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하는 세상: GMC 이야기

두 주 동안 혼란스러운 세상을 잠재우려는 듯 비가 매일 내렸다. 비가 잠깐 멈추고 해가 반짝 났던 지난 주말 나는 센추리시티 한 호텔에서 열린 유방암 컨퍼런스에 참석했다. 처음 발표됐을 때는 너무 새로워 긴가민가 했던 데이터들이 몇 년 사이 다시 점검되어 발표됐다.

‘항상 변해가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세상에 즉시 적응해야 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운 사실로 다가왔다. 새 정보에 적응하는 속도가 마음처럼 빠르지 않아 그럴 것이다.

‘난 한국의 경제체제가 아주 좋은 모델이라고 봐.’ 나란히 자리잡고 앉아 강의를 경청하고 있던 나이지리아 출신 종양내과학 남자의사가 내가 한국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말했다. 의사인 그가 경제 모델에 관심이 있다 하니 의아했다. 나이지리아가 어떻게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제치고 세계 20번째 경제 강국으로 부상했는지 알아봐야 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와 나는 편히 대화를 했다. 한국식으로 하면 친구간에 서로 반말을 하는 느낌이랄까. ‘GMC가 나를 살렸어.’ ‘(GMC는) 제너럴 모터스의 주주야?’ 나의 맹초같은 질문에 그는 심각하게 말했다. ‘아니! gift, mission, cross란 뜻이야. 거저 받은 선물인 재능, 주어진 미션의 실천, 힘들어도 고통이라 생각 않고 지는 십자가의 은총이란 뜻이지.’

그가 말한 ‘GMC’ 이외에 내가 그에게서 본 것은 세상사에 대한 그의 관심과 분석 능력, 새로운 환경을 만들고 적응하는 노력이었다. 남들이 못 보는 곳에서 새로운 의료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보통 사람들이 쳐다보지 않는 감옥, 그 안에 갇힌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이 필요한 것을 분석하고 실천할 계획을 세우고 해냈다.

그의 이야기는 이랬다. 나이지리아에서 내과 전공을 마치고 미국과 캐나다에서 종양내과학, 약학을 수련했다. 캘리포니아 UC 어느 의과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야간 비지니스 스쿨을 2년에 걸쳐 다니게 된다. ‘캘리포니아 재소자들의 건강관리’에 대한 졸업 논문은 교수의 눈에 띄였고 캘리포니아 주지사에게 전달된다. 그의 사업 모델이 재소자 헬스케어에 채택되고 그는 재소자를 상대로 하는 의료 그룹을 만든다.

참 뛰어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경제와 의학을 접목시킬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세계에서 제일 많은 재소자가 있는 나라 미국(약 200만 명), 그 중에 캘리포니아주(약 30만 명)가 숫자로는 으뜸이다. 이들을 먹이고 건강을 지켜주어야 할 의무가 있는 정부는 세 번째로 많은 예산을 이들에게 쓴다. 주정부 교통국(Caltrans) 예산의 2배가 된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가 내어놓은 의료 모델로 주정부는 많은 돈을 아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롤스로이스를 타는 몇 안되는 의사들 틈에 끼게 됐다.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나는 일개미에 지나지 않았던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평탄하고 안이한 삶에 익숙하다 보면 눈을 들어 주위를 돌아볼 필요가 없게 된다. 변하는 세상, 새로운 정상치를 허락하지 않기 쉽다.

우리 모두 잠깐이라도 고개를 들고 주위를 보자. 새로운 것이 보이면 자신을 믿고 도전해 보자.

