 비슷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일찍이 영국과 네덜란드가, 이차대전 이전 3년 동안은 일본이 점령했다. 이후 말레이시아와 합병됐다가 한국보다 좀 늦은 1959년에 독립했고, 공식 독립선언은 1965년이다. 지금은 세계 정보통신 산업과 금융시장, 글로벌 사업체의 허브이고, 국제회의, 국제 전시회 장소로도 선호되고 있다. 세계적 관광 명소이기도 하다. 싱가포르 관광청 통계에 의하면 2022년 한 해 동안 630만명의 외국인이 방문했고 143억 달러 수입을 창출했다고 한다. 앞서 방문했던 인도네시아와 다르다는 느낌을 지울수 없었다.

▲ 바다사자 조각상 (사진=모니카 류 제공)

우리는 제일 먼저 마리나 해변부터 찾았다. 이곳 초입에 그들의 마스코트 ‘바다사자’ 석상이 바다를 바라보고 앉아 있다. 몸체는 물고기이고, 얼굴과 상체는 사자다. 사자의 벌린 큰 입에서 물이 작은 폭포처럼 뿜어지고 있었다. 근방 산책로에는 하늘을 향해 펼쳐진 흰 연꽃 모습의 예술 과학 박물관과 버섯을 펼쳐 놓은 모양의 ‘수퍼트리’라고 불리는 18개의 인공 수직 나무가 서 있다. 그중 두 개의 수퍼트리 꼭대기를 연결해서 만든 산책로를 걷는 방문객들의 모습이 땅에서도 보였다. 이 수퍼트리에는 총 22만6천개의 나무가 심어지어 있고, 관개수로(灌漑水路) 역할을 한다고 한다.  

▲ 하늘의 정원 전망대 (사진^모니카 류 제공)

싱가포르를 상징하는 3개의 카시노 호텔 타우어가 운하 저수지 건너편 해변에 자리하고 있다. 배 모양으로 조형된 ‘하늘의 정원’ 전망대를 머리에 이고 있는 모습이다. 무려 3에이커(약 3,672평)의 면적으로 그야말로 하늘의 정원이어서 방문객들이 산책도 하고, 수영도 하며, 고급 레스토랑에서 그들이 자랑하는 최고의 요리를 먹을 수도 있다. 이 높은 곳, 하늘 가까이에서 땅 위의 인위적 문화 공간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니 놀랍다. 그런데 주인은 미국 라스베이거스 샌즈라고 한다. 몇 년 후에는 네 번째 타워를 세울 예정이라고 한다.

하버드 대학의 동아시아 전문 교수이었던 에즈라 보겔은 30년 전 그의 저서에서 처음으로 ‘아시아의 네 마리 용(龍)’이라는 용어를 썼다. 홍콩, 타이완, 싱가포르와 한국의 발전 가능성을 시사하면서다. 그는 한국보다 중국과 일본에 관심이 더 많았다. 그러나 한국과 싱가폴의 발전상을 생각하면 그의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은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다.

싱가포르. 한때 초라하고 가난했던 어촌이 지금은 세계 IT와 무역센터를 품고 있다. 초대 총리이었던 중국계 리관류(1923~2015)의 공로라고 한다. 한국이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기 위해 더위를 참으며 열심히 일하던 그때, 그는 연평균 섭씨 25도에서 31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운 기후 때문에 업무의 효율성이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에어컨을 마음껏 쓸수 있는 정책을 썼다. 그래서 싱가포르 경제 성장의 큰 역할을 에어컨이 했다는 뒷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싱가포르의 국부로 추앙되지만, 그가 원했기 때문에 그의 동상은 싱가포르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서양인들이 개인의 자유를 중요시하는 것과 달리 아시안들은 정직하고,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정부를 원한다’(1992)고 말했던 그가 지금의 싱가포르 기반을 깔아 놓은 셈이다. 

<해외기획-인도네시아 기행문(2)> 주식과 채권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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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모니카 수필가
기사입력 2025-03-26 [17:45]

▲ 삼푸콩 사원 (사진=류 모니카 제공)     ©울산광역매일

인도네시아 자바 섬의 사마랑에 들렸다. 여기에는 삼푸콩(三保洞) 이라 불리는 중국 사원(사진=삼푸콩 사원)이 있다. 약 9, 800평 부지에 자그마한 여러사원들과 함께 있다. 그중 제일 웅장하고, 오래된 사원이라고 한다.

