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가 싫어하는 의사 2014

얼마 전 중앙일보 오피니언 면에서 ‘아직도 이런 의사가 한인타운에 있다니’라는 제목으로 밸리에 사는 한 독자가 쓰신 글을 읽었다. 글의 내용으로 보아 그 독자는 시니어이고 한국어를 구사하는 의사를 주로 찾으시는 것 같았다.

한 시간이나 걸리는 한인타운까지 가서 전문의사를 찾았는데 의사는 환자의 질문에는 대답하지도 않았고 면박을 주었으며 의사의 말이 거의 반말에 가까웠다고 했다. 또 그 글을 보낸 환자의 의견으로는 병원도 일종의 서비스 업종이니까 환자가 ‘갑’이 되고 의사는 ‘을’이 돼야 하지만 생명을 다루는 직업이어서 의사가 ‘갑’의 입장에 서는 것을 허용한다고했다.

독자의 의견은 의사로서의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천직(vocation)과 직업(occupation)의 차이를 다시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됐다. 천직은 타고난 직업이나 신분을 뜻한다. 천직에는 봉사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반면 직업은 소위 살아가는 수단으로 일을 하고 돈을 번다는 뜻이 더 강하다. 그러나 일하는 사람의 신념에 따라 직업이 천직이 될 수도 있다.

의사, 간호사, 변호사, 선생, 종교인 등은 대표적으로 천직의 사명을 가져야 하는 사람들이다. 생명을 다루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 돕고 교육을 하며, 영적 지도자의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명감을 갖고 일 할 수 없다면 생계를 위한 직업이 될 수밖에 없다.

보통 직업이라도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하는 일을 천직이라고 생각하며 일 한다면 사회는 더욱 발전하고 건강해질 것이다.

그러나 지금을 사는 우리들에게 ‘천직’은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 물질주의를 기본으로 한 사회 체제안에서 업종별 경쟁은 불가피하게 됐다. 이 치열한 경쟁과정에서 천직이어야 할 직업들이 비즈니스로 전락하고 있다. 진실한 의미의 ‘천직’이 도태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3년전 오피니언 칼럼으로 동료의사들을 설문조사해 ‘의사가 싫어하는 환자’에 대해 쓴 적이 있다.

요약해 보면 ‘자신의 병을 의사의 잘못인 양 몰고 가거나, 불평이 많으면서도 의사의 처방을 안 듣는 환자, 내용도 모르고 질문을 위한 질문하거나, 인터넷 정보를 잘못 알고 줄줄이 나열하는 환자, 중요한 일이 아닌데 수시로 전화하거나, 같은 말을 반복하여 시간을 빼앗는 환자 또 버릇없는 사람’ 등이었다.

이번에 독자의 의견을 참고로 ‘환자가 싫어하는 의사’를 써 본다면 ‘친절하지 않고 잘 난 척하고 버릇이 없으며 환자의 질문을 무시하고, 환자가 무식하다고 단정하는’ 의사들일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환자들의 의사에 대한 불평 내용도 의사가 환자에게 갖는 불만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환자와 의사 사이에는 병을 치료받고 치료하는 그 이상의 관계가 존재한다. 의술은 다른 어떤 직업보다도 환자와 의사의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효력을 기대할 수 있다.

의사가 싫어 하는 환자

“이게 뭐야. 세상에 이렇게 캔텅커러스한 늙은이가 있어!” 동료의사가 회의실에 들어오며 내뱉다시피 한 말이다. 이 말을 듣던 한 레지던트가 ‘아 SAT 단어다!’ 하며 큰 소리로 웃었다.

‘캔텅커러스(cantankerous)’라는 단어는 잘 쓰여지지 않는 어려운 말로 ‘못 돼먹은’ 이라고 번역하면 아주 잘 맞는다.

의사들도 싫어하는 환자가 있을까? 환자들이 대놓고 의사를 비판하기 쉬운 것이 미국이다. 불평의 편지를 과장이나 공공기관에 보낼 수 있다. 인터넷 서비스로 의사를 점수 매기는 곳도 있어 내용이 공정하던 않던 간에 세상과 공유한다. 하지만 의사들은 무례하고 부당하게 행동하는 환자가 있어도 같은 방식으로 대응하지 않는다. 그런 환자에 대한 보고를 할 기관도 없다.

