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 모니카 수필가
기사입력 2025-03-26 [17:45]
인도네시아 자바 섬의 사마랑에 들렸다. 여기에는 삼푸콩(三保洞) 이라 불리는 중국 사원(사진=삼푸콩 사원)이 있다. 약 9, 800평 부지에 자그마한 여러사원들과 함께 있다. 그중 제일 웅장하고, 오래된 사원이라고 한다.
넓은 마당에는 14세기에 이곳을 방문했던 명나라의 쟁해 장군의 석상(사진=쟁해 장군 석상)이 서있다. 장군이 이 사원 근방의 작은 동굴에서 기도했던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한때는 개인 소유이었는데, 지금은 중국 출신 사람들과 여러 다른 인종들의 문화 행사가 열리는 비영리 단체 소속이다. 내가 방문했을 때는 인근의 고등학교 학생들이 호랑이 탈춤 공연을 하고 있었다.
혼혈이 많은 인도네시아에는 여러 인종이 어우러져 살고 있다. 그중 중국계는 1.2%정도다. 하지만 그들의 문화적 침투력은 매우 강하다. 인도네시아 어디를 가든 웬만한 도시에는 모두 차이나 타운이 있고, 중국 사원, 음식점 등이 있다. 활발한 그들의 삶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도네시아는 인종의 섞임이 보편화된 것 이외에도 6개 종교의 어우러짐이 특이하다. 87%가 무슬람 교인이고, 기독교인이 약 10%이다. 힌두교, 불교, 유교는 극소수다. 하지만 종교인들 간의 반목이 없다. 오히려 전례 예식은 서로 약간씩 섞인 퓨전 스타일이라고 한다.
이번 인도네시아 여행에서 또 하나 배운 게 있다. 유럽 국가들이 동남 아시아와 동양에 침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향료 수출입 무역을 하던 일반 무역상들이었다는 사실이다. 17세기에 네델란드 출신 사업자가 만든 동(東)인도회사가 좋은 예이다. 나중에 부도를 내어서 망하기는 했지만 이 회사는 인류 최초로 주식과 증권의 개념을 도입해 설립됐다. 결국 서양인들만의 주식·증권 투자를 통해 인도네시아를 속에서부터 야금야금 파먹어 들어갔던 셈이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유럽인들은 인도네시아를 정치적으로 점령했다. 인도네시아는 네델란드의, 말레이지아는 영국의 식민지가 됐다. 이들은 노예제도를 자연스레 만들고, 아편을 제공해 그들의 자립 능력을 빼앗았다. 그리고 그들을 강압했다. 그리고 이 비운의 민족은 이차대전 중 3년 동안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 이때 인도네시아에는 처음으로 ‘국가의식’이 싹트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공산주의자들이 잠시 나라를 흔들기도 하였다.
인도네시아의 근대사는 한국의 근대사와 정치적인 면에서 비슷한 점이 많다. 조선과 대한제국은 오랫동안 나라의 문을 열지 못했기에 서양 문물에 어두웠고, 무역에 참여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도 국제 무역에 활발하게 참여했던 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신라 흥덕왕 때 (서기 820~840년 대) 활동하던 청해진 대사 장보고가 있었다. 일본 승려 엔닌은 장보고에 대한 연구 결과를 문서화했는데 장보고는 해적을 토벌했고, 신라의 서남해 해상권을 장악했으며 골품제도(骨品制度)에 반대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장보고는 우리나라 최초의 한국인 무역상이었던 셈이다.
일제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난 뒤 한국은 많은 장애물을 넘어 지금은 세계가 우러러 보는 IT 강국이 됐다. 혼자 뛰어야 했던 장보고 청해진 대사와 달리 똑똑한 차세대들이 지구촌 여러 곳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반면 인도네시아는 1948년 독립 이후 개발 발전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여행 중 길을 지나다 보면 간혹 한국의 기업 광고가 눈에 뜨이고, 웃고 있는 멋진 한국 배우들의 얼굴도 보였다. 두 나라가 모두 역경을 거쳤지만 한쪽은 성공한 반면 다른 한쪽은 소기의 성과를 달성하지 못했다. 개인이나 사회처럼 국가도 결국 역사의 수레바퀴에 제대로 올라 타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운명이 엇갈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