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서울시 명동에 있는 베를린 광장: 그곳에 서 있는 세 쪽의 시멘트 벽, 독일의 오래된 가로등, 그리고 곰

essay based on care of patients, current events

한국 서울시 명동에 있는 베를린 광장: 그곳에 서 있는 세 쪽의 시멘트 벽, 독일의 오래된 가로등, 그리고 곰

슬픈데,
그림으로 그려지지 않네
슬픈데
사진으로도 찍을 수 없네
슬픈데
눈에 보이지도 않네
손으로 만져지지도 않네
내 영혼 처럼
기억 속의 사람들,
기억 속의 동물들,
메말라 죽어간 플랜트들,
가슴에 있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핵전쟁’이라는 단어가 뉴스를 통해서 자주 전파되고 있다. 원자폭탄 투하로 일본이 몰락했던 1945년 이후, 핵무기를 의도적으로 쓴 전쟁은 없었지만, 핵 때문에 발생한 두 개의 참상은 잘 알려져 있다. 원전 사고로 일어나는 재앙은 여러 대(代)를 이어 크고 작고 때로는 극심한 상태로 나타난다는 것을 우리는 확인했다. 1986년에 있었던 ‘체르노빌(Chernobyl) 원전 사고’와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지진으로 발생했던 사고가 그 근거이다.
그러니까 1986년, 지금부터 36년 전 어느 봄 날 아침이었다. 내과 동료 의사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그는 그날 새벽에 소련 영(領),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Chernobyl)이라는 곳에서 발생한 원전 사고에 대해서 물어왔다. 그 동료 의사가 종양 방사선학과에 전화한 것은, 종양 방사선학과는 방사선을 이용해서 암 환자를 치료하기 때문에, 방사선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별일 아닐 것이라고 단순하게 내 생각을 설명했다. 왜냐하면, 방사선에 관련된 모든 사항은 해당 정부뿐 아니라 국제적으로 지켜야 할 기준과 지침이 있고, 이에 따라서 방사선은 통제되고 조정되는 환경 안에서 쓰이는 것이기 때문에, 사고가 났을 때 빨리 대처했을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나의 대답은 원칙적으로는 맞는 말이었지만, 내 생각이 틀렸었다는 것을 세월이 지난 후에 알게 되었다. 많은 자료가 아직도 은폐되어 있지만, 실제 그곳에서 일어났던 사고는 의도적이 아닌 결함이 있는 원전(原電 nuclear reactor)에서 발생한 것이었는데, 이 사고에 대처했던 러시아 정부와 관리들은 무지했다. 그리고 이 사고를 방관했고, 심각성을 은폐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구출되지 못하고 희생되었다. 사실의 은폐는 주변 국가에서도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고, 냄새도 나지 않는 동위원소들이 공중에 발산되었을 당시, 70%의 방사능은 바람을 타고 벨라루스를 덮쳤다. 이러한 사실을 국민에게 알리는 대신, 소련 영(領)이었던 벨라루스는 방사선 사고에 대한 정보유출을 법적으로 금했다. 러시아는 겨우 0.5%의 방사선이 그들의 땅을 더럽혔을 뿐이었다. 많은 양의 방사선은 사람을 죽이지만, 주변에서 그보다 적은 양을 받았던 사람들과 그 후손들은 지금도 그 후유증-주로 비정상적 뇌 기능, 정신질환, 발암, 유산, 기형아 임신으로 고생하고 있다.
나치 대학살로 619개의 마을이 파괴되었던 벨라루스는 이 핵사고로 485개의 마을이 없어졌고, 70개는 영구히 땅에 묻혔다. 전쟁 때는 4명 중 한 명이 죽었지만, 이 핵사고로 인해서 5명 중 한 명이 핵으로 더럽혀진 땅에서 살고 있다. 약 2 백 만 명에 달한다. 그중 7십 만 명이 어린이들이었다. (2006년 통계)
방사능에 더럽혀진 체르노빌에는 아직도 남아 있는 방사능이 테스트 기계에 잡힌다. 그곳은 사람이 살지 않는 폐허이다. 올해 우크라이나를 침범한 러시아 군대가 2월에서 4월까지 체르노빌에 주둔했었다고 한다. 트랜치를 파던 군인들이 방사선 중독에 걸렸고, 한 명은 사망했다는 보도이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에 대한 뉴스는, 당시 종양 방사선의학과에 의뢰된 암 환자들의 불안 수위를 높였다. 이러한 사고가 없었던 때에도, 의뢰되어 온 환자들은 ‘방사선’이라는 단어에 예민했다. 어떤 환자들은 방사선의학과 전문의사를 만나기도 전에 치료거부를 결심하기도 했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는 사람을 죽였는데, 어떻게 방사선 치료가 환자는 죽이지 않고 암세포만을 죽일 수 있느냐는 질문을 했다. 좋은 질문이었다. 정답은 있는데, 정답에 도달할 때까지 여러 단계의 정보를 이해시켜 주어야 해서 그 태스크는 쉽지 않았다.
