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노동은 신선한 것이라고 했던가?

거의 20년은 되었을 것이다. 이 유화작품을 본 것은. JAMA(Journal of American Medical Association)은 Theodore Gericault (1791-1824)라는 프랑스 화가의 유화 ‘Portrait Study’을 실었다. 이 작품에 대한 설명은 많지 않다. Google Arts & Culture 에 의하면 Medusa 라는 배가 1816년 아프리카 바다에서 파선했을 당시를 그린 ‘Raft of Medusa’ 로 유명해진 화가이라한다. 그가 준비기간 동안 연습한 작품이 위의 그림이다. 모델은 요세프라는 이름을 가졌던 모양이다. 참고로 메두사배에는 140명이 타고 있었고 13일간 표류했다한다. 14명이 살아남았다고 한다.

1818-1819년은 프랑스 노예해방이 없던 때였다. 그는 이 배에 탔던 노예를 생각하고 그린 것이었을까?

흥미로운 사실은 이 화가가 제 정신이 아닌 사람들의 초상화(Portrait of Insane) 을 그린 것으로도 유명하다. ‘제 정신이 아닌 사람들’… 그들은 거의 중년 이상의 남, 녀들이었다. 화가 자신도 좀 제 정신이 아닌 사람축에 들었다고 하는데, 그런 그림을 그리게 된 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추정된다. 자신의 정신질환의 테라피라는 설이 가장 유리하다고 한다.

디카수필 시작한다: ‘빈사의 사자상’

카메라에 어느 순간을 담는다. 그 순간을 누군가에게 주면서, 당시에 얻었던 마음을 나누는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은 뜻깊은 일일 것이다. 나에게는 새로운 방식의 나눔이다. 보여주고 싶은 자연이나 역사-때로는 피비린내 나는 역사-가 배여 있는 오래된 건물들, 방문한 나라나 고장의 문화를 표현하는 물건들을 글로 표현하려면, 글 쓰는 이는 힘들고, 읽는 사람은 상상력을 동원해야 하는 지루한 일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우선 ‘디카수필’ 예찬에 대한 나의 마음을 싣는다.

‘빈사의 사자상(The Lion Monument)’은 스위스 루체른에 있는 작은 공원의 절벽에 자연석을 이용해서 만든 작품이다. 실제 사자보다는 큰(10 x 6m) 거대한 조각품으로 죽어가는 사자를 표현하고 있다. 덴마크 버텔 토르발센(Bertel Thorvaldsen) 조각가가 1821년 완성한 작품이다. 앞에 있는 작은 연못 표면은 항상 죽어가는 사자의 모습을 반영한다. 그러나 이 사자는 아직도 살아 있다.

사자는 머리를 반쯤 숙이고, 마지막 숨을 거두는 모습이다. 사자의 오른쪽 앞발은 프랑스 왕가를 나타내는 백합이 새겨진 방패를 누르고, 발톱은 웅크리고 있다. 아파서 일까? 아니면 누군가를 할퀴려는 최후의 동작이었을까? 스위스 문장이 그려진 다른 방패에 사자는 머리를 기대고 있다. 그리고 부러진 창은 옆구리에 꽂힌 채이다. 비통한 모습이다.

이 조각의 사연은 이렇다. 스위스는 1700년대에 가난했다. 젊은이들은 돈을 받고 프랑스의 용병으로 근무가게 된다. 그러던 중, 230년 전, 1792년에 프랑스에 혁명이 일어난다. 루이 16세를 충성을 다해서 보호하던 스위스 용병 1,100명 중에서 760명이 전사했다.

이들의 용맹과 충성을 기리기 위해서 만든 비통한 모습의 ‘빈사의 사자상’을 일 년에 약 백 십만 명의 관광객이 방문한다고 한다.

