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녀에게서 온 카드

오늘 아침에도 ‘소중함’으로 채워진 내가 되어 하루를 맞이 한다. 주위는 밝고 따뜻하고 조용하다.
‘소중한 할머니, 가지고 있다. 멋진 어머니의 일! 알겠어? 스칸디나비아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십시오! 재미있고 안전한 여행을 떠나십시오! 애정, 미준’
이렇게 이상하게 쓰여진 카드를 나는 아침마다 읽는다. 그리고 나의 가슴 깊은 곳을 들여다 본다. 빛과 따뜻함이 서늘하고 깊은 곳을 채워가고 있다.

아홉살짜리 큰 손녀가 어머니 날에 제 어미의 엄마인 나에게 자신이 만든 카드에 구글 (google)사전을 찾아가며, 제가 쓰는 단어들을 번역해서 쓴 글구이다. 나는 그 때 엘에이에 없었다. 접혀진 카드의 다른 면에서는 이렇게 썻다. ‘ Dear Halmoni, Have a grand mother’s day! Got it? Have a great time in Scandinavia! Have a fun and safe trip! Love, Jessica Ryoo Thomas’ Jessica와 Thomas는 내가 붙인 가명이고, 그애의 가운데 이름은 나의 성, 아니 정확히 말해서 내 남편의 성이다.

한국말을 하는 혈통, 비혈통의 사람이라면, 이 아이가 한국말로 쓴 사랑의 문서가 엉망인 것을 금방 알아차릴 것이다. 뭐 이런걸 글이라고? 훽~ 던저 버렸을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카드에 쓴 글씨는 내 아버지의 늘 하시던 표현을 빌린다면 ‘개발 소발’이다.

나는 다시 한번 한글의 과학성에 놀라지만, 언어란 어느 정도 기본적 교육과 실습이 필요하다는 것을 실감했다. 한글은 어순이 영어와 다르다. 생각의 바른 표현은 문화가 끼치는 정서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이 아이의 한국말로 한 표현이 문화의 이질적인 면을 보여주고 있다. 참으로 외국 말이란 자꾸 쓰면서 자기 것으로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한국계 외조부모를 두고, 한국계 엄마에게서 태어난 아이이지만, 한국말을 한다던가, 한글을 쓰고 읽고 제 것으로 만들려면, 이 아이에게도 시간과 관심의 투자가 필요하다. 이미 한번 포기 한 적이 있던 터였다.

아이가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Have a grand mother’s day!” 라는 구절을 google을 통해서 직역을 하다보니 한국말의 어순에는 동사가 뒤로 간다는 것을 모르고 있던터라, ‘have’ 를 다른 단어와 붙여서 함께 번역하지를 못하고 ‘가지고 있다’ 라고 따로 쓰고 있다. 또 ‘Got it?’ 이라는 문구는 아이가 평상적인 ‘good’라는 표현 대신 ‘좋은 것 보다 더 멋진, 더 근사한’ 이라는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grand’라는 단어를 쓰고, 그점을 강조하기 위해 ‘Got it?’ 했던 것이다. 또 재미있는 것은 ‘grand’ 와 ‘mother’를 붙여 쓰면 할머니라는 뜻인데 이 두 글짜를 띄어서 써서 그 효과를 돋 보이게 했다.

다음 주, 나는 한국어 진흥재단 이사장의 자격으로 미국 중고등학교의 교장단, 교육감 팀, 한국어 교사 팀과 한국말을 배우고 있는 장학생 팀을 인솔하고 모국을 방문한다. 첫째와 셋째 팀의 대부분은 비한국계이다. 그들이 한국 땅을 밟으면서 한국문화에 대한 이해와 한국말에 대한 자신의 과제를 나름대로 풀게 될 것을 바라고 있다.

미국으로 귀국한 후, 감사의 카드를 보내 올 것이다. 내 손녀와 달리 철자법, 어순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말이다. 그래도 나는 손녀가 쓴 ‘소중한 할머니’, ‘애정, 미준’ 이라는 표현을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이 사랑한다.

