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군기자 마리 콜•빈(Marie Colvin): 거울을 보지 않고 창문을 열고 세상을 보았던 여인 2012

나이가 들어가면서 느끼는 것은 젊어서 실감하지 못했던 진리에 눈뜨게 된다는 아이러니다.

마치 세상이 변해 내가 알게 된 것 같은 착각을 하지만 사실 진리는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었다. 이제야 느낀 아이러니 중의 하나는 좁은 한계 속에 있는 나의 삶이다. 이 같은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시리아에서 종군 기자로 일하다가 전사한 영국 선데이 타임스 소속 마리 콜빈에 대한 기사 때문이다.

마리 콜빈 같은 기자들이 없었다면 나같은 사람이 어떻게 세상의 실상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나는 내가 만든 좁은 세상 안에서 우물안의 개구리 처럼 그것이 전부인양 살아갔을 것이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직업 정신을 갖고 천직을 잘 수행하였던 여인이었다.

기자들이 우리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세계 방방곡곡에서 기자들은 가서 보고, 체험하고 세상을 알린다. 그 세상사라는 것은 바로 사람이, 자연이, 동물이 만드는 것이다. 암담한 전쟁뿐만 아니라 예술, 정치, 의학, 교육분야 등에서도 우리의 사고 범위를 넓게 해준다. 불현듯 그들의 역할을 다시 생각하게 되면서 감사한다.

되돌아보면 나는 미디어를 통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어렸을 때 당시 일어나고 있는 세상사를 뉴스로 들었고 비록 어렸지만 저녁 식탁에 둘러 앉아 세상사를 논하는 토론에 끼어들곤 했다. 큰오빠는 거의 집에 없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작은오빠와 언니는 AFKN 영어 라디오 방송을 듣곤했다. 어느 날 이 방송을 듣던 작은 오빠가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 소식을 식구들에게 알렸다. •라이•프 메거진 사진으로 중국의 ‘붉은 혁명’을 실감나게 이해하기도 됐다.

기자들은 미국의 대통령이 행하던 부정을 사회에 고발했었고, 베트남 전쟁의 참혹상을 세상에 알렸다. 벌거벗은 채 폭탄을 피해 울며 달리고 있는 베트남 여자 아이의 사진, 머리에 총부리가 겨눠진 채 공포에 떨고 있는 베트콩의 얼굴 모습을 보도해 세상을 잠에서 깨어나게 했다. 아프리카 수단의 극심한 기아상태를 사진으로 보도했다.
언론은 우리들의 잠자고 있는 의식을 깨운다. 부정과 분쟁, 불공평, 사회폐단 등을 생각하게 한다. 그런 면에서 언론의 공로는 크다. 대표적인 기자가 마리 콜빈이다.

체첸(Chechen 또는 Chechnya), 코소•보(Kosovo), 시에라•리온(Sierra Leone), 짐바브웨(Zimbabwe), 스리•랑카(Sri Lanka), 동티모르(Timor-Leste) 등의 전쟁터에서 일어나고 있는참상을 보도했다. 전쟁은 인류에 대한 범죄임을 고발했던 마리 콜•빈이다. 왼쪽 눈을 스리랑카 내전을 보도하다가 잃었는데 성형수술을 하지 않고 검은 안대로 가리고 다녔다. 13년 전 동티모르 내전 때는 여자들과 아이들 1500명을 구명하는데도 기여했다고 한다.

AP통신은 마리 콜•빈을 2차대전 전후에 나치 다차우(Dachau) 강제수용소에 대한 보도를 했던 당시의 종군 여기자 마르•타 겔혼(Marta Gellhorn)에 비교해 치하했다. 마르•타 겔혼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등의 소설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어네스트 헤밍웨이의 세번 째 부인이었다. 헤밍웨이도 젊었을 때는 기자였다.

영국의 한 여기자는 마리 콜•빈을 ‘거울을 들여다 보지 않고 창문을 통해 밖의 세상을 보았던 여인’이었다고 표현했다.