미주 중앙일보 2017.2.20. 월

•빅토르 위고에게 묻는다 2013

뮤지칼 영화로 다시 탄생한 ‘레 미제라블(Les Misérables)’을 보았다. 이 뮤지칼은 ‘올리버!’, ‘•팬톰 오•브 오페라’, ‘고양이들’과 함께 오랫동안 재생되어 새 세대들에게 보여지고 사랑받아 왔다.
프랑스 판 ‘올리•버 트위스트’라고도 보여지는 이 소설을 쓴 •빅토르 위고(Victor-Marie Hugo)는 ‘비갯 덩어리’를 쓴 모파상(Guy de Maupassant), ‘보•바리 부인’의 •플로베르(Flaubert) 그리고 ‘데이비드 커퍼•필드’를 쓴 영국의 챨스 디킨스와 버금가게 부당한 사회체제와 인간의 부조리함을 글로써 고발 했던 사람이다.

‘레 미제라블’이 소설로만 남아있지 않고 뮤지컬로 다시 태어 난 것은 참 반가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고전을 가까이 하기 어려운 새로운 세대에 맞게 위고가 우리에게 보여주려는 사회정의에 대한 우리들의 의무 또 사랑, 우정, 연민 등을 노래를 통해 쉽게 전달해주었기 때문이다.

‘레미제라블’을 뮤지컬로 태어나게 한 공로자 중의 하나는 알라 부빌 (Alain Boubil)이라는 송 라이터 (작사가)인데 챨스 디킨스의 작품 ‘올리버 트위스트’를 주제로 만든 뮤지컬 ‘올리버!’가 런던에서 공연 될 당시 고용돼 일하다가 거기서 영감을 받아 시작한 일이라고 한다. 그와 그의 친구 세명이 소설안의 인물들이 되어 2년 동안 가슴으로 가사를 쓰고, 곡을 붙여 1980년에 음반으로 발표했다. 당시 음반은 26만부나 팔렸다.
이후1987년 부터 2003년까지 브로드웨이에서6680번이나 공연되어 뮤지컬 역사상 네번째로 장수한 작품에 랭크됐다. 이번에는 전 세계에 영화로 발표돼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사실 위고나 디킨스는 고아를 무대에 올려 우리를 깨우쳤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 사건들중에 빼어 놓아서는 안 될 사건이 있다면 ‘여인들의 행진’이다. 위고가 태어나기 전인 1789년 10월, 6000명의 프랑스 주부들은 ‘빵 값을 내려라! 우리에게 빵을 달라!’고 외치며 파리 중심부의 시장에서 출발해 •루이 16세와 마리 앙토와넷이 살고 있는 •벨사이유 (Versailles)궁전으로 행진했다. 그 경로에서 더 많은 주부들이 합세했다고 한다. 그들은 갈쿠리, 창꼬치 또는 불발탄이 잦은 구식 총기를 들고 행진했다고 역사책은 말한다.
놀랍게도 철통같은 문을 밀어 저치고 여인들은 궁전 안으로 밀려 들어갔고, 루이 16세는 여인들에게 빵을 내어주라고 했다고 한다.
‘여인들의 행진’이 계기가 되어 루이 16세는 벨사이유에서 파리로 도망가다시피 거처를 옮겼다. 더 중요한 것은 이를 계기로 남성으로만 구성돼 있던 국민의회에 대해 여성의 동등한 참정 권리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나는 다시 ‘레 미제라블’을 영화를 보면서 내가 젊었을 때 느낀 것과는 달리 무언가 채워지지 않는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장•발장(Jean Valjean)은 죽어가는 창녀에게 딸 코제트를 거두어 주고 가난과 학대에서 코제트를 보호하고 그녀에게 아버지의 사랑을 부어주겠다고 약속 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물질의 풍요함과 안이한 삶 속으로 코제트를 시집 보내는 것에서 코제트의 삶을 마무리 시킨 것이 어쩐지 아쉽다.

환자가 선물한 바흐의 샤콘느 2016

새해라서 그런지 자꾸 지난 날을 되돌아보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분주하기만 했고 안정되지 못했던 초창기 전문의사 시절이 생각나 때로는 불편하다. 그때 나는 설익은 과일처럼 성숙하지 못했다. 그래서 도움이 필요한 환자들을 알아 보지 못했고, 도와줄 수 있는 기회를 놓친 적도 많았다. 그뿐이 아니다. 자식으로, 엄마로, 아내로서 실수도 많았다. 물론 실수를 통해서 배웠지만.

