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무새와 친구들 (동화)

앵무새 날개는 뽀얀 하늘색이었어요. 손끝이 닿으면, 파란색은 보송보송할 것 같았어요. 그런데 색깔은 만지는 것이 아니잖아요? 가슴 털은 아주 찐~한 노란색이었고요. 지난주, 나를 방문했던 앵무새는 샌디에이고 동물원에서 살고 있다 했어요. 샌디에이고 동물원에는 환자를 방문하는 동물 대사들이 살고 있데요. 병원에는 사람들만 병문안할 수 있고 동물 식구들은 병원 안을 들어 올 수 조차 없데요. 그런데 동물 대사들은 예외래요.

우리 집에는 일곱 살 된 고양이, 몬티가 있어요. 나는 몬티가 보고 싶었어요. 내가 백혈병에서 완치된 7년 전 생일날, 새끼 고양이 몬티는 동물 보호소에서 우리 집으로 입양되었어요. 몬티는 나를 보러 올 수 없데요. 병원 원칙이라 했어요. 슬퍼하는 나에게 동물 대사가 대신 찾아온 것이었어요. 알록달록한 앵무새가요!

동물 대사들은 여우, 원숭이, 거북이, 독수리, 앵무새들이 대부분이래요. 길들인 뱀도 있데요. 이 동물 대사들은 원래 산이나 바다에서 살았데요. 어쩌다 몸을 다쳐서 동물 응급실에서 치료를 받게 되면서, 사람들과 가까워진 것이래요. 다친 동물들은 상처가 아물어도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경우가 많데요. 혼자 먹이를 찾기도 어렵고, 다른 동물들에게 먹히는 예도 있데요. 동물원에 그냥 머물게 된 동물원 식구 중에서 성품이 온순한 동물들은 특별한 훈련을 받고 대사가 된다고 했어요.

앵무새 동물 대사를 가지고 온 아저씨는 병실에 들어오시자마자, 새장 문을 열었어요. 날개를 펴고 앵무새가 방안을 빙~빙 날았어요. 아주 잠깐이요. 그러더니 앵무새는 날개를 접고 침대 이불 위에서 띠뚝 띠뚝 몇 발자국 걸었어요. 내 종아리 즈음에서 멈추어 섰어요. 그리고 한참 동안 나를 빤히 보았어요.

아저씨가 ‘하우 아 유?’ 하니까 앵무새는 ‘하우 아 유!’ 하고 나에게 말하는 것이었어요! 나는 너무나 신기해서 어떻게 앵무새에게 대답을 할지 몰랐답니다. 아빠와 엄마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어요.

오늘 아침나절, 아빠는 창문 넘어 먼 곳에 눈을 멈추고 한참을 계셨어요. 아빠 옆에 서 있던 엄마도 아주 아주 먼 곳에서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 듯했어요. 아빠랑 엄마는 나의 의사 선생님을 만나고 오신 참이었어요. 그리고 보니, 참, 오랜만에 아빠와 엄마는 같은 방에 있네요.

아빠와 엄마는 이혼했어요. 내가 초등학교 2학년, 그러니까 일곱 살 때이었어요. 키모테라피 받느라 무척 아팠던 때였어요. 엄마와 아빠는 자주 싸웠어요. 나 때문에 언제나 다투셨던 것 같아서, 속상했었어요. 내가 기억하는 나는 언제나 아팠던 것 같아요. 아빠랑 둘이서만 살게 되었던 어느 날, 나 때문에 이혼했느냐고 아빠에게 물었어요. 아빠는 그냥 나를 안아 주었지요. 아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어요.

내가 중환자실에서 일반 호스피스 소아 병실로 옮겨진 지, 이제 두 주가 되어가요. 나는 작년에 중학교에 입학했어요. 친구들 율이와 보니를 정말 좋아해요. 턱에 수염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는 율이를 보니와 나는 자주 놀렸어요. 우리는 합창반에 있었는데, 테너 파트였던 율이가 갑자기 할아버지 목소리를 내는 바람에, 함께 합창을 할 수 없게 되었어요. 보니는 나보다 키가 머리 하나 정도 커요. 보니도 나처럼 아빠랑 살고 있어요.

