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밭을 그냥 지나쳐 왔네/ 새소리에 무심히 응대하지 않았네/ 밤하늘의 별들을 세어보지 않았네/ 친구의 신발을 챙겨주지 못했네/ 곁에 계신 하느님을 잊은 시간이 있었네/ 오늘도 내가 나를 슬프게 했네.’
고정채봉 시인의 ‘오늘’이라는 시이다. 뒤 돌아보면 내가 지나 온 나날이 시인이 노래하듯 그랬던 것 같다. 나의 하루를 차지했던 환자들이 나에게 꽃과 새, 별이 되어 주었던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또 내가 환자들에게 꽃과 새, 별이 되어 주었던가도 생각해 본다. 아닌 것 같다.
그렇지만 나는 그들에게 또 그들은 나에게 짧은 시간이긴 해도 삶의 동행자가 되는 것을 허락했고 가슴을 따뜻하게도 해 주었으며 어렵고 힘든 아픔을 덜어 주기도 하고 나누기도 했다.
지난 두 달 동안 다섯 명의 뇌암 환자가 의뢰되어 왔다. 모두 엄청나게 커다란 암 덩어리가 뇌 속에서 자라고 있었다. 본인과 가족들의 절망감을 나 또한 무겁게 안고, 뇌암 종양학 전문, 신경외과 전문 동료의사들과 함께 치료 여부를 의논했다. 우리가 패배할 것을 알고 있는 이 전쟁에서의 싸움 과정을 토론했다. 치료가 힘들다 해도 혹시 조금의 시간을 벌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작은 희망을 우리 모두는 버리지 못했다.
한 대학생은 치료를 마치고 다시 버클리로 새 학기에 맞추어 9월에 떠난다. 다른 여학생 리디아는 거동을 못해 가족들이 휠체어를 밀고 치료를 받으러 온다. 오늘은 좀 어떠냐고 물으니 웃으면서 ‘기분이 좋아요’라고 대답한다. 가슴이 무겁다. 그래도 리디아에게 감사한다.
다른 환자 50대 여인은 치료를 중단하기로 결정하고 호스피스 도움을 받고 있다. 많은 신경이 작동하지 않아 누워서 하루를 보내야 한다. 남편과 함께 첫 번째 왔을 때 받은 인상으로는 여인이나 남편 모두 선한 마음의 소유자로 성실히 살아온 것 같았다.
현대의학이 부여하는 약물과 방사선 치료에 대한 설명을 했다. 그리고 어렵사리 호스피스에 대해 운을 띄웠다. 그녀나 남편 모두 호스피스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못한 상태에서 나에게 의뢰되어 왔기 때문에 내가 말 하려는 내용이 선전포고처럼 들릴 수 있고 절망감을 더 부추기기 쉬울 것 같아 조심스레 운을 띄었다. 통계를 강조하며 희망보다는 절망을 나르는 메신저가 되거나, 거짓 예언자가 되어 진료실을 돌아서서 나올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의사들도 나쁜 소식을 전달하는 것을 회피하고 싶기는 일반인과 다르지 않다.
이 여인처럼 희망이 없을 경우 환자와 가족에게 말기 암의 상태를 우선 인식 시켜야 하고, 삶의 남은 시간이 짧다는 것, 치료가 생명연장을 시킬 수 있는 확률이 적다는 것, 또 치료를 원할 때 에너지와 시간의 많은 부분을 치료 받는 것에, 부작용 때문에 소비할 수 있고 괴로울 수 있다는 것을 이해시켜야 한다. 이해가 됐을 때 호스피스의 장점들을 알려주고 충분히 생각할 시간적 여유를 주어야 한다.
어찌 지내는지 궁금해서 전화를 했다. 여인과 남편은 호스피스 치료에 만족하고 있었다. 다행이었다. 가족과 자기 집에서 나날을 보낼 수 있는 것에 감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화를 받은 남편은 흐느끼고 있었다.
죽음이 준비된 이 여인처럼 ‘내가 나를 슬프게’ 하지 않은 오늘이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