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열게 한 북클럽 2012

작은 딸은 매년 크리스마스에 프레첼 만드는 파티를 한다.

프레첼은 유럽에서 유래된 일종의 빵으로 매듭 모양으로 되어 있다. 쿠키라고 부르기는 어려운 것이 전혀 달지가 않기 때문인데 이탈리아의 수도원에서 시작된 것이라고도 하고 남 •프랑스 또는 독일에서 시작되었다고도 한다. 딸네는 프레첼의 종류를 그 해의 기분에 따라 변형해서 만드는데 이번에는 두어가지 통상적인 것 이외에도 김치 프레첼도 만들었다.

파티에서 젊은이들과 어울려 한 해 동안 있었던 마음에 남는 이야기, 슬프거나 아팠던 일 특이하고 재미 있었던 일들을 나누었다. 딸의 친구들은 주로 작가 희망생들이거나 선생 또는 박사과정 중의 젊은이들이다. 어떤 면에서는 극좌 극우파들이다. 오염되지 않아 싱싱하기만 하다. 이들도 나이가 들면서 극우 극좌에서 중도를 걷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날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는 ‘쇼펜하우어 북 클럽’을 만든 제이슨에 관한 것이었다. 나도 10여년 전 제이슨의 집에서 그를 한 번 만난 적이 있는데 둘째 딸 아이와 제이슨의 여동생 •로라가 친구였던 것이다. 그 때 본 제이슨은 표정이 없었고 집은 썰렁했다. 나중에 제이슨과 •로라의 집안이 겨울날 고드름처럼 춥게 느껴지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이 아이들의 아버지는 아이들이 어렸을 때 겨울 등산을 갔다가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뉴잉글랜드 지방에 눈사태 예보가 있었는데 제이슨의 아버지는 이를 무시하고 길을 나섰다가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랜 기간 마음의 문을 닫고 지냈던 제이슨이 북클럽을 만들고 인터넷에 회원모집 광고를 올린 것이 2년 전이었다. 제이슨만 알고 있던 가입 조건은 남자는 못 생길 것, 여자는 예뻐야 할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모든 종류의 책을 적당한 시간 안에 읽어내고 분해하며, 토론에 참여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신청서에는 이력서와 사진을 동봉하여야 했고 멤버들은 진지하게 책을 선정해서 읽고 토론하였다. 영화로 만들어진 책은 함께 영화를 보았고 다시 작품평을 했다고 한다. 이런 과정 중에 제이슨은 맘에 꼭드는 아가씨를 만났다. 그리고 그들은 올해 결혼했다.

깊이 알지는 못하지만 쇼펜하우어는 박애정신을 가진 순수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점철된 잦은 실패와 사회적 소외가 비관적인 안목의 대가(大家)로 만든 것이 아닌가 싶다.
‘결혼을 한다는 것은 나의 권리를 반절로 깎고 의무는 갑절로 올리는 것이다’ 라든가 ‘결혼이란 눈을 가리고 뱀이 우글대는 주머니에 뱀장어를 꺼내리라는 희망을 갖고 손을 넣는 행위’ 또 ‘인생은 운영비가 커버되지 않는 비즈니스이다’라고도 하였다.

제이슨은 북클럽을 통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룹 •테라피를 받은 셈이다. 그룹 테라피를 표현하자면 손잡이가 긴 숟가락으로 자신의 입에 음식을 퍼 넣을 수 없는 것을 옆의 사람이 멀찌감치에서 먹여 주는 것과 같다.

‘쇼펜하우어 북 클럽’ 회원들은 쇼펜하우어가 한 발자국 더 나아가지 못하고 끝냈던 비관의 삶과는 달리 영양밥, 사랑의 반찬을 제이슨에게 먹여주었던 것이다.

‘여보’라는 말

나는 ‘여보’라는 말을 생각하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이 말은 특별한 의미를 갖고 나에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내가 세상에서 단 한 사람에게만 주는 이름이고 또 부르는 이름이다.

내 주위에는 남편이나 아내에게 ‘아무개 씨!’하고 부르는 부부들이 많다. 또 요즘은 ‘오빠!’ 또는 ‘자기야!’ 하고 부르는 것이 유행인 모양이다. 우리 부부도 그렇게 세속 이름이나 별명으로 서로를 부르던 시절이 있었다.

내가 밥과 빵을 싫증내지 않고 좋아하는 것이나 바하의 음악을 늘 듣는 것도 바로 비슷한 의미가 아닐까 생각된다.