그러니까 새 학년이 시작되었을 때, 백혈병이 다시 나를 찾아온 것이었어요. 이번에는 배가 많이 아팠어요. 다시 약물치료를 시작했어요. 의사 선생님은 방사선 치료를 배 전체에다 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했어요. 그리고, 오늘 아침, 오랜만에 병실에서 만난 아빠와 엄마는 주치의의 불림을 받았던 것이었어요.

아빠는 내가 올여름 방학 때 엄마 집에 갈 수 없으리라 말씀하셨어요. 방학이 되면, 두 주 동안 나는 엄마네 집에 가서 지나곤 했거든요. 아빠는 이어서 느리게, 더듬거리면서 키모테라피는 고만하자고 말씀하셨어요. 나를 바라보시는 아빠의 눈은 깊고 진하고 어두웠어요. 나는 아빠의 이런 눈을 본 적이 있어요. 백혈병이 다시 나를 찾아왔을 때, 의사 선생님을 만나고 오신 후, 나를 바라보시던 아빠의 눈이 그랬어요.

그날 밤, 나는 커다란 독수리를 타고 하늘을 훨훨 신나게 나르는 꿈을 꾸었어요. 동물 대사로 왔던 노랗고 파란 앵무새가 친구 열 두 마리를 데리고 와서 내 옆에서 함께 날랐어요. 정말 멋있었어요. 하늘에서 내려다본 우리 학교 마당에는 율이와 보니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어요. 친구들은 활짝 웃으면서 나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어요.

중앙일보 6월 25일 2021년 발표되었다.

열무김치를 담그며

이 수필은 2021년 8월 8일 중앙일보 문예난에 발표됨.

오늘 오후 열무김치를 담그는 대대적인 행사를 치렀다. 내가 ‘작이’가 되는 날이었다. 많이 만들던, 조금 만들던, 김치를 만든다는 것은 나에게는 큰일이다. 담구어 놓은 김치를 사서 밥상에 올리면 쉽겠지만 만들어 먹는 습관이 된 지 오래된 터라 단순한 내 김치 맛에 길들여진 나와 식구들이다.

나는 새색시이고 남편은 풋풋한 청년이었던 시절에 우리는 한국식당, 한국 식품점이 없는 뉴욕주 북쪽 대학촌에서 쉽지 않은 미국 생활을 시작했다. 영어와 관습에 서툴러 눈치 보며 위축되는 경우가 많았던 때였다. 수련의 중에, 악센트는 있어도 의사소통이 원만한 인도나 필리핀, 중동 출신들에게 밀리는 기분이 자주 들었다.

중동사람들은 늘 당당해 보였다. 그들의 음식점은 대학가에 몇 군데 있었고, 중동 문화와 음식에 친근감을 나타내는 교수도 있어서 부러웠다. 이차대전 후, 일본이 패망했다 해도 미국과 일본이 엮인 역사가 미국인들이 일본인을 무시하지 않게 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주류 백인들은 비록 스시는 안 먹어도 템푸라 맛에 호들갑을 떨곤 했다. 중국과 국교는 단절되어 있던 때이지만, 중국 음식은 이미 세계에 알려져 있던 터였다. 고린내 나는 치즈를 먹으면서도, 인도사람들이 풍기는 카레 체취, 극동 사람들에게서 스며나오는 마늘 냄새를 공공연히 불쾌하다 해도 되는, 문화적으로 둔감하던 시절의 미국이었다. 그런 새 세상에 사는 우리 부부에게 반드시 있어야 하는 음식은 밥과 김치였다. 갓 난 장이 큰 딸아이에게 김치를 씻어 먹이곤 했다.

