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모두 조용하그라!”
“…….”
“곧 부활절이 다가오니께, 예수님에 대한 글짓기를 해 볼까?”
중학교에 입학한 지 한 달쯤 지난 어느 날, 국어 선생님은 열댓 명 되는 급우들에게 누렇게 변한 오래된 갱지를 하나씩 나누어 주시며 말씀하셨어요.
나는 쓸 말이 없었어요. 나는 예수님을 알지 못했거든요.
그리고 나는 하느님을 믿지 않았어요.
우리 반 학생들이 갱지를 메꾸지 못하는 것을 보신 선생님은 마음을 바꾸셨어요.
“그냥 마음에 내키는 대로 아무 글이나 써 보그라.”
“…….”
‘눈을 감으라 하신다.
그러면 보인다고 하신다.
세상이 온통 까맣다.
아무것도 안 보인다.
할머니는 보인다고 하신다.
눈을 더 꼬~옥 감아 보라 하신다.
그래도, 그래도
하느님은 보이지 않는다.
엄마 얼굴이 보인다.’
나는 끄적인 작문 종이를 서둘러 선생님에게 드리고 빨리 교실을 빠져나왔어요. 왠지 나는 초등학교 시작 할 때부터 선생님들과 가까이 있는 것이 편하지 않았어요.
나는 경상북도 시골에 외할머니하고 살았어요. 일 학년 반 급우들뿐 아니라 전교생은 모두 밭에 붙어 있는 집에서 살았어요. 근방 도시에서 버스로 한 시간 남짓 들어와야 하는 곳이었어요. 한 학년에 한 반이 있는 조그만 학교였어요. 교장 선생님은 수녀님이었어요. 교장 선생님 말고도 영어 선생님, 수학 선생님 그리고 국어 선생님 이렇게 세 분이 더 계셨어요. 한 선생님이 두 학년을 담당하셨어요.
영어 선생님이 우리 반 담임이셨어요. 선생님은 우리 학교에 오시기 바로 전에 대학을 졸업했다고 했어요. 반 친구들이 선생님에게는 애인이 있다고 쑥덕거렸어요. 웃는 얼굴이 예뻤어요. 웃으면 덧니가 조금 보였어요.
작문을 지어내고 한 달포가 지난 어느 날, 담임 선생님은 방과 후에 나를 남으라 하셨어요. 참, 내 이름은 추석형(錫亨)이에요.
“추‧석‧형, 집에 엿 붙여 놓고 온 기~가? 학교 끝나면 우찌 그리 빨리 도망가노?”
“…….”
“석행이 식구는 몇 맹이고?”
선생님은 처음에만 나를 ‘석형’이라 부르셨고 그다음부터는 ‘석행’이라고 부르셨어요.
“하나요”
“하나?”
“누꼬?”
“외할무니요…”
“엄매랑 아부지 어디 계시노?”
“…….”
“서울 가셨나?”
“…….”
“무라 캤노?”
“아부지는 엄매가 나 낳기 전에 죽었다카데요.”
“뭐라꼬? 아부지가? 그럼 엄매는?”
“죽었에요.”
“뭐라켔노? 돌아가셨다고?”
“…….”
“……언제?”
“삼 년 전에요.”
내가 쓴 작문을 국어 선생님에게서 받아 읽으셨던 스물 몇 살 선생님은 말없이 한참을 창밖만 보고 계셨어요.
“석행아, 오늘은 그만 가그라. 할머니가 기다리시겠꼬망.”
학교가 있는 곳에 장터랑 작은 성당이 있었어요. 나는 외할머니를 따라서 미사가 있는 주일 날에는 성당에 가곤 했어요. 미사는 한 달에 한 번 장이 파한 오후에 근처 도시에서 신부님이 오셔서 들여 주셨어요.
성당에 가는 일은 정말 맘에 들지 않는 일이었어요.
나는 하느님을 믿지 않았어요.
외할머니는 하느님은 좋으신 분이시고 어떤 기도도 다 들어주신다고 하셨어요. 엄마가 아플 때, 나는 정말 열심히 기도했어요. 아침에도, 학교에서도, 잠자리에서도 엄마를 꼭 낫게 해 주시라고 기도했어요. 하느님은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어요.
