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으로 가는 길은 붐볐지만 날씨는 화창했다. 조카가 비행시간에 맞게 우리를 엘에이 공항으로 대려다 준 오후였다. 조카의 차 백미러에는 두 달 전에 사고로 세상을 떠난 제임스의 사진이 들어 있는 ID Card가 걸려 있었다.
사진 속의 제임스의 얼굴은 살아 생전 모습 그대로 잘생겼고 정직했다. 그의 얼굴은 운전하는 조카에게로 자꾸 달랑거리면서 향했다.
제임스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그를 가끔만 봐왔던 나조차도 슬픔에 싸였는데 조카가 모든 활동을 접고 두문불출하면서 괴로워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둘은 삶의 많은 부분을 함께 나누었고 비슷한 생활관을 갖고 있었고 세상에 대한 편견(?)조차도 비슷했다.
제임스가 죽은 후 며칠 동안 조카는 울기만 했다. 조카 주위에 있는 우리도 함께 울었다. “너무 억울해, 이모” “그래, 참 억울하기만 하구나. 세상은 공평한 것 같지 않게 만 보인다.” “이모, 너무 아까워” “그래, 정말 너무 아깝다.”
내가 죽음을 본 것이 이번이 처음이랴. 많은 환자들이 세상을 뜨기 전에 가족 친지들과 작별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아왔다. 의학도이고 종교인인 나는 죽음의 문을 넘어 선 환자들이 평화의 세상에 있을 것으로 믿지만, 이 땅에 남아 있는 가족과 친구들에게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상실감, 허무함과 아픔이 있음을 잘 안다. 자신의 삶의 일부였던 사람을 영원히 만질 수도, 볼 수도 없게 된다는 진리는 허무하기 짝이 없다. 더더구나 제임스처럼 서른 살도 되기 전에 사고나 전쟁으로 갑작스레 세상을 뜨거나, 불치병으로 많이 아파하다가 죽을 때 남은 가족과 친지들의 고통은 크고 그 상처는 많은 시간이 걸려 아문다. 아니, 영원히 아물지 않을 수도 있다.
한국말로도 번역(류해욱 신부 번역) 출판 된 나오미 레이첼 레멘이라는 의사가 쓴 ‘나의 할아버지의 축복’ 이라는 책에 이런 얘기가 나온다. 융이라는 정신과 의사는 꿈 분석의 대가로 알려져 있었다. 그가 어느 정신학 모임에 갔을 때 어떤 사람이 자신의 꿈을 해설받고 싶어 질문을 했다. 그가 꿈마다 나치의 학대로 시달린다는 내용이었다. 이때 이 의사가 말로 대답을 하는 대신 모든 청중 즉 의사와 정신학자들을 일어서게 하고 그 꿈을 묵상하며 몇 분 동안 서있도록 했다. 그 꿈을 머리로 해석하는 것 보다는 일어서서 말없이 묵상하면서 고통에 동참하도록 했다는 뜻이다.
심한 고통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또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로 위로 한다는 것은 의미가 거의 없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말한다는 것은 사치이다. 그저 그 사람이 겪고 있는 아픔 안에 함께 있어 주는 것 자체가 도움이 된다. 우리는 그래서 상담을 권한다. 상담을 하는 중에 자신이 서 있는 곳을 보게 되며 서서히 치유가 가능하게 되는 것을 알고 있다. 상담 중에 의사는 말하기 보다는 주로 듣는다. 연설을 피한다는 의미도 된다. 그리고 고통 중에 있는 당사자가 그 깊은 내막을 들여다 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나는 조카에게 제임스의 사진이 든 ID Card를 치우라고 말하지 않았다. 때가 되면 그 카드는 치워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