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등(一等)과이등(二等) 사이, ‘햇빛 교육’

큰 딸네가 고심 끝에 탈가주(脫加州) 했다. 교육에 관련된 이유가 가장 크고 많다. 방문해서 손주들의 활동 새 캠퍼스를 돌아보고 있다. 대학처럼 넓다. 나지막하게 아도비 식으로 지은 건물이 여럿 보인다. 건물 사이 사이에는 앉아 쉴 수 있는 벤치가 마련된 정원들이 있고, 어떤 정원은 몇 개의 건물 통로들로 둘러싸인 건물의 구심점인 ‘아트리움’ 형태이다. ‘아트리움’이란 중앙 홀이라는 뜻인데, 의학에서 ‘아트리움’은 심방(心房)을 일컫는다. 동선과 조경을 염두에 둔 설계로, 학생들은 건물들의 통로 한쪽 면 유리벽을 통해서 쾌적한 작은 자연을 보면서 복도를 지나다닌다. 어떤 정원의 중간에는 연못이 자리하고 아담한 관목들이 둘러싸고 있다. 연못 어딘가에 거북이가 살고 있단다. 숨어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정원은 학생들의 침묵과 묵상의 공간이다. 틴에이저들이란 팝 뮤직에 열광하는 철없는 세대라는 편견을 갖고 있던 나는 그들이 삶과 학습에 고심하는 긍정적인 노드(nerd)이기도 하다는 것을 본다. 그들은 그들대로 고민거리가 있다. 조용히 혼자 있는 시간을 자신에게 할애하기도 한다. 그럴 수 있는 용기와 능력도 있다.

건물 밖을 나오니, 나이깨나 먹은 꺽다리 플라타너스 고목들이 샛노란 이파리를 달고 있다. 잊고 있던 학창시절 가을날 같다. 나의 기억엔 가을이란 고민의 계절이다. 의과대학 재학 시절의 가을은 새빨간 단풍잎들이 복잡한 사고(思考)를 정리해 주지 못했다. 잡히지 않는 미래를 향한 염려와 희망은 가을 ‘계절병’의 농도를 부추겼다. 이곳 시골스러운 중고교에도 엘에이 유수 학교와 다를 바 없이, 고심해야 하는 아이텀들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가운데, 교정 한편에 자리한 축구 경기장으로부터 들려오는 응원의 함성이 실없는 고민은 고만하고, 멜랑콜리를 날려 보내라 한다. 아이들은 듬직하다. 그들의 열중하는 모습이 싱싱하고 아름답다.

이곳에서는 동급생들은 경쟁자가 아니라, 친구이다. 함께 화학 실험을 하고, 함께 오케스트라를 연주하면서 각자의 악기로 음악을 만들어 내고, 햇빛 속에서 달린다. 무럭 무럭 자라는 봄날의 푸른 나뭇잎처럼 싱싱하다. 아, 이것이 내가 늘 부러워했던 ‘햇빛 교육’이 아니던가!

나는 모국에서 모든 정규교육과정을 끝내고 도미한 후, 뉴욕주립대학 의과대학에서 수련의 과정을 마치고 전문의가 되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두어 해 전 쯤 부터인가, 치맛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치맛바람이 왜, 어떻게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하여간 심하게 불었다. 대백과사전이 정의한 세 종류의 치맛바람 중, 가장 심하게 불었던 바람이 교육제도를 흔들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참고로 계 모임 같은 경제 분야를 흔들던 치맛바람, 춤바람들이 있다.

치맛바람은 매사에 최고이어야 한다는 학구열을 부추기었고 당시 학생이었던 세대는 치맛바람의 피해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등(一等), 이등(二等) 또는 일류(一流)와 이류(二流), 하다못해 금수저, 은수저, 흑수저 등, 수저 계급(階級)제도를 인지하고 받아들이게 하던 ‘일등병(一等病)’ 교육이 아니었나.

그런 가운데, ‘일등병(一等病)’은 예방이 가능한 것이라 깨닫게 했던 클래스가 있었다. 중학교 입학 후, 미군 장교 부인이 잠깐 영어 시간을 맡은 때이었다. 그 선생님은 ‘하나뿐인 최고’라는 표현은 옳지 않고, ‘여러 최고 중의 하나(One of the Best)’라는 표현이 맞는다고 했다. 새로운 개념을 소개했던 것이다. 우리가 전전긍긍하며 달리고 도착하려는 정점에는 한 명이 먼저 도달 할 수도 있고 여럿이 함께 도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일깨워 준 것이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 말하는 교육의 정의는 ‘인간 형성의 과정이며 사회개조의 수단이다……사회발전을 꾀하는 작용인 것’이라고 되어 있다. 영어 참고서에는 교육이란 지식, 기술과 형질, 특질의 전수(傳受)라고 정의하고 있다. 나아가서는 한 인간이 비판적 사고력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덧 붙여 설명한다. 한국적 정의는 사회에 귀결하고, 서양적 정의는 개인의 성장을 강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손주들과 차세대들이 동서양의 철학이 함께하는 ‘햇빛 교육’의 주인공이기를 바란다. 그 가운데 건강하고 긍정적인 공부벌레 노드(nerd)가 된다 하여도 상관은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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