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픈 업] 결혼, 이혼, 졸혼, 사후 이혼 2024.12.19

‘아이고, 진저리난다! 이 인간 죽고 나서도 애 먹이네!’

중년에 남편을 잃은 먼 친척이 있다. 그 친척은 여성이다. 사연인즉, 남편이 소천하고 나서도, 시집 식구들은 남편이 살아 있었던 평소처럼 명절, 제사 때 몰려와서(!), 명절 상 차리라 하고, 기일에는 제사상에 ‘콩 놔라, 팥 놓아라.’ 한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시동생, 시누이들은 환갑을 넘은 나이임에도, 죽은 형제의 부동산이 얼마나 되는지 과도한 관심을 두고 간섭하는데, 욕심을 부리는 것 같다고 했다. 슬퍼할 틈이 없는 그녀다. 죽음 준비 없이 죽은 남편이, 청산하지 못하고 남긴 빚을 감당하여야 한다고 한다.

일본 사람들은 부부 중에 한쪽이 죽은 후에 이혼이 가능하다고 하는데, 그러한 법이 한국에도 있으면 좋을 것 같다. 일본의 사후 이혼, 다른 말로 ‘인척(姻族) 관계 종료 신고’ 추세는 2012년부터 작년까지, 11년 사이에 약 43%나 증가했다고 한다.

죽었는데, 왜 이혼이 필요할까?

바로 나의 친척이 겪는 것 같은 어려움을 배제하려는 뜻으로 법제화하였다고 한다. 일본은 근래 세대 차이와 세대 간 인식 차이가 크게 두드러지면서 필요한 개혁을 앞서가며 시행한 것 같다. 일본 민법(728조)에 따르면 생존한 배우자가 ‘사후 이혼 신고서’를 관공서에 제출하면 인척 관계를 쉽게 끊을 수 있다. 죽은 후 일정 기간에 서류 제출을 해야 한다는 시간제한은 없고, 배우자 부모의 동의도 필요 없다고 한다. 일반적 이혼과 달리 배우자의 유산 상속이나 유족연금 수급에도 배우자 부모에게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다.

홀아비보다 과부가 많은 것은 동양, 서양이 비슷하다. 여성의 평균 수명이 남성보다 길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후 이혼 신청자는 대부분 여성이고, 일반적으로 가족 봉양은 여성에게 요구되므로, 배우자 가족에 대한 봉양 부담이 과부에게 돌아올 수 있다. 한국처럼 말이다.

한국에서 졸혼은 불문율로 받아들이는 상황이고, 이혼은 법적으로 허락하지만, ‘사후 이혼’이라는 법은 아직 없다. 미국에 살면서 ‘사후 이혼’이라는 단어조차 접한 적이 없다. 이혼 중에 상대편이 죽으면, 유언 검인 법원으로 케이스가 넘겨지는 예는 있다.

이 친척이 겪고 있는 ‘일’은 남의 일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가까이 있다. 이 ‘일’이란 한 종목만이 아니다. 우리 삶에, 아니 죽음을 삶의 일부라고 가정할 때, 살아서나 죽음의 산을 넘고 난 후에라도, 반드시 이해해야만 할 중요한 이슈이다. 기간 내에 플랜 해 둘 과제이다. 죽음의 준비, 나와, 내 가정의 영역에 대한 정의, 이에 따른 의무, 지켜야 할 권리 내지는 예의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선 이혼을 생각해 본다. 미국 건강 센터 (US National Center for Health) 통계에 의하면 일 년에 약 450만 명이 결혼하고, 이의 42~53% 정도가 언젠가는 이혼으로 마무리된다고 한다. 이 통계는 정확한 방법으로 축출하지 못했다는 주석이 붙어 있다. 데이터 집계 방법이 완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설명은 너무 길어서 이 글에서는 생략한다. 미국인들의 이혼율이 세계 10위 안에 들지 않는 것이 좀 의아했다. 세계 인구 리뷰(World Population Review)는 조지아, 몰도비아 나라의 이혼율이 제일 높고, 스리랑카, 과테말라, 베트남이 제일 낮다고 보고했다. 나의 예측과 무척 달랐다.