무의미한 것 같기도 하고 평범한 것 같으며 때로는 지루한 것 같은데, 없으면 찾고 먹을수록 들을수록 편하고 좋다. 왠지 안심하고 편안하게 나를 내어주고 접할 수 있다.

‘여보’란 말은 평범한 이름 안에 깊고 맑은 사랑의 샘을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여보란 말은 평범한 말이 아닌 것 같다. 세상에서 한 사람만 빼고 나를 여보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나를 모니카라고 부르는 사람은 그 한 사람만 빼고 전부라도 과언이 아니다.

‘여보’라는 말.

처음 만났을 때 가졌던 차갑고 예리했던 이성도, 뜨겁고 부풀었던 열정도, 사랑함으로 느꼈던 아픔도 이제는 내가 매일 먹는 밥처럼 그렇고 그렇다. 그러나 그 여보라는 말은 소망을 갖고 언제나 나를 아껴주고 있다.

그리고 그 여보는 연륜이 지어 준 편안한 주름, 희끗희끗 한 반백의 머리, 여전히 깊고도 차가운 듯 싶은 눈으로 소망을 함께 하자고 말없이 말한다.

세상을 가득 채워주는 햇빛처럼 나는 하루를 평화로 채운다.

테스의 인생역전

테스는 중국계 아버지와 •필리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필리핀 출신의 간호사이다. 20여년 전에 내가 일하는 곳으로 전근해 온 테스는 주간 8시간 근무가 끝나면 또 다른 병원에서 밤 일을 해 왔다.

그렇게 테스는 30년을 두 직장에서 •풀타임으로 일해 온 놀라운 여자이고 엄마이다.

테스의 삶이 바뀐 것은 그녀가 31세였을 때라고 한다. 어느 날 아침에 깨어 보니 옆에서 자고 있던 남편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고 했다. 그들은 동생에게서 입양한 아이 한 명과 자신의 아이 네명 모두 다섯 명의 자녀를 기르고 있었다. 제일 어린 아이가 한살이었다고 한다.

어느 날 아침 첫 시간에 시술을 해야 하기에 일찍 오•피스에 도착 한 적이 있다. 당일 수술방 설치 준비는 테스가 하는데 테스가 보이지 않았다.

테크니션이 “선생님 테스는 정확히 15분 정도 기다려야 깰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무슨 이야기인데?”

“아~ 그럴 일이 있습니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밤 일을 다른 병원에서 끝내고 일찍 도착하는 테스를 함께 일하는 테크니션들이 잠을 자도록 도와주고 테스가 출근해야 하는 시간이 되면 깨워 주곤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테스가 1분이라도 더 쉴 수 있게 동료들이 배려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집에서는 테스 대신 큰 딸이 동생들을 거두었다. 큰 딸이 대학에 입학해 집을 떠났을 때 둘째가 자리를 메워 주며 온 식구들이 서로를 도왔다.

큰 딸은 졸업장을 받을 때 단상에서 관중을 향해 돌아서서 한손엔 졸업장을 또 다른 손엔 꽃다발을 높이 쳐들고 많은 관중 속 어딘가에 앉아 있는 엄마를 향해 “엄마! 드디어 우리는 해 냈어요!”하고 외쳤다고 한다.

그러한 큰 딸의 모습은 빅스크린으로 방영됐다고 한다.

아버지가 딸을 사위에게 건네는 것이 통례인 결혼식에 딸의 아버지 즉 ‘남자’의 자리가 비엇으니 테스로서는 시동생이 마땅히 그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딸은 “엄마가 받을 영광의 자리인데 왜 삼촌이 해야 돼요?”

웨딩 마치에 맞추어 단상을 향해 딸 손목을 잡고 걷던 테스는 눈물이 흘러 앞이 안 보였단다. 딸은 테스의 귀에대고 ‘엄마 울지마…’하고 속삭였다는 것이다.

테스는 오늘도 두 곳에서 일한다. 지금은 집에 아무도 없기 때문에 오히려 환자를 돌보는 것이 즐겁고 편하다고 말한다. 이번에는 큰 딸이 간호사로 일하고 있는 뉴질랜드에 다니러 갔다가 몇십년을 못 갔던 고향 •필리핀도 다녀오기로 했다. 무척이나 하고 싶었지만 못 했던 성지 순례도 계획중이다.

젊어서 홀로 되었던 테스의 하루 하루의 삶은 집념과 소망, 아이들의 이해와 협조, 자신의 희생과 신앙 없이는 불가능 했을 것이다. 또 테스를 돕는 동료들과 친구들이 있었으므로 그녀의 삶은 무겁지만은 않았던 것같다.

