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와 노블리스 오블리제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에서 약 4만 명의 미국 젊은이들과 약 140,000명의 한국 군인들이 전사했다. 무모한 전쟁이었다. 전쟁으로 한창나이의 젊은이들은 죽었고, 출전했다가 다행히 살아남은 청년들은 진학할 기회를 잃었다. 나의 큰 오빠는 전사했고, 둘째 큰 오빠가 대학으로 진학할 기회를 놓친 장본인이었다.

휴전되고 나서, 미국의 한 독지가 여성은 나의 둘째 큰 오빠 같은 청년들에게 미국 유학의 길을 제안했다. 그렇게, 둘째 큰 오빠는 미국에서 학부를 마칠 수 있었다. 그는 귀국해서 골프채 만드는 회사 사장, 또 다른 사업체들의 CEO, COO 로 활약했다.

전쟁을 겪고 한강의 기적을 만드는데 이바지한 오빠 세대들이 받았던 도움을, 한국인 디아스포라가 이 미국 땅에서 되돌려 베풀고 있다. 바로 내 고등학교 동문이 마음을 모아서 한 일이다.

남가주에는 700 명이 넘는 동문이 살고 있다. 동문회의 미션 중의 하나가 사회봉사이다. 동문을 만나 그리움을 달래고, 회포를 푸는 것은 디아스포라 삶에 중요하다. 그리고 사회봉사의 미숀도 그 이상으로 의미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동문회는 Hurricane Katrina가 있었던 2005년에는 경제적으로 힘든 태풍 피해자들을 도왔고, 코비드 사태가 시작된 2020년에는 오고 갈 곳이 없이 락다운 된 한국출신 유학생들을 도왔다. 올해는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이곳에 유학중인 학생들을 찾아 내어 장학금이 아닌, 생활보조금 $18,000불을 모아서 나누고 있다.

뒷담이지만, 우크라이나 유학생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워싱턴 DC에 있는 우크라이나 대사관, 샌프란시스코 총영사관, 엘에이에 있는 우크라이나 문화센터에 연락을 넣었을 때,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감동하고, 감사하면서 학생들의 데이터를 찾아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행정부와 문화센터에는 유학생에 대한 data base 가 없었다.

결국, UC 대학들에 연락을 하고, 학생들을 찾아내었다. 연락된 학생들은 모두 힘든 시간을 지내고 있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일차적으로 CSUN(Cal State University of Northridge) 세명의 학생들과 관계자들을 만났다. 한 학생당 $2,000불을 전달했다. UCLA 한명, UC Berkeley 5명에게 역시 같은 금액이 곧 전달된다.

오빠 같은 청년들에게 진학의 길을 열어 준 그 여성 독지가처럼, 우리 디아스포라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행할 때이다. [끝]

한국일보 ‘발언대’

류모니카/한국어진흥재단 이사장/남가주 경운회 2020-2021 동창회장/2022 사회복지부 담당

‘호국 영령을 국민의 이름으로 추모합니다’

새끼 고양이다. 몇십 년 전에 내가 근무하던 병원 근방에 있는 홈디포에서 구조했던 까만 고양이 ‘네로’처럼, 작고 새까맣다. 새끼고양이는 101 프리웨이 길갓에 너부러져 있었다. 주위에 피가 없고 몸체가 흐트러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서, 차에 치인 것이 아니라, 달리는 차에서 내 던지어진 것 같았다. 언짢았다. 마음이 아프다고 하는 말을 돌아가신 어머니가 들으셨다면, 어머니는 말씀하셨을 것이다. 사람들도 전쟁터에서 죽어가기도 하는데, 그런 일로 상심해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그렇다. 엄마 말씀대로, 고양이 한 마리가 살생 되었다고 상심해서는 안 되겠지. 지금 대서양을 건너 6,400마일 떨어진 유럽에서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되고 있지 않은가? 어머니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아닌 한국전에 대해 말씀을 하고 계시겠다. 6·25로 많은 아픔을 겪어 내시고, 크게 웃지도 울지도 않으시고 평생 말이 없으시던 어머니가 가신지 이미 오래되었다. 어머니가 말씀하시는 6·25와 우크라이나가 겪고 있는 전쟁의 참상은 다를 바 없는 것 같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끝이 없는 인간의 욕심을 말해준다. 러시아는 1922년부터 1991년까지 70년 동안, 주변의 15개 국가를 점령하고 있던 슈퍼 파우어였다. 비록 10%의 땅덩어리가 쓸모없는 툰드라이고, 30년 전 15개국을 독립시킨 후에 영토가 줄었지만, 러시아는 아직도 세계에서 제일 크다. 아시아 동북쪽 끄트머리에 있는 캄차카반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서쪽 유럽의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무려 11시간의 시간대를 가진 나라이다. 그런 나라가, 2014년 크림반도 침공 이후, 올해 2월에 우크라이나 본토를 침범했다.