 

아, 나도 저렇게 늙고 싶다

[LA중앙일보] 발행 2018/06/18 미주판 19면 기사입력 2018/06/17 16:18
그들의 얼굴은 아름다웠다. 스톡홀름 노벨 뮤지엄에 들렸을 때 노벨 문학 부문 수상자들의 스냅 얼굴 사진들을 보며 느낀 것이다. ‘아, 나도 저렇게 늙고 싶다!’라는 생각이 첫 순간에 들었다. 나 자신이 전시된 사진 주인공들의 나이대에 속하거나 더 늙었는지도 모르는데, 어울리지 않는 생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노벨 뮤지엄에 들르기 전까지 주름은 추하게 보인다는 분별 없고 습관적이며 반사적인 생각을 하고 살았던 것 같다. 이번에 노벨 문학상 수상자들의 주름진 얼굴을 보면서 주름도 멋있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그들 하나하나의 얼굴에 진 주름은 형태가 달랐다. 그래서 그런지 같은 표정도 아니었다. 같은 점이 있다면 날카로우면서도 정(精)하고 인자한 눈이었다. 말로는 설명이 어려운, 내가 본 그들의 얼굴은 정돈된 삶을 보여주고 있었다.

자신들의 삶뿐 아니라 주위의 생명들을 두루두루 끌어안고 떠들어 대는 혁명가가 되는 대신 소리 없는 혁명을 속으로 감당하며 살았기 때문일까. 모든 생명이 숨 쉬는 길목에서 동조자로, 관찰자로 세상을 일깨웠던 연륜이 보인다.

‘두 번은 없다’라는 시로 한국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1996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비스와바 짐보스카(Maria Wisława Anna Szymborska, 1923~2012) 할머니의 마르고 쭈글쭈글한 손을 포착한 사진도 있었다. 아름다웠다. 그 작고 힘없어 보이는 손으로 그녀는 세계를 일깨우는 시를 쓸 수 있었다니.

나는 감동을 자아내는 시간을 노벨 뮤지엄에서 보냈다. 한국의 주입식 교육에 비판적인 내가 주입된 지식의 보따리를 노벨 뮤지엄에서 풀었다면 말이 되는지 모르겠다. 초등학교 때 교과서에 실린 마담 큐리의 이야기를 읽고 외웠어야 했다. 그래서 큐리 부인의 결혼 전의 성(性)이 스클로브스카라는 것도 아는 터였다. 폴란드 출신으로 프랑스에 귀화했던 그녀는 물리학, 화학으로 36세, 44세에 노벨상을 받았다. 그녀의 가정에서 다섯 개의 노벨 메달을 가져갔다는 것은 역사상 없는 일이고, 그녀는 최초 여성 수상자였다. 노벨상을 받고도 여자라서, 외국인이라서 과학자, 학자의 대우를 손쉽게 받지 못한 힘든 삶을 살았다. 그러나 자신이 발견한 두 개의 동위원소 중의 하나를 그녀의 모국 폴란드를 기념하며 폴로니움이라 명명할 줄 알았던 여성이었다.

큐리 부인과 남편, 딸 아이린, 사위 프레데릭 졸리옷이 획득한 다섯 개라는 노벨상을 놓고 나는 동료 의사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런 획기적인 한 가정의 업적이 유전자 때문인지, 환경 때문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우리들의 결론은 약간의 유전자, 대폭의 환경이라는 것에 동의했다. 가변적인 요소가 있다면 외부의 압력에 의한 노고가 아니라 개개인의 자발적인 호기심, 호기심을 갖고 찾아가는 끈기라는 것이었다.

그 말이 맞는다. 나의 전공 분야에서 가끔 쓰는 물리현상 ‘브레그 피크’라는 것이 있는데 이 현상은 윌리엄 헨리 브레그 경이 발견해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그의 아들 윌리엄 로렌스 브레그는 25살의 나이에 물리학 노벨상을 받았다. 최연소자였다. 환경의 역할이 컸을 것이라는 결론이다.

나는 네 손주를 둔 할머니다. 부모들인 우리들은 아이들에게 사색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고 아이들의 롤모델이 되어 주면 좋겠다. 노벨 뮤지엄을 나오며 힐끗 보았던 달라이 라마의 안경, 요셉 브로드스키의 타자기가 내 의견에 동의하고 있었다.