남들에게 비쳐질 내 자신에 연연하지 말고 창문을 열고 세상을 내다 보는 뜻있고 알찬 삶을 살아야겠다. 무모함이 그치지 않는 세상도, 평화를 이루는 세상도 결국 우리들이 만들어 가는 것이다.

미국의 기둥 타이틀 나인( Title IX) 2012

오렌지카운티에서 있었던 세계 한민족 과학자들의 모임에 참석했다. ‘IT 및 바이오’를 주제로 했던 이 모임엔 500여명의 뛰어난 한국인 과학자들이 참여했다. 나는 마지막 날 여성 과학자들이 함께 하는 순서에 참석했다. 의료 관련 회의만 참석해 왔던 나로서는 이런 모임이 생소하고 서먹하기는 했지만 이공계 수재들이 어떻게 세상에 기여하고 있는지를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내가 이 회의에 참석하게 된 동기는 아주 수동적인 것이었다. 잘 아는 선배가 참석을 권유했는데 내 입장에서는 선배에 대한 예의로 또 그 선배와 점심이나 하면서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에 응낙했던 것이다.

그날 회의에서 만난 한인 여성과학자들은 학구적일 뿐 아니라 창의력도 많아 보였다. 대부분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과학자이면서 장관을 지낸 분, 의사이면서 현직 국회의원인 분도 있었다.

나에게 흥미로웠던 주제는 에너지 보급과 관련된 원자력에 대한 이슈와 여성 과학자들의 사회 진출에 관한 것이었다. 그중 후자에 대해 언급해 보려고 한다.

이공계 대학 대학원 박사 과정에 진학하는 여성 숫자가 한국, 미국 모두 상승일로에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한국의 예를 들면 이공학 석사 학위를 받은 여성의 분포가 1980년에는 클래스의 17%였는데 2011년에는 50%로 늘었고 박사학위 프로그램에도 전체의 37.5%가 여성이라고 한다.

그러나 학위 취득 후 여성의 사회 진출은 한국과 미국 모두 졸업 숫자보다는 적은데 이 점에서는 한국이 미국보다 더 뒤떨어진다. 흥미로운 것은 이공계 여성의 활동이 미국에서는 활발히 진행되고 보조되고 있다는 것이다. 2008년 미국의 실직률이 6.6%일 때 의학을 포함한 이공계 여성 박사들의 실직률은 비교적 낮아서 1.7%에 지나지 않았다고 미국 국립과학기구가 보고했다.

어떻든 미국이 이 분야에서 여성과 유색 인종의 고등교육 박사학위 취득률 또 취업 부분에서 꾸준히 발전하는 건강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타이틀 나인(Title IX)’ 덕분이라고 보고 있다. 정부지원을 받는 모든 교육기관은 교육의 기회를 성별에 따라 차별할 수 없다는 내용을 담은 법안이 ‘타이틀 나인’이다. 이 법안은 40년 전 닉슨 대통령 재임시 제정 선포된 것으로 사회적으로 마이노리티 취급을 받는 여성이나 유색인종들에게는 아주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지난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미국은 어느 때나 다름없이 세계 최고의 자리를 지켰는데 언론은 이것이 여성 운동선수들의 공로라고 지적한 바 있다. 미국이 딴 전체 금메달의 2/3(29/46), 전체 메달의 60%(58/103)를 여성 선수들이 획득했던 것이다. ‘타이틀 나인’이 없었다면 여학생들은 배구팀, 트랙팀, 수영팀도 쉽게 만들 수 없었을 것이다.

‘타이틀 나인’ 초안을 쓴 사람은 미국 최초의 유색인종 그것도 동양 여인으로 여러 번 상원의원을 지낸 일본인 3세 펫지 다케모도 밍크였다. 대학 때 차별대우를 받았던 그녀는 의사가 되고 싶었지만 원서를 제출한 22개의 의과대학 어디에서도 여자라는 이유로 (어쩌면 동양계라는 이유로?) 그녀를 뽑지 않았다. 이런 불평등한 세상을 고치려고 법대를 갔고 정치인으로 많은 일을 했다.