나는 하느님이 미웠어요. 가끔 하느님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세상을 만들고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하느님이라면 외할머니와 나를 내버려 두고 아버지와 어머니를 우리에게서 빼앗아 갈 리가 없을 것이니까요.
할머니는 몇 대 안 되는 상추랑 풋고추를 키우고 장이 서는 날 갖고 나가 팔곤 하셨어요. 나는 할머니를 따라 장에 가는 것을 좋아했어요. 장에는 볼 것들이 정말 많았거든요. 여름철에는 일주일에 두 번 주일날과 수요일에 장이 섰어요.
여름 방학이 되었어요. 친구들과 따로 만나서 놀지도 못했어요. 모두 밭일을 도와야 했거든요. 운이 좋은 날은 장터에서 친구들을 만나 잠깐이라도 함께 돌아다니면서 놀 수 있었어요. 비 오는 날에도 장은 섰어요.
장이 선 어느 날 오후 천막이 처 있지 않은 한 귀퉁이에서 할머니가 펼쳐 놓은 상추랑 풋고추를 허리를 굽혀 들여다보고 계시는 영어 선생님을 친구랑 돌아다니면서 놀다가 장터 한끝에서 보았어요. 그날 아침나절에는 비가 왔었거든요. 우산은 할머니랑 나를 모두 가려주기에는 작았어요. 비 맞아 꾸겨진 적삼 밑으로 늘어진 할머니의 젖가슴을 듬성듬성 기운 치마 주름이 가리고 있었어요. 외할머니 발등 쪼글쪼글한 주름 사이에는 맨발로 걸으면서 모여든 먼지가 땀이랑 빗방울이랑 어우러져 자리 잡고 있었어요. 그날따라 멀리서 본 할머니 얼굴에는 굵은 주름이 더 많았어요.
할머니가 창피했어요. 나는 선생님 눈에 띄지 않으려고 서둘러 천막이 처 있는 옆 골목으로 도망쳤어요. 선생님이 채소를 팔고 있는 할머니가 내 외할머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싫었어요.
여름 방학 두 번째 일요일에는 신부님이 오셔서 미사를 해 주신다고 할머니가 방학 시작하는 날부터 매일 노래를 부르시다시피 돼 뇌이셨어요. 할머니는 밭터에서 채소를 가꾸는 일 이외에 중얼중얼하면서 묵주 알을 굴리시는 것이 하루 일의 전부이었어요. 할머니의 묵주는 동그랗게 깎은 나무 알들로 된 것이었어요. 나무 알들은 내 엄지손가락의 첫마디만 했어요. 나무 알맹이 가운데로 구멍이 뚫려 있고 그 구멍으로 꼬여진 실이 지나가면서 연결되어 있었어요. 끝도 시작도 없어 보이는 나무 알 고리였는데 한 부분에 펜던트처럼 몇 개의 알이 더 달려 있었고, 그 끝에 십자가가 마무리하고 있었어요.
할머니의 묵주는 엄마가 남긴 것이었다고 했어요. 가끔 할머니 몰래 묵주를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아보곤 했어요. 엄마 냄새는 어떤 것이었을까…. 기억나지 않았어요.
주일 날이 왔어요. 미사는 오후 5시에 시작된다고 하였어요. 동네 사람들이 하나씩 둘씩 성당으로 모여들었어요. 나는 도망칠 수 없었어요. 풋고추와 상추를 이른 오후까지 모두 팔 수 있었던 할머니는 내 손목을 잡아끌고 제대 가까이 맨 앞줄로 가셨어요. 할머니 힘이 그렇게 센 줄은 미처 몰랐었어요. 자리를 비집고 나를 앉히고 당신도 앉았어요.
곧 지루한 미사가 시작될 판이었어요. 미사에 참석해야 한다는 것은 정말 맘에 들지 않는 일이었어요. 무슨 뜻인지도 모를 말을 지껄이는 신부님, ‘일어서라, 앉아라, 무릎을 꿇어라’ 하시는 할머니의 잔소리도 싫었어요.