현충일, 전쟁의 상흔

[LA중앙일보] 발행 2018/06/06 미주판 21면 기사입력 2018/06/05 19:36
평화로운 날이다. 5월의 마지막 월요일, 메모리얼데이. 전사한 장병들의 무덤에 꽃을 꽃아주는 풍습에서 시작되었다는 미국의 현충일이다. 이 풍습이 정확히 언제 시작되었는지,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에 대해서는 의견들이 다르다. 대충 미국 남북전쟁(1861~1865) 이후, 전사한 젊은이들을 기리는 뜻에서 남쪽과 북쪽에서, 자발적으로 시작했던, 같은 마음의 행사였던 것 같다.

남북 전쟁 이후, 미국 국내에는 전쟁이 없었다. 하지만 2차대전, 한국전, 월남전을 포함한 여러 나라의 전쟁에 가담함으로써 많은 전사자를 내었다. 그래서 미국이 메모리얼데이를 지키는 것에는 많은 의미가 있다. 뜻은 그러했지만 대부분의 현대 미국민들은 국군 묘지를 방문한다거나 전사한 장병의 묘지에 꽃을 꽂는 것에, 또 그들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에 관심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대부분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메모리얼데이는 주말을 끼고 하루를 더 놀 수 있는, 공짜로 얻는 연휴라 좋을 뿐이다.

웨스트우드에 있는 국군 묘지를 지날 때마다, 질서 정연하게 서있는 흰 대리석의 묘비를 본다. ‘저 많은 젊은이들은 누구를 위해서 죽었는가?’ 라는 생각이 든다. 나라를 위해서? 또는 지구 다른 편에서 자유를 빼앗기고 있다는 다른 어느 나라 사람들을 위해서? 그들은 자신이 왜 징병되어 가는지를 알았을까? 그들은 열심히 가르쳐 준대로 싸웠고, 나를 위협하는 나와 같은 또 하나의 인간을 죽여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죽음을 피할 수는 없었던 젊은이들이었다. 자꾸 이 죽음들이 무의미하게 생각되는 것은 나의 나이 탓인지도 모른다.

나는 대학을 갈 때까지 명절에 만두를 먹어보지 못했다. 집안의 장남, 제일 큰 오빠는 20대에 한국전에서 전사했다. 그는 두 딸과 아내를 남겼다. 나는 오빠를 기억하지 못하고, 그의 두 딸도 사진으로만 아빠를 알고 있을 뿐이다.

휴전선이 그어지고 휴전이 선포된 후 우리 식구들은 부산 피난처에서 서울 후암동 집으로 돌아 왔다. 이 때터라고 기억되는데, 엄마는 필요한 말만 했다. 말이 없었다. 엄마가 우는 것을 본 적도 없다. 엄마 얼굴에서 사라지지 않았던 어두운 그늘은 슬픔이었을까. 아픔이었을까. 많고 많은 세월도 이를 이겨주지 못했다. 엄마는 참으로 오랫동안 만두를 빚지 않았다.

전쟁의 상흔은 깊고, 크고, 오래 간다. 재활이 불가능하다. 오히려 망각은 가능할 수 있다. 누구를 위한 죽음이었나에 포커스를 맞추게 되면 잃어버린 삶에 대한 절망이 우리를 음습할 것이다.

전쟁이 없던 시대가 없었다. 2015년에도 30개 국가에서 무기를 쓰는 전쟁 혹은 충돌이 있었다고 했다. 시리아가 좋은 예이다. 내가 잘 못 세었을 수도 있지만, 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전쟁이 중국의 삼국전쟁부터 현대까지 222번나 있었다. 이 중 1000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전쟁은 2차 세계대전을 포함해 다섯 개나 된다. 100만에서 1000만 미만의 전쟁은 한국전을 비롯해 10개이다. 1000만까지 밖에 셀 줄 모르는 나는 전사자 숫자를 세다가 포기했다.