흥미롭게도 나라별 이혼율은 성불평등 지수(GII: Gender Inequality Index)와 반비례한다는 것이다. 스리랑카, 과테말라, 베트남은 성불평등 지수가 4.01 이상으로 세계에서 제일 높게 계산되었다. 반대로 이혼율이 높은 스위스, 노르웨이, 핀렌드, 네델란드 같은 나라의 성불평등 지수는 아주 낮다는 것이다.

이혼율이 낮다면, 일반적으로 평탄한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가정이 많다고 생각 하기 쉽다. 그러나 이 통계에서 배울 점은 이혼율이 낮다고 행복한 결혼한 가정이 많은 것은 아니라는 것과 이혼은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경우가 많은 나라도 있다는 것이다.

이혼율은 한 해 동안 이혼한 가정 수를 1,000가정을 기본으로 계산한 것이다. 정확하게 계산하려면, 이혼한 가정들을 그들이 결혼하였던 해로 돌아가, 같은 해에 결혼한 가정 중에서 이혼으로 끝난 가정과의 비율을 따져보아야 하는데, 통계를 잡을 수 없는 불가능한 상황이다.

또 일본에선 결혼하면 아내가 남편 성(姓)을 따르는데, 현재 추세로 볼 때, 과부가 된 여성들이 본래 자기 성으로 돌아가겠다는 ‘복씨(復氏) 신고’도 증가 추세가 될 수밖에 없다. 한국은 혼인해도 여성들이 본래의 자기 성을 유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복씨 신고 같은 것은 필요 없는 나의 친척이지만, ‘사후 이혼 제도’가 없는 한국이라도 그녀 남편의 친척뿐 아니라, 모든 한국분이 알아야 할 일인지도 모른다.

이화의대 회보 77호 ‘아름다운 동행’ 인터뷰 2024.12.12.

안녕하십니까.

저는 이화의대 동창회 홍보이사 김금입니다. 이의회보 제 77호 아름다운 동행에 선생님을 인터뷰할 수 있게 되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직접 만나 뵙고 대화를 나누면서 인터뷰를 했다면 더 좋았을텐데 이렇게 서면으로 질문을

드리게 되어 아쉽게 생각합니다. 그럼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1. 바쁘신 일상에서 선생님의 건강과 행복을 위하여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우선 인터뷰 감사드립니다. 요즘 갑자기 유명세를 타는 것 같아서,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고 있습니다. 이 과정은 저를 겸손하게 합니다.

70대 후반에 들어서 있으니까, 건강이나 행복을 위한 새로운 선택이나 계획은 없습니다. 건강을 위해서는 남편과 유튜브 프로그램 중에 30분 동안 실내에서 걷는 운동이 있어서, 이를 규칙적으로 합니다. 채식을 주로 해 왔는데, 그것은 건강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동물의 권리에 대한 저의 아이들의 견해에 따르면서 30여 년 전에 시작한 것입니다.

행복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행복의 정의가 의외로 많고, 개인적이더라고요. 감사할 능력을 주십사고 기도합니다. 감사하면, 행복할 능력도 생기지요. 지금껏 열심히 살 수 있게 여건이 주어지었던 것에 감사하고, 가족, 친구들이 있었음에 행복했습니다. 주어진 일이 있었습니다. 의사로서, 글쟁이로서, 또 글 쓰고, 봉사단체에서 일했다는 것이 축복이었습니다. 여가에 친구들 만나고, 음악회에 가고, 뮤지엄 방문도 하고, 때로는 남편과 크루즈여행하고, 손주들을 만나러 타주에 또 유럽에 갑니다. 드라마 보면서 게으름도 피우고, 베스트 셀러가 나오면 사서 읽어보기도 합니다. 일정이 가득 차 보여도 바쁘지 않게 편한 나날을 꾸려가고 있으니까 행복합니다.

2. 전월화 선생님께서는 경기여고를 졸업 후 이화의대에 입학하셨습니다. 의과대학을 지원하시게 된 동기는 무엇이었습니까?

저는 뭘 모르고 살아온 사람입니다. 특별한 목표를 갖고 경기여고, 이화여대에 지원한 것이 아니고, 집안의 흐름에 따라, 대한민국의 유행에 따라, 움직이었던 중고교와 의과대학 시절이겠습니다.