우크라이나와 노블리스 오블리제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에서 약 4만 명의 미국 젊은이들과 약 140,000명의 한국 군인들이 전사했다. 무모한 전쟁이었다. 전쟁으로 한창나이의 젊은이들은 죽었고, 출전했다가 다행히 살아남은 청년들은 진학할 기회를 잃었다. 나의 큰 오빠는 전사했고, 둘째 큰 오빠가 대학으로 진학할 기회를 놓친 장본인이었다.

휴전되고 나서, 미국의 한 독지가 여성은 나의 둘째 큰 오빠 같은 청년들에게 미국 유학의 길을 제안했다. 그렇게, 둘째 큰 오빠는 미국에서 학부를 마칠 수 있었다. 그는 귀국해서 골프채 만드는 회사 사장, 또 다른 사업체들의 CEO, COO 로 활약했다.

전쟁을 겪고 한강의 기적을 만드는데 이바지한 오빠 세대들이 받았던 도움을, 한국인 디아스포라가 이 미국 땅에서 되돌려 베풀고 있다. 바로 내 고등학교 동문이 마음을 모아서 한 일이다.

남가주에는 700 명이 넘는 동문이 살고 있다. 동문회의 미션 중의 하나가 사회봉사이다. 동문을 만나 그리움을 달래고, 회포를 푸는 것은 디아스포라 삶에 중요하다. 그리고 사회봉사의 미숀도 그 이상으로 의미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동문회는 Hurricane Katrina가 있었던 2005년에는 경제적으로 힘든 태풍 피해자들을 도왔고, 코비드 사태가 시작된 2020년에는 오고 갈 곳이 없이 락다운 된 한국출신 유학생들을 도왔다. 올해는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이곳에 유학중인 학생들을 찾아 내어 장학금이 아닌, 생활보조금 $18,000불을 모아서 나누고 있다.

뒷담이지만, 우크라이나 유학생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워싱턴 DC에 있는 우크라이나 대사관, 샌프란시스코 총영사관, 엘에이에 있는 우크라이나 문화센터에 연락을 넣었을 때,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감동하고, 감사하면서 학생들의 데이터를 찾아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행정부와 문화센터에는 유학생에 대한 data base 가 없었다.

결국, UC 대학들에 연락을 하고, 학생들을 찾아내었다. 연락된 학생들은 모두 힘든 시간을 지내고 있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일차적으로 CSUN(Cal State University of Northridge) 세명의 학생들과 관계자들을 만났다. 한 학생당 $2,000불을 전달했다. UCLA 한명, UC Berkeley 5명에게 역시 같은 금액이 곧 전달된다.

오빠 같은 청년들에게 진학의 길을 열어 준 그 여성 독지가처럼, 우리 디아스포라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행할 때이다. [끝]

한국일보 ‘발언대’

류모니카/한국어진흥재단 이사장/남가주 경운회 2020-2021 동창회장/2022 사회복지부 담당

‘호국 영령을 국민의 이름으로 추모합니다’

새끼 고양이다. 몇십 년 전에 내가 근무하던 병원 근방에 있는 홈디포에서 구조했던 까만 고양이 ‘네로’처럼, 작고 새까맣다. 새끼고양이는 101 프리웨이 길갓에 너부러져 있었다. 주위에 피가 없고 몸체가 흐트러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서, 차에 치인 것이 아니라, 달리는 차에서 내 던지어진 것 같았다. 언짢았다. 마음이 아프다고 하는 말을 돌아가신 어머니가 들으셨다면, 어머니는 말씀하셨을 것이다. 사람들도 전쟁터에서 죽어가기도 하는데, 그런 일로 상심해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그렇다. 엄마 말씀대로, 고양이 한 마리가 살생 되었다고 상심해서는 안 되겠지. 지금 대서양을 건너 6,400마일 떨어진 유럽에서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되고 있지 않은가? 어머니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아닌 한국전에 대해 말씀을 하고 계시겠다. 6·25로 많은 아픔을 겪어 내시고, 크게 웃지도 울지도 않으시고 평생 말이 없으시던 어머니가 가신지 이미 오래되었다. 어머니가 말씀하시는 6·25와 우크라이나가 겪고 있는 전쟁의 참상은 다를 바 없는 것 같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끝이 없는 인간의 욕심을 말해준다. 러시아는 1922년부터 1991년까지 70년 동안, 주변의 15개 국가를 점령하고 있던 슈퍼 파우어였다. 비록 10%의 땅덩어리가 쓸모없는 툰드라이고, 30년 전 15개국을 독립시킨 후에 영토가 줄었지만, 러시아는 아직도 세계에서 제일 크다. 아시아 동북쪽 끄트머리에 있는 캄차카반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서쪽 유럽의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무려 11시간의 시간대를 가진 나라이다. 그런 나라가, 2014년 크림반도 침공 이후, 올해 2월에 우크라이나 본토를 침범했다.