방사선 치료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미국 암 환자의 약 50%가 암 치료 과정 중에 수술, 약물 이외에도 방사선이 필요하다. 이 세가지 방법을 때로는 따로, 때로는 함께 쓴다. 방사선은 잘 못 쓸 경우, 부위에 따라서, 방사선량(量)의 정도에 따라서, 부작용의 종류와 정도가 다르다. 생명을 앗아갈 수도 있다.
방사선은 암 치료뿐 아니라, 병이 의심될 때, 진단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쓰인다. X-ray가 그것이다. X-ray는 127년 전에 빌헬름 뢴트겐 (Wilhelm Roentgen)이라는 독일 사람이 발견했다. 비슷한 시기에 마리 큐리, 피에르 큐리 부부가 동위원소 라듐(Radium)을 발견했다. 동위원소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동위원소를 이용한 치료가 효과적이고 절대적인 질병들이 있다. 그 예가 자궁암이다. 자궁암의 경우 동위원소를 근접치료 방법으로 사용해서 막강한 방사선을 질병 부위에 쏘아 주고, 주위는 보호하는 방식이다. 이 위대한 발견으로, 인류의 의료는 획기적인 발전 도상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참고로 마리 큐리는 폴란드 사람으로 프랑스에 유학 갔다가 동료 물리학자인 피에르를 만나 결혼했다. 우리처럼 디아스포라였던 마담 큐리는 역사상 최초로 노벨상을 받은 여성이다. 그녀의 딸 아이린, 사위, 남편과 함께 5개의 노벨상을 거머쥔 역사에 남은 인재(人才) 가정이다.
원자폭탄을 만들어 한국을 일본으로부터 해방하는데 간접적인 이바지를 한 미국인,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노벨상을 받지 못했다. 위대한 발견을 한 천재 오펜하이머가 제외된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122년 동안 노벨 물리학상은 116번, 222명에게 주어졌다. 이 중 한 명은 두 번 수상했다.
그렇다. 방사선은 우리가 암에서 회복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치료 방법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방사선의 어두운 면을 잊어서는 안 된다. 무차별적으로 방사선 연구에 집중했던 큐리 부인과 그녀의 딸, 아이린은 각각 악성빈혈, 백혈병으로 죽었다. 마차 사고로 40대에 사망한 피에르 큐리도 오래 살았더라면, 방사선으로 인해 발암했을지도 모른다.
러시아는 핵무기를 써서 전쟁에 이기려는 망상을 버려야 한다. 당시 그들의 땅이었던 체르노빌에서는 의도적이 아닌 사고로 많은 사람이 죽고, 병들고 자연이 파손되었지만, 지금, 의도적으로 핵을 사용하는 전쟁은 있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과연 우리는 염려하지 않아도 될까. 비록 지난 100여 년 동안 방사선에 대한 방대한 지식이 쌓였고, 그러므로 방사선 의료사고를 예방할 수 있다. 그러나 핵전쟁이라면, 날아오는 핵무기를 막을 길이 없다. 지금, 이 순간, 누군가가 핵무기를 분해시키는 방법을 알아내려, 연구하고 있으리라 믿고 싶다. 우리는 안전제일의 세상에 살아야 할 권리가 있지 않은가.
그리고 방사선은 우리에게 필수적인, 보이지 않는 빛이고, 그늘이다.
지난달,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에 있는 바셀로나에 다녀왔다. 이 층에 있는 오래된 아파트에 머물렀다. 아파트에 딸린 길 쪽에 있는 좁은 발코니에서 내려다본 디아고날(Av de la Diagonal) 아침 길은 분주했다. 광장 쪽 방향으로, 한 중년의 남자가 누런색 마닐라 봉투를 옆구리에 끼고 서둘러 걸어가고 있었다. 짙은 남색 양복에 넥타이 없이, 말끔한 흰 셔츠를 받쳐 입은 남자는 적당한 숱의 반백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고 있었다. 갑자기 그 남자는 아버지의 환영(幻影)과 겹쳐졌다.