그래도 놀랍고 고마운 것은 주위의 사람들이 나를 참아 주었다는 사실이다. 이 글을 쓰는 이유도 감사하고 미안한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이다. 이미 고인이 된 사람들에게도 방법이 있다면 이런 마음을 전하고 싶다.

나에게 자신이 연주한 바이올린 곡이 담긴 테이프를 건네주었던 유대인 노인 환자가 생각난다. 생존해 있다면 100살은 넘었으리라. 그는 한 쪽 눈에 임파암이 생겨 나를 찾았다.

일반적으로 그냥 ‘눈’이라고 말하지만 의학적으로 눈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안구가 있고, 안구가 자리잡고 있는 안구집이 있다. 안구집에는 안구를 움직일 때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양쪽 눈을 각각 다른 방향으로 끌어주고 밀어주는 근육이 있고, 시신경, 눈물샘, 렌즈를 보호하는 막도 있다. 임파암은 안구에도 올 수 있고 안구집에도 생길 수 있다. 그 환자의 임파암은 방사선 치료로 완치됐지만 부작용으로 눈 주위에 있는 눈물샘과 예민한 조직들이 영향을 받게 되었다.

치료가 끝난 후 두번 째 나를 찾아 왔을 때 그 노인이 유대인이고 바이올리니스트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눈이 아프고 눈물이 많이 흘러서 악보를 보기 힘들어 연주가 어렵다며 나에게 테이프 하나를 건네주고 갔다.

그 테이프에는 환자 자신이 연주한 바흐의 ‘샤콘느’가 들어 있었다. 15분 분량의 슬프고 어려운 곡이었다. 바흐를 좋아했지만 당시 나는 음악이 전하는 고통, 슬픔, 영적 갈등을 껴안을 만한 능력도 여유도 없었다. 그후 다시 노 연주자가 병원을 찾아 왔을 때 나는 건성으로 감사를 표시했고 그후 테이프를 치웠다.

30여년이 지난 어느 날, 바흐에 대해 읽다가 우연히 ‘샤콘느’에 대한 글을 접하게 됐다. 바흐의 삶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 곡이 쓰여진 사연은 이랬다. 바흐는 그가 섬기던 레오폴드 왕자와 함께 여행을 다녀와야 했다.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내의 죽음을 알게 된다. 장례는 이미 끝났고 아내는 이미 땅에 묻힌 후였다. 그녀는 36세였다. 그때 바흐가 쓴 곡이 ‘샤콘느’라고 한다. 슬프고 아프다. 영적인 고뇌와 갈등이 복잡하게 얼켜있다.

지금은 이 곡이 나에게 말하려는 삶의 애환, 고통, 영적 갈등을 잘 이해한다. 더불어 나는 이곡이 주는 위로도 가슴으로 느낄 수 있다. 자꾸 듣고 싶을 정도로 좋아한다. 이 곡은 환자들이 알려주고 싶어하는 삶의 어려움에 대한 말 없는 호소를 들을 수 있게도 한다.

그 환자가 주었던 테이프를 찾아야겠다. 그리고 그의 연주를 다시 들어야겠다.

내 이름은 박장은(朴長恩)

내 이름은 박장은 (朴長恩)
2008

“가정의 병력은 어떻게 됩니까?” “저는 입양되었기 때문에 친 부모나 혈연의 병력을 모릅니다.”

지난 주 휠체어를 타고 온 50대 남자 환자는 어디서 발생한지 모르는 암이 뼈에 전이되어 골절교정 수술을 받은 후 나에게 의뢰됐다. 미국 이름이지만 얼굴은 동양인 그것도 한국인의 모습이었다.