김치는 한국말과 같이 항상 우리와 함께 있어 왔다.

그때까지 나는 김치를 담가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음식을 만들어 본 경험이 없었다. 맛은 잘 기억하고 있었기에 추억 속의 맛을 찾아가면서 김치와 여러가지 음식을 만드는 실험이 시작되었다. 그 실험은 50여 년 가까이 된 미국 생활 안에서 지금껏도 지속되고 있다. 뭐 대단한 연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 레시피가 복잡하니까 내 식대로 재료를 생략하거나, 미국 특유의 식재로 바꾸어 넣는 실험을 해 본다는 의미이다. 당시 그곳에는 한국인들이 먹는 배추가 없어서 단단한 편에 속하는 브로콜리나 양배추 같은 것을 썼던 것이 첫 실험이었다. 브로콜리 김치는 그런대로 맛이 좋았다. 그러나 브로콜리 값이 너무 비싼 것이 흠이었다.

오늘 오후, 열무를 상처 나지 않게 살살, 조심히 씻었다. 그러고 나서 소금을 뿌렸다. ‘작이’가 하던 대로 나는 ‘작이’ 처럼 열무를 씻고, 소금도 ‘작이’ 흉내를 내면서 뿌렸다. ‘작이’는 승무를 추는 여승처럼, 팔을 위로 뻗고 공중에서 원을 그렸다. 엷은 바람결에 흔들리던 여승의 옷자락처럼 작은 손에 움켜쥔 소금을 흔들어서, 열무 위에 뿌렸다. 마당에서 진행된 ‘작이’의 여름 열무김치를 담그는 특별 공연은 그랬다. 그렇게 ‘작이’가 담그던 열무김치는 싱그럽고 담백했다.

‘작이’는 열무가 절여지는 동안 물 폭탄을 쏘면서 마당을 구석구석 청소하곤 했다. ‘작이’는 외로운 마음을 물로 씻어 내버리면서 달래었는지도 모르겠다. ‘작이’에게는 크고 작은 생각하기 싫은 티끌들이 많았을지 모른다. 어린 나이에 집안의 생계를 도와야 했던 꼬마 ‘작이’. 고향을 떠나와 번잡한 서울에서 겁 없이 시작했던 더부살이 직장이 힘들었을 것이다. 때로는 외롭고 슬펐을 것이다.

‘작이’. ‘작이’는 내가 어렸을 때 우리와 함께 살던 가사도우미였다. 작은아이라는 말을 줄여서 ‘작이’라 불렀다.

내가 어렸을 때, 한국은 가난했다. 농촌은 더 가난했다. 작히 부유하다고 할 수 없는 우리 집 같은 가정에서도 도우미를 쓰며 살았다. 도시 사람들은 ‘작이’네 고향 사람들보다 상대적으로 부자였다. 1960년대에는 한 집 건너 가사도우미를 고용하던 시대였다. 자신의 주린 배를 채울 수 있고, 무능한 부모에게 쥐꼬리만 한 모은 번 돈을 보내어 식구들을 먹여 살릴 방법이라고는 도우미가 되는 길밖에 없었다. 도우미 고용주를 입맛에 맞게 선별, 선택할 옵션은 상상조차도 할 수 없던 시절이었다. 열악한 환경도 마다하지 않고 일했다는 연구 보고서를 읽었다. 그 보고서에는 가사도우미 소녀들의 한 달 월급이 주인아저씨 담뱃값 정도였다고 한다. ‘작이’네를 도와주지 못했던 내 부모님들의 가정, 내 모국의 슬픈 역사이다.

한국을 떠난지 거의 반세기가 되어간다. 긴 세월이 흘렀건만, 여전히 나는 김치를 먹고, 김치를 좋아하고, ‘작이’가 가르쳐준 대로 김치를 담근다. 내 나이 도래이었던 ‘작이’도 나처럼 할머니가 되었겠지. 이젠 편히 살고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손주들에게 맛깔나는 여름 열무김치를 담가 먹이면서, 어려서 견디어내든 힘들었고 외로웠던 여름날들을 이야기해 주겠지. ‘작이’는, 그러면서, 제 손주들을 축복해 줄 것이다.