테스가 가졌던 소망과 집념은 돈으로 산 것이 아니었다. 테스 자녀들의 이해와 협조도 돈으로 산 것이 아닌 공짜였다. 테스가 보여준 희생과 아이들을 향한 사랑도 아이들에게 거져 준 공짜였다. 친구 동료들이 보여준 관심과 배려도 테스가 공짜로 받은 것이었다. 테스가 가졌던 아니 지금도 갖고 있는 신앙도 그냥 주어진 공짜였다.

세상 일에는 공짜가 없다. 그러나 인생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많은 귀한 것들이 있는데 그것은 모두 공짜이다.

•루게릭 병과 싸우는 여인 2011

여름밤이 무척이나 울적하다. 오랜만에 틀어 놓은 CD에서는 옛날 가수가 오래된 노래를 눈치없이 열창하고 있다. 왜 이렇게 울적함을 털어 버릴 수 없을까. 쉬이 잊혀지지 않는 무거움이 있다.

그렇다. 그것은 내가 오늘 •루게릭(Lou Gehrig)병에 걸린 환자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여인이 나에게 온 것은 •루게릭병 때문이 아니었다. 여인에게 유방암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루게릭병을 지난 2년간 앓아온 여인의 남은 생은 약 2년으로 보고 있었다.

제법 덩어리가 큰 암 때문에 유방 절제 수술을 받았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외과 의사는 모두 떼어내는 것을 피하고 환자가 힘들지 않을 정도 만큼만 수술을 했다. 가슴을 도려 낸 공간에 실리콘 백을 넣고 봉합을 했다. 옷을 입으면 유방 절제를 한 것처럼 보이지 않게 하는 수술까지 동시에 한 것이다.

그녀는 비록 휠체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자신을 잘 가꾸고 있었다. 옅은 화장이 보기 좋았다. 목에는 간단한 목걸이가 걸려 있고 입고 벗기 쉽게 성글게 짠 보라색 상의를 걸치고 반바지에 샌들을 신고 있었다. 페디큐어도 했지만 마비된 두 다리는 혈액순환이 잘 안 되어 그녀가 입은 보라색 상의처럼 붉고 푸르렀다.

그녀의 눈은 정결하고 애가 타거나 욕망이 있어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는 가끔씩 눈물이 고이는 듯 하더니 그냥 사라지곤 했다.

진찰이 끝난 후 나는 그녀와 그리고 그녀의 딸과 함께 마주 앉았다. 루게릭병이 꽤 빨리 진행되고 있어서 6개월 전에는 다리만 약했었는데 지금은 손에도 마비가 오는 중이어서 글을 제대로 쓸 수가 없다고 했다. 그래도 요리는 그럭 저럭 가끔씩 하고 남편과 아이들이 집안의 일과를 대부분 담당하고 있다고 했다. 욕조에 앉혀 주면 목욕도 스스로 하고 대소변도 실수가 없다고 했다.

나는 유방암에 대한 방사선 치료를 추천하지 않았다. 살아 있을 날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그녀에게 남은 시간을 유용하게 보내면 좋겠다고 말했을 뿐이다.

그녀는 거부하지 않았다. 또 남은 시간을 이용해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나처럼 그녀를 잠깐 보았던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글로 적어 보내겠다고 했다. 그 말을 하면서 비로소 그녀는 울었다. 곁에 있던 딸도 울었다.

암에 걸린 많은 사람들은 암에서 살아 남을 수 없다고 스스로 단정해 버린다. 그것은 옳지 않은 정보의 결과이다.

그러나 이 여인이 겪는 것처럼 조직학적으로 지극히 양성인 병이 암보다 훨씬 급성적이고 악성일 경우가 있다. 유방암보다 •루게릭병이 오히려 그녀의 생명을 단축시키고 나날의 기능을 좀먹고 있는 것이다.

루게릭병. 한국말로 ‘근(筋) 위축성(萎縮性) 측생(側생) 경화증(ALS)’으로 번역된다. 1939년 뉴욕 양키스 야구팀 선수인 루 게릭이 이 병으로 쓰러진 것에서 유래된 병명이다.

보통 정신도 멀쩡하고 대소변 보는 것에 지장이 없고 감각신경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지만 운동신경이 죽어서 결국 2~3년의 투병 끝에 환자는 삶을 마감하게 된다.

진찰실을 떠나는 그녀에게 “허그해 주고 싶은데 괜찮아요?”하니까 “아이구 선생님 ALS에 전염되시려고요!” 한다. 우리는 농담했고 웃었고 포옹을 했고 그리고 헤어졌다.

이 저녁 마음이 자꾸만 깊이 가라 앉는 것은 저 처량 맞은 음악 때문인가. 내일 오피스에 가면 그녀에게 안부 전화를 걸어 보리라.

