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오빠, 진기오빠, 천상병시인, 장영희교수가 생각나는 아침

2023.9.20. 수요일 아침

pilot의 꿈을 가졌던 큰오빠 전유경. 큰오빠의 형, 나의 ‘제일 큰오빠’ 전응경의 전사는 오빠를 가장으로 내몰고, 어려움을 감내했다. 오늘 아침 깨면서, 큰오빠, 그리고 (김)진기 외사촌 오빠를 생각했다. 헌병감을 지냈던 진기오빠는 내 결혼식에서 나를 escort 했었다.

천상병시인, 장영희교수를 만난 적은 없다. 모두 아픔을 승화하고, 아름답고 뜻 있게 살다간 사람들이다. 시인과 교수의 사진은 삭제했다. 카피 라이트가 있는 경우일지 몰라서…

[수필] ‘2천일(二千日)의 신화(神話)’

2023.8.28 남가주 경기여고 동문회 뉴스레터에 보냄

모국인 한국을 떠나 살아온 나는 영어와 한국어 권(圈)을 넘나들면서, 때로는 두 세계를 섞으면서 살았다. 많은 디아스포라의 삶이 그렇듯이, 음식, 예절, 언어문화의 섞임은 자연스레 짬뽕(국물과 식재료가 마구 섞여있는 이미지에서 파생된 의미의 단어: 일본 참프루‘, 인도네시아말로 짬뿌르‘(Campur)도 섞는다는 뜻이 있다.)이 되었다. 그런 나를 보고 한심하다고 할 사람은 없을게다. 그렇게 보낸 시간이 반세기나 된다. 그렇다면, 그간 나와 함께 했던 의식(意識)과 사고(思考) 또한 짬뽕이 되었을까? 그 짬뽕의 바탕은 무엇일까? 자라면서 받았던 밥상머리 교육일까, 학교라는 틀 안에서 가르쳐진 지식일까, 타향살이에서 어렵게 다듬어진 개똥철학일까. 아니면 어머니가 물려주셨을지도 모르는 지혜일까.

곰곰이 들여다보면, 내 일상의 모든 것은 한글이라는 뿌리 위에 있었다. 그 뿌리는 항상 깊이, 널리 퍼지면서 자라고 있었다. 여기에서 뿌리라는 말은 상징적인 표현이다. 실상 어린, 빨리 자라는 나무의 뿌리는 나무 둘레의 38배로 원형을 그리면서 자란다고 한다. 몸체가 크고 튼튼할수록, 뿌리는 멀리 퍼져나간다는 과학적 근거이다. 여담이지만 뿌리는 크게 두가지로 분리해서 보는데, 주근(主根)과 측근(側根)이다. 주근은 식물의 밑동으로 땅 속 깊이 꼿꼿이 자라면서 수분, 양분을 빨아올려서 줄기를 지탱하는 기관이다. 고어로 불휘라고 부르고 용비어천가에 나온다. 측근은 퍼져나가는 수염뿌리를 생각하면 된다. 한글이라는 뿌리는 주근, 측근 모두, 그 힘과 영역이 방대했다.

바다를 떠돌다가 풍파에 밀려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도 침몰하지 않았던 것은, 한글과 한글이라는 토대 위에 세워져 나의 일부가 된 ‘2천 일의 신화(神話)’ 때문이다. 그것은 나의 가슴과 머리가 순수했던 어린 10대 시절에 경기여자중고등학교에 적(籍)을 두면서 2천 일 동안 썼던 신화이다. 신화의 뿌리는 깊고, 방대하다.

그런데 이 ‘신화(神話)’는 혼자만 쓴 것이 아니었다. 지난달, 57년 전에 브라질 이민을 떠나면서 헤어졌던 교우를 엘에이 한인 쇼핑몰에 갔다가 우연히 만났다. 친구는 나를 보고 ‘정동?’ 하고 말을 붙였다. 나는 ‘일 번지?’ 하고 답했다. 우리는 한글 다섯 자로 서로의 뿌리를 확인했던 것이었다!

나를 위시한 디아스포라 한국 사람들은 한국과 세계역사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장보고 통상이 이끌었던 최초 한국의 해상무역은 신라인들의 디아스포라 삶을 보여준다는 전설이 있다. 일제 강점기 때의 슬픈 역사를 뛰어넘어, 지금 7백 만이 넘는 한국 분들이 카나다, 미국, 브라질, 아르헨티나, 중국, 일본, 러시아, 우츠베키스탄, 아프리카, 독일 등 세계 무대에서 활동하고 있다. 현대 한국 디아스포라가 장보고가 살았던 시대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한글이다.