그 행인은 남아있는 듯한 젊음을 갖고 있었고, 그의 걸음걸이는 단단해 보였다. 나를 낳고 나를 기를 때, 아버지에게 잔해(殘骸)의 젊음이 있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늦둥이로 태어난 나는 늙은 모습의 아버지를 기억한다.
폐기물처럼 나에게 덤핑 되었던 사진들 속에서 아버지를 우연히 만났었다. 거의 백 년 가까운 세월을 아우르는 흑백 사진들은 이어지지 않는 가족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한 사진에서, 아버지는 옛 광화문 시청을 배경으로 팔짱을 낀 편한 모습으로 웃고 계신다. 사진 뒷 면에는 ‘환도(還都) 후(後)’라고 적혀있다. 1·4 후퇴 때 부산으로 피란 갔던 가족들이 서울로 돌아왔던 때인 모양이다. 옛 시대 사람치고 작은 키가 아닌 중년의 사나이는, 소매를 반쯤 걷어 올린 흰 와이셔츠 차림으로, 홀쭉하지도, 뚱뚱하지도 않다. 작고 까만 태의 동그란 안경을 끼고 있다.
아버지의 반듯한 이마는 적당히 넓고, 올백으로 빗은 반백의 머리숱은 너그럽다. 부리부리 한 눈, 뾰족한 콧날, 그리고 콧잔등 양미간 부분은 주저앉았다. 어머니는 아버지 코의 양미간, 코 부릿점이 낮아서, 액운(厄運)이 많다고 자주 넋두리하였었다. 마치 집안의 불행이 아버지의 코 때문인 것처럼 그랬다.
그렇긴 하다. 내가 자란 집안에는 불행한 사건들이 많았다. 아버지의 큰아들이 육이오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사건은 참으로 슬픈 비극이었다. 그의 죽음은 고집스런 먹구름이 되어, 바람이 불어도 물러가지 않고 늘 해님을 가렸다. 집안은 어둡고, 추운 채로 우리를 둘러쌌다. 거대한 검은 구름은 우리에게 웃거나, 울거나, 불평하는 것은 사치라고 가르쳤다. 뒤돌아보니, 엄마의 바닥이 보이지 않은 슬픔과 우울은 뼛속 깊이까지 스며있는 아버지의 아픔이 소리 되어 나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아버지는 늘 말이 없었다. 남은 우리 형제들에게 자신의 견해를 나누거나, 비판조차 한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늘 그러려니 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아버지라고 생각했다. 디아고날 길을 바삐 걸어가던 그 남자처럼, 아버지는 나날의 생계를 위해 말없이 바삐 걸으셔야 했고, 때론 누런 서류 봉투를 잃지 않으셨을까?
대로(大路)인 디아고날 길을 또 다른 큰길인 그라시아 길(Passeig de Gracia)이 대각선으로 가로지른다. 스페인의 복잡한 역사의 일부를 보여주는 80여 년 된 23m 키의 오밸리스크가 서 있는 원점을 중심으로 아름다운 광장이 형성되어 있다. 이 사각진 회색 뾰족탑은 내 모국의 역사처럼 민주주의를 이룩할 때까지, 싸우고, 빼앗기고, 포기하고 때로는 항복해야 했던 카탈루냐 지방과 스페인 간의 과거를 잊으라고 선언하는 듯 보인다. 꽃과 관목, 행인이 앉아 쉴 수 있는 벤치가 평화롭다. 노란색이 회색이나 갈색보다 더 많이 섞인 자연석 화강암 옛 건물들은 중앙에 자리 잡은 오벨리스크를 중심으로 360도 방사형으로 지어져 퍼져 있다. 광장을 면한 건물의 부분은 중심에서 거리가 먼 곳에 있는 건물 뒷부분보다 좁다.
광장을 면한 한 건물 얼굴에 ‘우리는 우크라이나와 함께합니다’라는 구호가 쓰여있는 4, 5피트 길이의 푸른색 배너가 걸려있는 것이 보인다. 구호를 중심으로, 배너의 한쪽 편에는 우크라이나 푸른색과 노란색의 위아래로 양분된 국기가, 오른쪽에는 유럽 연합(EU)을 상징하는 12개의 노란 별이 원형으로 그려져 있다. 배너의 중앙쯤에는 EU 깃발이 펄럭이고 있다. 유럽의 27개 회원국이 EU의 정치 경제 동합체를 이루지만 12개의 별은 참여국 숫자와는 특별한 관계가 없다고 한다.