우크라이나의 남부, 아조프 바다 쪽을 완전 장악하고 싶어서 그렇다고 한다. 2014년에 크리미아반도는 자치공화국이 되었지만, 사실상 러시아가 통치하고 있다. 아조프 바다는 흑해로 연결되고, 전략상, 국제 물물 교환 상 중요한 곳이다. 고대 비잔틴 시대부터, 20세기에 걸쳐 오토만제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의 사르데냐, 러시아가 이곳을 차지하려고 때때로 편을 달리 가르면서 싸웠다고 한다. 풍경이 수려하고 날씨 또한 좋아서 크리미아반도의 수도, 유파토리아(Eupatoria)는 러시아 제국의 짜(Tsar)가 휴양 차 머물곤 했던 곳이다.

크리미아전쟁이라면 기억나는 사람이 있다. 현대 간호론의 기초를 깔았던 영국 여인 ‘백의의 천사’,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다. 그녀는 크리미아전쟁 때 터키에 머물면서 부상병을 간호했다. 전쟁이 있었던 1854년부터 1855년 동안 전사자, 부상자, 다른 이유로 사망한 세 그룹의 군인들을 도표(graph)로 만들어 표시하고 세상에 알렸다. 그 도표가 장미 모양이라서 ‘장미 도표’라고 불렸다고 한다. 그 이후 통계학자라는 또 다른 명칭이 나이팅게일에게 붙여졌다.

70년 동안 러시아 속국으로 있다가 날개를 펴던 우크라이나가 당하고 있는 재침과 72년 전 있었던 6·25 한국전쟁이 자꾸 내 머릿속에서 겹쳐진다. 어쩌면 그것은 5월 마지막 월요일이 미국의 메모리얼 데이였고, 6월 6일은 모국의 현충일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미국과 한국의 호국 영령을 기리는 기념일이 일주일 상관으로 지나갔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로스앤젤레스 국립묘지’가 있는데도, 묘지를 방문하지 않았다. 6·25 때 그 젊은이들은 한국이라는 알지도 못했을 터이다. 그런 나라에 가서 안타깝게 전사한 젊은이들에게 보속(補贖)하는 마음으로 갔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서울 현충원에 있는 큰오빠의 빈 무덤에는 봉사자들이 태극기라도 꽂았을까?

큰오빠는 육이오 전쟁 때 전사했다. 집안에는 그의 전사에 관한 문서가 없었다. 집안의 역사를 알고 있는 부모님들, 올케언니, 둘째 큰오빠는 이 세상에 없고, 나는 실상 그들이 생존했던 당시에는 그의 전사에 관한 내용에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전쟁의 후유증으로 우울을 되씹고 살았던 부모님들의 침묵이, 늘 나를 무겁게 눌렀었던 것 같다.

그러던 중, 6·25전쟁 참전 용사 초청 기념식이 엘에이에서도 있을 것이라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이 기념식에 초청된 살아남은 사람들, 그것도 엘에이에 사는 분들이 몇 분이나 될지 궁금했다. 전쟁 당시 20대이었으면 지금은 90대의 노인들일 것이다. 그분들이 건강했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있다. 그 바램과 함께, 나는 큰오빠 전사에 대한 기록이 찾고 싶어졌다.

전쟁기념관 정보 사이트에는 전사자에 대한 간단한 기록이 올려져 있었다. 좀 놀랐다. 3년 전 전쟁기념관을 방문했을 때에는 전사자의 소속 부대를 알아야만 동판에 새긴 이름을 찾을 수 있었다. 나는 그때, 오빠의 이름을 찾지 못했다.