우리 조상들은 모국을 떠나 어느 곳에 정착하든지 간에, 두 가지 일을 했다. 첫째는 후손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둘째는 공동체를 만들어 서로 간에 문화와 디아스포라 삶에 도움이 되는 정보를 나누면서 함께 하는 일이었다. 공동체는 사탕수수밭, 오랜지 밭 그리고 한국어로 예배를 드리는 교회를 토대로 자연스레 형성되었다. 참으로 대단한 일이다.

남가주경운회가 뉴스레터를 영어로 출판하지 않고, 한국어로 만드는 것처럼, 세계 어느 곳에 있어도 디아스포라 한국인들은 한글을 잊지 않는다. 후세에게 가르칠 뿐 아니라, 나아가서는 한글이 세계언어로서 받아들여지도록 세상을 계몽하고, 그를 위해서 쉼 없이 달린다. 그렇게 달려온 선구자들이 많다. 나는 선구자는 아니지만, 바통을 물려받아 다음 주자(走者)에게 넘겨 줄때 까지 열심히 뛰고 있는 단거리 경주자 중의 하나이다.

한국 땅에서의 ‘2천 일(二千 日)의 신화(神話)’는 나의 경우, 이 미국 땅에서 ‘2만 일(二萬 日)의 신화(神話)’로 이어가고 있다. 이 신화는 역시 한글을 통해서이다. 비혈통계 환자가 대부분이었던 일과(日課)이었어도, 한글을 읽는 동포들에게 한글로 의학 칼럼을 써서 새로운 의학 정보를 나누었다. 일기를 쓰듯, 동화와 수필과 시도 한글로 써왔다. 지금은 한글을 차세대 한국계 혈통뿐 아니라 비혈통 학생들이 배울 수 있도록 한글이 정규학교 선택과목이 되게하기 위한 ‘한글세계화’에 함께 한다. 힘들지만 기분 좋게 잘 진행되고 있다.

내가 이사장으로 봉사하고 있는 미국의 비영리단체인 한국어진흥재단이 그 과업의 성과를 보여준다. 미 전역에서 200여 개의 중고교 정규학교에 한국어 클래스가 만들어지고, 2만 여명의 학생들이 한국어반을 택하고 있다. 남가주만을 볼 때 80개교 학교에서 총 332개 학급의 한국어반이 운영되고 8,500여 명의 학생들이 한국어반을 수강한다. 지난주에 엘에이 카운티에 있는 두 중고교에 한국어반을 개설했다. 이 두 학교에는 한국혈통 학생이 극소수이다. 그러나 학생들은 그들이 원해서 한국어를 세계언어의 옵션으로 택하였다.

차세대가 한국어를 배우게 하려면 이 미국 사정에 맞는 이중언어, 한국어와 영어로 된 교과서가 필요하고, 교사양성, 예비교사 양성등 이에 합당한 부수적인 일들을 함께해야 한다. 한국 문교부 산하, 교육원과 함께 열심히 일하고 있다.

나는 오늘도 한글 신문을 읽고, 한글로 글을 쓴다.

나의 모교 경기여자중고등학교(京畿女子中高等學校)의 ‘2천 일의 신화’는 어릴 적 정동 1번지에서 태어나, 아메리카 대륙에 뿌리를 내리면서 나의 의식(意識)과 사고(思考)의 줄기를 키워, 한글로 ‘2만 일(二萬 日)의 신화(神話)’를 만들고 있다.

-끝-

[시] 백자(白磁)

아기 집 속 아이는

쬐끄만한 입술을 오믈거리다가

여인에게 침을 뱉고

오줌을 갈겼다

끈적이는 머리카락에

입 맞추고

바둥대며 세상을 숨 쉬는

첫 생명을

가슴에 품는다

여인은

까마귀 처럼 까만 양복

흰 와이셔츠

그리고 까마귀 색 넥타이

반백의 남정네

그녀의 첫 생명

백자가 품은 그녀를

가슴에 안고 있다

삼척 땅 속

기다림이 있는

그곳에

평생 찾던

정막 속에

백자와 하나 되어

뉘어 지고 있다

[수필] 대중이는 어디 있을까?