올해 2월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해서 발발한 전쟁은 223일째,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세계에서 제일 큰 땅을 차지하고 있는 러시아와 그에 비하면 약소하기 그지없는 우크라이나 간의 전쟁(군인 숫자 1,350,000: 500,000)으로 1천 3백 4십만 명 우크라이나인들이 조국을 떠나 피란길에 올랐다고 유엔이 보고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이 전쟁의 사상자 통계는 확실하지 않지만, 러시아는 9년 전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였던 전쟁에서 잃은 자국 군인들의 306%를 현재 진행 중인 전쟁에서 잃었다고 한다.
미국 출신 군인 33,600여명과 137,800여명의 한국 군인을 전쟁터에서 잃은 나의 조국이다. 나는 항상 어머니들, 미망인들, 자식들의 슬픔에 눈을 두었었다. 왜 똑 같이 아팠을지도 모르는 아버지들을 보지 못했을까? 미국과 한국의 171,000여명의 아버지들은 내 아버지 처럼 아들을 잃고 아파 신음하며 늙어갔을 것이다. 그런 아버지들이, 바셀로나에 갔을 때 까지, 왜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또 얼마나 많은 아버지가,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에 나간 아들을 기다리며 살아가야 할 것인가? 얼마나 많은 아버지가 울음을 참고 나날을 견디어 나가야 할 것인가? 나의 아버지처럼.
‘너 이렇게 나돌아다녀도, 네 남편이 뭐라고 하지 않아?’
‘무슨 뜻이야?’
‘너~~가 집에 붙어 있는 날이 없는 것 같아서.’
‘나는 붙박이장이 아닙니다요~~!’
질문하였던 그 친구와 나는 같은 중, 고교를 6년 동안, 또 전문학과(college)는 다르지만 같은 대학(university)을 다녔다. 남가주에서 동문회를 통한 동아리 활동 중에 다시 만나, 왕래하는 친구이다. 동아리 활동은 고교 동문회원들이 취미 생활을 위해 만든 것으로, 음악, 미술, 사진, 문학 등이 있다.
이렇듯, 모국을 떠나 살지만, 한국인들은 외로움을 뒤로하고, 활발한 사회활동을 병행하면서 특수한 이민자의 삶을 반영하는 예술, 문화 활동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 같다. 곳곳에 세워진 한인회, 한글학교, 한국어로 만들어진 신문, 한국어로 방영되는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을 생각해 본다. 정치계, 교육계에도 입성한 분들이 많다.
다시 나의 이야기로 돌아간다. 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동아리 활동들은 이민자라는 커다란 공통분모가 바쳐주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내가 무척 어려워하면서도, 하고 싶어 하는 글을 쓰는 것과 합창반에서 노래하는 것이 그 예이다. 노래하고 싶은 마음이 많았음에도 시간을 맞출 수 없어서 합창단원이 되지 못하다가, 큰마음을 먹고, 처음으로 출석한 날, 나를 반겨주던 친구는 한마디 꼭, 짚어서 말했다. 그리고서 친구는, 덧붙여, 한마디를 더 하였다.
‘네 남편의 외조가 크다!’
외조라니!
실상, ‘외조’와 ‘내조’의 개념은 이 미국 사회에는 없다. 그러나 한국 출신 이민자들의 삶은 한국문화를 기반으로 만들어져가고 있으니까, 이 개념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남아있을 것이다. 문화체육관광부 국립국어원 ‘온라인 가나다’라는 사이트에, 외조, 내조라는 단어를 남자, 여자라는 틀에 넣어서 올렸던 어떤 글에 대한 견해 내용이 생각난다. 현대 관념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내용/질문을 올린 어느 넷티즌에게 ‘온라인 가나다’는 다음과 같은 답글을 썼다. “예부터 바깥, 외(外)를 포함하는 단어는 보통 남편의 역할이나 위치를, 안, 내(內)를 포함하는 단어는 보통 아내의 역할이나 위치 등을 의미해 왔습니다. 과거가 묻어 있는 단어들로 볼 수 있지만, 이러한 단어를 해당 의미로 사용하고 있어서, 그 쓰임을 인정하여 사전에 담은 것입니다”. 아직도 쓰는 단어이지만, 내용은 변해왔으니 알아서 하라는 소리 같다.