이번에는 이름을 써넣으니까, 육군/제6사단 소속/중위/장교/6·25전쟁/군번 15348/생년월일 (빈칸)/출생지 서울/전사 일자 1950년 8월 21일/전사 장소 경북/연고자 (빈칸)/명비 위치 115-ㄴ-029라는 정보가 나왔다. 그가 속했던 부대와 그의 군번, 그리고 전사한 날짜…. 이 얼마나 귀중한 내용인가!

이 내용을 인쇄해 놓고 싶어서 프린트 앱을 눌렀더니 certificate가 컴퓨터 화면에 떴다. 사진이 들어갈 자리는 비어 있었다. 생년월일에 대한 기록이 없었는지, 이 역시 빈칸이었다. 아랫줄에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목숨 바친 호국 영령을 국민의 이름으로 추모합니다’라는 문구가 두 줄로 나뉘어서 쓰여있고, 제일 밑줄에는 빨갛고 큰 글씨로 ‘전쟁기념관’이라고 마감되어 있었다.

그의 짧았던 삶의 마지막을 한 페이지에 정리한 내용이다. 그는 육이오 전쟁에 출전한 후, 두 달도 되기 전에 전사했던 것이었다. 이제 나는 그의 기일(忌日)을 안다. 그를 위한 연미사 신청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큰오빠는 제나라를 위해서 싸우다가 전사했고, 나는 그 의미를 뒤로 한 채, 그저 그를 기억해 보려고 지금 애쓴다. 그런데 나는 거기서 그치지 말고, 위키백과가 전하는 16개국의 참전 군인들도 기억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도 오빠처럼 아내와 어린 자식들, 부모 형제가 있었을 것이다. 한 통계에 의하면 참전했던 미국 용사들의 나이는 평균 17세에서 24세이었다고 하지 않는가?

그들을 존경하고 기리는 뜻에서, 각 나라에서 파병되었던 젊은이들, 그리고 안타깝게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젊은 그들에 대해서 알고 싶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의 숫자로 다가올 뿐이다.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아서 답답하고, 마음이 무겁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모두 합쳐서 합산하기 전에, 일(1), 즉 하나라는 숫자를 들여다본다. 그 ‘하나’로 표시된 청년을 지금을 살고있는 우리가 알아볼 방법은 있는 것일까?

16개국 우호 국가에서, 총 1,719,597명의 군인이 투입되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한국 1,090,911명, 미국 480,000명, 영국 56,000명, 카나다 25,687명, 터기 14,936명, 오스트레일리아 8,407명, 필리핀 7,420명, 태국 6,426명, 네덜란드 5,322명, 콜롬비아 5,100명, 그리스왕국 4,992명, 뉴질랜드 3,794명, 에티오피아 3,518명, 벨기에 3,498명, 프랑스 3,421명, 남아프리카 826명, 룩셈부르크 83명이었다.

이들 중에 한국 군인 149,005명, 미국 군인 36,574명이 전사했다. 실종, 포로, 부상자를 합친 16개국 젊은이들을 합계하면 1백 5십만 명이 넘는다. 이들이 남긴 유족으로 아내와 한 명의 자식이었다고 치면, 총 3백만 명이 가장(家長) 없는 가정에서 아프고, 힘들게 살았다고 풀이할 수 있다. 또 부모까지 가족에 넣어서 계산해 보면 6백만 명이 된다. 이들의 고국은 북미, 남미,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 오스트랄리아 여섯 개 대륙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그 흩어져 있는 지구촌 곳곳에서 젊디젊은 미망인들이 어린아이들을 기르면서, 어떤 경우는 유복자를 낳고 기르면서, 힘든 세월을 보내었을 것이다. 그들이 가난하게 살지 않았기를 바란다.

그렇다. 마음이 아프고 우울해도 이젠 고만 접어야 하겠다. 큰오빠의 영이 쉬고 있었던 그가 떠났던 -후암동 집-을 오빠의 영이 아직 지구촌에서 떠돌고 있다면, 잊으라고 해야 하겠다. 그 집은 나의 집이기도 하지만, 나는 그곳을 아주 오래전에 떠나지 않았던가. 이제 큰 오빠와 한국에서 마지막 숨을 거둔 16개 나라의 젊은 영령들을 위해서, 슬프고 무거운 마음일랑 떨쳐내고, 감사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연미사를 신청해야 하겠다.