네 살은 되었을 것 같았다. 남자아이는 많이 울었다. 간호사가 안아 주어도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큰 소리로 오랫동안 울다가, 간호사 누나 가슴에 안겨 잠이 들었다. 잠 속에서도 아이는 흐느끼었다. 그 아이의 이름은 ‘대중’이라 했다. 한문으로 大衆(대중)이었는지, 한국의 15대 대통령 김대중 씨의 이름을 딴 大中(대중)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대(大)라는 글자는 아이가 넓은 마음으로 배포(排鋪) 있는 장군처럼 살라는 뜻으로 주어진 것이었을 것 같다.

오십 년 전, 겨울처럼 춥던 어느 가을밤에 경찰 아저씨의 팔에 안겨, 한 살도 안 된 꼬마 아기 네 명과 함께 서울시립아동병원 문턱을 넘어왔던 아이이다. 당시 의과대학을 갓 졸업하고, 인턴이었던 나는 시립아동병원에 파견 나가 있었다. 경찰 아저씨는 그날 밤도, 여느 날처럼, 길에 버려진 아이들을 걷어왔다.

‘대중’이는 거대한 첫 번째 입원실에서 며칠을 지나고, 제 나이 또래 아이들이 있는 방으로 옮겨졌다. 말을 할 수 있던 ‘대중’이는 텔레비전의 이름도 알았다. 당시 한국에는 텔레비전이 집마다 있던 때가 아니었다. 그로 보아서, 그 아이는 밥깨나 먹는 집에서 자라던 아이이었을 터인데, 왜 버려졌는지, 아니면 어쩌다 길을 잃었던 것인지, 그 아이를 찾으러 오는 부모가 왜 없는지, 우리는 안타까웠다.

파견근무가 끝나고 제자리로 돌아간 햇병아리 인턴들은 계획되어 있던 전문분야의 길을 떠났다. 나도 ‘대중’이와 ‘대중’이의 시립아동병원 친구들을 뒤로하고, 얼마 후, 도미했다. 나는 미국의 동부, 서부에서 살면서, 어린 시절을 고아로 한국에서 지냈다던 성인들과 고아들에게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만들어 주었다는 양부모들도 만났다. 6·25 동란 즈음 고아가 된 분들은 동란이 일어난 지 73년이 된 올해로 거의 80살이 되어가고 있고, ‘대중’이처럼 평화 시대에 부모와 헤어진 아이들은 40대 중반이 되었을 것이다.

한국에는 6·25 동란 때문에 남북한 합쳐서 십여만 명의 전쟁고아가 생겼다. 휴전된 지 20년이 지난 ‘대중’이가 구제되었던 1972년 즈음에도 남한은 고아 수출국이라는 오명이 붙여졌다. 보건복지부에 의하면 1955년부터 2021년까지 64년간 16만 9,454명이 해외로 입양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북한은? 북한 고아의 통계는 많지 않지만 Wilson Center (2020년 6월 18일, 서강대학교 홍인택)는 1952년부터 1959년까지 6·25 동란 전쟁고아 3만 명이 공산권 동맹 국가인 항가리, 로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 동독, 몽고, 중국에 초대되어 교육받았고 양육되었다고 보도했다. 그들은 국가 관념에 대한 교육을 중점적으로 받았다고 한다. 전원이 북한으로 돌아 갔다. 그 후 그 아이들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내용은 국제사회에 잘 알려지지 않았고, AP 뉴스(김형진, Monika Scislowska 6월 23일 2020년)에 짧막한 내용이 실린 것을 보았다. 한 명은 김일성대학에서 러시아어 교수를 하고 있고, 다른 한 명은 폴랜드어 교수로 일하고 있었고, 그 외에 세 명은 폴랜드 외교관을 지났다는 내용이었다. 3만 명 중 겨우 이 사람들의 소식이 있을 뿐이다.

6·25 동란의 상흔이 깊었던 한국에서 성장하고 미국에서 디아스포라로 살아온 나에게 2023년 여름은 특별하다. 한미외교 70주년이고, 이 때문에 만나게 된 특수한 사람들 때문인 것 같다. 한미 두 국가 간의 연계는 6·25 동란으로 시작된 것이기에, 전쟁 텃밭에서 전사한 한국과 미국의 젊은이들을 잊을 수 없지만, 이 역대의 참상에 대한 기억을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 수 있게 전환 시켜준 여름이다. 알게, 또는 모르게 세상에 남겨진 산화한 젊은이들의 자식들을 만났다. 평범 속에 흡수된 그들이지만, 실상 7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그 젊은이들이 스쳐 갔던 여인들과 그들이 남기고 간 아이들은 쉬이 아물지 않는 상처를 아물게 하려고 무척이나 애썼을 것이다.