내가 걸어왔던 길과 앞으로 가야 할 길을 삼(三) 막(幕) 연극(演劇)으로 나누어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위의 질문하신 부분의 시간대는 나의 뜻과 상관없이 엑스트라로 인생이란 무대에 등장했던 때이었고, 감독과 몇 번 다툰 후에 설득당하고 나서 억지로 조연 정도의 역을 맡게 된 것이 두 번째 무대라고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무대에 올라갈 때 많이 망설였습니다. 싫어하는 것을 모두 제외하고 나니까 의과대학이 남았더라고요. 의사이신 선배님, 후배들께 죄송합니다! 제가 감히 큰 뜻을 갖고 의사의 길을 가셨고, 가시고 있는 선생님들을 폄하한다고 생각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러나, 뒤돌아보면, 내가 의사의 길을 갔던 것은, 하느님의 뜻이었고, 당신의 특별한 보살핌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의대로 진학했던 것은 참으로 큰 축복이었습니다.

3. 연세대학교에서 내과 전공의를 수료하신 뒤 정신과 수련의 과정을 지나 종양방사선학 전문의를 수료하셨습니다. 선생님의 전공에 변화를 가져 오게된 과정과 이유는 무엇이었는지요?

참 좋은 질문입니다. 졸업 후에 도미해서 공부하고 귀국하여 교편을 잡고 싶었던 희망은 유신정책 선포로 외국 유학 부분적 봉쇄, 계엄령, 쿠데타 등, 정치적으로 불안정했던 당시 모국 사태 때문에 저의 전공은 미국과 한국 사이에서 바뀌었습니다. 남편의 도미는 몇 년간 묶인 상태이었어요. 전공 선택도 이에 따라 변했습니다. 미국은 7월 시작, 6월 종강인 정상적인 학기 사이클에 맞추지 못했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 없이 어디에든지 빈자리를 찾아야 하는 고충이 있었습니다. 종양 방사선학에 귀착하게 될 때까지, 시행착오가 많았지요. 몇 년을 소비한 셈이지만, 견디어 내야 할 일종의 ‘필요악’이었습니다.

내가 잠깐씩 몸담았던 내과는 무척 학구적인 전문 분야로 저에게는 반복되는 일상이 지루했었고, 재발이 잦은 정신과 환자들은 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환자들과 더불어 한 챕터를 쓰고, 다음 장으로 넘어갈 수 있는 종양 방사선학은 저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잠시지만 내과와 정신과에서 내린 뿌리는 지금까지도 살아있고 필수적인 영양분을 배달해 줍니다. 공부하는 의사, 생각하는 종양 방사선학 전문의로, 인생을 이해하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더불어 교민들을 위한 미주 중앙일보의 건강 칼럼니스트, 한국어진흥재단을 통한 외국어 교육의 중요함을 알리는 전사(戰士)가 되는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4. 선생님께서 종양 방사선학 전문의로서 도입하셨던 새로운 방사선 치료 도입과 그렇게 할수 있었던 환경에 대하여 말씀 부탁드립니다.

제가 젊음을 보내고, 은퇴했던 메디컬 그룹은 미국 내 3위 (때로는 5위, 연간 수익이 약 일천백억 원) 안에 드는 HMO(Health Maintenance Organization 건강관리기관)이었습니다.

당시, 여성 암 치료는 ‘여권신장’ 사회운동과 맞물림이 되었던 때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의학이 남성우월주의에서 미처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때였습니다. 약간 이야기가 빗나가지만, 그러한 관점에서 이화여대는 앞서가는, 참으로 훌륭한 교육기관이라고 자부심을 갖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일하던 메디컬 그룹은 변화를 받아들이는 의료계에 앞장섰습니다. 사회적으로 의료환경은 입원 치료에서 외래 통근 치료 방법으로 변해야 했습니다. 유럽은 이미 실시하고 있었지요. 치료비가 절약되고 환자들은 일상생활에 큰 변화 없이 치료받을 수 있는 이점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새로운 유방암 국부 치료와 자궁경부암 근접치료도 외래 통근 방법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을 설득하고, 그 치료법을 도입했습니다. 유방암과 자궁경부암은 그전까지만 해도 코발트 (Cobalt 60)나 시지움 (Cs 137) 동위원소를 사용해서 2~3일 동안 입원하여 절대안정 상태에서 치료했지요. 입원 치료에 따른 부작용이 없어진 것입니다. 근접치료 동위원소 소장실, 새로운 방사선 유출 방지를 위한 외래 환자 치료실 등 준비 과정에 들어가는 경비는 많았지만, 먼 안목으로 보았을 때, 장기적 표준치료에 앞장선 셈이 되었지요.