세뇌되는 집단은 이성을 잃고, 집단은 평화를 이룬다는 멋있는 슬로건을 내걸고 서로를 향해 무기를 겨눈다. 무기는 가슴을 뚫고, 보이지 않는 독가스는 숨을 거두어 간다. 누구를 위한 죽임이고 죽음이던가. 평화가 세상 전체를 채울 수 있다는 것은 허무한 꿈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오늘, 메모리얼데이에.

‘아태 문화유산의 달’에 생각하는 뿌리

미국이 월남전에 개입하면서 군의관을 전쟁터로 파견하는 바람에 미국은 자국민을 돌보아줄 의사가 부족했다. 40년도 더 전의 일이다. 외국에서 의사들을 수입(?)해 와야 했다. 나는 수입된 의사 중의 한 사람이다.

수련의 시절, 한국이 내 모국이라는 것을 알게 된 환자들은 자신이나 친척, 지인이 한국전에 참전했었다는 것, 지인 중의 아무개는 한국 고아를 입양했다는 것, 그리고 한국이 아주 가난했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곤 했다. 동양 여자 의사에 대한 차별대우였을까.

요즘 내 환자들은 나의 출신지를 묻지 않는다. 내가 한국 출신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경우, 한국 음식, 드라마, 간혹 자신의 며느리가 또는 사위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기분 좋게 자랑한다. 무엇이 우리를 차별대우의 사이클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일까. 무엇이 우리에게 사회정의의 실행을 가능하게 하는 것일까. 간단한 답이 나오질 않는다.

얼마 전 손녀들은 ‘아태 문화유산의 달’ 기념행사 공연에서 난타를 곁들인 하나북춤을 여러 꼬마들과 함께 두드리고 추었다. 손녀들은 빨강, 노랑, 검정 원색으로 조화된 농부 차림의 옷을 입고, 머리에는 띠를 둘렀다. 예뻤다. 일곱 살짜리부터 칠십이 넘은 할머니 학생들이 출연했다. 누가 시켜서 하는 ‘뿌리 교육’이 아닌, 알고 싶어서, 하고 싶어서 하는 배움의 실천이었다.

흑인 노예 수입, 중국 노동자 착취, 일본 혈통 미국 시민들의 강제 수용 등 유색인종을 향한 분별 없는 잔인한 집단 행위는 미국 역사에 오점으로 남아있다. 이 부끄러운 역사를 넘어서서 최초 동양인(일본인) 이민자가 미국 땅에 발을 디딘 5월, 중국인 노동자들을 써서 미 대륙 횡단 기찻길이 완성된 5월을 ‘아태문화 유산의 달’로 상정한 것이 1977년이었고 1978년 지미 카터 대통령이 법으로 만들었다. 일주일 동안 하던 축제를 한 달로 늘린 것은 1990년 아버지 부시 대통령 때의 일이다.

러시아 유대인 후손 스티븐 스필버그는 어렸을 때 자긍심이 부족했다고 한다. 흔히 왕따를 당해왔던 그는 자신의 유대인 ‘뿌리’를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 만드는 일을 하면서 사회의 부정의에 눈뜨게 된다.

또 부모의 이혼으로 아이들이 받게 되는 아픔에 대한 시각도 예리해졌다. 그는 자기 부모의 이혼이 아버지 때문이라 생각하고 10여 년 동안 아버지 만나는 것을 거부했다. 그러던 그는 삶의 여러 면모를 이해하게 되었고 2차대전에 참전했던 그의 아버지를 위한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만들었다.

이 영화는 국내외에서 약 7억 달러라는 수입을 올렸다. 그는 기계적인 작품의 영역을 넘어서서 인류애를 주제로 하는 많은 명화를 만들었다. 그의 일은 그에게 사회정의를 가르쳤고 자신의 ‘뿌리’를 찾게 했다. 많은 사회사업을 하고 있는 그는 유대인인 것이 자랑스럽다고 말한다.