누나를 만나고 온 날

하늘이 푸르른 가을날 늦은 오후, 나는 누나를 만났습니다. 누나는 동작동 현충원 근방에 있는 한 에어 비엔 비에 머물고 있었어요. 현충원 근방에 있는 달마사로 오라 했지요. 내가 열 살 때, 미네소타라는 곳, 어느 대학원으로 유학을 떠났던 누나는 지금껏 미국에 살고 있습니다. ‘국군의 날’이나 ‘현충일’이 되면 잠깐씩 현충원을 다녀가곤 하던 누나는, 지난 삼 년 동안 아버지를 만나러 오지 못했어요. 매부가 아팠기 때문이지요. 매부는 편안하게 삶을 마감했다고 해요.

누나는 가톨릭 신자입니다. 그런 누나가 올해는 절에서 만나기를 원했습니다. 누나는 얼어붙은 마음을 달마사에서 우선 녹이고 싶다고 했습니다. 새하얀 화강암 비석들이 단정히 줄지어 기다리는 모습이 뼛속까지 시려온다고 했습니다. 돌 비석들은 소리 없이 울고, 가슴은 신음을 끌어안고 있다 했어요. 돌 비석 주인들의 주름 없는 얼굴들을 볼 자신이 없어서, 오랜 세월, 매일 세 끼를 먹고, 얼굴에 주름을 달고 살다가 영생을 찾은 이들의 흔적을 우선 보고 싶다 했습니다. ‘달마사에선 목탁 소리를 들을 수 있겠지?’ 하고 전화에서 묻던 누나는 이젠 이 세상보다 저세상에 친구가 더 많다며 킥킥 웃었습니다.

누나는 만나기로 한 대웅전 앞에 보이지 않았어요. 한참 어둠에 익숙해지고 나니, 부처님상에서 떨어져 있는 곳에, 눈을 감고 꿇어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어요. 누나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누나, 부처님한테 기도한 거야? 하느님한테 혼나려고?’

‘하느님은 그렇게 옹졸하지 않아. 어디서나 당신을 생각하는 것이 기도거든’

‘누나, 이젠 한국 오면 우리 집에 머물자! 매부 없이 혼자 올 테니, 그게 쉽지 않을까?’

‘말은 고마운데, 너의 집은 대전에 있으니까 동작동에서 너무 멀어.’

‘아버지 묫자리는 성묘가 필요 없잖아. 그리고 아버지가 거기에 계신 것도 아닌데……’

‘그래, 그렇지. 빈 무덤이지.’

‘매형 돌아가셨을 때, 장례 미사에 참석 못 해서 정말 미안해. 그 때 난 아프리카 우간다에 있었어. 우간다에서 미국까지 하루 이상이 걸리고, 비행기도 두어 군데에서 갈아타고, 그것도 매일 뜨는 것이 아니거든. 또 그때 중요한 계약을 따내어야만 했어.’

‘괜찮아. 예상했던 죽음이었는데 뭐.’

나의 많은 질문에 누나는 소리없이 빙그레 웃으면서 싫어하지 않고 대답했어요.

누나는 50여 년 전 나를 업어주던 때보다 더 작아 보였어요. 나를 등에 태웠던 누나의 좁은 어깨는 언제나 나를 불안하게 했었지요. 어렸을 때, 누나 등에 업히면 왠지 더 슬펐어요. 누나는 나를 업고 강의를 들으러 간 적도 있었어요. 누나가 대학생일 때이었어요.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할께요.

쭈글쭈글한 주름이 누나의 뺨을 가로지르기도 하고 세로로 오르내리기도 했어요. 맑았던 얼굴엔 검버섯이 피었고, 청색이 날 정도로 까맣던 머리카락은 흰 눈에 덮인 까만 기와지붕처럼 추워 보였어요.