나이에 걸맞지 않은 깊은 주름과 시름이 감도는 얼굴은 평탄치 않았던 과거를 말해주는 듯 했다. 차트를 보니 담배와 알코올 중독의 경력이 있었다.

의사들은 환자 진찰을 하기 전에 자세히 병력을 검토한다. 특히 세계 곳곳에서 온 사람들이 모인 미국이기 때문에 의사는 환자에 대해 알아야 할 사항이 많다. 환자의 진짜(!) 나이를 비롯해 복용하는 약 약에 대한 부작용, 수술의 여부 같은 기본적인 것 외에도 살아 온 환경, 습관, 약물이나 담배 술 중독의 여부, 혈연의 병력을 검토하고 기록하는데 이러한 내용이 의사로서는 환자가 현재 겪고 있는 병을 진단하고 치료하는데 도움이 된다. 어떤 경우는 본인에겐 도움이 안돼도 가족과 친척에게 중요한 정보가 되기도한다.

어린이에게 있는 망막암, 신장암, 동양인에게 드물고 일부 유럽에서 온 유대인 혈통에 많은 유방암과 난소암이 좋은 예다.

간단히 설명하면 유전인자로 인한 어린이의 망막암은 맹인이 되게 할 수 있기때문에 가족 병력을 알 경우 자주 정밀 검사를 통해 조기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작은 수술과 적절한 항암 약물치료로 안구를 제거 하지 않고도 완치가 가능하다.

그러나 이번의 남성 환자처럼 입양된 경우는 암 발생률에 대한 정보를 찾을 수 없다고 보면 된다. 열흘 정도 치료기간이 지났을 때 그가 우울하고 힘들어 보여 이런 제안을 했다.

그의 이름은 Keane이고 성은 P로 시작됐다. 우울한 그에게 지금의 이름을 근본으로 해서 한국 이름을 만들어보자고 했다. 나의 엉뚱한 제안에 처음엔 황당해 했다.

Keane을 한국 발음으로 소리내면 ‘킨~’이 되니까 길 장(長)을 쓰고 한국 이름은 한 글자가 더 필요하니 풍성하다는 의미에서 풍(豊)자를 쓰는 것이 어떠냐고 했더니 풍의 발음이 마음에 안 든다고 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은혜(恩惠)의 은(恩)이 었다. 라스트 네임이 P로 시작되니 한국식 성은 박, 피, 변, 표 씨(氏) 중에서 하나를 고르라 했다. 그는 박을 골랐다. 박(朴)은 후박나무 또는 순박하다 라는 뜻이다. “자 Keane 이제부터 당신의 한국이름은 박장은(朴長恩)입니다”고 했더니 새 이름의 의미가 마음에 든다며 좋아했다. 그러면서 “내가 살아온 삶과는 반대되는 이름”이라고 했다. “이름은 부르기 위한 것으로 짓지만 부르다보면 이름의 뜻대로 삶이 이루어진다고 믿는다”고 했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 내 나름대로 작명 증명서를 만들어 간호사를 통해 그 환자에게 전해 주었다. 한국의 태극 마크가 화려하게 색칠 된 연(kite)을 그림으로 그리고 “Keane P의 한국 이름은 박장은(朴長恩)” 이라고 썼다. 영어로 jang=long eun=blessed by Most High라는 주석과 함께. 너무 늦었지만, 입양아로 어린시절을 보내고, 많은 사연을 가슴에 뭍고 살아온 것 같은 이 환자에게 한국식 이름을 갖게 해 주어 그의 마음을 위로해 주고 싶었다. 얼마 안 있어 세상을 하직한 박장은(朴長恩)씨에게 과연 위로가 되었는지 알지 못한채 세월은 흘러가고 있다.