장애물 경기

장 교수님*, 벼르고 벼르던 분갈이를 했습니다. 실내에서 근근히 목숨을 이어왔던 이 식물의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만 아열대 과(科)에 속해서 일 년 내내 푸르고, 잎이 두껍고, 길쭉하고 단단합니다. 잎은 가을에만 지지 않고, 때가 되면 누렇게 생명을 잃어갑니다. 사람과는 달리, 세상 빛을 본 순서대로 생명을 돌려보냅니다. 숨 없는 잎은 그냥 몸체에 오랫동안 붙어 있지요. 나무라고 부르기에는 작고, 풀도 아니고, 꽃을 피우지 않기에 화초라고 부를 수가 없네요.

이 식물에 대해서 장황하게 이야기를 늘어놓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 식물은 고통의 삶을 끈질기게 잘 버티었어요. 생명의 신비로운 힘에 대해서 숙고하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교수님의 뜻깊었던 생애의 시작 부분이 이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서 연관을 짓게 된 것 같습니다. 나에게 병이라면 병일 수도 있는, 사고비약(思考飛躍: flight of idea) 증상이 발동한 듯 합니다. 제 생각이 외람되다면, 용서해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이 플랜트가 메마른 흙 속에 뿌리를 박고, 갈증을 참으면서 사 반세기를 살아 남은 흔적은 꺼끌꺼글하고 울퉁불퉁한 거친 표면, 굽고, 뒤틀린 줄기, 하늘 대신 땅을 보고 있는 머리채에서 볼 수 있지요. 큰 딸아이에게서 나는 이 식물을 입양했습니다. 입양된 내 집에서도 오늘 분갈이를 받을 때까지 힘겹게 몇 해를 더 지났습니다. 분갈이라는 밀렸던 숙제를 하고 나니, 나는 비로소 통회의 고백성사(告白聖事)를 하고, 보속(補贖)을 끝낸 기분입니다. 이 플랜트가 인생은 ‘장애물 경기’라고 표현했던 당신을 만나보라고 나에게 말합니다.

이 플랜트가 인도 한 곳은, 은퇴하면 읽는다고 쌓아 둔 책더미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그대 만난 뒤 삶에 눈떴네’라는 책이 눈에 띄었습니다. 소아암 전문의였던 레이첼 나오미 레멘 박사가 쓴 ‘Kitchen Table Wisdom’을 예수회 신부이자 서강대 교수, 당신이 암으로 입원해 있을 당시 원목 사제로 활동하던 당신의 후배인 류해욱 신부가 번역한 책이지요. 책을 읽으면서, 내가 몰랐던 당신에게, 이제야 책을 통해서 조금 알게 된 당신에게, 세상은 당신을 절대로 잊을 수 없고,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졌습니다.

왠지 아십니까? 이 책은 당신이 쓴 것도, 당신이 번역한 것도 아니지만, 당신의 혼이 듬뿍 묻어 있기 때문이어요. 레멘 박사가 쓴 원서에는 이 한국어 번역본의 서문에 언급된 당신에 관한 이야기가 없지요. 책이 한국에서 출판되고 나서 3년이 지난 후, 당신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는 당신에 대해서 알고 싶어졌습니다. 인터넷에서 당신에 대한 글, 사진들을 찾아 읽었고, 보았습니다. 소아마비라는 전염병이 하필이면 한 다리가 아닌, 두 다리 모두를 강타했는지 안타깝더라고요. 그런 경우는 드문데 말입니다. 신체장애가 없는 사람들은 두 번 생각하지 않고 하는 일상의 일들, 학교 활동이 도움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었겠지요. 당신의 발이 되어 화장실까지도 안아다 주셨다던 어머님, 신체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상급학교 입학원서조차 거부당하였을 때마다 필사적인 노력을 하시었고 방파제가 되어 주셨다던 서울대 영문과 교수이었던 아버님, 사회정의가 없는 미개했던 한국 사회와 한국 교육계의 관습을 과감히 깨 주신 파란 눈의 서강대학 영문과 학과장 (고) 브르닉 신부님(미국명: Jerome E. Brewing), 그리고 앞서가던 서강대학이야말로 당신이 장애물 경기를 훌륭히 해 낼 수 있게 함께 했습니다. 무엇보다, 선수이었던 당신은 횃불을 들고, 멋있게 결승선을 통과했습니다. 박수를 보냅니다!

