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움의 혜택

‘할머니가 바르는 이 립스틱 때문에 할머니한테서 좋은 냄새가 나?’ 작은손녀가 묻는다.
내가 대답하기 전에 큰손녀가 재빨리 말한다. ‘할머니는 향수를 뿌려!’라고.

손주들이 나의 화장품에 흥미를 갖고 있는 것은 그 애들이 내가 사는 환경과 다른 환경에서 자라기 때문일 것이다. 큰딸의 아이들인 이 세 녀석들은 단순한 분위기에서 길러지고 있다. 아이들의 엄마인 나의 큰딸은 얼굴에 화장품을 바르지 않는다. 한국사람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맨얼굴로 직장엘 다닌다. 필요한 물건은 온라인으로 구입하고, 일요일 아침에는 파머스 마켓에서 채소와 과일을 산다. 이렇게 사는 것이 손주들에게는 노멀이다.

이 꼬마들이 남편과 나랑 함께 지나야 될 때가 있다. 제 집에서는 금지령이 내린 일들을 할 수 있는 공간에 오니 좋을 수 밖에 없다. 손자가 할아버지와 닌텐도 게임을 시작한다. 두 손녀는 나의 악세사리 서랍을 정돈해 준다고 자기들 방식에 의해서 정리를 해 놓는다. 그 결과, 내가 적시에 물건을 찾을 수 없게 되기도 한다. 때로는 볼연지, 아이 세도우, 립스틱을 발러본다. 아이들은 인간의 피부는 보호가 필요하다는 것을 화장품을 갖고 놀다가 배운다. 또 색갈의 다양함을 보고, 두가지나 세가지의 립스틱을 섞어서 새로운 색상을 만드는 체험도 한다. 상품화 된 색갈이 아닌 나만의 색갈을 내어 화장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래서 손주들은 남과 달리 보이는 것도 괜찮다는 것을 터득한다.

너무 자유분망한 어린시절을 지나도 문제지만, 규제되고 억제된 환경에서 주입된 지식을 받아 먹으며 성장하면 이에 따른 부작용도 있다. 나도 그랬다. 때로는 괴로웠고 자신에 대한 확신을 잃을 때도 있었다. 단단하고 투명한 벽을 깨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시행착오를 겪으며 살아 가는 우리, 역시 다를 바 없는 환자들이 내 앞에 있다.

아이들은 부모가 열어 주는 창문을 통해서 세상을 보고 또 열어주는 문을 통해서 세상으로 나아 간다. 문은 많아도 열리는 문이 몇 개 없을 수도 있다. 닫힌 문 밖의 세계는 ‘좋지 않다’고 입력되기 쉽고 궁극적으로 이것은 ‘틀리다’로 둔갑 할 수 있다. 쉬운 예를 들어 본다. 어떤 음식이던지 과식하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을 가르치기 보다, 전혀 금지를 한다면 어느 지점부터 그것들은 ‘나쁘다’가 되고, 그런 음식을 먹는 것은 ‘틀린 행위’라고 인식되기 쉽다. 닌텐도 게임이 나쁘다고 가르치기 쉽지만, 닌텐도 게임을 젊었을 때 부터 많이 해 온 남편은 복강경 수술의 대가이다. 그가 기계를 다루는 손놀림의 정확함이나 결단을 내릴 때의 신속함은 게임을 통한 간접경험에서 얻은 것으로 생각된다.

어떤 작은 경험이, 미세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사물이 우리의 성장과정에 상상력을 동원한다. 상상력은 자유로움을 허락한다. 자유로움이 자긍심을 갖게 하고 두려울 수도 있는 나의 길, 남이 가지 않은 나만의 길을 갈 수 있게 할 것이다. 가르쳐 지지 않은 세상물사가 자주 뉴노멀로 닥아오니 우리는 세상을 보고 받아 들일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은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몰랐던 것, 보지 못했던 것에 이질감을 갖지 말고 세상을 대하고 나의 길을 만들어 갈 수 있기를 바란다. 아이들도, 환자들도.

오지 않는 연하장

요즘은 우편으로 전달되는 중요 서류가 거의 없어 오피스 도서실 안에 설치 된 우편함은 그 의미를 많이 잃었다. 그래서 우편함을 돌아보지 않고 지나치는 새로운 습관이 붙었지만, 지난 달, 그리고 새해로 접어 든 지난 주 우편함을 매일 들여다 보곤했다.

