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7. 재미수필 당선작
“선생님은 어디에서 왔어요?”
“어디라니요?”
“아니, 어~디에서 오셨나구요?”
“환자분은 어디에서 왔나요?”
“나는 여기요. 여기 미국이요.”
“아~,그런 질문이었군요.”
“???”
“저기요!”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향해 집게손가락으로 천정을 가리키면서 대답했다.
“저~~기, 하늘에서요!”
환자는 유쾌히 웃었다.
“그러고 보니 선생님과 나는 동향 사람이네요!”
그 환자는 보기 드문 호인이었다. 백인 남자 노인으로 전립선암 치료에 대한 견해를 받으러 보내졌다. 당시 나는 수련 과정 중이었고, 내가 파견되어 일하던 서비스의 담당 교수는 백인으로 유대인이었다. 그 교수는 본토 출신이라는 것에 은근히 자부심이 많았다. 비판이 빨라 본토박이 레지던트들조차도
피하는 교수였다. 진찰을 끝내고 일사천리로 이해하기 어려운 의학용어로 치료의 목적에 관해서 설명하고 의사 가운을 펄럭이면서 훌쩍 진찰실을 떠났다. 나에게 나머지 치료에 필요한 절차를 일러주라고 지시하면서 말이다. 조금도 언짢아하지 않는 환자에게 시간을 갖고 자세한 설명을 더 해주었다. 환자는 완고한 사람이 아니었다. 한국에 관심을 보이면서 공부하러 자신이 태어난 나라를 떠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의아해했다. 호인이었던 노인 환자의 유쾌한 웃음과 서로 편안하게 나누던 대화는 그날 이후, 뜻을 담아 놓았던 타향살이의 초심이 흔들릴 때마다 위로가 되어 돌아와 주었다.
실상 나는 누가 오라고 해서 도미한 것이 아니고 내가 원해서 온 것이 아니었던가?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발달 된 의료시스템을 갖고 있었고 의과대학들은 인재들을 길러내고 있었다. 이러한 미국에로의 유학은 발전도상 한국 의학도들에게 꿈을 갖게 했다. 한국은 발전도상에 있었다.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교수들에게서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교수님들은 코디가 잘된
멋있는 옷차림에 자신감 넘치는 흥미로운 방식으로 강의를 끌어갔다. 학생들이 토론에 참여하도록 토픽을 주고 진행 시킬 때도 있었다. 도미하는 것이 유행처럼 된 졸업 무렵에 나도 유행의 물결을 탔다. 공부를 마치고 귀국해서 후배양성에 참여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벌써 40년도
더 전의 일이다.
수련 의사 시절, 매끄럽지 못한 영어를 하는 키 작은 젊은 동양 출신 여의사를 그냥 지나치는 환자는 거의 없었다. 동양에 대한 호기심이 있거나 저변에 깔린 동양인을 깔보는 선입견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알려주면 ‘배고프겠구나…’하는 식의 반응을 우선 보였다. 이어서 한국은 전쟁 때
미국이 도와주었던 나라라던가, 삼촌이 참전했던 가난하고 추운 나라 또는 고아를 수출하는 나라라는 견해였다. 그들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기분은 좋지 않았다. ‘내가 왜 이 고생을 사서 하고 있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많았다.
그래도 나는 미국 시스템을 좋아했다. 말할 때 엑센트가 있다고 해서 무식한 사람으로 간주하는 사람은 의외로 적었다. 당시 미국은 한국과 달리 꽤 개방적이었다. 여자 의대생도 늘어가는 추세였고, 여자 의사들이 치마만 입어야 했던 한국과 달리, 판탈롱 차림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어른격인
과장 선생님이 보여준 예의는 가부장적 한국 문화를 되돌아보게 하였다. 엘리베이터를 함께 타야 하는 경우 엘리베이터 문을 잡아주면서 여자 수련의들이 먼저 타도록 배려하는 모습은 당시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7월에 도착한 뉴욕 주립대학 업스테이트 캠퍼스가 있는 시러큐스는 흐리고 무더웠다. 뉴욕주 북쪽을 업스테이트라고 부르는데, 시러큐스는 업스테이트에 있었다. 뉴욕 같은 대도시가 아니고 미국이 산업화를 시작할 때 중요한 교통의 요지였던 곳으로 1970년대에는 대학도시로 불렸다. 보수적인 도시였고, 주민 대부분이 백인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익숙해진 시러큐스였지만 흐리고 비 오는 날이 많아 자주 나를 우울하게 했다. 유색인종이 드물어 외로움을 더 많이 느끼며 살았다. 김치나 된장찌개를 서브하는 한국 레스토랑도 없었고 한식 재료를 파는 마켓 조차 없는 곳이었다.
수련 의사 과정이 끝나면서, 심사숙고 끝에 한국으로 돌아가는 계획을 접었다. 엘에이에 있는 다(多) 전문분야 전문의들이 함께 일하는 의료 그룹에 들어가 활동하기로 했다. 이 종합병원의 의사들이나 환자들은 거의 모두가 비한국계였다. 다인종의 도시 엘에이에서도 환자들은 여전히 내가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그즈음 한국은 빈곤을 벗어나고 있었다. 세월이 흐르고, 지역이 달라서 그랬는지 한국을 칭찬하는 환자들을 자주 접하게 되었다. 한국은 기적의 나라라고, 아들이 한국 처녀와 사귀고 있다고 자랑스레 덧붙여 말하는 환자도 있었다. 실상 미국인들은 한국산 옷 세탁기, 그릇 닦는 기계, 자동차 중 하나
정도는 이미 알고, 쓰기도 시작하던 때였다.
대도시 엘에이에는 놀랍게도 내 모국어 한글로 신문이 출간되고, 한국말로 운영되는 방송국도 있었다. 나만의 글이었던 한글, 일기 쓰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던 한글이 살아있었다. 한글로 건강 칼럼을 쓰는 기회도 생겼다. 교민들에게 한글로 의학 정보를 알릴 수 있다는 것은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한국계 차 세대에게 한국어와 문화를 가르쳐 주는 주말학교와 같은 것을 비 혈통, 주류사회에 알리기 위해 힘쓰는 단체도 있었다. 그뿐이랴. 한글을 소중히 아끼고 진흥하면서 한국문학의 세계를 지속해서 홍보하고 실천하는 문인들, 교민 단체들이 있는 것을 알게 되면서—나는 겸손을 배웠다.
스메타나가 빼앗긴 조국의 몰다우강을 노래했고, 프랑스로 귀화한 마담 큐리는 자신이 발견한 동위원소에 모국의 이름 폴란드를 붙여서 폴라니움이라 이름하지 않았던가!
지금은 고인이 되었을 그 호인 할아버지 환자를 시러큐스가 아닌 이 엘에이에서 다시 만난다면 우리는 어떻게 서로 인사를 할까? 그는 나에게 어디서 왔냐고 또 물을까?
그럴 것이다.
나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환자분과 동향 친구인 나는 한군데 더 들리고 돌아서 이곳에 왔네요. 나는 코리언 아메리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