내가 만난 특별한 두 여인 중의 한 분은 한국전쟁 직후, 미국 흑인 가정에 입양되었던 은퇴 교사이자 작가인 산드라 윈덤여사이다. 다른 한 여인은 윈덤 여사와는 달리, 나의 환자 ‘대중’이처럼 1970년대에 홀트 양자회를 통해서 백인 양부모에게 입양되어 성장한, DNA로 따지자면 순수 한국인 여성인데 전문직을 가진 아내이고 엄마이다.

윈덤여사는 엘에이 총영사관과 UCLA가 합동으로 개최한 한미외교 7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 스피커로 초대되었던 인사 중의 한 사람이었다. 누구인지 모르는 흑인 병사와 역시 누구인지 모르는 한국인 여인 사이에 태어났던 혼혈아로 삶의 첫 4-5년을 가난하고 인종차별이 심한 한국이라는 곳에서 ‘깜둥이’라는 놀림을 받고 살았다고 한다. 흑인 병사는 미국인일 수도 있고 에티오피아인일 수도 있다고 그녀는 자신의 책에 설명하고 있다. 스텐포드 대학을 졸업한 인재로 그녀의 ‘오케스트레이션’이라는 책은 한국뿐 아니라 미국의 체제와 사회의 불합리를 말해준다. 또 부모, 국가라는 테두리, 종교, 교육, 문화의 이질감 등에 대해서 숙고하게 한다.

참으로 훌륭한 사람들이다. 훌륭한 사람들은 또 있다. 미디어를 통해서 본 뉴욕 부교육감 알랙사 앨번, 부시 펠로우십 수상자 캐서린 대출러, 김 파크 넬슨, 펜실베니아 소도시 시장 제니 안토니비츠, 비키 플린켄 스미스 검사, 킴 페굴라 네셔널 풋볼리그 버펄로 밀스 공동구단주 킴 페굴라를 보라.

부모를 잃은 고아(孤兒)이었는지, 부모나 부양가족이 마음을 먹고 버린 기아(棄兒)이었는지, 뜻하지 않게 부모를 잃은 미아(迷兒)이었는지는 더는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의 암울했던 초창기 운명을 입양해준 부모님들과 함께 합심해서 반전시킨 멋진 사람들이다. 오십 즈음이 되었을 ‘대중’이도 그렇게 멋진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믿는다. 사랑과 신앙의 힘이 얼마나 강하고 큰지를 한국 출신 입양아 영웅들이 보여주기 때문이다.

중앙일보 문예난 2023.6.22

[수필]이별의 노래, 동심초

남편의 종말을 보살피던 친구는 생전에 네 것, 내 것을 가리면서 까칠하게 굴었던 남편이 모든 것을 그녀에게 내팽개치다시피 하고 떠나갔다며 허탈하게 웃었다. 친구는 금생(今生) 보다 전생(前生)과 보이지 않는 흥트러진 끈이 삼라만상(森羅万象) 안에 우리를 묶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친구는 불교 신자가 아니다. 삼라만상이라…. 사전을 찾아보니 수풀 삼(森), 그물 라(羅), 일만 만(万), 코끼리 상(象), 네 글자로 만들어진 사자성어(四字成語)로, 심오한 뜻이 있어 보였다. 나무 목(木)자 세 개가 함께 하는 것으로 보아, 울창한 나무 숲을 뜻하는 것 같다. ‘빽빽한 나무숲에, 만 마리의 코끼리가 망에 갖혀 있다?’ 무척 답답한 형상이다. 그것이 우리 생이란다.

한 줌의 재로 남은 남편을 흰 항아리에 넣어서 비둘기 한 마리가 겨우 들락거릴 수 있을 만한 작은 공간에 놓아두고, 자리를 뜨면서 허무한 마음을 떨굴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녀가 남편과 함께했던 긴 시간 동안 사랑이라는 방정식(方程式)을 잘 풀었는지 물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친구는 남편과의 이별을 그렇게 했다.