이쯤에서 나는 다음 이야기를 꼭 쓰고 싶습니다. 정의나 평등에 둔감했던 교육자들, 그들의 군집단체인 교육계의 미개함과 그들이 행하였던 행패에 분노하는 나 자신을 봅니다. 신체장애를 가졌다고 입학원서조차 제출할 수 없었던 한국의 씨스템, 교육자로서 그런 부조리함을 스스로 교정하지 않았던 비겁한 사람들의 온상이었던 나의 모국 한국이었습니다. 작은 예를 들어봅니다. 서강대학에서 체육이 필수 교양 과목이었던 당시, 두 다리를 쓸 수 없는 당신에게 체육은 할 수 없으니, 앉아서 수업을 참관하여야 학점을 준다고 했다면서요? 그런데 체육관은 어디에 있었나요? 교정 외곽, 비탈 위에 있다 했습니다. 비 오는 날에, 층계도 없는 미끄러운 둔덕을 목발에 의지해서 땀흘리며 올라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다가, 나도, 브르닉 신부님처럼 울분했고, 신부님처럼 울었습니다.

척박한 환경을 겪어내며 살아 준 나의 플랜트가 저를 침묵하게 합니다. 희망과 용기를 날렀던 전사(戰士)이었던 당신은 서강대학 영문과 교수이자, 학자, 수필가로서 차세대 후배들에게 퍼즐을 맞추는 지혜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나도 이 길고 험한 장애물 경기에서 우승해서 승리의 횃불을 높이 처들고, 언젠가 내 고향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곧 준비를 시작하려 합니다.

*(고) 장 영희 (1952-2009) 서강대학교 영문과 교수, 수필가

이 수필은 중앙일보 ‘문예난’ 에 2021년 10월 15일 발표되었다.

꽃다발

“이름이 뭐예요?”

“제니퍼예요.”

“이름이 예쁘네요. 얼굴도 배우 제니퍼 존스를 닮았어요!”

오래전 ‘별 다방’ 패스트 푸드 연쇄점에서 마주치곤 했던 홈리스 아줌마의 이름은 제니퍼였다. 생기면 무엇이든 먹어 두어야 했던 제니퍼는, 그래서 그랬는지, 뚱뚱했다. 제니퍼에게 배우 제니퍼 존스를 닮았다고 한 것은 그녀가 좋은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하였으면 하는 마음에서 한 소리였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제니퍼 존스라는 배우를 알 것 같은 나이로 보이지 않았다. 보통 누울 자리 없이, 떠돌며 고생하며 살아왔을 여인은 제 나이 보다 늙어 보였을 것이다.

연쇄점은 성당 건너편 쇼핑몰 한구석에 있었다. 토요일 새벽이면 몇 안 되는 신자들이 새 성전 건립에 지향을 두고 기도 모임을 하던 때였다. 많은 한인 이민 공동체들은 한국어, 한국문화를 나눌 수 있는 이미 꾸며진 공간이 있는 건물을 마련하려 애쓰지만, 매물로 나온 건물이 드물고, 있다해도, 엄청난 재정적인 밑받침이 필요했다. 마침 어느 미국 노동단체가 강당으로 쓰던 건물을 싸게 사들이고, 이곳에 제대를 꾸며 미사를 봉헌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동체는 교회다운 교회를 갖고 싶어 했다.