또 하나의 발전은 다분야 전문의로 구성된 ‘종양 위원회(tumor board)’를 만든 것입니다. 중요한 도구가 되었지요. 1980년부터 본격적인 맞춤 의료의 시작으로 매주 만나는 위원회에서 병리 슬라이드 점검, 엑스레이 리뷰, 외과, 항암 전문의, 종양 방사선학 전문의들이 참석해서 의견을 나누고 환자와 직접 대화를 시작하는 소셜워커, 암전문 간호사, 코오디네이터들도 함께 일을 시작했습니다.

환자는 환자이기 이전에 인간이라는 것, 환자가 자신들이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돕는 것이었지요. ‘내 몸은 내 것입니다. 내가 관리하고, 암치료도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합니다’ ‘나에게 선택권이 있습니다’…오래된 지식에 유착되어 있는 의사들에게 경종이 울렸던 때였습니다.

5. 미국에서 진료에 임하시면서 미국학교의 한국어반 개설에 관심을 가지게 된 동기는 무엇이었는지요?

고백하자면, 나는 봉사하는 환경에서 자라지 못했습니다. 저희 큰딸이 중학교에 진학했을 때, 그 학교는 전교생, 교사, 가족 모두가 함께 사회봉사에 참여하는 전통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봉사라는 연결고리로 당도한 곳 중의 하나가 한국어진흥재단이었고, 이 재단을 통해서 한국인의 정체성, 한글의 우수성이 한국계 미국인인 나의 DNA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렸을 때 이중언어를 배우게 되면 뇌 표면을 넓혀주고, 이것은 IQ를 평균 10점 이상 올려주고 사회인으로 성공할 확률을 높이게 된다는 의학 정보는 제가 하는 한국어진흥재단 봉사의 의미를 확인해 주었습니다.

6. 이렇게 한국어반 개설을 이루어가는 과정이 항상 쉽지만은 않으셨을 것 같습니다. 가장 기억나는 순간과 보람있었던 순간이 있었는지요?

비혈통 학생이 99%인 학교에서 한국어를 배우게 해 달라고 페티션 드라이브를 해서, 교장 선생님을 설득한 경우입니다.

7. 선생님께서는 바쁜 일상에서도 계속 글을 써오셨고, ‘희망 한 단에 얼마에요?’ 수필집을출간하시도 하셨습니다. 미국에 거주하시며서 특히 한글로 글쓰기를 계속 하시는 것과 선생님께 한글 이란 어떤 의미인지요?

한글은 매일 먹는 ‘밥’과 같습니다. 나는 영어권에서 살아온 사람이지만, 한글로 출판되는 신문에 한국 교민들에게 최신 의학 소식을 전하는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또, 저는 일기를 쓰면서 살아왔는데, 일기도 한글로 씁니다. 그러면서 숨어 있었던 저의 문학에 대한 흥미, 재질이 확인된 것입니다.

8. 데일리코리아와 인터뷰하셨던 내용을 들었습니다. 병원에서 환자뿐 아니라 직원과도 인간적으로 따뜻함을 나눠주고 계신 것 같았습니다. 젊은 의사후배들에게 환자와 직원을 대하는 태도에 관하여 좋은 말씀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의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과 환자를 향한 진실성입니다. 항상 최신 정보 의학지식을 게을리하지 않고, 겸손하면 됩니다. 겸손하면서 실력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진실을 전달하기 어려울 때도, 감미롭게 색칠 해서는 안되고, 겸손하게, 그러나 환자와 밀착하지 않고 조금 떨어져서 일하는 공정성을 지키면 좋다고 생각합니다. 환자가 혼자 걷는 외로운 여정이 아니라, 의료팀과 함께 하는 길이라는 것을 인식시켜야 하겠지요. 환자가 의료팀을 믿도록 말입니다.

9. 한국의 어려운 의료환경으로 미국 등 외국으로 진출을 하려고 하는 젊은 의사들이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미국으로 가려고 노력하고 있거나 진로를 고민하는 젊은 후배들에게 어떤 조언을 해주실 수 있을까요?

