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의대 회보 77호 ‘아름다운 동행’ 인터뷰 2024.12.12.

안녕하십니까.

저는 이화의대 동창회 홍보이사 김금입니다. 이의회보 제 77호 아름다운 동행에 선생님을 인터뷰할 수 있게 되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직접 만나 뵙고 대화를 나누면서 인터뷰를 했다면 더 좋았을텐데 이렇게 서면으로 질문을

드리게 되어 아쉽게 생각합니다. 그럼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1. 바쁘신 일상에서 선생님의 건강과 행복을 위하여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우선 인터뷰 감사드립니다. 요즘 갑자기 유명세를 타는 것 같아서,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고 있습니다. 이 과정은 저를 겸손하게 합니다.

70대 후반에 들어서 있으니까, 건강이나 행복을 위한 새로운 선택이나 계획은 없습니다. 건강을 위해서는 남편과 유튜브 프로그램 중에 30분 동안 실내에서 걷는 운동이 있어서, 이를 규칙적으로 합니다. 채식을 주로 해 왔는데, 그것은 건강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동물의 권리에 대한 저의 아이들의 견해에 따르면서 30여 년 전에 시작한 것입니다.

행복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행복의 정의가 의외로 많고, 개인적이더라고요. 감사할 능력을 주십사고 기도합니다. 감사하면, 행복할 능력도 생기지요. 지금껏 열심히 살 수 있게 여건이 주어지었던 것에 감사하고, 가족, 친구들이 있었음에 행복했습니다. 주어진 일이 있었습니다. 의사로서, 글쟁이로서, 또 글 쓰고, 봉사단체에서 일했다는 것이 축복이었습니다. 여가에 친구들 만나고, 음악회에 가고, 뮤지엄 방문도 하고, 때로는 남편과 크루즈여행하고, 손주들을 만나러 타주에 또 유럽에 갑니다. 드라마 보면서 게으름도 피우고, 베스트 셀러가 나오면 사서 읽어보기도 합니다. 일정이 가득 차 보여도 바쁘지 않게 편한 나날을 꾸려가고 있으니까 행복합니다.

2. 전월화 선생님께서는 경기여고를 졸업 후 이화의대에 입학하셨습니다. 의과대학을 지원하시게 된 동기는 무엇이었습니까?

저는 뭘 모르고 살아온 사람입니다. 특별한 목표를 갖고 경기여고, 이화여대에 지원한 것이 아니고, 집안의 흐름에 따라, 대한민국의 유행에 따라, 움직이었던 중고교와 의과대학 시절이겠습니다.

내가 걸어왔던 길과 앞으로 가야 할 길을 삼(三) 막(幕) 연극(演劇)으로 나누어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위의 질문하신 부분의 시간대는 나의 뜻과 상관없이 엑스트라로 인생이란 무대에 등장했던 때이었고, 감독과 몇 번 다툰 후에 설득당하고 나서 억지로 조연 정도의 역을 맡게 된 것이 두 번째 무대라고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무대에 올라갈 때 많이 망설였습니다. 싫어하는 것을 모두 제외하고 나니까 의과대학이 남았더라고요. 의사이신 선배님, 후배들께 죄송합니다! 제가 감히 큰 뜻을 갖고 의사의 길을 가셨고, 가시고 있는 선생님들을 폄하한다고 생각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러나, 뒤돌아보면, 내가 의사의 길을 갔던 것은, 하느님의 뜻이었고, 당신의 특별한 보살핌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의대로 진학했던 것은 참으로 큰 축복이었습니다.

3. 연세대학교에서 내과 전공의를 수료하신 뒤 정신과 수련의 과정을 지나 종양방사선학 전문의를 수료하셨습니다. 선생님의 전공에 변화를 가져 오게된 과정과 이유는 무엇이었는지요?

참 좋은 질문입니다. 졸업 후에 도미해서 공부하고 귀국하여 교편을 잡고 싶었던 희망은 유신정책 선포로 외국 유학 부분적 봉쇄, 계엄령, 쿠데타 등, 정치적으로 불안정했던 당시 모국 사태 때문에 저의 전공은 미국과 한국 사이에서 바뀌었습니다. 남편의 도미는 몇 년간 묶인 상태이었어요. 전공 선택도 이에 따라 변했습니다. 미국은 7월 시작, 6월 종강인 정상적인 학기 사이클에 맞추지 못했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 없이 어디에든지 빈자리를 찾아야 하는 고충이 있었습니다. 종양 방사선학에 귀착하게 될 때까지, 시행착오가 많았지요. 몇 년을 소비한 셈이지만, 견디어 내야 할 일종의 ‘필요악’이었습니다.