새벽 기도가 끝나면 연쇄점에서 아침 식사를 함께하곤 했다. 연쇄점 현판은 빨간 배경에 흰 글씨로 식당 이름이 쓰여 있고, 한쪽 귀퉁이에 노란색 별이 붙어 있어서, 우리는 그곳을 ‘별 다방’이라 불렀다. 커피를 마시면서 음악 감상을 하던 ‘다방’에 익숙했던 디아스포라들이었던지라, 우리들은 ‘다방’이라는 말 속에 숨어있는 향수(鄕愁)를 잊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커피 맛보다, 커피 향이 더 좋은 ‘별 다방’의 커피 생각은 기도 중 분심이었다. ‘제사보다 젯밥’에 정신이 가 있었던 셈이다. 그리고 새벽기도는 나에게 무척 생소한 것이었다. 성지순례를 하러 가면 모르겠지만, 내가 자랄 때, 가톨릭교회에서 새벽에 모여 함께 기도하는 경우는 없었기 때문이다. 제니퍼는 나처럼 커피 향이 나는 ‘별 다방’을 애용하는 토요일 조식 단골손님이었다. 제니퍼가 다른 날에도 ‘별 다방’을 이용하는지는 알지 못한다. 주 중 새벽에 내가 성당에 가는 때는 없었기 때문이다. 늘 지나치기만 하다가, 처음으로 그날 아침에 말을 건네었다.

제니퍼와 말을 섞은 새벽은 꽤 쌀쌀했다. 날씨가 온유한 아열대 지방 엘에이이지만, 겨울철 새벽을 지난 아침은 섭씨 15도 위아래를 오르내린다. 적당히, 기분 나쁘게 으슬으슬하다. 내가 보았던 그녀는 그때까지 누구와 대화 하는 적이 없었다. 항상 혼자였다. 자신의 모든 재산을 쇼핑카트에 담아 담요로 덮고, 이동하곤 했다.

제니퍼에게 ‘별 다방’은 임시 주택이었다. 그곳 화장실을 이용하여 기본적인 생리적 요구를 해결했다. 점원이나 고객이 제니퍼를 방해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간혹 엘에이 타임스 신문을 테이블에 늘어놓고 여기저기 훑어보는 모습도 보았는데, 보기 좋았다.

얼굴은 희고 맑았고, 통통한 뺨이 늘 붉었다. 두 발과 일부 노출된 다리는 항상 부어 있었다. 두 다리 피부가 팽팽히 스트레치 되어 있어, 조금만 건드려도 흠집이 날 것처럼 아슬아슬해 보였다. 미니 홍이슬 포도 모양으로 고인 림프액종도 여기저기 있었는데, 다치면 금방 터질 것 같았다. 부어 있는 발가락 주름 사이에 낀 회색 먼지와 발톱 밑에서 빠꿈이 세상을 내다보는 새까만 때가 걱정스러웠다. 염증이라도 생기면, 상향성 림프염이 다리 전체로 퍼지고, 면역력이 낮을 홈리스인 그녀에게는 치명적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백혈병이 있었던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장미 가시에 찔려 림프염을 이기지 못하고, 폐혈증으로 죽은 것은 잘 알려져있지 않은가!

한동안 보이지 않았던 제니퍼 아줌마가 어느 날 아침 ‘별 다방’에 앉아 신문을 뒤적이고 있었다. 반가웠다. 그녀에게 그동안 어디 갔었느냐고 물었다. 심장과 폐에 물이 고여서 카운티 시립병원에 입원했었다고 말했다. 종아리와 발에 있던 부종도 빠졌고,많이 여위었지만, 편안해 보였다.