우크라이나의 남부, 아조프 바다 쪽을 완전 장악하고 싶어서 그렇다고 한다. 2014년에 크리미아반도는 자치공화국이 되었지만, 사실상 러시아가 통치하고 있다. 아조프 바다는 흑해로 연결되고, 전략상, 국제 물물 교환 상 중요한 곳이다. 고대 비잔틴 시대부터, 20세기에 걸쳐 오토만제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의 사르데냐, 러시아가 이곳을 차지하려고 때때로 편을 달리 가르면서 싸웠다고 한다. 풍경이 수려하고 날씨 또한 좋아서 크리미아반도의 수도, 유파토리아(Eupatoria)는 러시아 제국의 짜(Tsar)가 휴양 차 머물곤 했던 곳이다.

크리미아전쟁이라면 기억나는 사람이 있다. 현대 간호론의 기초를 깔았던 영국 여인 ‘백의의 천사’,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다. 그녀는 크리미아전쟁 때 터키에 머물면서 부상병을 간호했다. 전쟁이 있었던 1854년부터 1855년 동안 전사자, 부상자, 다른 이유로 사망한 세 그룹의 군인들을 도표(graph)로 만들어 표시하고 세상에 알렸다. 그 도표가 장미 모양이라서 ‘장미 도표’라고 불렸다고 한다. 그 이후 통계학자라는 또 다른 명칭이 나이팅게일에게 붙여졌다.

70년 동안 러시아 속국으로 있다가 날개를 펴던 우크라이나가 당하고 있는 재침과 72년 전 있었던 6·25 한국전쟁이 자꾸 내 머릿속에서 겹쳐진다. 어쩌면 그것은 5월 마지막 월요일이 미국의 메모리얼 데이였고, 6월 6일은 모국의 현충일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미국과 한국의 호국 영령을 기리는 기념일이 일주일 상관으로 지나갔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로스앤젤레스 국립묘지’가 있는데도, 묘지를 방문하지 않았다. 6·25 때 그 젊은이들은 한국이라는 알지도 못했을 터이다. 그런 나라에 가서 안타깝게 전사한 젊은이들에게 보속(補贖)하는 마음으로 갔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서울 현충원에 있는 큰오빠의 빈 무덤에는 봉사자들이 태극기라도 꽂았을까?

큰오빠는 육이오 전쟁 때 전사했다. 집안에는 그의 전사에 관한 문서가 없었다. 집안의 역사를 알고 있는 부모님들, 올케언니, 둘째 큰오빠는 이 세상에 없고, 나는 실상 그들이 생존했던 당시에는 그의 전사에 관한 내용에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전쟁의 후유증으로 우울을 되씹고 살았던 부모님들의 침묵이, 늘 나를 무겁게 눌렀었던 것 같다.

그러던 중, 6·25전쟁 참전 용사 초청 기념식이 엘에이에서도 있을 것이라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이 기념식에 초청된 살아남은 사람들, 그것도 엘에이에 사는 분들이 몇 분이나 될지 궁금했다. 전쟁 당시 20대이었으면 지금은 90대의 노인들일 것이다. 그분들이 건강했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있다. 그 바램과 함께, 나는 큰오빠 전사에 대한 기록이 찾고 싶어졌다.