나는 아버지를 본 적이 없어요. 아버지는 한국전쟁 때 전사하셨어요. 71년 전, 누나가 세 살 때이었데요. 스물 몇 살 나이에 과부가 되고, 가장이 된 엄마는 어려운 집안 살림을 꾸려나가느라 많이 고생하셨어요. 그래서 그랬는지 자주 아파 누워 계셨던 것을 기억해요. 바쁘고 옹색한 살림을 꾸려가면서도 고아원에서 봉사하시곤 했데요. 거기에서 겨우 걸음마를 띄기 시작한 나이의 나를 만났다고 해요. 전쟁이 끝나고 십 오년 정도 지난 후였다고 해요. 나는 전사하신 아버지의 가정으로 입양되었지요. 아버지의 성씨를 받았고요. 나는 유복자(遺腹子)라기보다 유복(遺腹) 입양아(入養兒)인 셈이었어요.

나를 업어 데리고 갔던 엄마……. 퀴퀴한 땀내가 배인 엄마의 적삼, 그 가슴에 안겨 잠들곤 했던 나는, 지금도 엄마 냄새를 맡을 수 있어요. 엄마의 냄새는 끝없는 평화를 약속하는 것이었어요. 엄마는 쌀이 부족하면 죽을 만들어 누나랑 형과 저를 먹이셨어요. 나를 때리는 사람이 없는 것이 이상했어요. 과학을 잘하던 형은 엔지니어가 되는 대학에, 책을 많이 읽던 한 누나, 이번에 잠깐 귀국한 그 누나는 문학을 전공했어요. 나는 엄마가 원하시는 경영학을 공부하였어요. 우리 모두는 장학금을 받았습니다. 엄마는 아르바이트 대신, 그 시간에 공부에 열중하고, 장학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하라고 말씀하시곤 했어요.

가난한 살림, 엄마가 가장인 우리 집에, 나를 데리고 오셔서 입적 시키셨던 엄마는 배짱이 컸거나 바보 같은 신념으로 사셨던가 봐요. 누나는 엄마가 늘 하시던 말이 ‘하느님은 산 입에 거미줄 치지 않는다’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엄마는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만나지 못한 아버지이지만 아버지는 나에게 당신의 성(姓)을 주셨고 아버지의 이름은 엄마만큼이나 나에게 튼튼한 성채가 되었어요. 두 누나와 형은 자주 편찮으셨던 엄마 대신 나를 돌보아 주었어요.

‘누나, 누나는 비 오는 날이면 나를 업고 산에 지렁이 잡으러 갔었지?’

‘그랬지.’

‘누나, 학교는 빼 먹고 간 것이었어?’

‘응. 당연히……….’

‘누나, 낙제를 어떻게 면했어?’

‘겨우, 겨우. 그래서 너를 업고 학교 간 적도 있었지. 출석 일수 미달이라고 하였을 때, 어떤 비오는 날은 지렁이 잡는 일을 포기해야 했어. 지금 생각하니까 우습다!’

‘그랬구나. 그런데, 누나, 왜 지렁이를 잡으러 다녔어?’

‘엄마한테 고깃국을 끓여드릴 돈이 없었거든. 고기에 있는 단백질이 지렁이에 많다고 해서.’

‘누나, 그럼 우리가 먹던 국이 지렁이 국이었어?’

누나를 만나고 온 날 밤 꿈속에서, 지렁이가 소고기로 변하는 국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우리들의 데미안은 누구인가?

남극을 다녀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책장 어딘가에 꽂혀있을 법한 헤르만 헤세가 쓴 책, ‘데미안’을 찾는 것이었다. 남극에서 보았던 알바트로스(한자 이름: 信天翁)라는 새 때문이었다. 이 책은 주인공 에밀 싱클레어가 십 대로 들어서면서 어렸을 때 그에게 주어졌던 밝고, 정돈되고, 규칙적이고, 도덕적인 환경과 관념에서 벗어나, 반대되는 삶의 이면을 스스로 경험하게 되면서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이야기로 헤세의 자서전적 소설이다. 핵심이 되는 친구 데미안, 알의 껍데기를 깨고 나오는 ‘새’, 그 ‘새’가 알바트로스라고 나는 착각하고 있었다.

