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을 위한 동화] 낡은 책상(II)

아버지가 얻어 오신 낡은 책상은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애용했던 귀중품이었어요. 그리고 그 책상은 나의 친구 리하르트 새순이를 기다리곤 했어요. 친구와 나는, 작고 낡은 우리 둘만의 책상에 마주 앉아 숙제하는 것을 좋아했어요.

친구 리하르트 새순(새筍)이가 오랜만에 연락을 해 왔어요.

‘미겔 산체스, 네가 내 옆에 있어 주었으면 좋겠어.’

‘무슨 일이야?’

리하르트는 아무나 방문할 수 없는 격리 입원실에 있다고 했습니다. 백혈구가 없기 때문이라 했어요. 백혈구는 힘센 군인들처럼 우리 몸의 곳곳을 순찰하러 돌아다니다가 나쁜 박테리아 무리를 만나면 죽여 버리는 것이 임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어떤 박테리아는 우리에게 꼭 필요해서 우리랑 함께 살아야 한다네요. 박테리아는 어디에나 있다고 해요. 우리가 숨 쉬는 공기, 땅에 서 있는 나무들에도 있데요. 그렇지만, 리하르트에게는 모든 박테리아가 적군이라 합니다.

리하르트는 백혈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리하르트가 암에 걸린 것이 불공평한 것 같아서, 화가 나고 슬픕니다. 자꾸만, 어렸을 때 생각이 납니다. 리하르트를 처음 만났던 날이 기억납니다. 어느날 아침 일찍, 항상 그랬듯이, 나는 우리 초등학교 운동장을 삐~잉 둘러싼 철망 중에 뚫려서 만들어진 개구멍을 지나서 운동장으로 들어가려고 하였어요. 그러다가,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키가 작고 빠짝 마른 동양 아이가 나를 삐쭘히 보고 있었던 것이에요. 나중에 리하르트 백인 부모님을 만난 후에 알게 되었는데, 리하르트는 입양아이었습니다.

입양된 리하르트에게는 이름 하나가 더 붙어 있어요. 새순이라고 처음에는 이상하게 들리던 이름이었어요. 리하르트 새순. 가족의 성까지 붙이면 리하르트의 이름은 꽤 길어요. 새순이라는 이름은 새순이를 낳으신 엄마가 지어 주신 것이라 합니다. 나는 잘 모르는 글자인데, 리하르트가 태어난 나라의 알파벳을 한글이라고 부른데요. 첫 글자 하나는 한글이고, 두 번째 글자는 한문이래요. 『새』-『筍』. 한문은 중국이라는 나라의 글이라고 합니다. 리하르트 양부모님이 리하르트를 데리러 갔던 한국의 보육원 서류에서 리하르트 엄마가 지어 주신 본래 이름을 보셨다 해요. 원래의 이름을 갖고 있는 것이 좋다고, 중간 이름으로 넣으셨다고 합니다.

이름의 뜻을 듣고 나서, 이런 상상을 했어요. 나는 함박눈이 펄펄 내리는 추운 겨울에 잎이 다 떨어져서 죽은 늙은 나무를 보고 있네요. 그 나무는 아주 외롭게 서 있어요. 죽은 것 같아요. 그런데 따뜻한 봄이 되자 울퉁불퉁한 줄기에서 두꺼운 껍질을 비집고 여린 초록색 새싹이 ‘안녕!’하고 말을 걸어 오면서, 기저귀 찬 새순이를 세상으로 내보내는 장면을요.

새순이와 나는 공부를 좋아했어요. 새순이가 주로 우리집에 와서 시간을 보냈어요. 함께 낡은 책상에 앉아 숙제도 하고, 그림도 그리곤 했어요. 리하르트와 나는 대학에 진학하기 전까지 같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 다녔어요. 아무도 대학을 간 사람이 없었던 우리 집안에서는 내가 처음이었어요. 반면, 부모님이 약학 박사이신 새순이가 대학으로 진학하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지요.

어렸을 때, 가끔 우울해 보이던 새순이. 우리집 낡은 책상에 턱을 고이고 깊은 생각에 빠질 때가 있었어요. 부유한 집에서 잘 사는 리하르트가 가끔 외로워 보이기도 했어요.

‘내 친엄마 아빠도 산체스 아줌마, 아저씨처럼 뽀뽀도 해주고, 무동도 태워주셨을까?’

새순이가 걸린 백혈병은 키모데라피로 잘 치료되었지만, 정상인 백혈구가 본의 아니게 따라서 죽었데요. 불공평해 보이는 삶 가운데에서 친구는 이 고비를 잘 넘길 수 있을까요….

리하르트가 받을 다음 단계의 치료는 골수이식이래요. 골수는 피를 만드는 공장이라 합니다. 보통은 DNA를 공유하는 친 혈통 가족의 골수를 얻어다가 리하르트의 뼛속에 넣어 주면 제일 문제가 없다고 합니다. 내 친구는 골수 기증자를 찾아야 해요. 유전적으로 성분이 맞는 사람을 어떻게 찾을지 막막합니다.

새순이라는 이름을 준 나라, 한국에서 친척들을 찾을 수 있을까요? 친척이 아니라도 한국분들과는 유전자 공유 가능성이 높아서, 한국말로 프린트하는 신문사들과 워싱턴에 있는 한국 대사관, 큰 도시마다 있는 한인회라는 교민들의 단체에 연락해 놓았어요. 애타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 친구 리하르트 새순이를 살리기 위한 기다림은 길고, 힘들지만, 새순이가 겪고 있는 어려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 아픔으로 새순이를 살릴 수 있다면, 그것은 축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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