연하장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텔마 할머니의 연하장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텔마는 삼십 여 년 전, 내가 뉴욕 주 엎스테이트 주립대학 병원에서 수련을 끝내고 전문의가 되어 카이저 병원에서 일 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만난 환자이다. 당시 중년이었던 그녀는 유방암 진단을 받은 터였다. 나의 동료 전문의와의 만남이 힘들고 깔끄러웠다 한다. 중키에 맑고 점잖아 보였던 텔마는 말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다른 소견을 받기 위해 두번째 전문의를 청구를 했다는 것은 그녀의 강인한 내면을 말해 준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텔마가 만났던 당시의 나는 트리플 마이노리티 (triple minority: 세가지 비주류 조건)를 대표하는 여자의사, 동양 여자, 젊은 의사였다.

하나의 암 덩어리가 유방에 있다고 유방 전체를 절제할 필요가 없다는 연구가 많이 발표되고 있던 때였다. 단순히 크기에 의존한 암의 단계를 우선적 중요 정보로 보았던 당시, 그녀의 암은 2단계에 미치고 있었다. 그러나 유방의 크기와 암 크기의 비율이 신체에 큰 변형을 주지 않고도 좋은 수술을 할 수 있다면 2단계 크기의 암이라 해도 완전절제를 피할 수 있다는 의학 정보도 많이 보급되고 있던 터였다. (필자 정보: 지금 같으면 우선 키모테라피를 해서 암 덩어리를 줄여 주는 방법을 쓴다.)

그 뿐 아니라, 의사를 포함한 제 삼자에게 ‘추하게’ 보이는 일그러진 육체의 변형 가능성이 있다 해도, 환자 자신이 그러한 정보를 이미 알고 이해하며 또 원한다면 환자의 의사를 존중해야 한다는 사고 방식이 뜨기 시작하던 때 였다. 즉 모든 정보를 의사가 주지만 결정은 환자가 하도록 하는 것이 윤리에 맞는 것이라는 것을 의료계는 터득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더 더욱 당시 내가 확인 했던 것은, 미(美)에 대한 관점은 지극히 주관적이라는 점이었다. ‘모양새가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이유만으로 완치율이 동등한데, 완전절제의 의견을 고집하는 것은 미성숙한 태도였다.

텔마가 힘들었던 점은 그녀를 본 동료 남자 의사의 ‘의료 가부장적 태도 (medical paternalism)’ 이었다. 과거에 가부장적 (家父長的) 환경에서 아버지들이 가족들의 의견에 아랑곳 하지 않고 모든 결정을 아버지 마음대로 내렸다는 것에서 유래된 말이다. ‘당신이 내 아내라면 유방 완전절개를 하라 할 것입니다!’라는 의견에 그녀는 고마워하기 보다는 좌절했다. 대화의 길을 남겨 놓지 않은 선언이었다. 물론 의사들은 최선을 다해 정보를 정돈해서 의사 자신의 견해를 환자에게 전달하려 노력하지만 너무 열정적으로 휘말리다 보면 객관적 자세를 잃을 경우도 있다.

텔마는 완치되었다. 유방 부분 절개 후 방사선 치료를 받았다. 그 후 은퇴하여 엘에이 동부 인랜드 쪽 은퇴마을로 이사했다. 그리고 매 년 연말이 되면, ‘아직 이 세상에 있어요.’ 라고 한 줄의 소식을 써서 카드를 보내오곤 했다.

텔마는 이 세상에 없는 것 같다. 답장을 쓸 연하장은 오지 않았다.

새해 인사

모두 건강하시고 댁내 매사 형통하는 2018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저희는 ‘세배 세리모니’로 새해를 시작했습니다. 저의 글에 쓰여 있는 그대로 말입니다.
그저 바삐, 다람쥐 챗바퀴 돌듯이 살다보니, 제일 귀한 사람들, 바로 내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얼마나 중요한 사람들인지를 알리지 못하고 지내왔던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맏절을 하며 서로에게 마음 속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사랑을, 배려를, 존경을 표현하기로 했습니다. 좋았습니다. 젊은이들도 좋아했고, 서로 감사하는 마음들을 다시 찾아 앞으로 내어 놓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저 ‘알겠거니…’ 하지 말고 알려주는 생활 방법을 취하고 싶습니다.

그 사이 저에게 떨어진 ‘한국어 진흥재단’ 이사장이라는 새로운 임무 때문에 무척 바빳습니다.

한국어 교사 연수를 주관하였지요.
전국에 있는 공립 중고교 한국어 교사들을 모아 연수를 하는 일인데
올해의 토픽은 ‘How to use Technology in Korean Language Classroom’이었습니다.