이 새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려면, 우선 독수리, 참새, 까지, 까마귀, 벌새 정도밖에 모르던 나의 무식을 고백해야 한다. 온 세상이 코비드 바이러스 악성 전염으로 앓고 있었고, 따라서 여정도 쉽지 않았지만, 알바트로스라는 새를 볼 수 있고, 알게 된 것은 더 없는 행운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남극 서식 동물인 몇 종류의 팽귄을 보았고, 몰랐던 자연을 체험할 수 있었던 것도 빼어 놓을 수는 없겠다.

남극 대륙(Antarctica)은 여행객을 태운 비행기나 자동차가 갈 수 없다. 바닷바람과 파도를 핸들 할 수 있는 큰 배로 가야 한다. 크루즈 배는 보통 오스트레일리아나 아르헨티나, 칠레에서 출발한다. 우리 부부는 비행기로 로스앤젤레스를 떠나, 마이애미를 경유해서, 아르헨티나의 제일 남단 도시인 우수아이아(Ushuaia)에서 크루즈에 승선했다.

‘남쪽 지구 대들보(South Pole)’를 중심으로 형성된 막대한 얼음 덩어리인 남극 대륙은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는다. 주인이 없고, 군대가 없는 비무장지대(DMZ)이다. 기온은 화씨로 영하 15도에서 영하 80도에 이르고 4월부터 8월까지는 해를 볼 수 없다. 내가 갔던 3월은 이상기후였는지 온화한 한국의 겨울 날씨처럼 섭씨 0도를 오르내렸다. 일 년 중 이때쯤에 바다 얼음이 어느 정도 녹아서 깨어져서, 큰 크루즈 배로 조각난 얼음을 헤치면서 항해할 수 있다. 크루즈 배는 얼음해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정박하고, 해변에 갈 때는 조디악 고무 배를 이용한다.

지구의 ‘일곱번 째 대륙(大陸)’인 남극 대륙은 바다에 떠있는 거대한 얼음산이라고 보면 된다. 그러나 워낙 거대해서, 바다에 떠서 머무는 얼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해상에 떠 있는 부분은 빙산의 일부, 빙판 또는 얇은 어름 쉬트였고, 수면 아래에 빙산(iceberg)의 큰 몸이 잠겨있었다. 일 년 전 얼음산에서 떨어져 나온 A-76이라고 이름 붙여진 빙산은 자그마치 맨해튼의 80배 크기로, 길이 105 마일에 너비가 15.5 마일이었다고 한다. (참고: 빙산에 이름을 붙이는데, 작년 이전까지 가장 컸던 빙산의 이름은 B-15이었다). 빙산의 색깔은 소금 농도에 따라 흰색, 엷은 하늘색, 진한 하늘색이었다.

이곳에는 사람이 살지 않고 단기간 머무는 연구 과학자들이 있을 뿐이다. 사람들에 의해서 길든 개, 소, 말, 고양이 같은 동물들은 없고 팽귄, 물개, 바다사자, 이빨 고래, 바닷새들이 살고 있다. 여러 종류의 새 중에, 내가 데미안이 스케치하던 ‘새’라고 착각했던 알바트로스는 여러 면에서 특이한 새였다. 편 날개 길이(익폭)는 평균 11피트로, 세상에서 제일 크고, 대서양만 빼고 모든 대양(大洋) 위를 나르고, 창공 필요한 높이에 다다르면, 에너지 소비를 하지 않고 떠 있으며, 날개를 펄럭이지 않고 여러 시간 동안 나를 수 있다고 한다. 남극해를 일 년에 세 바퀴 돌고(75,000마일), 평균수명이 50년 이상이며, 일부일처의 삶을 산다는 이렇게 특이한 새가 멸종 위기에 있다고 하니, 염려되고 슬프다.

알바트로스 새를 데미안 책에서 이리저리 찾아보다가, 결국 책을 다시 읽게 되었다. 다시 읽으니 좋았다. 무엇이 좋았느냐고 묻는다면, 내가 이번에 느낀 헤세는 많이 평범하고, 또 많이 비범한 인성의 소유자였다는 점이었다. 우리 모두가 겪는 외로움, 공포, 열등감과 이를 잊기 위해 애쓰는 우리들의 어설픈 허세나 회피 과정을 정신학자처럼 잘 다루고, 표현했다. 목사가 되려고 신학교에 입학했다가 퇴교했던 헤세는, 그의 신이 조물주이었음을 부인하는 것까지도 매끄럽게 잘 표현했다.