그렇다. 그 표현대로라면, ‘외(外)’란 밖이라는 뜻으로, 남편의 역할, 위치를 뜻하면서 남편이 밖에서 안사람인 아내를 돕는다는 뜻으로, 여성의 사회활동은 이례적이라고 단정하고, 여성의 정체성이란 ‘집 안’으로 국한하는 시대적, 역사적 표현이다.
결혼문화가 급변하고 있다는 기사를 2018년에 매일경제 최경선 기자가 쓴 바 있다. 요즘 장가가거나 시집가는 신혼부부는 드물고, 결혼하자마자 독립해서 따로 사는 게 대세라고 했다. 한국이 그런데, 이곳 미국에 사는 디아스포라들에게는 내조, 외조란 더더욱 맞지 않는 개념이고 표현이겠다. 자녀 교육상 조심해서 사용하는 것도 현명할 것이다.
카말라 헤리스(Kamala Harris)가 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때, 그리고 케탄지 브라운 잭슨(Ketanj Brown Jackson)이 대법관으로 인준되었을 때, 미국 미디어는 남편들의 내조가 있었다는 말을 쓰지 않았다. 시대적, 역사적 요소들을 강조하고, 문화적인 부부들의 이야기를 올렸지만, 내조, 외조로 구분하지는 않았다. 이 두 여인의 역사적인 성공을 축하하고, 함께하는 남편들은 아내의 능력을 이미 젊었을 때부터 알았었고, 두 남자는 그들이 응원한 아내의 출세를 기뻐하고 자랑했다. 멋있게 보였다.
이 두 여성의 출세가 단순한 본인들의 노력으로만 이루어졌다고 볼 수는 없다. 남편들의 응원뿐 아니라, 그들이 성장할 때 그들이 보았던 부모들의 단련된 삶이었다. 그들은 부모들이 다져온 삶의 기반 위에서 성실하게 그들의 길을 갔던 것 같다. 이민자 일세인 부통령의 부모들과 노예의 5대 후손이었던 대법관의 아버지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자식들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식들과 함께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었던 사람들이었다.
잭슨 대법관이 했던 많은 명언 중에 마음에 와닿는 문구가 있다. ‘인종 차별이(역자 주: 흑인들을 백인과 섞이지 못하게) 우리(역자 주: 흑인들)를 분리했던 때부터, 흑인 여성이 대법관이 될 때까지는 한 세대밖에 걸리지 않았어요…!’라는 말이다. 이 말은 미국은 이민자와 노예 조상들이 쌓은 기반 위에서 쉼 없는 투쟁을 마다하지 않았던 후예들이 있었고, 과감한 개혁에 앞장선 선구자가 있었다는 뜻이 함축된 것일 것이다.
한국은 어떤가? 2009년 이후, 한국의 여학생들이 남학생들보다 대학 진학률이 높았지만, 여전히 전문분야에서는 여성의 분포가 뒤진다. 변호사의 약 19%, 의사의 24%, 교수의 23%가 여성이다. 2016년 한국 통계국(KOSIS Korean Statistical Information Service)은 일할 수 있는 연령대 남성의 74.7%, 여성의 52.7% 가 직업전선에 있다고 보고했다. 20% 이상의 격차를 보여준다.
내조, 외조라는 단어를 배척하는 풋풋한 젊은이들이 있는 나라, 여왕이 있었던 나라, 미국은 하지 못했던 여성 대통령을 선출했던 나라가 나의 모국 한국이다. 딸들과 며느리의 사회활동과 사회 진출을 위해서 사위, 아들, 그리고 아버지, 엄마가 함께 노력한다면, 시간이 걸려도 여성이 차지하는 전문직의 분포도도 점차 시정되고 보수될 것으로 믿는다.
나의 삶을 뒤돌아본다. 긴 세월을 남편도 나도 다중작업하며 살았다. 우리는 그렇게 살면서, 서로를 응원해주는 협조자(協助者)이었다. 가정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동조(同調)가 아닌 협조를 하면서 살아왔다. 동조란 남의 주장에 자기의 의견을 일치시키거나 보조를 맞춘다는 뜻으로, 동조의 조(調)는 협조의 조(助)와 한문 글자가 다르듯이, 그 뜻을 달리한다. 협조(協助)에 쓰이는 조(助)는 ‘보조적인’ 또는 ‘버금간다.’라는 뜻이다.
참으로 산다는 것은, 쉽지 않다고, 새삼스레, 다시 생각해 본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협조하며 장점을 살려주면서 함께 걸을 때, 세상은 그런데로, 그럴듯하게, 살 가치가 있게 변해준다는 것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