그렇다. 우리는 기본적 인권중의 하나인 쉼터에 대해서 별 생각 없이 살아간다. 우리의 육체, 정신, 감성은 하루라는 싸이클을 쉼터에서 쉬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매사가 편한 우리는 우리에게 쉼터가 있다는 특권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하루 일을 끝내고, 스트레스를 받아 준 뻣뻣하고 단단해진 등판을 평평한 바닥에 누이고, 쉴 수 있고, 잠을 잘 수 있는 것은 큰 축복이다. 집이 없고, 무슨 이유에서든지 가족이 없는 노숙자들은 등을 누일 따뜻한 바닥이 없다. 배고픔, 추위나 더위를 이기려고 쉬지 않고 걸어서 이동한다. 그러니 다리에 수종이 생기고, 수종은 심장과 폐에 문제를 일으킨다. 끼니를 기약할 수 없으니까 아무것이나 생기면 먹어 두곤 한다. 그래서 몸무게는 조절될 수 없다. 건강이라는 말은 이런 노숙자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사치스러운 단어일 뿐이다.

부활절을 지낸 다음 토요일 또 그녀를 ‘별 다방’에서 보았다. 그녀의 테이블 위에는 엘에이 타임즈가 널려져 있었고 그녀는 화장하고 있었다. 하늘색 아이섀도, 분홍색 입 연지를 발르면서 말이다. 예뻤다. 그때 어디선가 빼빼 마른 키다리 아저씨가 불쑥 나타났다. 청바지에 흰 티셔츠를 입은 백인 아저씨는 활짝 웃으면서 몸 뒤에 숨겨 갖고 있던 꽃다발을 제니퍼에게 내밀었다. 꽃들이 약간 시들어 보였다. 여기저기에서 부활절 때 잠깐 쓰고 버려진 꽃들을 모아 만든 것 같았다. 꽃을 건네는 아저씨와 꽃다발을 받는 제니퍼 모두가 행복해 보였다. 두 남녀가 그려진 한 폭의 그림이었다.

오 년 후 새 성전은 건립되었다. 건강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세상으로 나왔던 제니퍼, 꽃다발을 주던 그리고 받던 노숙자 아저씨와 제니퍼는 ‘별 다방’에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로스 안젤레스에서 노숙자로 살다가 이 세상을 등지는 여자들의 평균 수명이 48세이고 남자들은 51세라고 한다. 나는 제니퍼와 꽃을 주던 아저씨가 어디로 떠나갔는지 알 것 같았다.

누군가 노숙자들을 두고 이런 말을 했다.

‘살았을 때 쉴 곳이 없던 그들은,

죽었을 때 영원히 머무를 곳이 있다네….’

다발 속 꽃잎들이 훌훌 떨어져 떠났던 것처럼, 그녀도 백인 아저씨도 영원히 머물 곳으로 떠났을 것이다. 부활절 그녀에게 증정됐던 꽃다발이 그녀 가슴에 안겨 있다. 아저씨는 보이지 않는다. 산들바람을 맞으면서 달려가는 그녀가 보인다.

떠나는 사람들과 남는 사람들

죽음이 요즘처럼 대중에게 가까이 있었던 적은 없었다. 죽음을 바라보는 모습이나 떠난 이들을 애도하는 모습이 예전과 다르다. 죽은 이를 잡고 비통해 우는 모습은 보기 드물다. 죽음이 흔하고 많아서 또는 감염의 우려 때문에 죽어가는 친지들에게서 멀리하는 것인가? 전쟁터에서는 닥치는 위험 때문에 죽음을 놓고 슬퍼할 시간을 갖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판대믹이 덮치고 있는 지금, 그런 의문이 들었다.

 

뉴잉글랜드 저널 오브 매디신(NEJM)의 사설에 판대믹을 겪는 의료진, 일반인들의 생각과 태도가 잘 정리되어 있기에 나누고 싶다. 줄여서 표현해 본다.