이야기가 잠깐 빗나가지만 의료소송의 20%만 의료과실과 관련이 있고 80%는 무관하다. 하버드 의과대학에서 특정기간 동안 치료받은 3만여명의 환자를 리뷰하였는데 이중 치료 부작용은 3.7%였고 과실에 의한 부작용은 1%에 지나지 않았다. 또 47건의 의료소송이 있었는데 의사의 부주의로 인한 부작용 때문에 생긴 의료소송은 3%도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생각이 들어 동료 의사들과 회의를 하기전 짧은 설문조사를 해 보았다. ‘ 환자를 증오한 적이 있나’ ‘있었다면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것이 질문이었다. 아무도 환자를 ‘증오’ 해 본 적이 없었지만 ‘싫어 한 적은 여러번 있었다’고 했다. 이유가 여러가지였다.

자신의 병을 의사의 잘못인 양 몰고 가는 환자, 불평은 많으면서 의사의 처방을 안 듣는 환자, 내용도 모르고 질문하는 환자, 인터넷 정보를 잘못 알고 줄줄이 나열하는 환자, 별 일이 아닌데도 수시로 전화해서 메시지를 남기는 환자, 의사나 간호사를 자기 소유물인 양 행동하는 환자가 그것이다.

또 똑같은 소리를 반복하는 환자, 현재 질병과 관련이 없는 옛날 이야기를 시시때때로 되풀이하는 환자, 시간을 안 지키는 환자, 의심 많은 성격의 환자 그리고 ‘못 돼먹은’ 성품의 소유자들도 싫어하는 환자들이었다.

이 내용들을 들여다 보면 의사에게 좌절감을 주는 경우는 환자들의 몰이해 즉 자신의 병과 처방에 대한 이해의 부족 때문에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외 상식 이하의 사고 방식과 배려할 줄 모르는 이기적인 태도도 의사들에게는 오랫동안 불쾌한 기억으로 남는다.

의사는 환자들보다 오히려 더 열심히 해결책을 찾고 싶어한다. 그러나 환자들은 때론 걸림돌이 되는 요소들을 의사들에게 던짐으로써 의사의 판단을 흐리게 하거나 분석 과정을 혼탁하게 만들수 있다.

문제가 있어 찾아 온 병원이라면 그곳에서 퍼즐을 풀어 가는 의사의 눈을 가리지 말고 해결책을 찾는데 도움이 되게 처신하는 것이 환자들의 기본 예의이고 의무다.

동료 의사들과의 짧은 설문조사 결과 의사라는 직업을 택한 사람들은 대체로 너그럽다는 사실이었다. 누구를 특별히 증오한다거나 싫어하는 경우가 별로 없다. 일시적으로 환자를 싫어할 수는 있지만 불쾌했던 순간은 쉽게 잊는다. 그래서 의사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의사라는 직업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영어 못하는 환자

“아버지는 다섯 번이나 병원에 왔는데 어떻게 폐암 4기를 이제야 찾아냈단 말입니까?”

환자의 아들은 화를 참으면서 침착하게 나에게 대들고 있었다. 나를 찾은 중국 본토 출신 70대의 환자는 영어를 전혀 하지 못했다. 그날 통역 역할을 하던 아들 외에도 아내, 딸, 사위 그리고 또 다른 아들이 함께 왔다. 분노와 근심이 팽팽하게 엇갈리는 진료실 분위기를 환자 자신은 초월한 것 같이 보였다.

환자는 두 달 전 허리가 아파서 응급실을 방문했던 것을 시작으로 여러 테스트를 거쳤다. 이 과정에서 폐에 종양으로 보이는 덩어리, 척추뼈와 척추뼈 주위의 신경을 누르고 있는 전이된 암이 발견됐다. 이 환자는 언제나 그랬듯이 병원을 방문할 때마다 아내를 대동했고 영어를 약간 하는 부인이 통역을 하곤 했다. 지병인 고혈압 당뇨 관리에 부인의 통역은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이번의 경우 환자가 겪는 미묘한 아픔의 증상에 대한 표현이 의사에게 잘 전달됐는지에 대해서 의심이 간다.

이 환자의 경우처럼 캘리포니아 주민들 중 약 40%가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하지 못한다. 질병 치료과정에서 언어 불소통은 불행한 상황을 불러올 수 있다. 병에 관련된 환자와 의사의 불확실한 이해, 이로 인한 진단의 지연, 환자 안전 보장의 오해 때문에 질적으로 우수한 치료를 받지 못하게 되고 환자의 만족도와 의료에 대한 믿음에 금이 가기 쉽다. 따라서 병의 치료가 더 힘들고 완치를 향한 길이 험해지기도 한다.

오랫동안 연방정부와 주정부는 다양한 언어에 통역을 제공해야 하는 책임을 부인하지 않았지만 실천에 옮기는 것에 대해서는 실상 좋은 점수를 받지 못했다. 이 약점은 곧 만회될 것으로 보인다. 정부 혜택을 받고 있는 큰 병원들에게 환자와의 소통을 위해 자발적으로 방도를 마련하고 실천에 옮기도록 지침을 준 것이다. 이 지침이 큰 병원을 평가 감사하는 기관들의 실천 항목 중의 하나가 되었다. 참고로 미국 내 큰 병원들은 몇 년에 한번씩 이런 기관의 방문을 받는다. 쉽게 말해 성적표를 받는 시스템이다.