뒤에서 누군가 조용하게 말을 붙여왔어요.
“석행이 잘 지냈나?”
뒷자리에 앉아 계셨던 영어 선생님을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이었어요. 선생님은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하얀 레이스로 된 미사 보를 쓰고 있었어요. 선생님은 예뻤어요. 나를 보고 환히 웃으셨어요. 선생님은 나를 좋아하시는 것 같았어요.
“선생님, 안녕 하신교?”
나는 얼른 일어나서 선생님 쪽으로 돌아섰어요. 그리고 선생님에게 비스듬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어요.
“얼굴이 까맣게 탔네. 옆에 계신 분이 할머니싱~가?”
옆에 있던 외할머니도 뒤로 돌아서시어 굽은 등을 더 굽혀서 깊이 선생님께 인사를 하셨어요.
“아~고, 선상님이요, 석행이 할매요. 이 동네에 사시능교?”
“아니예, 볼일이 있어서 신부님하고 왔슴니더.”
“아고, 넘 반갑습니더!”
“지난번 장터에서 뵈었습니더. 그때는 몰라뵈었는데, 석행이 할머니라카니, 정말 반갑습니더.”
“선상님, 불쌍한 우리 석행이 잘~부탁드립니더.”
선생님은 장터에서 풋고추를 팔던 할머니의 손주가 나라는 것을 그때 알게 된 것이었어요. 그리고 지루한 미사는 시작되었어요.
자꾸 선생님이 내 뒤통수만 보고 계시는 것 같았어요.
친했던 친구가 서울로 이사 간 것을 빼고 개학한 학교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어요. 친구는 자기 삼촌이 타시던 헌 자전거를 나에게 주고 갔어요. 낡기는 했지만, 자전거를 갖고 있다는 것이 왠지 멋지게 생각되었어요. 가끔 허름한 안장이랑 바퀴에서 먼지를 닦아 내고, 바큇살과 손잡이에 광을 내어주기도 했어요. 자전거로 학교를 다닐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편한지 그제야 알게 되었어요.
새 학기에 나는 될 수 있으면 더 자주 영어 선생님을 피해 다녔어요. 왠지 선생님과 마주친다는 것이 창피했어요. 영어 시간에도 선생님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어느덧 가을이 되었어요. 외할머니 생신은 가을이었어요. 엄마가 살아계셨을 때는 흰 쌀밥에 미역국과 소고기 동그랑땡을 만들곤 하셨어요. 나는 동그랑땡을 무척 좋아했어요. 엄마가 돌아가신 후에는 당신 생일날에 미역국 먹을 일이 없다고 할머니는 한 번도 미역국을 끓이지 않으셨어요. 그러니까 벌써 세 번이나 미역국을 먹지 못하고 할머니 생신이 지나간 셈이에요.
그날도 학교가 파하자마자 나는 서둘러 교실을 나왔어요.
“석행아! 거기 좀 스래이!”
학교 정문 쪽을 향해서 속도를 내어 페달을 밟고 있을 때, 누군가가 뒤에서 나를 향해 외치고 있었어요. 뒤돌아보니 영어 선생님이었어요. 무엇인가를 흔들면서 나를 향해 뛰어오고 있었어요. 멀리서 보니 뭔지 갈피가 잡히지 않는 얇고 넓적한 것을 한 손에 높이 들고 흔들면서 말이에요. 허물어져 가는 열 개의 교실을 담은 학교를 뒤로하고 달리어 오고 있는 선생님과 바람에 날리고 있는 선생님의 머리칼이 왠지 낯설게 느껴졌어요.
“와 그래요?”
“잠깐 서 보래이! 이눔 아~야!”
“…….”
“이것 갖다가 내일 아침 할마이 미역국 끓여 드리레이.”
“…….”
선생님은 낡은 자전거 뒷자리에 마른미역 한 판을 꽁꽁 묶어 달아 주셨어요.