내가 잠깐씩 몸담았던 내과는 무척 학구적인 전문 분야로 저에게는 반복되는 일상이 지루했었고, 재발이 잦은 정신과 환자들은 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환자들과 더불어 한 챕터를 쓰고, 다음 장으로 넘어갈 수 있는 종양 방사선학은 저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잠시지만 내과와 정신과에서 내린 뿌리는 지금까지도 살아있고 필수적인 영양분을 배달해 줍니다. 공부하는 의사, 생각하는 종양 방사선학 전문의로, 인생을 이해하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더불어 교민들을 위한 미주 중앙일보의 건강 칼럼니스트, 한국어진흥재단을 통한 외국어 교육의 중요함을 알리는 전사(戰士)가 되는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4. 선생님께서 종양 방사선학 전문의로서 도입하셨던 새로운 방사선 치료 도입과 그렇게 할수 있었던 환경에 대하여 말씀 부탁드립니다.

제가 젊음을 보내고, 은퇴했던 메디컬 그룹은 미국 내 3위 (때로는 5위, 연간 수익이 약 일천백억 원) 안에 드는 HMO(Health Maintenance Organization 건강관리기관)이었습니다.

당시, 여성 암 치료는 ‘여권신장’ 사회운동과 맞물림이 되었던 때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의학이 남성우월주의에서 미처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때였습니다. 약간 이야기가 빗나가지만, 그러한 관점에서 이화여대는 앞서가는, 참으로 훌륭한 교육기관이라고 자부심을 갖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일하던 메디컬 그룹은 변화를 받아들이는 의료계에 앞장섰습니다. 사회적으로 의료환경은 입원 치료에서 외래 통근 치료 방법으로 변해야 했습니다. 유럽은 이미 실시하고 있었지요. 치료비가 절약되고 환자들은 일상생활에 큰 변화 없이 치료받을 수 있는 이점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새로운 유방암 국부 치료와 자궁경부암 근접치료도 외래 통근 방법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을 설득하고, 그 치료법을 도입했습니다. 유방암과 자궁경부암은 그전까지만 해도 코발트 (Cobalt 60)나 시지움 (Cs 137) 동위원소를 사용해서 2~3일 동안 입원하여 절대안정 상태에서 치료했지요. 입원 치료에 따른 부작용이 없어진 것입니다. 근접치료 동위원소 소장실, 새로운 방사선 유출 방지를 위한 외래 환자 치료실 등 준비 과정에 들어가는 경비는 많았지만, 먼 안목으로 보았을 때, 장기적 표준치료에 앞장선 셈이 되었지요.

또 하나의 발전은 다분야 전문의로 구성된 ‘종양 위원회(tumor board)’를 만든 것입니다. 중요한 도구가 되었지요. 1980년부터 본격적인 맞춤 의료의 시작으로 매주 만나는 위원회에서 병리 슬라이드 점검, 엑스레이 리뷰, 외과, 항암 전문의, 종양 방사선학 전문의들이 참석해서 의견을 나누고 환자와 직접 대화를 시작하는 소셜워커, 암전문 간호사, 코오디네이터들도 함께 일을 시작했습니다.

환자는 환자이기 이전에 인간이라는 것, 환자가 자신들이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돕는 것이었지요. ‘내 몸은 내 것입니다. 내가 관리하고, 암치료도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합니다’ ‘나에게 선택권이 있습니다’…오래된 지식에 유착되어 있는 의사들에게 경종이 울렸던 때였습니다.

5. 미국에서 진료에 임하시면서 미국학교의 한국어반 개설에 관심을 가지게 된 동기는 무엇이었는지요?

고백하자면, 나는 봉사하는 환경에서 자라지 못했습니다. 저희 큰딸이 중학교에 진학했을 때, 그 학교는 전교생, 교사, 가족 모두가 함께 사회봉사에 참여하는 전통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봉사라는 연결고리로 당도한 곳 중의 하나가 한국어진흥재단이었고, 이 재단을 통해서 한국인의 정체성, 한글의 우수성이 한국계 미국인인 나의 DNA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렸을 때 이중언어를 배우게 되면 뇌 표면을 넓혀주고, 이것은 IQ를 평균 10점 이상 올려주고 사회인으로 성공할 확률을 높이게 된다는 의학 정보는 제가 하는 한국어진흥재단 봉사의 의미를 확인해 주었습니다.