우리의 아이들이 부정의를 볼 줄 아는 인지의 눈, 남의 고통에 동참할 수 있는 가슴을 갖도록 도와주자. 비록 무엇이 우리에게 사회정의의 실행을 가능하게 하는지는 모르더라도, 어떻게 하는지는 알 수 있지 않겠는가. 연약하게 시작된 ‘뿌리’가 내 가족이나 민족만을 위한 ‘뿌리’가 아니라 인류를 위한 ‘뿌리’로 건강히 자리를 잡아갈 수 있기를 어머니 날, 어린이날이 있는 오월에 ‘아태 문화유산의 달’을 얹으면서 바라본다.

‘좋은 의사’란?

김인순 중앙일보 기자와 한 인터뷰 2018.5.

카이저병원의 모니카 류 방사선 암 전문의는 의사는 항상 자신을 업데이트해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의학적 실력은 기본, 환자의 마음도 헤아려야
천직 사명감없이 부와 명예 위한 선택은 안돼
창의적이고, 지속적 열정 있어야 진정한 의사

한인 부모의 바람 중 하나가 자녀가 의사가 되는 것인데 과연 지금 미국 병원에서는 의사를 채용할 때 어떤 조건을 주로 보는지 궁금해진다. 미국에서 큰 종합병원의 하나인 카이저병원에서 의사 면접 위원회(job interview committee)의 한 멤버로서 참여하는 모니카 류 방사선 암전문의에 좋은 의사의 조건이 무엇인지 채용할 때 어떤 조건들을 보는지 들어 보았다.

-지금 미국의 큰 종합병원에서는 의사채용을 어떻게 하고 있나.

“병원의 특성에 따라 선호하는 조건이 다르다는 걸 먼저 말하고 싶다. 대학병원이나 국립보건국 국립항암연구소와 같이 리서치를 하는 곳에서는 학구적인 면에서 업적이 많은 의사를 선호한다. 이런 의사를 고용함으로써 새로운 리서치를 계속해 나갈 수 있게 되고 연구비를 나라나 큰 기업에서 따 올 수 있는 기회도 마련되기 때문이다. 대학병원은 아니지만 큰 그룹으로 어떤 특정의 전공 치료 프로그램이 있는 곳에서는 그 분야에 보다 많은 임상실험 경험이 있는 의사를 선호한다. 일반적인 종합병원에서는 환자 치료 경험이 많으면서 업데이트된 테크놀로지나 최근 개발된 약이나 기술에 익숙한 전문의일수록 환영한다. 또 대학병원과 연관되어 그 대학의 전공의를 가르치는 임상 외래교수 자격을 가진 사람을 선호한다.”

-어떤 절차를 따르나.

“미국은 공정함을 모토로 삼는 나라이기 때문에 반드시 먼저 의사를 고용한다는 공고를 한다. 이 공고를 보고 의사들이 서류를 제출한다. 제출서류는 자신의 이력서추천서면허증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이 같은 서류를 받는 특수한 과가 병원에 있어서 서류심사를 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해당되는 과의 과장이나 과장비서에게 통고하면 과장을 위시한 동료의사들이 모두 서류를 리뷰하게 된다. 동료의사들이 모두 다 서류를 보는 이유는 그 사람과 함께 일해야 하기 때문이다. ‘좋다’는 의견이 모이면 그때 인터뷰를 잡는다. 만일 이력서에 의과대학 다닐 때부터 리서치를 해서 논문발표를 해왔고 활발한 레지던트 시절을 보냈다는 내용이 있다면 유리하다. 큰 병원에서는 5~6명을 뽑아 면접 커미티를 만들어 함께 들어가 지원자와 인사를 나눈 후 각자가 원하는 질문을 다 다른 각도에서 하게 된다. 지원자는 이때 진실하고 참신한 삶을 살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인터뷰는 얼마나 걸리나.

“몇 시간으로 끝날 수도 있지만 며칠 동안 계속되는 경우도 있다. 30년 전 카이저병원에 면접을 왔을 때 이틀 동안 기존 의사들을 만났고 그들이 환자를 볼 때 먼 발치에서 보고 나의 의견을 발표하기도 했다. 또 내가 종양 방사선 전문의다 보니 투머 보드(tumor board)에도 참석했다. 반면 산부인과 전문의인 남편은 과장과 만나는 것으로 인터뷰가 끝났다. 최종적으로는 병원장을 만나 채용이 결정된다.”