전쟁기념관 정보 사이트에는 전사자에 대한 간단한 기록이 올려져 있었다. 좀 놀랐다. 3년 전 전쟁기념관을 방문했을 때에는 전사자의 소속 부대를 알아야만 동판에 새긴 이름을 찾을 수 있었다. 나는 그때, 오빠의 이름을 찾지 못했다.

이번에는 이름을 써넣으니까, 육군/제6사단 소속/중위/장교/6·25전쟁/군번 15348/생년월일 (빈칸)/출생지 서울/전사 일자 1950년 8월 21일/전사 장소 경북/연고자 (빈칸)/명비 위치 115-ㄴ-029라는 정보가 나왔다. 그가 속했던 부대와 그의 군번, 그리고 전사한 날짜…. 이 얼마나 귀중한 내용인가!

이 내용을 인쇄해 놓고 싶어서 프린트 앱을 눌렀더니 certificate가 컴퓨터 화면에 떴다. 사진이 들어갈 자리는 비어 있었다. 생년월일에 대한 기록이 없었는지, 이 역시 빈칸이었다. 아랫줄에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목숨 바친 호국 영령을 국민의 이름으로 추모합니다’라는 문구가 두 줄로 나뉘어서 쓰여있고, 제일 밑줄에는 빨갛고 큰 글씨로 ‘전쟁기념관’이라고 마감되어 있었다.

그의 짧았던 삶의 마지막을 한 페이지에 정리한 내용이다. 그는 육이오 전쟁에 출전한 후, 두 달도 되기 전에 전사했던 것이었다. 이제 나는 그의 기일(忌日)을 안다. 그를 위한 연미사 신청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큰오빠는 제나라를 위해서 싸우다가 전사했고, 나는 그 의미를 뒤로 한 채, 그저 그를 기억해 보려고 지금 애쓴다. 그런데 나는 거기서 그치지 말고, 위키백과가 전하는 16개국의 참전 군인들도 기억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도 오빠처럼 아내와 어린 자식들, 부모 형제가 있었을 것이다. 한 통계에 의하면 참전했던 미국 용사들의 나이는 평균 17세에서 24세이었다고 하지 않는가?

그들을 존경하고 기리는 뜻에서, 각 나라에서 파병되었던 젊은이들, 그리고 안타깝게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젊은 그들에 대해서 알고 싶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의 숫자로 다가올 뿐이다.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아서 답답하고, 마음이 무겁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모두 합쳐서 합산하기 전에, 일(1), 즉 하나라는 숫자를 들여다본다. 그 ‘하나’로 표시된 청년을 지금을 살고있는 우리가 알아볼 방법은 있는 것일까?

16개국 우호 국가에서, 총 1,719,597명의 군인이 투입되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한국 1,090,911명, 미국 480,000명, 영국 56,000명, 카나다 25,687명, 터기 14,936명, 오스트레일리아 8,407명, 필리핀 7,420명, 태국 6,426명, 네덜란드 5,322명, 콜롬비아 5,100명, 그리스왕국 4,992명, 뉴질랜드 3,794명, 에티오피아 3,518명, 벨기에 3,498명, 프랑스 3,421명, 남아프리카 826명, 룩셈부르크 83명이었다.

이들 중에 한국 군인 149,005명, 미국 군인 36,574명이 전사했다. 실종, 포로, 부상자를 합친 16개국 젊은이들을 합계하면 1백 5십만 명이 넘는다. 이들이 남긴 유족으로 아내와 한 명의 자식이었다고 치면, 총 3백만 명이 가장(家長) 없는 가정에서 아프고, 힘들게 살았다고 풀이할 수 있다. 또 부모까지 가족에 넣어서 계산해 보면 6백만 명이 된다. 이들의 고국은 북미, 남미,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 오스트랄리아 여섯 개 대륙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그 흩어져 있는 지구촌 곳곳에서 젊디젊은 미망인들이 어린아이들을 기르면서, 어떤 경우는 유복자를 낳고 기르면서, 힘든 세월을 보내었을 것이다. 그들이 가난하게 살지 않았기를 바란다.