알껍데기를 깨고, 세상으로 나오는 새의 모습은 대문 앞쪽, 길을 접한 곳에 있는 현관 입구, 여기에 세워진 돌로 된 아치, 아치 중간 지점 바로 윗쪽 벽에 붙어있는 오래된 문장(紋章)에 조각되어 있었고, 이는 덧칠한 페인트에 가려서 형태가 정확하지 않았다는 것.—바로 이 새를 나는 찾아내야 했다. 그 새는 알바트로스가 아닌, 매(sparrow hawk)였다. 이론적으로도 헤세가 살았던 유럽, 대서양으로 알바트로스가 날아간다는 과학적인 근거가 없다는 점이, 문장(紋章)의 새, 데미안의 의식과 영(靈)을 뜻하는 새가 알바트로스가 아닌 매라는 것을 반증 했다.

다시 읽은 데미안 책은 삼 십 육 년 전에 2불 95전에 값이 매겨진 반탐 책(Bantam Book) 회사가 출판한 것으로 종이는 누렇게 변했고, 책 커버는 너덜너덜하다. 지금 다시 들여다보니, 영역본 33판이었다. 토마스 만이 1947년 4월에 쓴 소개문으로 영역본은 시작된다. 큰아이가 제일 앞장 빈칸에 나의 이름 Monica C. Ryoo 라고 첫 줄에, 그리고 6/86이라고 그 밑줄에 써 놓았다. 딸은 그 때 11살이었을 게다. 멋 부려서 쓴 딸의 글씨체가 좀 낯설다. 지금 40대 중반을 넘어선 그 애는 멋 부린 글씨를 쓰지 않는다. 그 애의 글씨는 아주 작고, 버러지가 기어가는 것 같은 형태를 하고 있다. 바빠서, 성격이 소심하게 바뀌어서, 완벽주의자가 되어서 글씨체가 변한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위의 모든 것’ 아니면, ‘위의 아무것도 아님’이 정답일까?

딸의 사춘기, 청춘기가 데미안과 싱클레어, 지나간 전(前) 세대들의 그것과 다를 바 없이, 때로는 우울하고, 외롭고 그래서 혼란스럽고, 아프고,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요구되는 행복이라는 방안에서 창살 틈으로 빠져나가 버린 희망의 빛을 되찾으려고 방황했을까. 방황의 광야는 어떠했을까. 희망의 빛은 방에서 떠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을 광야를 지나 되돌아 왔을 때, 알게 되었기를 바란다.

남극을 떠나 쉬지 않고 지구를 돌다가, 다시 남극으로 돌아가는 알바트로스가 되지 않아도 된다. 매서운 눈으로 세상을 간과하는 매가 아니어도 된다. 위험이 주위를 둘러쌀 때, 악이 무섭게 달려들 때, 우리는 친구를 부르면 된다. 우리는 우리 속 깊은 곳에 친구가 함께함을 알게 될 것이다. 딸과 우리들의 데미안은 누구인가?

늙어가며 작아지고 있는 우리들

언니를 반년 만에 만났다. 십 년 손위인 언니는 미국 밖에서 일 년 중, 몇 달을 지낸다. 언니가 갑자기 작아 보였다. 내가 성인이 되었을 때, 언니는 나보다 머리 하나 정도가 컸다. 형제 중에 키가 제일 작았던 나는 가끔 ‘스라소니’라는 별명으로 불리었다. 언니와 이야기를 나눌 때면 언니가 늘 나를 내려다보곤 했는데, 이번에는 언니와 내가 대등한 입장에서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스라소니’라는 별명은 식구들이 무례하게 나를 비하해서 불렀던 표현이었다. 이 말은 평안도 사투리로, ‘못난 호랑이 새끼’를 뜻한다. ‘스라소니’란 중형 고양잇과에 속한 포유동물로 중앙 유럽, 동아시아에 살고 있다. 학명으로는 링스(Lynx)이다.