내가 말을 안 들으면 내 이름 석형(錫亨)의 석(錫) 자는 ‘돌대가리’ 석(石) 자로 변한다고 위협하던 선생님, 낡은 자전거 뒷자리에 마른미역 한판을 달아 주시던 선생님,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셨던 그 영어 선생님은 삼 십 년도 더 지난 후에 할머니 수녀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오셨어요.
선생님의 애인은 예수님이었어요. 꿈으로 채워졌던 천여 날의 나의 세계, 반나절 걸어서야 갈 수 있었던 장터, 할머니가 마음을 묻으셨던 작고 초라한 성당이 있던 그곳으로 말이지요.
돌대가리 석형이가 아닌 무신론자 석형이에게 선생님, 아니 수녀님은 연락을 주셨어요. 선생님이 계신다는 수녀원으로 찾아갔어요. 수녀들이 쓰는 검은 ‘머릿수건’ 사이로 몇 줄기 백발이 보였어요. 야위신 선생님에게 수도복은 너무 커 보였어요. 수녀님의 눈동자는 고요하고 맑았고, 얼굴은 창백하지만 평화로웠지요. 나를 껴안아 주는 수녀님은 낙엽처럼 가벼웠어요.
“이젠 영감이 되어가고 있구나, 석행아!”
“선생님은 이제 할매네요!”
“석행이 니는 아직도 신이 없다고 생각하는기가?”
“하느님 생각, 하지 않고 산 지 오래됩니더.”
수녀님과 함께한 그 가을날 오후는 왠지 쓸쓸했어요. 수녀님은 나의 청년기에 대해서, 또 외할머니에 관해서 물으셨어요. 나는 어려웠던 대학 시절이나 마지막 몇 해를 힘들게 사셨던 할머니를 잊고 싶어 했었거든요. 수녀님은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그즈음에 수녀가 되신 것이었어요.
수녀님도 그리고 나도 이유는 다르지만, 가족 없이 외로운 삶을 살아왔더라고요.
미국에는 여러 곳에 한국이민 교회가 있다고 하셨어요. 삼십 년도 넘게 사목을 하셨던 것이었어요. 선생님은 주로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나 성당을 갈 수 없는 사람들을 찾아다니시면서 일을 하셨던 것이었어요. 친구도 많았데요. 친구 중에는 집 없는 거지들도 있었나 봐요. 먹을 것을 갖다 주기도 하셨고, 추운 겨울에는 기부받은 양말이랑 옷들을 모았다가 나누어 주곤 했었데요.
“석행아, 니 할머니한테 유산 받았나?”
“유산이라꼬요? 빤히 다 아시면서 무슨 소리하능기요?”
“나는 미국에서 유산 받았데이!”
“뭐라카요, 수녀님?”
어느 겨울밤 수녀님은 경찰서에서 전화를 받았데요. 늦은 밤이지만 경찰서에 출두해서 확인해 주었으면 하는 일이 있다는 것이었데요. 어느 노숙자가 길에서 죽었는데 그 노숙자의 주머니에서 유서가 발견되었다고 했어요.
‘내가 죽으면 한국인 OOOO 수녀에게 감사하였다고 전해 주십시오. 그리고 나의 전 재산을 수녀님에게 남깁니다.’
노숙자의 유산은 $512.00불이었다고 했어요. 수녀님은 그 이야기를 하시면서 웃지 않으셨어요.
“수녀님, 나는 외할머니에게서 엄마 묵주를 유산으로 받았어예.”
나는 상의 왼쪽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묵주를 선생님께 꺼내어 보여 드렸어요.
“니는 그걸 장식으로 갖고 다니나?”
“…….”
“언제 그 나무 알들이 묵주로 될끼가?”
“…이제 수녀님 오셨으니까, 생각해 보겠십니더.”
선생님은 고향 수녀원에 돌아오신 그해 흰 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날에 소천하셨어요.
수녀님의 장례미사 때 나는 할머니의 묵주를 꺼내어 코에 대어 보았어요. 엄마 냄새랑 할머니의 풋고추 향내가 풍겨 나왔어요. 그리고 나는 수녀님의 애인을 볼 수 있었어요.
친구 김파코미아 수녀에게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