6. 이렇게 한국어반 개설을 이루어가는 과정이 항상 쉽지만은 않으셨을 것 같습니다. 가장 기억나는 순간과 보람있었던 순간이 있었는지요?

비혈통 학생이 99%인 학교에서 한국어를 배우게 해 달라고 페티션 드라이브를 해서, 교장 선생님을 설득한 경우입니다.

7. 선생님께서는 바쁜 일상에서도 계속 글을 써오셨고, ‘희망 한 단에 얼마에요?’ 수필집을출간하시도 하셨습니다. 미국에 거주하시며서 특히 한글로 글쓰기를 계속 하시는 것과 선생님께 한글 이란 어떤 의미인지요?

한글은 매일 먹는 ‘밥’과 같습니다. 나는 영어권에서 살아온 사람이지만, 한글로 출판되는 신문에 한국 교민들에게 최신 의학 소식을 전하는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또, 저는 일기를 쓰면서 살아왔는데, 일기도 한글로 씁니다. 그러면서 숨어 있었던 저의 문학에 대한 흥미, 재질이 확인된 것입니다.

8. 데일리코리아와 인터뷰하셨던 내용을 들었습니다. 병원에서 환자뿐 아니라 직원과도 인간적으로 따뜻함을 나눠주고 계신 것 같았습니다. 젊은 의사후배들에게 환자와 직원을 대하는 태도에 관하여 좋은 말씀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의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과 환자를 향한 진실성입니다. 항상 최신 정보 의학지식을 게을리하지 않고, 겸손하면 됩니다. 겸손하면서 실력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진실을 전달하기 어려울 때도, 감미롭게 색칠 해서는 안되고, 겸손하게, 그러나 환자와 밀착하지 않고 조금 떨어져서 일하는 공정성을 지키면 좋다고 생각합니다. 환자가 혼자 걷는 외로운 여정이 아니라, 의료팀과 함께 하는 길이라는 것을 인식시켜야 하겠지요. 환자가 의료팀을 믿도록 말입니다.

9. 한국의 어려운 의료환경으로 미국 등 외국으로 진출을 하려고 하는 젊은 의사들이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미국으로 가려고 노력하고 있거나 진로를 고민하는 젊은 후배들에게 어떤 조언을 해주실 수 있을까요?

‘나’를 존중하고 사랑하십시오. ‘의사인 나’를 존경하십시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할 능력이 있습니다. 이기주의자와는 다른 의미입니다. 그 실력을 쌓고, 씨스템의 변화가 필요할 때 함께 하시고, 결단이 필요할 때, 용기를 갖기를 바랍니다.

10.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이화의 후배들과 동창회에 전하고 싶으신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애초에 큰 뜻이나 목표가 없었더라도, 살아 가면서 의미를 발견하고, 좋아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했던 저는 뭘 모르고 철없을 때 이화의 딸이 되었고, 배꽃이 날리는 과학관을 감쌌던 이화가 제 평생 함께했습니다. 인내와 사랑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화의 선배님들, 후배님들, 행복하십시오!

감사합니다. 김금미 배상

이 질문지를 받고, 답을 작성한 후, 정작 줌 회의를 시작할 때는 모든 의과대학 동창회의 임원진들이 함게 했습니다. 모두 현역에 계신 의사선생님들이라,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한 원격회의였는데, 참으로 여성 후배 의사 선생님들이 훌륭했습니다. 회의가 끝날 무렵, 후배님들이 동창회 이름으로 한국어진흥재단에 $1,000.00을 기부해 주시겠다하여서, 참으로 감동했습니다. 보통은 졸업생이 모교에 기부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이 기부금과, 고교 후배 차성규(Mrs. Bona Chung) 의 기부금을 합쳐서, 재단에 잘 어울리고 필요한 grandfather’s clock 을 사는 과정중에 있습니다. 물론 시계의 어딘가에 모교동창회와 차성규 후배님의 이름을 새기어 넣을 준비도 하고 있습니다. 모두 모두 감사할 뿐입니다. 한국어진흥재단 사옥 마련에 도움을 주신 많은 분들의 성함은 30주년 기념 책자에 들어가 있고, 이 기부금은 오픈하우스 때 발표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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