그렇다. 마음이 아프고 우울해도 이젠 고만 접어야 하겠다. 큰오빠의 영이 쉬고 있었던 그가 떠났던 -후암동 집-을 오빠의 영이 아직 지구촌에서 떠돌고 있다면, 잊으라고 해야 하겠다. 그 집은 나의 집이기도 하지만, 나는 그곳을 아주 오래전에 떠나지 않았던가. 이제 큰 오빠와 한국에서 마지막 숨을 거둔 16개 나라의 젊은 영령들을 위해서, 슬프고 무거운 마음일랑 떨쳐내고, 감사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연미사를 신청해야 하겠다.

누나를 만나고 온 날

하늘이 푸르른 가을날 늦은 오후, 나는 누나를 만났습니다. 누나는 동작동 현충원 근방에 있는 한 에어 비엔 비에 머물고 있었어요. 현충원 근방에 있는 달마사로 오라 했지요. 내가 열 살 때, 미네소타라는 곳, 어느 대학원으로 유학을 떠났던 누나는 지금껏 미국에 살고 있습니다. ‘국군의 날’이나 ‘현충일’이 되면 잠깐씩 현충원을 다녀가곤 하던 누나는, 지난 삼 년 동안 아버지를 만나러 오지 못했어요. 매부가 아팠기 때문이지요. 매부는 편안하게 삶을 마감했다고 해요.

누나는 가톨릭 신자입니다. 그런 누나가 올해는 절에서 만나기를 원했습니다. 누나는 얼어붙은 마음을 달마사에서 우선 녹이고 싶다고 했습니다. 새하얀 화강암 비석들이 단정히 줄지어 기다리는 모습이 뼛속까지 시려온다고 했습니다. 돌 비석들은 소리 없이 울고, 가슴은 신음을 끌어안고 있다 했어요. 돌 비석 주인들의 주름 없는 얼굴들을 볼 자신이 없어서, 오랜 세월, 매일 세 끼를 먹고, 얼굴에 주름을 달고 살다가 영생을 찾은 이들의 흔적을 우선 보고 싶다 했습니다. ‘달마사에선 목탁 소리를 들을 수 있겠지?’ 하고 전화에서 묻던 누나는 이젠 이 세상보다 저세상에 친구가 더 많다며 킥킥 웃었습니다.

누나는 만나기로 한 대웅전 앞에 보이지 않았어요. 한참 어둠에 익숙해지고 나니, 부처님상에서 떨어져 있는 곳에, 눈을 감고 꿇어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어요. 누나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누나, 부처님한테 기도한 거야? 하느님한테 혼나려고?’

‘하느님은 그렇게 옹졸하지 않아. 어디서나 당신을 생각하는 것이 기도거든’

‘누나, 이젠 한국 오면 우리 집에 머물자! 매부 없이 혼자 올 테니, 그게 쉽지 않을까?’

‘말은 고마운데, 너의 집은 대전에 있으니까 동작동에서 너무 멀어.’

‘아버지 묫자리는 성묘가 필요 없잖아. 그리고 아버지가 거기에 계신 것도 아닌데……’

‘그래, 그렇지. 빈 무덤이지.’

‘매형 돌아가셨을 때, 장례 미사에 참석 못 해서 정말 미안해. 그 때 난 아프리카 우간다에 있었어. 우간다에서 미국까지 하루 이상이 걸리고, 비행기도 두어 군데에서 갈아타고, 그것도 매일 뜨는 것이 아니거든. 또 그때 중요한 계약을 따내어야만 했어.’

‘괜찮아. 예상했던 죽음이었는데 뭐.’

나의 많은 질문에 누나는 소리없이 빙그레 웃으면서 싫어하지 않고 대답했어요.