‘나’를 존중하고 사랑하십시오. ‘의사인 나’를 존경하십시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할 능력이 있습니다. 이기주의자와는 다른 의미입니다. 그 실력을 쌓고, 씨스템의 변화가 필요할 때 함께 하시고, 결단이 필요할 때, 용기를 갖기를 바랍니다.

10.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이화의 후배들과 동창회에 전하고 싶으신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애초에 큰 뜻이나 목표가 없었더라도, 살아 가면서 의미를 발견하고, 좋아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했던 저는 뭘 모르고 철없을 때 이화의 딸이 되었고, 배꽃이 날리는 과학관을 감쌌던 이화가 제 평생 함께했습니다. 인내와 사랑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화의 선배님들, 후배님들, 행복하십시오!

감사합니다. 김금미 배상

이 질문지를 받고, 답을 작성한 후, 정작 줌 회의를 시작할 때는 모든 의과대학 동창회의 임원진들이 함게 했습니다. 모두 현역에 계신 의사선생님들이라,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한 원격회의였는데, 참으로 여성 후배 의사 선생님들이 훌륭했습니다. 회의가 끝날 무렵, 후배님들이 동창회 이름으로 한국어진흥재단에 $1,000.00을 기부해 주시겠다하여서, 참으로 감동했습니다. 보통은 졸업생이 모교에 기부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이 기부금과, 고교 후배 차성규(Mrs. Bona Chung) 의 기부금을 합쳐서, 재단에 잘 어울리고 필요한 grandfather’s clock 을 사는 과정중에 있습니다. 물론 시계의 어딘가에 모교동창회와 차성규 후배님의 이름을 새기어 넣을 준비도 하고 있습니다. 모두 모두 감사할 뿐입니다. 한국어진흥재단 사옥 마련에 도움을 주신 많은 분들의 성함은 30주년 기념 책자에 들어가 있고, 이 기부금은 오픈하우스 때 발표된 것입니다.

[수필] 태어난 날에

몇 년쯤 되었다. 매년 12월이 되면, 나와 남편에게 자그마한 꽃다발이 배송되곤 한다. 짧은 노트와 함께… ‘사랑, 삶, 그리고 세상을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해요, 엄마(umma), 아빠(appa)’. 어제도 예년처럼 꽃다발을 받았다.

둘째 딸은 제 아이가 태어난 이후부터 매년, 자기 생일에 꽃을 보내온다. 제가 태어난 날을 기념일이라 여기고, 부모인 우리가 제 출생의 일부라고 여기는 것 같다. 딸의 생각도 틀린 것은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의예과 시절에 생명이 창조되는 도중에 멈추어져서 실험실에 도달한 생명 없는 생명들을 보았고 그들을 갖고 실험했다. 각각 다른 창조 시기에 있던 그들은 의과대학생들이 현미경을 이용해서 공부하도록 굳혀진 후, 마이크론 두께로 잘려지고, 염색 과정을 거친 슬라이드에 부착된 상태이었고, 어떤 경우에는 포르말린 병에 갇혀 둥둥 떠 있었다. 창조되었던 생명이 흙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과학도들에게 묵묵히 제 몸을 내어놓고 있었다. 종교적 차원과 철학적 견해를 떠나, 과학을 하는 사람이 ‘생명 옹호’ 자가 되는 것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보호받은 애초의 생명은 엄마의 자궁 안에서 약 280일 동안 자라고 때가 되면, 엄마의 몸에서 분리되어 세상에 나와야 한다. 그때 빛을 보고, 공기를 들여 마시는 순간이 있던 날을 우리는 생일로 기념한다. 말 그대로 생일이지, 생년월일은 아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생일’, 즉 ‘만들어진 날’이란 처음 창조되어 엄마의 자궁 안에 정착한 때를 쓰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정보까지 알 수 없는 우리네 형편이다. 그래도 법적으로 나이 계산에 대한 새로운 규칙이 생기기 전에 한국인들이 쓰던 나이 계산법, 즉 태어날 때 한 살인 것은 꽤 과학적이다.