‘타이틀 나인’의 정신은 가정에서부터 연습되어야 한다. 가부장적 제도를 벗어나 가족들이 수평적 관계를 갖고 살아가면서 사회정의에 대한 자유로운 토론, 편견의 타도를 연습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어떤 체제적인 이유로든 소외된 사람들이 보이면 이들을 염두에 두며 살아갈 때 ‘타이틀 나인’의 아이디어는 자연스럽게 강화될 것 같다. 사회가 바뀌면서 차세대들은 더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링컨의 땅에 세워진 학교들 2013

남편과 나는 지난 주 남부 테네시주(州)를 시점으로 중서부 일리노이주를 거쳐 미시간주(州)까지 자동차 여행을 했다. 일리노이를 지나는데 ‘•링컨의 땅’이라는 팻말이 있었다. 처음으로 그런 싸인이 고속도로에 있는 것을 본 것이다. ‘•링컨의 땅’이라…

미국은 각 주(州)마다 특징에 따라 별명이 있다. 예컨대 캘리포니아의 또 다른 이름은 ‘골든 스테이트’다. 주(州)의 닉네임대로라면 남편과 나는 ‘봉사자의 주(테네시)’부터 북상해서
‘대호수의 주(미시간)’까지 ‘링컨(대통령)의 땅(일리노이)’을 거쳐 여행을 한 셈이다.

테네시의 별명은 예상외였다. ‘봉사자의 주’라니? 테네시주 멤피스에는 로큰롤의 왕, 엘비스 프레슬리의 저택인 ‘그레이스랜드’가 있다. 전세계에서 수많은 방문객들이 찾기 때문에 ‘엘비스 프레슬리의 주’라고 불려야 타당할 듯 싶은데, ‘봉사자의 주’라고 불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1812년 독립전쟁 때 테네시 주민들이 많은 전쟁 사상자들을 자진해서 돌보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번 여행에서 우리 부부가 새삼 생각하게 된 것은 ‘링컨의 땅’이라는 일리노이주의 별명이다.

켄터키에서 태어난 •링컨 대통령은 정치의 본거지를 일리노이로 삼았다. 링컨 대통령이 남북전쟁을 종결짓고 노예들을 해방시킨 위대한 사람이라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훌륭한 업적이다.

이에 버금가는 또 하나의 업적이 있다면 그가 승인했던 ‘모릴 법안(Morill Act)’이었다.

모릴 법안은 발의자인 저스틴 스미스 모릴 하원의원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원래 명칭은 ‘모릴 토지-보조연구자금 단과대학 법안(Morrill Land-Grant Colleges Act)’이다. 주립대학의 건립을 쉽게 했던 법으로 상하의원의 각 지역구 당 3만에이커의 국유지를 아무런 대가 없이 주고 그 토지에 대학을 설립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당시 미국은 남북전쟁에서 많은 젊은 층을 잃었다. 경제는 나빳고 살아 돌아온 젊은이들에게 고등교육을 싸게 시킬 방안이 필요했다. 기계공업이 세상을 바꾸려 꿈틀거리고 있었던 때이기도하다.

막대한 국가소유의 땅을 공짜로 나누어 주자는 법안의 통과는 쉽지 않았지만 결국 관철되었다. 인준된 이후에는 몇 차례 수정과정을 거쳤다. 교육자금이 모자라는 경우 받은 땅을 팔아 쓸수 있게도 했다.

이번 여행에서 들렸던 일리노이 대학도 그 혜택을 받은 대학이다. 정부에서 받은 48만 에이커의 땅 중 38만 에이커를 1867년에 에이커 당 66센트에 팔아 ‘공업 대학’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법에 의해 미 전역에 106개의 주립대학이 건립됐다. 사립학교도 모릴 법안의 혜택을 받았는데 코넬대학과 MIT 대학도 그 예다. 미국 고등교육의 토대를 닦은 모릴법은 아직도 미국 독립 이후 제정된 법안 중 가장 생산적인 법으로 평가받는다.