통역 서비스는 주 7일 하루 24시간 가능하다. 통역이라는 과정을 공정히 이행하기 위해서는 환자가 대동한 사람이나 어린이를 활용하는 것은 응급 상황이 아니면 하지 않아야 한다. 또 가족 친구도 피하는 것이 좋다. 각 언어에 대해 통역 면허를 가진 전화 통역 서비스 이외에도 병원 내에는 특수언어 이해력 시험을 통과한 이중언어 스태•프들이 있다.

환자의 미묘한 증상을 자격있는 통역관이 의사에게 잘 설명해 줄 때 비록 의사가 소비하는 시간이 두 배가 드는 불편은 있지만 빠르고 정확한 진단이 가능해지고 좋은 치료를 향한 목표도 이룰 수 있다. 또 미래가 암울한 상황을 토론해야 할 때 가족은 설명하기 어렵지만 통역관은 해낼 수 있다. 영어를 못하는 환자는 통역 서비스를 요구할 수 있다.

얼마 전 LA카운티 지방법원에서도 무료 통역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양한 언어를 쓰고 있는 이민자들로 이루어진 미국이 비로소 그 구성원의 ‘웰빙’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나 보다.

일본이 사과하든 말든 우리는 기억하자 2016

며칠 전 내가 속한 한 비영리 단체 월례 모임에서 공적인 일에 대한 토론외에 사적인 일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실상 나는 답답하게 한 달을 보낸 터였다. 조선 말기 역사를 읽고 있었고, 그 동안 역사와 관련된 경험을 자그만치 여덟 개나 했던 것이다.

내용은 이렇다. ‘세계인이 놀라는 한국사 7장면’이라는 책을 선물 받아 읽고 있었고, 일본군 위안부를 주제로 한 영화 ‘귀향’의 시사회에 갔다. 가주 교육국이 추진 중인 일본군 위안부의 교과서 서술에 지지 서명을 했다. KBS의 다큐멘터리 ‘조선총독부 최후의 25일’을 봤고,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여성차별철폐위원회에서 일본이 위안부 강제 연행 증거가 없다는 입장을 발표하는 뉴스를 봤다.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라는 책이 있음도 알게 됐다. 독일의 양면성을 알게됐다. 독일은 홀로코스트 기념일에 유대인 생존자를 그들의 연방의회에 초청해 연설을 하게하는 통례를 만들고 매년 행하여 오고 있었는데 대학살을 자행했던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 나미비아에는 100년이 지난 후에야 겨우 사죄했다 사실이다. 그것도 국가 차원이 아니었다한다.

일본이 ‘문화정책’의 미명 아래 조선인들을 세뇌해 지식인 친일파를 만드는 과정과 친일파가 일본에게 충성하게 되는 부분을 이해하게 되었을 때 많은 갈등이 왔다. 조선인은 일본의 ‘황국신민’이 되었다. 그래서 조선의 젊은이들이 학도병으로 징병되는 것도, 어린 소녀들이 일본 군인들의 성적 욕구를 풀어 주는 위안부로 유린당하는 것도 그들에게는 이상할 게 없었다.

내가 깨달은 것은 일본이 한국민이 바라는 정치적, 외교적, 도덕적 차원의 사과 또는 참회를 하는 일은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살아있는 증거가 있지 않은가? 일본이 사과를 하든 말든 우리는 생존해 있는 소수의 산증인들을 가슴에 안아드리고 남은 여생을 잘 지내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또 일본이 사과하지 않는 것을 대통령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우리 안의 분열을 없애야 한다. 독일이 유대인에게는 사죄했지만 나미비아에게는 사죄하지 않았던 양면성을 보며 우리는 세계평화의 유지라는 그럴듯한 슬로건과 힘의 균형이 무엇을 뜻하는지 묵상해 보고 그 진실을 알아야 한다.

생각해 보자. ‘귀향’의 제작을 간접적으로 반대했던 우리 한국사람들이다. 엘에이에서는 시사회를 영화관에서 하지 못했다. 그 뿐이랴. ‘일본국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라는 책을 두고 “위안부 제도의 강제성을 증명하기 어렵다”고 서평을 한 한국 교수도 있다. 위안소 관리인은 자신의 일상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지 위안부들에 대한 관찰 기록을 남기려고 쓴 일기가 아니라는 것을 그 교수는 잊은 듯하다.