암을 극복한 사람들: 에드워드 케네디 쥬니어 이야기

사년 전 방사선 학회 컨•벤션이 보스턴에서 열렸다. 당시 허리케인 샌디의 영향으로 행사기간 내내 춥고 흐리거나 비바람이 불었다. 며칠은 보스턴 시가 마비되어 컨•벤션이 계획되로 진행되지 못했다.

심포지엄에서는 암 치료에 관련된 논문이 발표됐고 새 테크놀로지로 개발된 최첨단 치료기구들도 전시됐다. 의학의 발전을 실감하게 하는 커다란 컨•벤션이었다.

이번 컨•벤션에 2~3명의 주요 연설자들이 초청됐다. 이들 중에 한 과학자는 남들이 가지 않는 비주류의 길을 걸어왔던 자신의 삶을 참석자들과 함께 나누었다. 다섯살 때부터 ‘기발하고 엉뚱한’ 생각을 했다는 그는 주위 사람들의 우려와는 상관없이 묵묵히 그의 아이디어를 실현하려는 노력을 해왔다. 그 결과 그의 엉뚱한 생각이 지금은 우리들에게 두개골을 열지 않고 뇌종양을 치료할 수 있는 테크놀로지를 제공해 주었다.

컨•벤션에서 가장 인상이 깊었던 순서는 암을 이겨내고 생존한 사람의 강의였다. 그의 연설은 이렇게 시작됐다.

“나는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의 조카이고 매사추세츠 상원의원이었던 에드워드 케네디(에드워드 케네디 의원은 최장수 상원의원 중의 한 명으로 47년간 의원직에 있었다)의원의 아들입니다. 나는 이렇게 연설하는 것이 당황스럽거나 떨리지 않지만 오늘 연설에 대해 특별히 염려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은 바로 저의 어머니 조운입니다. 어머니는 저와 함께 이 자리에 참석하셨습니다. 엄마!(그는 어머니라고 하지 않고 엄마라고 불렀다) 한 번 일어나 보세요.”

에드워드 케네디 주니어는 열두 살 때 오른 쪽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았다. 악성골수암에 걸려 당시 거의 실험적인 새로 나온 항암제를 쓰고 나서 다리절단 수술을 받았던 것이다.

그는 그때의 기억을 이렇게 표현했다.

“의사들은 나에게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회진을 들어 올 때마다 내 다리에 있는 혹덩어리가 얼마나 작아졌는지에만 신경을 썼습니다.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할 때 그냥 혹만 도려내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아버지는 저에게 무릎 밑 부분 오른쪽 다리와 오른 발이 없어질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아버지의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리를 절단해야 한다는 사실에 절망했던 그였지만 수술후 5개월 만에 외다리로 스키를 탔다. 나는 외다리로 스키 슬로프를 내려오던 에드워드 케네디 주니어의 사진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때의 기억이 나의 깊은 감명으로 각색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진을 보면서 했던 생각들은 한 마디로 표현하기 어렵다. 눈이 하얗게 덮인 산등성, 다리가 하나밖에 없는 틴에이저가 스키를 타고 내려오고 있다니…. 그 모습이 숭고할 만큼 아름다웠다. 무엇보다도 그를 장애자라고 멸시하지 않고 보호해 주는 사회가 부럽고 존경스러웠었다.

그로부터 40년 동안 그는 대학을 가고, 변호사가 되고, 결혼해서 남편으로 또 두 아이의 아버지로 활동적인 삶을 유지해 왔다. 예일대학 임상정신과 의사이자 교수인 아내를 두고 있으며 4년 전에는 의료재정 전문 마우드 그룹 회장으로 있었다. 그 후 코네티컷 상원의원으로 활동중이고 미국 장애인협회 이사로서 사회를 계몽하고 있다.

그의 강의는 훌륭했다. 의족으로 걷는 그의 걸음걸이는 전혀 이상하지 않았고 그는 멋있었다. 암을 이겨내고 불구라 하더라도 활발히 잘 살아가는 용기있는 사람들에게 박수를 보내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