모릴법의 통과는 국민 교육이라는 대전제에 공감한 ‘통합의 정치’ 덕분에 가능했다. 비록 일년 정도밖에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했던 •링컨 대통령, 끈기 있게 법안의 필요성을 외친 모릴 상원의원, 이에 공감했던 동료 정치인들이 만든 위대한 역사다.

훌륭한 자양분이 밑거름된 ‘•링컨의 땅’에 단풍은 퍽이나 아름다웠다.

Pacem Eternis 2013

미국의 메모리얼데이, 한국의 현충일, 6•25사변기념일, 게티즈버그 전쟁 150주년 기념일도 지났다. 엊그제 처음으로 LA국립묘지에 갔었다.

작년 이맘 때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큰 오빠와 오빠처럼 젊은 나이에 전쟁에서 생명을 잃은 이들을 한국사람의 입장에서만 생각하면서 글을 쓴 적이 있다.

글의 내용 중의 일부는 친정 가족들에 대한 사연이었다. 미국 이민으로 인해 홀로 남겨진 큰 오빠의 빈 무덤 이야기였다. 비록 이름만이 오빠의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그곳은 나에게 국가라는 공동체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고 생명의 고귀함을 되새겨 주는 곳이다.

그 글을 친구 경희가 읽었다. 경희는 소아 정신과 전문의사로 나와의 인연은 길다. 중학교 1학년 때 만난 우리들은 고등학교, 의과대학을 거쳐 인턴 생활까지 같은 곳에서 했다. 경희의 부군 이 박사님은 또 다른 고교동창의 오빠이자, 내 남편의 의과대학 선배이다. 민족주의자이신 이 박사님은 현충원에 자주 가신다고 한다. 가게 되면 오빠의 무덤을 찾아 보시겠다고 연락이 왔다.

경희가 보내온 이 박사님의 전갈은 나에게 맑은 청량제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것은 나에게 표현하기 어려운 깊은 평화를 허락했다.

이 박사님의 뜻을 들은 지 한 해가 지났다. 엊그제 LA국립묘지 방문은 이 박사님의 사회봉사를 생각하면서 이루어 진 것이라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 분은 이미 세상 사람이 아닌 군인들을 현충원에서 만나고, 누구보다 그들을 가슴에 품으며 살아 오신 것이다.

LA국립묘지는 웨스트LA에 있다. UCLA 캠퍼스 근방 세펄•베다와 윌셔가 만나는 지점 바로 동북쪽에 114 에이커의 넓은 땅에 자리잡고 있다. 내가 그곳을 찾은 이른 오후는 평일이어서 그런지 한가했다. 일렬로 단정하게 세워진 흰 대리석 묘비들. 묘비에는 모든 것을 일축한 한 줄의 이름과 참가했던 전쟁(들), 태어난 해, 사망한 해가 적혀있을 뿐이었다.

누구를 위한 죽음이었을까. 여기 뭍혀있는 미국의 참전용사들은 거의 모두가 외국에서 싸웠고 외국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데 친지한테서 2006년 사진 부문에서 퓰리처상을 받은 타드 하이슬러의 사진과 글이 전송되어 왔다. 사진은 2005년 이라크 전쟁에서 전사한 해병대 소위(小尉) 제임스 케이시와 관련된 것으로 •럭키 마운틴 뉴스에 보도됐던 사진들이었다. 성조기로 감싸진 전사자의 관, 그 관에 엎드려 오열하는 만삭의 젊은 아내, 배안의 태아를 관에 대고 아이와 죽은 영혼이 대화하게 하는 모습, 관 앞에서 남편이 좋아하던 음악을 노트북으로 틀어 놓고 밤을 함께 보내는 젊은 아내, 그리고 부동자세로 밤을 새우며 이 모든 것을 지키고 경의를 표하고 있는 예복차림의 해병대원의 모습 등이었다.

빌리 래이 사이러스는 큰 오빠나 제임스 케이시처럼 전사한 젊은이들을 노래 ‘어떤 이들은 전부를 주었다(Some gave all)’로 기리고 있다. 그의 노래는 빌보드에 최장기록을 세운 바 있다. 모든 것을 남을 위해 준 이들이여, ‘파쳄 에터니스!(Pacem Eternis)!’ 영원한 평화가 그들과 우리에게 있으라!