-과마다 기준을 삼는 의사의 자질이 따로 있나.

“물론 있다. 예를 들어 사람 만나서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는 성격의 소유자가 병리학이나 방사선과를 택했다면 개인적으로 힘들 것이다. 병리학자라면 사람이 아닌 사람의 몸에서 떼어낸 질병부위를 보고 슬라이드를 보고 진단을 내리는 일과를 보낸다. 방사선과는 환자의 몸을 찍은 사진만을 본다. 사람 대하기를 즐겨하는 성격은 환자를 직접 만나서 하는 임상적인 과를 택하는 것이 의사인 당사자나 환자에게 좋다. 반대로 내성적이고 수줍음이 많은 사람은 직접 환자를 보지 않아도 되는 의료 분야가 더 적성에 맞을 것이다. 30년 동안 병원에 있으면서 개인적으로 느낀 것은 내과전문의들은 조용하고 학구적인 사람들이 많고 수술을 하는 외과계통(일반외과 정형외과 신경외과 산부인과 비뇨기과 등)은 적극적이고 활달하다.”

-일반적으로 고려하는 의사의 성격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

“인터뷰하면서 얼마 전부터 차별대우를 방지하는 뜻에서 가족사항 질병 여부 성의 선호도(gender preference) 등과 같은 질문은 못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인터뷰를 하면서 그 사람의 성격을 많이 알게 된다. 가장 고려하는 부분은 그 사람이 팀 플레이어인가 하는 점이다. 독불장군으로 혼자 뛰어가는 스타일은 곤란하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 만해도 방사선 암치료(수술)를 할 때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명이 하나의 팀을 구성하여 함께 환자를 치료해야 한다.”

-30년 전과 비교할 때 요즘의 의사들이 취업 면접에서 무엇을 우선 순위로 두나.

“나와 같은 이민 1세대에는 취업 인터뷰할 때 ‘질적인 삶’은 옵션이 아니었다. 좋은 사람들과 큰 메디컬 그룹에서 함께 ‘일’하는 것이면 족했다. 그러나 요즘은 세대가 달라졌음을 느낀다. 가장 먼저 샐러리를 묻고 그 다음은 휴가기간이 얼마인지를 묻는다. 그 다음에 보험혜택 등의 순서이다. 일을 택하는데에도 ‘질적인 삶’에 관심이 많아졌다. 보기 좋고 이상적이라 생각한다.”

-의사들의 이직은 어떤가? 어떤 때에 의사를 그만두나.

“이것 역시 개인적인 경험으로 이야기할 때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뒤늦게 발견하거나(대부분 의대생일 때 탈락한다)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서 더 이상 의사로서의 삶이 행복하지 않을 때 병원을 떠나는 것 같다. 우울증으로 의사를 그만두는 경우도 있다. 의사 자살률은 정확히 나와있지는 않지만 일 년에 약 50명 정도라고 한다.”

-지금 의사를 지망하는 한인들에게 선배로서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

“왜 의사가 되려는지 자신에게 묻는다. 흰 가운이 멋있어 보여서? 의료봉사를 해보니 좋아서? 물질적으로 잘 살아서? 부모가 원해서? 이런 것 때문이라면 재고해 보길 바란다. 진정으로 의사가 되고 싶은데 실력이 부족하다면 그때에는 희망을 버리지 말고 계속 해보길 바란다. 인생을 90세로 볼 때 몇 년정도 좀 늦게 가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노력해서 부족한 부분을 시간을 갖고 나의 계획에 따라 채워가면 된다. 남과의 경주가 아니다. 의과대학 코스는 정말 힘들다. 그러나 의사가 된 후에도 지속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의사라는 직업은 ‘숭고한 천직’이기 때문에 언제나 창의적인 마음으로 계속적인 열의가 없이는 우선 본인이 행복할 수 없다. 환자를 위해 항상 자신을 업데이트 시켜나가야 하는 것이 의사라는 직업이다. 그래서 또한 도전해 볼 만한 직업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