 넓은 마당에는 14세기에 이곳을 방문했던 명나라의 쟁해 장군의 석상(사진=쟁해 장군 석상)이 서있다. 장군이 이 사원 근방의  작은 동굴에서 기도했던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한때는 개인 소유이었는데, 지금은 중국 출신 사람들과 여러 다른 인종들의 문화 행사가 열리는  비영리 단체 소속이다. 내가 방문했을 때는 인근의 고등학교 학생들이 호랑이 탈춤 공연을 하고 있었다.

▲ 쟁해 장군 석상 (사진=류 모니카 제공)     ©울산광역매일

혼혈이 많은 인도네시아에는 여러 인종이 어우러져 살고 있다. 그중 중국계는 1.2%정도다. 하지만 그들의 문화적 침투력은 매우 강하다. 인도네시아 어디를 가든 웬만한 도시에는 모두 차이나 타운이 있고, 중국 사원, 음식점 등이 있다. 활발한 그들의 삶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도네시아는 인종의 섞임이 보편화된 것 이외에도 6개 종교의 어우러짐이 특이하다. 87%가 무슬람 교인이고, 기독교인이 약 10%이다. 힌두교, 불교, 유교는 극소수다.  하지만 종교인들 간의 반목이 없다. 오히려 전례 예식은 서로 약간씩 섞인 퓨전 스타일이라고 한다.   

이번 인도네시아 여행에서 또 하나 배운 게 있다. 유럽 국가들이 동남 아시아와 동양에 침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향료 수출입 무역을 하던 일반 무역상들이었다는 사실이다. 17세기에 네델란드 출신 사업자가 만든 동(東)인도회사가 좋은 예이다. 나중에 부도를 내어서 망하기는 했지만 이 회사는 인류 최초로 주식과 증권의 개념을 도입해 설립됐다. 결국 서양인들만의 주식·증권 투자를 통해 인도네시아를 속에서부터 야금야금 파먹어 들어갔던 셈이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유럽인들은 인도네시아를 정치적으로 점령했다. 인도네시아는 네델란드의, 말레이지아는 영국의 식민지가 됐다. 이들은 노예제도를 자연스레 만들고, 아편을 제공해 그들의 자립 능력을 빼앗았다. 그리고 그들을 강압했다. 그리고 이 비운의 민족은 이차대전 중 3년 동안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 이때 인도네시아에는 처음으로 ‘국가의식’이 싹트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공산주의자들이 잠시 나라를 흔들기도 하였다.

인도네시아의 근대사는 한국의 근대사와 정치적인 면에서 비슷한 점이 많다. 조선과 대한제국은 오랫동안 나라의 문을 열지 못했기에 서양 문물에 어두웠고, 무역에 참여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도 국제 무역에 활발하게 참여했던 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신라 흥덕왕 때 (서기 820~840년 대) 활동하던 청해진 대사 장보고가 있었다. 일본 승려 엔닌은 장보고에 대한 연구 결과를 문서화했는데 장보고는 해적을 토벌했고, 신라의 서남해 해상권을 장악했으며 골품제도(骨品制度)에 반대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장보고는 우리나라 최초의 한국인 무역상이었던 셈이다. 

일제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난 뒤 한국은 많은 장애물을 넘어 지금은 세계가 우러러 보는 IT 강국이 됐다. 혼자 뛰어야 했던 장보고 청해진 대사와 달리 똑똑한 차세대들이 지구촌 여러 곳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반면 인도네시아는 1948년 독립 이후 개발 발전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여행 중 길을 지나다 보면 간혹 한국의 기업 광고가 눈에 뜨이고, 웃고 있는 멋진 한국 배우들의 얼굴도 보였다. 두 나라가 모두 역경을 거쳤지만 한쪽은 성공한 반면 다른 한쪽은 소기의 성과를 달성하지 못했다. 개인이나 사회처럼 국가도 결국 역사의 수레바퀴에 제대로 올라 타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운명이 엇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