입양 고양이 네로 2015

‘네로’가 갔다. 네로는 내가 입양했던 고양이 중 하나인데 작고 까매서 ‘네로’라고 불렀다. 어려서 듣던 이탈리아 동요 ‘검은 고양이 네로’에서 따온 이름이다.

나는 한 동안 고양이 구조활동에 참여한 적이 있다. 어느 날 오•피스 근방에 있는 홈디포에 갔다가 집 없는 여러 마리의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는 사람을 우연히 만났다. 그 때 이런 홈리스 고양이들을 개인적으로 구조하는 사람과 또 그런 활동을 하는 단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모두 인도적인 차원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었고 대부분은 과외로 자신의 시간과 돈을 쓰고 있었다. 그들은 구조한 개나 고양이가 동물보호소에서 안락사 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고 했다. 구조하고, 불임시술을 해주고, 예방주사까지 맞게 한 후 최선을 다해 입양을 시키는 일을 하고 있었다.

미국에는 1만3600개의 동물보호소가 있다. 동물보호소는 19세기 말 뉴욕, 보스턴, 필라델피아에서 개를 임시로 맡기기 위해 생긴 것에서 유래한다. 요즘은 전국적으로 매년 약 760만 마리의 동물이 보호소를 거쳐가고(개 400만, 고양이 340만) 이중 약 36%가 안락사를 당한다고 한다(지역에 따라 30~70%). 일정 기간 안에 입양이 안 되면 건강하더라도 죽인다. 우리는 이것을 안락사라고 하지만 실상 병들어 죽여지는 동물은 그리 많지 않다.

시(市)나 카운티에서 안락사를 시키는 근본적 이유는 빠듯한 예산 때문이다. 또 미국 가정의 30~50%가 이미 한 두 마리 이상의 애완동물과 살고 있어 이들을 품어 줄 가정이 많지 않기 때문이기도하다. 길거리에 나돌아 다니는 이 녀석들의 출산조절만이라도 할 수 있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인데 참으로 난감하지 않을 수 없다. 고양이 예를 들어보자. 새끼 고양이는 약 6개월만 자라면 임신이 가능하고 1년에 두 번 임신할 수 있다. 한 번에 4~6마리 새끼를 낳을 수 있으니 피임을 시키지 않는다면 기하급수적으로 숫자가 늘어날 것이다. 개는 1년에 한 번이다. 그러므로 홈리스 동물들의 임신조절만 해 줄 수 있다면 이 악순환을 깰 수 있다.

어떻든 네로가 우리 식구가 되었을 때 녀석의 나이는 알 수 없었지만 한 번 잡혀서 불임수술을 받은 흔적이 있었다. 오른쪽 귀의 자그마한 부분이 절제되어 있었다. 잡은 고양이는 불임시술을 해 주고 풀어 줄 때 귀 일부분을 짤라 표시 해 주는 것이 통례로 되어있다. 그러니까 네로는 TNR(trap-neuter-return 포획-불임수술-돌려보내짐) 프로그램대로 잡혀 불임수술을 받았지만 입양되지 못해 다시 길로 풀려 났거나 입양 후 어떤 사연이 있어 다시 버려진 것 같았다.

동물애호협회와 동물관리국이 지원하는 TNR프로그램은 미국 이외에 영국, 이탈리아, 캐나다에서도 시행되고 있으며 다시 풀어 준 동물의 수명은 그다지 나쁘지 않다고 한다.

나는 네로 이외에도 여러 마리의 홈리스 고양이를 입양시키고 직접 입양도 했는데 그 과정에서 국가가 정한 법, 그리고 그 법을 준수하게끔 돕는 관리기관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64년 한 여성이 쓴 ‘동물 기계 (Animal Machines)’이라는 책이 영국을 흔들었고 1년 후인 1965년 지구상 최초로 영국에서 동물복지를 위한 위원회가 조성되었다는 것도 배웠다.

네로 같은 생명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내용을 다음 기회에 더 쓰기로 하고 네로 녀석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접으며 오늘을 마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