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름은 태양

‘45세 남성 · 4· 첫 발생 장기 : 모름 · 넓적다리뼈 골절 사흘 전 핀으로 고정했음 · 극심한 아픔을 호소함 · 방사선 치료 가능 여부를 의뢰함.’

의뢰되어 온 남자 환자는 휠체어에 앉아 진찰실에서 의사가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에겐 그가 한국인으로 보였다. 햇볕에 그을린 진흙 색 피부, 벌어진 어깨, 소매 없는 러닝셔츠 상의에 반바지 차림으로 앉아 있었다. 무릎 위쪽까지 내려오는 반바지 바짓가랑이 한쪽이 터질 듯이 팽팽하였다. 넓적다리를 동여맨 하얀 붕대가 바지 틈새로 보였다. 수술받은 쪽 다리 종아리와 발은 퉁퉁 부어있고 일본식 조리 슬리퍼를 신은 맨발에는 자르지 않은 발톱 밑에 검은 때가 박혀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야외에서 일하는 노동자 같았다. 표정이 없었다. 양 볼과 목은 늘어져 있었다. 굵은 주름, 튀어나온 입술, 내리 앉은 입매, 면도하지 않아 들쑥날쑥 자란 희끗희끗한 턱수염 때문인지 그는 45세가 아닌 70세로 보였다.

혹시 한국분이세요?”

실례인 줄 알면서도 나는 대뜸 그에게 한국어로 물었다. 미국에서는 상대방의 국적이나 인종을 확인하지 않고 영어가 아닌 외국어로 말을 걸면 실례가 된다. 그날 나는 평소의 내 의례대로 환자를 대하지 못했다. 보통은 아무개 씨, 나는 의사 아무개입니다.’라고 먼저 나를 소개하면서 악수하고, 면담을 시작한다.

“No, I am not a Korean. Are you a Korean, Doctor?”

내 짐작대로 그는 내가 한국말로 첫마디를 건넸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계속해서 영어로 말했다.

“I was born in Korea. My American folks adopted me when I was three years old.”

“Do you understand Korean though?”

“No, I do not know Korean.”

“My apologies that I spoke in Korean.”

그날 내 클리닉에는 많은 환자가 약속되어 있었고 제시간에 봐 주어야 할 환자들이 자꾸 뒤로 밀리는 판이어서 나는 서두르고 있었다. 나는 의뢰서에 적힌 부분만 대강 훑어보고 급히 진찰실로 들어갔던 터였다. 환자와 대면하기 전에 차트에 쓰인 사항을 꼼꼼히 읽어 보았더라면 그의 이름이 한국 이름이 아닌 것과 가족관계를 쓰는 칸이 비어있다는 것을 인지했을 것이었다.

챠트에 그의 이름은 타일러(Tyler)’라고 쓰여 있었다. 그의 성()A로 시작되는 유대계통의 성씨였다. 타일러라는 이름은 영국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다. 그 어원은 타일을 붙이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왔다고 한다. 그의 가족력 칸이 비어있는 것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나는 타일러 씨에게 언제부터 아팠는지, 어떻게 입원하게 되었는지 물었다. 그의 대답은 짧고 퉁명스러웠다. 그를 낳은 생모와 생부, 친척들이 걸린 병에 대해서 알고 있는지 물을 차례가 되었다.

혹시 양부모님께서 생부모님에 관해서 이야기해 준 적이 있나요?”

…….”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혹시 양부모님은 타일러 씨의 출생에 대한 정보를 갖고 계셨나요?”

모릅니다.”

그는 잘라 말했다.

다른 친척들에 대한 병력도 들은 적이 없으신가요?”

전혀 없습니다.”

…….”

제가 알고 있는 것은 나를 낳은 생모가 십 대, 미혼모이었다는 것뿐입니다.”

