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여고 54회/전 월화 (AKA Monica C. Ryoo, M.D.)
올해 2024년 ‘동창의 날’ 행사가 10월 19일에 동창회관에서 있었습니다. 모교를 떠난 지 58년이 되었고 디아스포라 한국계 미국인으로 살아온 지 반세기입니다. 이 특별한 날에 31돌 ‘자랑스러운 경기인’ 상을 모교 선후배 동문님들께서 저에게 주셨습니다. 이 수상(受賞)으로 저는 제가 살아온 길을 돌아보고 또 제가 누구인지를 숙고합니다.
재학시절 모범생도 아니었고, 인기가 있거나, 리더십을 발휘했던 제가 아니었기에, 조금 변명이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때로는 걷지 않고 뛰어넘으면서, 때로는 달리면서 나의 길을 갔습니다. 반세기를 모국 밖에서 살아온 저에게 뼛속 깊이 자리 잡은, 설명하기 어려운 한국적인 것들이 있었기에, 세상이 필요한 사람으로 살 수 있었습니다.
의업이 천업인 제가 한국어 진흥을 하게 된 것은 필란트로피(philanthropy) 사상에 입각한 것입니다. 자선(charity)는 도움이 필요한 곳에 문제 완화를 위해서 도와주는 활동이고, 필란트로피(박애정신)는 도움이 필요하게 된 원인을 찾아서 연구하고, 이에 적합한 해결책을 마련하는 것이라 설명됩니다. 교육체제가 없어서 여아들이 배우지 못했던 조선 말기에 미국 선교사들이 세운 여학교가 그 예입니다. 당시 그분들이 만든 고아원은 자선의 실천이었습니다.
필란트로피는 필로스(philos), 즉 사랑이라는 뜻의 말과 인류라는 뜻의 안트로포스(anthropos)의 복합어로, 인류애라고 번역되겠습니다. 한국어 진흥은 교육 결여에 대한 필란트로피로 미국내 혈통 2세, 3세 영역을 넘어서서, 타인종에게 세계언어 교육 혜택을 받도록 하는 활동의 일부이었습니다. 이 일에 앞장서면서 간접적 애국자가 되었습니다.
이 한국적인 나의 일부 또는 전부는 한글을 익히기 시작하던 걸음마 아기 시절부터 조금씩 조금씩 쌓여서 정동 일번지에서 다져지고 연마되었습니다. 정동 일번지는 옛 덕수궁 부지로 1945년부터 1988년까지 경기여중고 캠퍼스가 있던 곳입니다. 저의 학창 시절을 보내었던 정동 일번지 캠퍼스에는 회화나무 고목이 교정 가운데서 학생들의 쉼터가 되었지요. 대한민국이 가난했던 때이었지만, 모교에는 수영장이 있었고, 수영은 체육 시간에 필수로 익혀야 했습니다. 겨울에는 운동장 한 구석에 얼음을 얼려서 스케이트를 배우고, 시험도 치루어야 했습니다.
모교에서 제공하였던 학과목들을 최선을 다해서 가르치시던 선생님들이 계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학과목 이외의 음악 교육, 미술교육은 충분하고 훌륭했습니다. 음악 전문인이 아니라도 악보를 읽을 수 있는 뮤직론을 배웠고 한국 가곡, 아리아, 외국민요도 노래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 미술시간도 알차게 주어지었고 추상화, 큐비즘을 구별하고 논할 수 있는 박학한 졸업생의 삶을 허락한 곳이었습니다.
인생을 삼막(三幕) 연극(演劇) 무대로 생각해 봅니다. 연극 첫 장에서 나는 나의 뜻과 상관없이 엑스트라로 무대에 세워졌습니다. 그때, 이미 한글은 내 안에 스며들어 있었습니다. 두 번째 무대에서는 감독과 몇 번 다툰 후에 설득당하고 나서, 조연역을 맡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무대에서 한글은 뒷전으로 물러나야 하는 때가 많았습니다. 이제 마지막 장(章)인 세 번째 연출은 마음에 듭니다. 수십 년 동안 진행되고 있습니다. 언제 커튼을 내릴지 모르겠지만, 여러 번의 변신과 변모가 저의 각색, 저의 연출 그리고 저의 감독하에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셋째 장에 놀라운 ‘자랑스러운 경기인’ 상 팡파르가 울리었습니다.
경기여고, 대한민국, 한국인의 피와 뿌리…이를 연결하는 한글이 오늘도 제 인생의 셋째 장(章)을 뜻깊게 합니다. 정동 일번지에서 썼던 이천(二千) 일의 신화가 졸업 후 이만(二萬) 일의 신화로 이어지도록 정(情)과 열(熱)을 허락해 주고 있습니다. ‘자랑스러운 경기인’으로 이만(二萬) 일의 신화를 잘 써가리라는 마음으로 이글을 마칩니다. 이 글을 쓰는 엘에이의 크리스마스 새벽 시간은 따뜻하고, 고요하고, 평화롭습니다.
경기여고 동문회지 2025년 1월 호에 나갈 원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