소녀상을 세우는 것도 좋지만 우리도 위안부와 학병 희생자들을 포함한 일제 강점기의 사실을 주제로 하는 박물관을 세우고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 정치인들이 꼭 방문해야 하는 코스로 정하면 좋겠다. 이 곳은 영원히 역사의 왜곡을 지탄해 줄 것이다.

다큐멘터리 ‘조선 총독부 최후의 25일’에 담긴 우리들의 아버지, 어머니, 오빠, 언니가 독립을 환호하던 모습을 잊지 않을 때 우리에게는 언제나 희망이 함께 할 것이라 믿는다.

옐로 저널리즘(Yellow Journalism) 2014

‘옐로 저널리즘 (황색언론)’이 한국을 우롱하고 흔들었다. 얼마 전 총리로 지명되었던 문창극씨에 대한 ‘미디어 사건’이 그것이다.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 전문성을 잃은, 비윤리적으로 각색된 뉴스 처리를 ‘황색언론’이라고 부른다. ‘옐로 저널리즘’ 이라는 말이 생긴 것은 19세기 말이니까 지금으로부터 100년도 넘는 셈이다. 우리에게도 친숙한 이름들- 퓰리처 상의 주인공 퓰리처(Pulitzer)와 관광지 허스트 캐슬의 주인이었던 허스트 (Hearst) 사이의 이득권 싸움 때문에 생긴 단어라고 보면 된다.

퓰리처가 갖고 있던 ‘뉴욕월드’와 허스트가 퓰리처의 동생 앨버트에게서 사들인 ‘뉴욕저널’ 사이에 벌어진 치열한 판매부수 경쟁이 옐로 저널리즘의 시작이었다. 퓰리처는 17세에 헝가리에서 온 유대계 이민자였다. 직업군인으로 남북전쟁에도 참여했다.

당시 뉴욕월드는 한 부에 2센트였다. 평민들이 쉽게 읽고 계속적인 흥미를 갖도록 만든 신문이었다. 눈에 금방 띄는 큰 글씨로 대서특필하거나, 대중을 자극하는 정치적인 단어, 각색된 스캔들, 서슴지 않고 누군가를 후려치는 비판, 그러면서도 재미있는 만화를 연재했다. 연재 만화 ‘호간의 뒷골목’은 컬러로 인쇄되었다. 낡은 노란 옷을 입은 주인공 ‘옐로 키드’가 잘 사는 아이들을 놀리거나 복수하는 식의 테마였다. 이 꼬마는 약간 더러워 보이고, 홈리스 또는 이민자일지 모른다는 암시를 하는 모습을 갖고 있었다.

퓰리처가 최다 판매부수를 올리고 있을 때 허스트는 하버드대학 재학 중이었다. 하버드에서 쫓겨났지만 퓰리처의 신문 편집 재주에 감탄했던 그는 한때 퓰리처의 신문사에서 일했다고 전해진다.

허스트는 퓰리처의 괴팍한 성격에 불만을 가졌던 ‘옐로 키드’ 만화가와 재주 있는 몇몇 편집자들을 빼내어 온다. 그리고 퓰리처 신문 값의 반, 단돈 1 센트로 신문값을 매겼다. 퓰리처의 ‘센세이셔널리즘’을 그대로 도입, 시시한 뉴스도 재미있게 만들었고, 뉴스가 없으면 아예 뉴스를 지어냈다. 그렇게 해서 ‘옐로 저널리즘’ 이라는 단어가 만들어 졌다.

옐로 저널리즘은 스페인-미국 전쟁 발발의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언론은 허구적인 뉴스를 비이성적, 선정적인 방법으로 보도하여 스페인을 몰아붙였다. 마침 스페인의 식민지로 독립을 꿈꾸던 필리핀, 쿠바, 푸에리토 리코, 괌은 외부의 도움이 필요했고 미국은 새로운 프런티어가 필요했다. 애국심은 충동질 되었고 미국은 스페인에 선전포고를 하게된 것이다. 스페인, 영국에 이은 미국의 빅 브라더적인 제국주의 기반은 이때부터 모습을 갖추게 되고 쿠바, 푸에리토 리코, 괌, 필리핀은 미국의 식민지가 됨으로써 새로운 역사의 장을 쓰게 된다.

나는 문창극씨를 모른다. 그러나 공정해야 할 뉴스를 교묘한 방법으로 짜깁기한 한국의 옐로 저널리즘, 그 내용을 검증하지도 않고 그대로 베껴 퍼 나른 매체들, 그리고 이때다 하고 편승한 모리배 정치인들을 생각할 때 성숙하지 못한 한국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더 오래 이런 질병을 견뎌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옐로 저널리즘’의 놀이터를 허용하고 있는 우리는 과연 어떻게 쇄신의 꿈을 실현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