누나는 50여 년 전 나를 업어주던 때보다 더 작아 보였어요. 나를 등에 태웠던 누나의 좁은 어깨는 언제나 나를 불안하게 했었지요. 어렸을 때, 누나 등에 업히면 왠지 더 슬펐어요. 누나는 나를 업고 강의를 들으러 간 적도 있었어요. 누나가 대학생일 때이었어요.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할께요.

쭈글쭈글한 주름이 누나의 뺨을 가로지르기도 하고 세로로 오르내리기도 했어요. 맑았던 얼굴엔 검버섯이 피었고, 청색이 날 정도로 까맣던 머리카락은 흰 눈에 덮인 까만 기와지붕처럼 추워 보였어요.

나는 아버지를 본 적이 없어요. 아버지는 한국전쟁 때 전사하셨어요. 71년 전, 누나가 세 살 때이었데요. 스물 몇 살 나이에 과부가 되고, 가장이 된 엄마는 어려운 집안 살림을 꾸려나가느라 많이 고생하셨어요. 그래서 그랬는지 자주 아파 누워 계셨던 것을 기억해요. 바쁘고 옹색한 살림을 꾸려가면서도 고아원에서 봉사하시곤 했데요. 거기에서 겨우 걸음마를 띄기 시작한 나이의 나를 만났다고 해요. 전쟁이 끝나고 십 오년 정도 지난 후였다고 해요. 나는 전사하신 아버지의 가정으로 입양되었지요. 아버지의 성씨를 받았고요. 나는 유복자(遺腹子)라기보다 유복(遺腹) 입양아(入養兒)인 셈이었어요.

나를 업어 데리고 갔던 엄마……. 퀴퀴한 땀내가 배인 엄마의 적삼, 그 가슴에 안겨 잠들곤 했던 나는, 지금도 엄마 냄새를 맡을 수 있어요. 엄마의 냄새는 끝없는 평화를 약속하는 것이었어요. 엄마는 쌀이 부족하면 죽을 만들어 누나랑 형과 저를 먹이셨어요. 나를 때리는 사람이 없는 것이 이상했어요. 과학을 잘하던 형은 엔지니어가 되는 대학에, 책을 많이 읽던 한 누나, 이번에 잠깐 귀국한 그 누나는 문학을 전공했어요. 나는 엄마가 원하시는 경영학을 공부하였어요. 우리 모두는 장학금을 받았습니다. 엄마는 아르바이트 대신, 그 시간에 공부에 열중하고, 장학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하라고 말씀하시곤 했어요.

가난한 살림, 엄마가 가장인 우리 집에, 나를 데리고 오셔서 입적 시키셨던 엄마는 배짱이 컸거나 바보 같은 신념으로 사셨던가 봐요. 누나는 엄마가 늘 하시던 말이 ‘하느님은 산 입에 거미줄 치지 않는다’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엄마는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만나지 못한 아버지이지만 아버지는 나에게 당신의 성(姓)을 주셨고 아버지의 이름은 엄마만큼이나 나에게 튼튼한 성채가 되었어요. 두 누나와 형은 자주 편찮으셨던 엄마 대신 나를 돌보아 주었어요.

‘누나, 누나는 비 오는 날이면 나를 업고 산에 지렁이 잡으러 갔었지?’

‘그랬지.’

‘누나, 학교는 빼 먹고 간 것이었어?’

‘응. 당연히……….’

‘누나, 낙제를 어떻게 면했어?’

‘겨우, 겨우. 그래서 너를 업고 학교 간 적도 있었지. 출석 일수 미달이라고 하였을 때, 어떤 비오는 날은 지렁이 잡는 일을 포기해야 했어. 지금 생각하니까 우습다!’

‘그랬구나. 그런데, 누나, 왜 지렁이를 잡으러 다녔어?’

‘엄마한테 고깃국을 끓여드릴 돈이 없었거든. 고기에 있는 단백질이 지렁이에 많다고 해서.’

‘누나, 그럼 우리가 먹던 국이 지렁이 국이었어?’

누나를 만나고 온 날 밤 꿈속에서, 지렁이가 소고기로 변하는 국을 맛있게 먹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