참으로 필요한 토픽으로, 그 성과가 좋았고 long term 성과는 더 좋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또 작년 한 해 동안 7개의 한국어 반을 신설했습니다. 마지막 두개의 학교는
San Diego, Poway District에 있는 D39 이라는 공립학교이고,
또 한 학교는 Nevada, Las Vegas에 있는 DPPS Agassi Campus 였습니다.
DPPS 란 Democracy Prep Public School 의 약자입니다.
99%의 학생들이 유색인종이고, 저소득층 학교이지만
안드레 아가시의 영향으로 학교가 잘 돌아가고 있더라고요.

제가 직접가서 MOU 에 사인을 해야 했습니다.

어떠든,

이제부터는 자주 저의 웹사이트에 글도 올리고 여러분들과 소통하는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새해 첫 토요일 아침,
캘리포니아, 엘에이에서,

류 모니카 올림

‘세배 세리모니’

설날이라는 이름을 받은 날이 있어서 좋다. 생일이나, 대보름, 추석이라는 명절을 피해 왔던 내가– 변했다.

올해 설날, 이젠 부모가 되어 제 아이들을 돌 보고 있는 딸들, 조카들 가족과 함께 떡국과 빈대떡을 만들어 먹을 생각을 하니 기뻣다. 새벽 꽃 시장에가서 꽃을 사오고, 집을 가꾸었다. 크리스마스 디너 세트를 치우고 동양식 그릇들로 교체했다. 꼬마들이 바닥에 모여 앉아 떡국을 먹을 수 있게 다듬어 만들어진 나무 밥상도 펴 놓았다. 그들 자리 앞에 작은 간장종지, 앞 접시, 예쁜 떡국 그릇, 한국식 수저를 놓아 준비했다.

그냥 지나가는 말이지만 나는 종이컵이나 종이접시를 쓰지 않는다. 환경에 좋지 않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지만 실상 난 잘 차려진 상차림이 좋다.

한국서 이곳에 연수하러 온 두 친구들의 아들과 가족들, 친지, 아이랜드에서 다니러 온 조카가족들 까지 꽤 붐비는 떡국 행사가 되었다.

될 수 있으면 한복을 입자고 제의했다. 딸들과 사위들은 결혼 때 만든 한복이 있고, 손주들은 친구가 보내 준 당의, 도령모등 아주 화려한 옷들이 있다. 그러고 보면 모두 단벌 신사들이긴 하다. 그런데 보니, 남편은 한복이 없었다.

남편은 한복 샤핑에 함께 가고 싶어하지 않았다. 몇 년에 한 번씩 행사가 있을 때마다 들러 한복을 마련하곤 했던 곳을 찾았다. 그곳에 가면 한국 비단을 구경하는 기쁨도 있다. 둘둘 말아 진열장에 곱게 뉘어져 있는 한국 비단은 아름답다. 화려한 색갈, 교묘한 무늬는 감탄 할 만 하다. 여러 색갈의 조박지들을 이어 만든 상하 한 벌의 옷이 잘 어울려 준다는 것이 희안하다.

고대에 전투복으로 쓰였다는 쾌자를 골랐다. 쾌자란 입는 사람에 따라 고위층으로 또는 하졸로도 보일 수 있는 옷이라는 해석이 있다. 쾌자는 두루마기 처럼 생겼지만 소매가 없다. 그래야 싸울 때 거치장 거리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관심을 갖고 본 쾌자의 앞면과 뒷면 끝자락 부분에는 붓으로 흘려 그린 듯 보이는 풀잎 모양의 패턴이 있었다. 전체적으로 약간 푸른 빛이 도는 비둘기 색이 나는 완성품이었다. 거의 모든 쾌자가 그렇듯이 등쪽 겨드랑이 선 중앙에서 부터 아래로 스플릿이 있었다. 그래서 움직일 때 펄럭인다. 꽤 멋있어 보인다. 남편도 편안해 했다.

떡국을 먹기 전에 우리는 ‘세배 세리모니’를 했다. 우선 어른들이 딸, 사위, 손자 손녀들 앞에서 먼저 서로에게 절했다. 사랑한다는 말도, 존중한다는 말도 하지 못하고, ‘알고 있겠지….’ 하면서 살아 온 우리들이다. 그래서 절하는 중에 서로를 생각하자 모두 동의했다. 의외로 젊은애들도 그 아이디어를 좋아했다. 자신들의 어려움을 서로 감지했던 터였나?

꼬마들이 어른들에게만 하는 세배가 이어졌다. 아이들 조차도 깊숙하게 바닥에 까지 엎드리면서 천천히 절해 주었다. 급히 일어나지 않는 모양이 좋았다.
한번도 유통된 적이 없다는 새 돈으로 준비한 세뱃돈을 봉투에 넣어 어른과 아이들 모두에게 선사했다. 아이들은 5불, 어른들은 10불. 작은 선물이지만 이것이 주는 의미를 잃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그들이 매일을 감사하며 살면 좋겠다. 그래서 그들이 뿌리는 삶의 향기가 멀리 멀리 퍼져 나가 주었으면 더 좋겠다.