생일(birthday) 와 출생일(birthdate)은 한 사람의 출생에 관련된 날을 표시하는 두 종류의 방법이다. 생일은 태어난 연도, 시간과 상관없이 날짜만을 뜻하고, 양력이나 음력을 따르는 나라, 고장, 가정이 있다. 출생일은 태어난 해, 달 그리고 날을 함께 명시하는 경우이다. 한국에서는 출생일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대신 생년월일이라고 표한다. 생일은 사람뿐 아니라, 회사, 학교 같은 기관도 창립일로 기념하고 축하한다.

출생일 또는 생일은 개인이 갖고 있어야 할 필수적인 정보로 어른과 아이를 구분한다. 우리들의 권리나 의무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성장 중인 아이는 어른의 보호가 필요하고 결정해야 할 사항이 있다면, 아이를 보호하는 보호자가 담당해야 한다. 예를 들어 보자. 성인이 되면, 학교를 다니고 싶지 않으면 내 맘대로 퇴학해도 된다. 의무교육이 적용되지 않는 나이이다. 또 성교나 결혼할 때, 허락을 받지 않아도 된다. 술, 담배, 로또 살 권리가 있다. 투표권과 공직에 출마할 권리도 있고, 운전면허도 받을 수 있다.

책임이 주어지는 법적 의무가 어른이 되면 그 효력을 발생한다. 그 예가 한국에 있는 병역의 의무이다. 의무를 회피하고 이탈하게 되면, 범죄자가 되므로 구속되고, 벌금형을 받거나, 영창 생활을 하는 일도 있다. 미국은 병역의 의무 즉 징병제가 1973년에 폐지되어, 군대 지원을 원하면 나이 확인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어른은 몇 살부터인가?

법적으로 성인이 되는 나이는 나라마다, 민족마다 다르다. 12살에서 21세 사이에 성인으로 입성한다. 미국의 경우는 주(州)마다 다르다. 보통은 18세부터 성인으로 취급하지만, 앨라배마, 콜로라도, 메릴랜드, 네브래스카주(州)는 19세부터 성인이고, 워싱턴 디시, 인디아나, 뉴욕은 21세부터 성인으로 취급한다니, 놀랍다.

어떻든, 생일이 관련된 문화 행사도 꽤 있다. 예수의 생일로 서방 국가들이 정한 12월 25일, 크리스마스는 전 세계가 축하한다. 한국은 만 한 살 될 때 ‘돌’ 잔치, 60살 때 환갑을 축하하고, 미국이나 캐나다 같은 곳은 딸이 16세가 될 때 ‘스위트 열여섯 살’ 파티를 하여 준다.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은 15세에, 필리핀의 경우는 딸은 18세 때, 아들은 21살 때, ‘데뷔’ 파티를 연다. 유태인은 12살 때 여아(女兒) 바트 미츠바, 13살 때 남아(男兒) 바 미츠바 성인식을 결혼식 버금가게 종교와 민족 의례를 합쳐서 화려하고 성대하게 치른다.

제 생일날, 꽃다발을 보내 준 딸은 남편과 내가 뉴욕주립대학 시러큐스 캠퍼스에서 혹독한(!) 수련 의사 과정을 거치고 있던 때, 편안하고 즐거운 태교(胎敎)를 받지 못하고 스트레스를 나와 함께 받으면서 세상에 나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반도의 최 북쪽, 중강진과 같은 위도에 있는 시러큐스는 강추위에, 스노우 벨트 중심지에 있어서 흐린 날이 많고, 눈도 많이 내렸다. 그 애가 태어나던 새벽에도 함박눈이 내렸다.

밤새 함박눈이 사뿐히 내려와서 세상의 더러움이나 어려움을 모두 덮어 주던 그날, 막 모습을 드러내며 밝아오던 여명에 세상은 창백하게 눈부시었다. 아이는 자라면서, 자기를 환영해 주었던 함박눈에 덮이어 티 없이 완벽했던 세상이 그렇지 못한 세상과 함께함을 배웠다. 사회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하루를 살아가는 초 중 고교 학생들을 학생 실습에서 보기도 했다. 만화소설 ‘파우어 온!’은 그래서 탄생했다. 그래도 그 애는 희망을 가슴에 품고, 세상을 처음 보았던 그날을 기념하면서, 제 부모에게 꽃다발을 보내 주었다.

중앙일보 문예난 2024.1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