콧수염의 달 11월

미주 LA 중앙일보 2016년 11월 24일 목요일,                                                                                                                                                             추수감사절

삼 주간 오피스를 비우고 돌아오니 동료 의사들이 콧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아니, 콧수염은 왠 일?” “모벰버 운동의 달이니까! 어때, 우리 멋있지?” 내가 일하고 있는 카이저 병원에서는 올해 처음으로 11월이 ‘남성 건강의식 고취의 달’ 운동에 동조하는 의미에서 남자 의사들이 콧수염(또는 턱수염까지도) 을 기르고 11월 말에는 투표로 가장 멋진 수염쟁이(!) 의사를 선정한다고 이멜이 돌았다.

새로 생긴  합성단어 ‘모벰버(movember)’ 란 모스타쉬(moustache 오스트리아 영어. 미국 철자는 mustache ) 에서 따 온 “mo” 에  November(11월) 에서 가져온 “vember” 가 합쳐진 단어이다. 1999년 남 오스트렐리아에서 시작됬고 2004년에 ‘모벰버 자선단체’가 생겼다. 여러나라에서 동참하는 이 운동은  전립선암, 고환암에 대한 경각심을 일으키고 일반적인 남성건강에 대해서도 올바른 태도를 고무하기 위한 것이 목표이다.

소수의 뜻이 있는 사람들이 의견을 모아 만든 동아리 활동이 세계적인 운동으로 퍼지는 것을 보면서 이번 여행에서 감명을 받았던 어쩌면 일맥상통 할 지도 모르는, 내가 새로이 알게 된 두가지 역사적 사건을 나누고 싶다.

네델란드, 독일, 오스트리아, 항거리, 체코 공화국 어디를 가도 예술품들이 널려있었다. 예술품을 전쟁에서 보호하기 위해 만든 ‘예술품 저장 창고’를 독일 뉴렘베르그 성(城) 지하에서 구경했다.  사암층을 까고 중세기 때 24 미터 지하에 만든 맥주 저장 창고를 이차대전이 터진 지 일 년 후 1940년 부터 과학기구, 조각품, 예술품, 교회의 스테인드 글라스들을 옮겨 공습을 피했던 곳이다.

몇몇 사람의 아이디어가 역사적인 일을 해 냈다는 점에서 존경스러웠다. 그렇지만 대학살이 저지러 지고 있을 때 생명을 구하는 작업에 손대지 못했다는 점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다못해 대 성당 앞 성모와 아기예수 상이 있는 바로크식 분수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들은 나무로 집을 짓고 시멘트 지붕을 덮어서 이 예술품도 살렸던 사람들이 아닌가?

어느 날 황금색, 붉은색으로 물든 낙엽들이 너부러져 비 맞고 있는 길을 걸었다. 구르몽 (Remy de Gourmont 1858-1915) 의 ‘낙엽’이라는 시를 기억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축축히 어둡게 젖은 코블스톤 작약길에  ‘스텀블링 블럭(stumbling block)’이라 불리우는 작은 동철판이 비에 씻기어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허리를 굽혀 동판에 쓰인 글을 읽는다.  ‘ 이곳에 (아무개) 살다….생년월일…(날짜)끌려나가다…학살당하다(캠프이름)’

‘스텀블링 블럭’이라는 말의 일반적인 의미는 우리가 하고저 하는 일을 방해하여 멈추게 하는 일이나 사물을 뜻하는데 이 경우도 아마 그런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그저 무심코 제 갈 길을 걸어가고 있다가 우연히 발에 밟히는 작은 동판이 우리가 가던 길을 멈추게 하니까.

독일은 국가차원에서 유대인과 세계에 대학살의 만행을 이미 사죄했다. ‘스텀블링 블럭’은 일반 시민들이 만들어 개인적인 사죄를 하고 희생자들을 기억하자는 운동이다.  끌려나갈 당시 살았던 집 앞 길에 가로, 세로 10센티 동판을 작약돌위에 얹어 작약돌을 대치한다. 건터 뎀닉(Gunter Demnig)이라는 독일 미술가가 1992년 시작한 일이 지금은 유럽 18 나라에 약 5만 개의 블럭들이 코블스톤을 대치한 바 있다고 한다.

내가 ‘예술품 저장고’에 이견을 갖고 있듯이 ‘스텀블링 블럭’에 대한 이견도 있지만 어떤 작은 희망과 용기가 커다란 물결이 되어 우리를 변화시킨다. ‘모벰버’이다.

추수감사절에 감사할 일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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