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학생운동’과 어머니

이 우울은 언제부터 스며들었을까. 바닷바람에 소리 없이 흘러가는 산안개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나와 함께 한 지 꽤 오래되었다. 산안개처럼 가기도 하고, 때로는 갔다가 다시 오기도 한다. 6·25의 아픔을 가슴에 안고 4월을 돌고 돌아 우리 형제들을 치마폭에 안으셨던 어머니 생각에 우울한가 보다. 아니, 어쩌면 이십여 년 전, 오피스 근방 길거리에서 살다가 우리 집으로 입양되어 살았던 두 마리 고양이와 친구도, 배필도 없이 그리피스 공원에서 십여 년을 맴돌던 외톨이 산사자 P-22의 외롭고 아팠던 삶과 죽음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아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엄마가 살아 계셨다면, ‘사람도 죽는데, 마음 쓰지 말거라.’ 하실 것이다.

숱한 일을 겪으셨던 어머니는 4월이 되면 다시 이생을 방문하신다. 나는 학생들이 주동이 되었던 데모가 정권을 뒤엎을 수 있었던 ‘4·19 혁명’의 정치적 관념과 멀리 있었다. 그저 쫓기는 흑백색 교복 입은 학생들과 이들을 뒤쫓는 경찰들, 희뿌연 최루탄 연기가 기억 속에 멈추어 있을 뿐이다. 범벅이 카오스 가운데 엄마가 있고, 엄마는 엄마의 특수했던 그 날의 동선(動線)과 함께 되돌아온다.

엄마의 동선은 이랬다. ‘4·19 혁명’은 중학교에 입학한 지 두어 달이 지났을 때 터졌다. 정치인들의 부패를 규탄하는 데모가 혁명 이전부터 거의 매일 광화문을 중심으로 있었는데, 밥상머리에서 주워듣던 신문보도에 의하면 데모는 나날이 격앙하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꽤 많은 초, 중고교 캠퍼스가 사대문 안에, 주로 광화문을 중심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 가족 중에는 큰 조카와 내가 각각 다른 여자 중학교에, 작은오빠는 근처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광화문을 중심으로 산재한 학교들과 학생들에게 경계를 이루지 않는 매운 최루탄 연기는 아비규환의 전쟁 아닌 전쟁터를 넓히고 있었다. 계엄령 선포로 학생들은 즉시 퇴교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날, 엄마는 나를 데리러 오지 않으시고 조카의 학교로 향하셨다고 한다. 육이오 전쟁으로 아버지를 잃은 조카는 자기 엄마와 분가해서 다른 곳에 살고 있었다. 그 애는 나보다 한 학년이 위이었다. 나는 혼자 걸어서 집에 갔다.

그랬던 4월달은 내 기억에 회색과 검은색으로 희미하게 채색되어 남아있다. 엘리옷(T.S.Eliot 1888-1965)은 ‘황무지’라는 무려 434행으로 구성된 시를 ‘사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표현하면서 시를 시작한다. 이 부분은 인기가 많다. 시, ‘황무지’는 나에게는 철학 논문 같기도 하다. 그의 개인적 삶을 배울 기회가 없었던 나에게는 난해하고 지루한 글이다. 엘리옷도 4월에 전사한 친구에 대한 아픔과 그리움을 시로 쓴 것이었고, 죽음이라는 자연의 섭리가 끝이 아니라 부활의 시작이라는 희망을 준다. 어디 4월만 잔인하랴. 어디 죽음만 있으랴.

뮤지컬 ‘캣츠’로 많은 이에게 친근한 엘리옷은 미국 출생이었는데, 영국에 귀화했다. 하버드 대학에서 학사, 석사학위를 받았고 프랑스 소르본 대학에도 재학한 적이 있었다. 그에게 영국은 편안한 곳이었나 보다. 시, 희곡, 소설 등 다작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였던 그는 평론가이며 출판가이기도 했다. 그의 시 ‘황무지’의 서두가, 월트 휘트만(Walt Whitman)과 제프리 차우서(Geofrey Chaucer)의 시와 많이 닮았다는 혹평도 있다. 그 외에도 기독교, 인도 철학, 로마나 그리스 신화에서 따온 내용으로 짜집기도 많이 했다고도 알려져 있다.

‘4·19 학생운동’ 계엄령이 선포되고, 서울 안에 있는 모든 학교가 강제로 폐교되었을 때, 나를 뒷 전으로 하셨던 어머니, 쌔~애 한 최루탄 연기 속에서 서둘러 조카를 찾아 그 애의 학교로 향하셨던 어머니가 카오스의 광화문 광장 중심에 있는 나를 염두에 두지 않으셨을 리는 없다. 그저 내가 우선순위 일위가 아니었을 뿐이었다. 육이오 전쟁이 발발한 지 10년이 지났던 그때에도 조카의 아버지를 잃어서 생겼던, 아물기를 거절하고 있던 상채기가 세상을 향해 커다란 입을 벌리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게다.

어제는 칼라바사스에 있는 킹 질렛 커퓨니티 파크 센터에서 하는 소품 전시회에 들렸다. 소박하고 유명세에 관심이 없는 화가들의 작품은 평화로웠다. 전시 센터에서 P-22의 얼굴이 새겨진 9″x 12″x 0.5″ 크기의 우드버닝(pyrography) 작품을 발견했다. 녀석의 약간은 두려우면서도 치열했던 강렬했던 눈빛이 좀 온순하게 표현되기는 했어도, 마음에 들었다. 녀석은 P-22라는 이름표를 달고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사람도 죽은데, 마음 쓰지 말거라.’ 하시던 어머니도 P-22를 아끼실 것 같다.

미주 중앙일보 2024.4.26 [문예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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