지난 일 년 동안, 많은 부고(訃告)가 도착했다. 어느 때보다도 죽음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함께 가족으로 살았던 길고양이 두 마리도 우리 곁을 떠났다. 세상을 뜬 친지들은 코비드-19 때문에, 코비드 백신 부작용으로, 암 때문에, 또 내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우리는 이생을 떠나서 가야만 하는 다음 세상이 어디인지 모른다. 모르니까 흔히 이터니티(eternity)라 하고, 이를 영겁의 곳, 영원한 시간이 있는 곳 정도로 얼버무린다. 그런 테마를 갖고 쓰여진 자서전적 책, 소설, 영화, 드라마도 심심치 않게 부상한다. 요즘 혼수상태에 빠진 사람이 천당이나 지옥에 안착하기 전에 거치어야 한다는 중간 지점, 연옥(?)에 있다가 다시 깨어난 후에, 이생과 그 중간 지점을 넘나들고 살면서, 악귀들을 잡아 영원히 가둔다는 넷플릭스 드라마가 허상인 것을 알면서도 시청률이 높은 것은 단순한 이유는 아닐 것이다.

되돌아보면, 부모님 세대의 어르신들은 집단적인 이별을 많이 겪어 내었어야 할 팔자(八字)였던 것 같다. 일본 강점기때 4개의 전쟁을 겪었고 그 이후 북한이 관련된 전쟁까지 (북한 18, 남한 6: 엔싸이클로피디어) 꽤 많다. 이별의 괴로움으로 늘 가슴이 아팠던 엄마는 아픔을 삭여 보시려고 그랬는지, 평생 우울을 되씹으며 사셨다. 우울은 괴로움을 그리움으로 덮었고, 죄 없는 엄마는 그리움이 죄인 양, 이에 대한 보속(補贖)을 연일(連日) 하셨다.

하루 중에 엄마가 가장 괴로워했던 시간은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는 늦은 오후이었다. 손위 형제들이 집을 떠난 후라, 거의 혼자 자라다시피 했던 나는 우울한 엄마에게 싸이코테라피스트 역할도 했다. 그런 시간이면 엄마가 좋아하는 신청곡을 받고, 독창을 하곤 하였다. 많은 레퍼토리가 있는 것은 아니었는데, 엄마는 <동심초(同心草)>라는 가곡을 자주 듣고 싶어 하셨다.

<동심초>는 <산유화>, <이별의 노래>, 동요 <잘 자라 우리 아가>로 우리에게 친근한 김성태(金聖泰) 작곡가가 만든 가곡으로 육이오 사변 이후에 소개된 곡이다. 가사는 순수 한국 시(詩)가 아니고 7세기 중국 당나라 시를 김안서(金岸曙) 시인이 번안(번안: 원작의 줄거리나 사건은 그대로 두고 풍소, 인명, 지명등을 작기 나라에 맞게 바꾸어 고치는 것)했던 것이라고 한다. 김안서 시인은 1950년 납북된 언론인이며 작가이다. 오산학교 교사를 지냈고, 김소월의 스승이었으며, 타고르의 ‘키탄잘리’를 번역하기도 했다. 1950년 납북된 후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많은 정보가 없다. 친일반민족행위 명단에도 포함되어 있다. 우리 한국민족의 슬프고 어두운 역사의 한 부분이다. 참고로 신사임당이 작사자라는 것은 낭설이다.

‘꽃 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만날 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동심초(同心草)’란 같은 마음(同心)을 나누는 종이(草)라는 뜻으로 현대말로 표현하자면 ‘러브레터’이다. ‘풀 초(草)’가 들어간 것은 종이는 풀로 만들기 때문이다. (이 가사가 여류시인인 설도(薛濤)가 쓴 춘망사(春望詞, 봄날의 바램)’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설명이 201715일자, 새만금일보 동심초는 과연 풀이름인가라는 정복규 기자의 글에 자세히 발표된 바 있다.) 정기자는 김억(김안서)가 했던 말, ‘시의 번역은 번역이 아니라 창작’이라는 내용도 곁들였다. 내가 보기에도 <동심초> 가사는 원문의 의미를 훌쩍 뛰어넘는 창작 같아 보인다. 나도 이 분석을 읽을 때까지, 동심초는 꽃이라고 잘못 알고 있었다.

나는 엄마에게 <동심초> 노래를 불러 드릴 때, 엄마의 그리움을 잘 표현하려고, 꽃이 바람에 지는 것을 상상하면서 멋을 부려가며 노래하곤 했다. 번역이 아닌 번안한 말들이었기에 오히려 다행이었던 것 같다. 애절하고 충분한 위로의 말들로 이어졌던 노래이었다. 다시는 이생에서의 만남이 없을 이별이었건만, 떠난 이와 같은 마음을 보이지 않는 종이에 써서, 바람에 날려 보내곤 하셨을 것이다. 친구도 그가 남편과 함께 이루었던 사랑을 방정식으로 써서 지금 바람에 날려 보내고 있지 않을까.

중앙일보 2023.9.7일 발표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