부모님들이 평안도 출신이어서, 언어, 음식을 포함한 생활 문화가 평안도 식이었다. 평안도 식이란 이 경우 직설적이고 꾸밈이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키 작고 못 생기고, 암팡지다고 나를 그리 불렀을 것이지만, 사실 평안도 사람들은 일찍 남녀평등의 교육을 실천하던 장점도 있었다. 서양문화가 중국에서 평안도를 거쳐 들어왔기에 일찍 이를 받아들이셨던 분들이었다. 딸들도 자신의 의견을 편히, 확실히 하도록 가르치셨다.

나를 ‘스라소니’라고 놀리었던 언니가 ‘스라소니’만큼 키가 줄었다. 나는 언니가 칼슘과 비타민 D를 먹는지, 운동은 하는지 궁금했다. 언니는 골다공증으로 키가 줄고 허리가 굽은 것을 느끼지 못하고 지내오고 있었다. 골다공증은 뼈가 부러지거나, 허리가 굽거나, 허리가 아프게 될 때까지 인식하지 못하는 병이다. 그래서 의료계에서는 ‘silent disease’ 즉 ‘드러나지 않는 병’이라고 부른다.

코비드가 지난 2년 동안 세계적으로 약 4억 7천만 명이라는 막대한 숫자의 사람들을 감염시켰다. 골다공증도 이와 다를 바 없이 흔하다. 세계 건강 기구(WHO)에 의하면 세계적으로 50세 이상 여성의 21%, 남성의 6%가 이 ‘드러나지 않는 병’을 갖고 있다고 한다. 한국 사람들은 세계 평균 보다 많아, 여성의 35.5%, 남성의 7.5%가 골다공증을 갖고 있다고한다.

골다공증은 골절의 전조이다. 세계적으로 골다골증이 있는 5억 명 중, 어느 해에는 8백 9십만 명이 골절되어 수술을 받아야 했다. 그냥 넘어가기 어려운 것은 한번 골절상을 겪은 사람들이 일 년 이내에 약 6.6%가, 2 년 내에 12%가, 4 년 내에 20.9%가 또 뼈가 부러지는 불상사를 겪는다. 흔히 골절되는 부위는 엉덩뼈, 등뼈 그리고 손목뼈이다.

골다공증에 의한 골절로 겪는 고통은 심하고, 수술 후 재활에도 시간이 무척 걸리고 힘들뿐 아니라 질적인 삶이 크게 영향을 받는다. 그뿐이랴. 치료와 재활에 들어가는 재정적인 부담도 무시할 수 없다. 좀 오래된 통계(2008년~2013년 동안)이지만 매디캐어는 골다공증으로 인한 골절 치료에 환자 한 사람당 약 4만 5천 불을 지출했다고 보고했다.

골다공증은 칼슘과 비다민 D 섭취, 활동적인 생활습관, 과음이나 흡연을 피해 주면 예방이 가능하다. 고질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스테로이드를 장기간 복용해야 한다거나, 소장의 흡수기능이 저하된 경우, 가족력이 있을 경우, 체중이 평균치에 못 미치게 마른 사람들, 백인 여성, 70세 이상의 남자들도 위험 그룹에 속한다.

골다공증 예방에 앞장선 메디컬 그룹으로 카이저 병원이 모범 케이스로 잘 알려져 있다. 이 그룹이 발표한 논문을 간추려 정리해 보면 주치의는 예외 없이 50세 이상 환자들에게 골밀도(bone density) 테스트를 받도록 하고, 그 결과에 따라 치료 또는 예방 프로그램에 보낸다. 치료는 주사로 하는 경우도 있다. 골다공증의 예방은 획기적인 예방 의학의 성공적인 사례로 보인다.

나는 ‘스라소니’라고 불리는 현상를 피해 가지 못했지만, 지금 한국은 다르다. 남한의 남성 평균키는 100년 전 조선 때 보다 15㎝가 더 큰 174.9cm이고, 여성은 20cm 더 큰 162.4cm라고 한다. 참고로 조선 시대의 키에 대한 정보는 서울대학 해부학 팀이 16세기부터 19세기 동안 살았던 썩지 않은 어른 116명의 대퇴골 길이를 기본으로 예측한 숫자이다.

한국인 ‘스라소니’는 없어진 것 같지만, 골다공증에 대한 예방 홍보는 절실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