 

‘전염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은 위험해 보인다. 그래서 살아있는 우리는 전염병에 위협을 느낀다. 그들을 만질 수 없다. 무섭다. 죽음으로 향한 벼랑 끝에 서 있는 사람들은 옆에서 바라보고 있는 우리를 도덕적으로 무력하게 만든다.’라고 표현했다, 뉴스 미디어는 이탈리아와 이란에서 거대한 무덤 구덩이에 한꺼번에 많은 사체를 묻는 모습을 보도했다. 일반인들은 감성적으로 점점 더 솔직해지는 반면 철면피가 되어가고 있는가?

 

모든 죽음은 혼자 겪어내야 하는 여정이라고 해도 죽는 이들의 차원에서 보면 죽음은 외롭다. 죽음에 차이가 있다면 준비된 죽음인지 아닌지 일 것이다. 아니, 준비라고 표현하기보다는 예상된 것인지 아닌지의 차이가 우선일 것이겠다.

 

지금 같은 판대믹 때는 예외이지만, 의사라고 죽음을 많이 보지는 않는다. 예전 같지 않아서 종양학 전문의사들은 말기의 환자들을 자신이 챙기지 않고 호스피스 전문인들에게 의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환자들의 마지막 순간을 보지 못하는 것이 상례이다. 일상생활의 기능을 잃어 갈 때, 다시 말해서 종말이 가까워져 오면, 완치의 개념을 버리고 증상 완화에 중점을 두는 캐어가 호스피스이다. 통계적으로 호스피스에 의뢰된 환자들은 의뢰되지 않았던 환자들보다 며칠 더 그리고 편안하게 산다. 그동안 환자와 가족들은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에서 어느 정도 해방되기도 한다.

 

내가 처음으로 환자가 죽는 과정을 본 것은 인턴 생활을 시작한 지 한 달 되던 때였다. 우리는 백혈병을 앓고 있던 대학생을 살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항암치료제가 듣지 않았다. 항암치료제는 암세포를 죽이지 못하고 정상 세포와 면역에 중요한 백혈구를 파괴하고 있었다. 정맥주사 몇 개, 산소 호흡기, 소변 폴리 등 많은 의료 기구들이 그의 몸에 연결되어 있었다. 내 나이 또래의 형이라는 젊은이가 그의 병실에 상주하면서 그를 돌보고 있었다. 한국은 그 당시 미국과는 달리 입원환자의 수발을 가족들이 들어주어야 하는 시스템이었다.

실상 나는 그 환자가 숨을 거두던 겨울 저녁에 그 환자 방에 있지 않았다. 선배 남자 레지던트가 나를 정서적 차원에서 보호하려고 방에서 내보낸 것이었다. 내가 여자 인턴이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 선배 남자 레지던트에게는 자연스러운 배려이었을 것이다. 지금 같으면 성차별한다고 탄원서를 쓰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간호 스테이션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환자가 운명한 지 십여 분이 지난 다음, 환자의 형은 나를 붙들고 절규했다.

“왜 세상은 이렇게 불공평합니까?”

“…….”

나는 답을 하지 못했다. 지금도 나는 정답을 모른다.

 

이제 이 코비드-19는 아프리카 대륙을 휩쓸 것으로 예측된다. 에이즈, 말라리아, 결핵, 에볼라로 이미 많은 상처를 받은 아프리카는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큰 타격을 받을 것이다. 이 시점에서 예방주사는 기약이 없는 상태이니 첫째는 이미 겪고 있는 우리와 같은 차원의 예방이고, 그다음은 병원의 설비 준비이다. 케냐를 예를 들어 보면, 전국 5천만 인구에 겨우 200개의 중환자실(미국은 십만 명에 34개)밖에 없다는 것이다.

 

떠난 사람들이 세상에 남기고 간 그들의 영혼 없는 몸, 소유물의 마지막 정리를 남은 이들이 해야 한다는 철칙을 생각해 보고 있다. 내가 떠나면 나의 흔적 또한 깨끗이 지우고 정리해 줄 사람이 누구인가를 숙고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