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8.28 남가주 경기여고 동문회 뉴스레터에 보냄
모국인 한국을 떠나 살아온 나는 영어와 한국어 권(圈)을 넘나들면서, 때로는 두 세계를 섞으면서 살았다. 많은 디아스포라의 삶이 그렇듯이, 음식, 예절, 언어문화의 섞임은 자연스레 짬뽕(국물과 식재료가 마구 섞여있는 이미지에서 파생된 의미의 단어: 일본 ‘참프루‘, 인도네시아말로 ‘짬뿌르‘(Campur)도 섞는다는 뜻이 있다.)이 되었다. 그런 나를 보고 한심하다고 할 사람은 없을게다. 그렇게 보낸 시간이 반세기나 된다. 그렇다면, 그간 나와 함께 했던 의식(意識)과 사고(思考) 또한 짬뽕이 되었을까? 그 짬뽕의 바탕은 무엇일까? 자라면서 받았던 밥상머리 교육일까, 학교라는 틀 안에서 가르쳐진 지식일까, 타향살이에서 어렵게 다듬어진 개똥철학일까. 아니면 어머니가 물려주셨을지도 모르는 지혜일까.
곰곰이 들여다보면, 내 일상의 모든 것은 한글이라는 뿌리 위에 있었다. 그 뿌리는 항상 깊이, 널리 퍼지면서 자라고 있었다. 여기에서 뿌리라는 말은 상징적인 표현이다. 실상 어린, 빨리 자라는 나무의 뿌리는 나무 둘레의 38배로 원형을 그리면서 자란다고 한다. 몸체가 크고 튼튼할수록, 뿌리는 멀리 퍼져나간다는 과학적 근거이다. 여담이지만 뿌리는 크게 두가지로 분리해서 보는데, 주근(主根)과 측근(側根)이다. 주근은 식물의 밑동으로 땅 속 깊이 꼿꼿이 자라면서 수분, 양분을 빨아올려서 줄기를 지탱하는 기관이다. 고어로 불휘라고 부르고 용비어천가에 나온다. 측근은 퍼져나가는 수염뿌리를 생각하면 된다. 한글이라는 뿌리는 주근, 측근 모두, 그 힘과 영역이 방대했다.
바다를 떠돌다가 풍파에 밀려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도 침몰하지 않았던 것은, 한글과 한글이라는 토대 위에 세워져 나의 일부가 된 ‘2천 일의 신화(神話)’ 때문이다. 그것은 나의 가슴과 머리가 순수했던 어린 10대 시절에 경기여자중고등학교에 적(籍)을 두면서 2천 일 동안 썼던 신화이다. 신화의 뿌리는 깊고, 방대하다.
그런데 이 ‘신화(神話)’는 혼자만 쓴 것이 아니었다. 지난달, 57년 전에 브라질 이민을 떠나면서 헤어졌던 교우를 엘에이 한인 쇼핑몰에 갔다가 우연히 만났다. 친구는 나를 보고 ‘정동?’ 하고 말을 붙였다. 나는 ‘일 번지?’ 하고 답했다. 우리는 한글 다섯 자로 서로의 뿌리를 확인했던 것이었다!
나를 위시한 디아스포라 한국 사람들은 한국과 세계역사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장보고 통상이 이끌었던 최초 한국의 해상무역은 신라인들의 디아스포라 삶을 보여준다는 전설이 있다. 일제 강점기 때의 슬픈 역사를 뛰어넘어, 지금 7백 만이 넘는 한국 분들이 카나다, 미국, 브라질, 아르헨티나, 중국, 일본, 러시아, 우츠베키스탄, 아프리카, 독일 등 세계 무대에서 활동하고 있다. 현대 한국 디아스포라가 장보고가 살았던 시대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한글이다.
우리 조상들은 모국을 떠나 어느 곳에 정착하든지 간에, 두 가지 일을 했다. 첫째는 후손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둘째는 공동체를 만들어 서로 간에 문화와 디아스포라 삶에 도움이 되는 정보를 나누면서 함께 하는 일이었다. 공동체는 사탕수수밭, 오랜지 밭 그리고 한국어로 예배를 드리는 교회를 토대로 자연스레 형성되었다. 참으로 대단한 일이다.
남가주경운회가 뉴스레터를 영어로 출판하지 않고, 한국어로 만드는 것처럼, 세계 어느 곳에 있어도 디아스포라 한국인들은 한글을 잊지 않는다. 후세에게 가르칠 뿐 아니라, 나아가서는 한글이 세계언어로서 받아들여지도록 세상을 계몽하고, 그를 위해서 쉼 없이 달린다. 그렇게 달려온 선구자들이 많다. 나는 선구자는 아니지만, 바통을 물려받아 다음 주자(走者)에게 넘겨 줄때 까지 열심히 뛰고 있는 단거리 경주자 중의 하나이다.
한국 땅에서의 ‘2천 일(二千 日)의 신화(神話)’는 나의 경우, 이 미국 땅에서 ‘2만 일(二萬 日)의 신화(神話)’로 이어가고 있다. 이 신화는 역시 한글을 통해서이다. 비혈통계 환자가 대부분이었던 일과(日課)이었어도, 한글을 읽는 동포들에게 한글로 의학 칼럼을 써서 새로운 의학 정보를 나누었다. 일기를 쓰듯, 동화와 수필과 시도 한글로 써왔다. 지금은 한글을 차세대 한국계 혈통뿐 아니라 비혈통 학생들이 배울 수 있도록 한글이 정규학교 선택과목이 되게하기 위한 ‘한글세계화’에 함께 한다. 힘들지만 기분 좋게 잘 진행되고 있다.
내가 이사장으로 봉사하고 있는 미국의 비영리단체인 한국어진흥재단이 그 과업의 성과를 보여준다. 미 전역에서 200여 개의 중고교 정규학교에 한국어 클래스가 만들어지고, 2만 여명의 학생들이 한국어반을 택하고 있다. 남가주만을 볼 때 80개교 학교에서 총 332개 학급의 한국어반이 운영되고 8,500여 명의 학생들이 한국어반을 수강한다. 지난주에 엘에이 카운티에 있는 두 중고교에 한국어반을 개설했다. 이 두 학교에는 한국혈통 학생이 극소수이다. 그러나 학생들은 그들이 원해서 한국어를 세계언어의 옵션으로 택하였다.
차세대가 한국어를 배우게 하려면 이 미국 사정에 맞는 이중언어, 한국어와 영어로 된 교과서가 필요하고, 교사양성, 예비교사 양성등 이에 합당한 부수적인 일들을 함께해야 한다. 한국 문교부 산하, 교육원과 함께 열심히 일하고 있다.
나는 오늘도 한글 신문을 읽고, 한글로 글을 쓴다.
나의 모교 경기여자중고등학교(京畿女子中高等學校)의 ‘2천 일의 신화’는 어릴 적 정동 1번지에서 태어나, 아메리카 대륙에 뿌리를 내리면서 나의 의식(意識)과 사고(思考)의 줄기를 키워, 한글로 ‘2만 일(二萬 日)의 신화(神話)’를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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