도장, 볼펜 그리고 환자

아버지의 글 앞에 선다. 내리 방향으로 화선지에 쓰신 글은 시(詩)인 것 같다. 아버지가 흘려 써 내려간 시는 열네자의 한문자(漢文字)로 되어 있다. 초서로 쓰신 부분이 있어 전부를 이해하기는 어렵다. 무슨 뜻일까. 언제 쓰셨을까?

우측에서 좌측으로, 또 위에서 아래로 써 내려진 두 줄의 시. ‘작일쾌청(昨日快晴)….인생(人生)…부침(浮沈)…’ 이라고 되어 있다. 인생은 예측할 수 없고 덧 없다는 뜻 같다. 끝 막음한 시의 왼쪽에 조금 작고 가늘게 또 한 줄의 흘려서 쓰신 글이 있다. 완성한 년,월 같고 아버지의 호(號) 처럼 보이는 세 글짜가 작품을 끝내고 있다.  그리고 그 밑에 두개의 정사각형 인각이 상하로 찍혀 있다. 빨간 색이다. 재어 보니 4 센치미터의 도장이다. 시의 영역 밖, 화선지 오른쪽 위에 훨씬 얇고 긴 사각 형태를 한 또 하나의 빨간 인각이 찍혀 있다.

아버지의 호(號)가 새겨진 도장 안의 한문을 해독하지 못해 아버지의 호가 무엇인지 터득하지 못한다. 부끄럽게도 말이 되지 않지만, 사실이고 그래서 안타깝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형제들과 유품을 정리하다가 갖게 된 것이었다. 빛 바랜 흑백사진들과 함께 오랫동안 묻혀 있었다. 한국 전통 양식이 아닌 서양식으로 플랙시 글라스 액자 안에 화선지를 띄웠다. 멋 있다. 작품은 동양화만 모아 놓은 곳에 걸려 있다.

막내로 늦게 태어 난 나는 아버지와 가깝지 않았다. 아버지의 필묵을 본 기억이 없다. 아버지가 서예를 쓰시는 모습도 기억하지 못한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아버지의 흔적이라고는 두 장의 서예품과 옥편(한문사전)이다. 아버지는 책, 노트북, 연필, 만년필 같은 학용품을 귀히 여기시었다.

그 작품 앞을 지나칠 때 마다 느린 붓의 움직임과 붓날림의 힘을 느낄 수 있다. 끝막음을 하시며 떨군 검은 먹의 모습이 멋있다. 무슨 생각을 하시며 쓰셨을까. 분명 아버지는 새벽에 먹을 갈고, 붓을 잡으셨고 천천히 선을 그으셨을 것이다.

그러던 아버지. 그리고 나.

지난 한 달 동안 미 동남부, 한국을 거쳐 일본을 다녀와야 했다. 여행 중 어느날 지나치던 쇼윈도에서 빨간 펜을 보았다. 되돌아 가게로 들어 갔다. 고인이 된 미국 여배우의 이름을 붙여 만든 한정판의 볼펜이란다. 글래머였던 그녀는 단순한 디자인의 빨간 원피스, 한 줄 짜리 아코야 진주 목거리를 즐겼다고 한다. 그녀는 단순함이 아름다움을 더 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었나보다.  그래서 볼펜은 빨갛고,  클립은 진주 하나로 끝막음 되어 있다. 펜은 싸지 않았다.

어이 없게도, 아버지 생각이 나서 피식 웃었다.

아버지는 저 쪽 세계에서 자주 나에게 되 돌아 오신다. 새벽 침묵 속에 움직이는 연필의 나무 향기 가운데. 아버지의 표현대로 ‘개발소발’ 마구 써가는 내 필기 가운데. 검은 옷칠한 일본 가옥 처마에. 또 친구가 선사한 인각도장과 함께.

인각도장은 친구에게서 선물로 일본 여행 때 받은 것이다. 도장을 한참 들여다 본다. 아름다운 무늬가 이리 저리 흐르고 있는 돌, 제법 무거운 옥돌에 나의 한국이름이 한문으로 새겨져 있다. 아버지의 인각 만큼 큰 네모진 도장이다. 나는 과연 ‘이소승다(以小勝多)’의 마음가짐으로 붓과 먹을 써서 마음을 표현 할 수 있을 것인가. 내 환자들의 이야기를 수필이 아닌 시로 써 낼 수 있을까. 나는 아버지처럼 한문으로 화선지에 획을 긋지는 못 할 것이다. 대신 아름다운 한글로 획을 그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