타일러 씨는 내가 한국 출신 이민자라는 것을 알았지만 반가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한국계 환자가 드물게 오는 병원이었다. 대개 평범하고 순탄한 삶을 사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내가 한국 이민자 출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한국에 관한 관심을 보여 주는 것이 보통이었다. 나의 개인사에 관해서 궁금해하기도 했다. 한국이라는 말을 들으면 과거에 가난한 나라라거나 고아 수출국으로 사촌이 고아를 입양하였다거나 삼촌이 육이오 전쟁 때 참전했던 나라라고 말하는 것을 종종 들었다. 별로 유쾌하지 않았지만, 그 내용은 어느 정도 사실이던 때였다. 타일러 씨의 양아버지는 당시 하와이에 살고 있던 군인이었다. 한국에 주둔한 적은 없었다고 한다. 군인가정으로 하와이에 살았으므로 특별히 환경적 요소로는 마음 쓰이는 점은 없었다. 그러나 양부모, 양부모 친척들의 병력에 대해서는 물을 필요가 없었다. 그가 겪고 있는 암과 생물학적인 관련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대답은 짧고 퉁명스러웠다. 툭툭거리는 말투여서 화가 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의 마음은 읽을 수가 없었다. 말 없는 환자들이 그렇듯이 타일러 씨도 속으로 분노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또 나야? 왜 내가 암에 걸려야 해? 인생은 너무나 불공평해!’ 만약 그가 그런 분노를 누르고 있다면 그는 치료를 거부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노파심이 들었다. 나는 권하는 치료를 내동댕이치는 환자들을 심심치 않게 보아왔다. 대개 분노를 누르고 살아왔거나 스트레스를 풀지 못하고 살아온 환자들이었다. 가까운 부모 또는 배우자를 향한 분노가 대부분 이었다. 일종의 복수라고 생각하고 하는 행위이다. 간혹 자긍심이 없는 환자들도 치료받는 것을 거부한다. 자신이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굳게 믿는 사람들이다. 타일러 씨를 보면서 내가 전공의 때 만났던 어떤 여자 환자가 기억났다. 그 여자 환자는 자기는 암 치료를 받을 가치가 없다고 치료를 거부했다. 아버지를 무서워했던 그녀는 공포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어 무진히 노력했지만, 아버지의 반복되는 힐난은 결국 그녀가 참으로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확신시켰던 것이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 50세가 넘었는데도 머리에 깊이 새겨진 비하된 자신에 대한 열등감과 공포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었다.

치료를 거부하는 환자를 많이 본 곳이 내가 전공의를 하던 뉴욕주립대학 업스테이트 메디컬 센터였다. 시라큐스에 있는 그 대학병원에는 꽤 알려진 종양 방사선학 전공의프로그램이 있었다. 비교적 백인 위주의 시대였던 1970년대에 나는 도미했다. 미국의 대학병원에서 세계 최고의 의학 수련을 받고 귀국해서 후배양성에 전념할 수 있다는 것은 매력적인 아이디어이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많은 의대생과 의사들이 도미 준비를 하는 것이 유행처럼 의학계를 지배하고 있었다. 한국의 의학은 발전하는 중이었고 한국은 가난했다. 그래서 나는 도미했지만 잠자는 시간과 집에 있는 두세 시간을 빼고 영어만 쓰는 나날은 외롭고 힘들었다. 생소하기만 했던 미국의 의료 시스템을 익히고 새로운 의학상식을 흡수해야 하는 스트레스는 컸다. 영어에 익숙하지 않아 이해력이 낮았고 내가 쓸 수 있는 어휘는 적어서 세 살배기 어린이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환자들이 하는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고 대충 넘어가는 경우도 흔했다. 교수님에게 환자에 대한 병력을 보고해야 하는데 난감했던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뿐인가? 모든 매개체는 영어로만 전달되고 있었다. 그 당시 한글로 된 신문은 시라큐스 까지 배달이 되지 않았고 한국어 라디오, 텔레비전 방송은 그곳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한국에 대한 뉴스는 친구를 통해서 전화로 듣거나, 가끔 미국 방송국에서 다루어 주지 않는 한 알 수 없었다. 또 병원 전공의 식사 메뉴는 어떠했나. 샐러드, 짓이긴 감자, 또는 감자튀김, 밍밍한 미트 로프나 소금만 들어간 동그랑땡이 자주 반복돼서 서브 되었다. 먹은 후에도 먹은 것 같지 않아 늘 허기가 지었다. 된장국, 총각김치가 너무도 그리웠다. 시라큐스에는 외식을 할 만한 동양음식점이라고는 중국집이 하나 있었지만 내가 한국에서 먹던 스타일의 매콤한 중국 음식을 만들어 내지 않았다. 한국식품점은 물론 없었다. 김치가 먹고 싶어서 배추처럼 단단한 채소라고 찾아낸 것이 브로콜리였다. 브로콜리 김치는 실패로 끝났다. 가난했던 유학생 신분으로 잠깐이라도 한국을 다녀올 수 있는 처지는 더더욱 아니었다. 한국은 멀고 먼, 갈 수 없는 그리운 내 고국이었다. 나는 우울했다.

뉴욕 같은 대도시가 아닌 시라큐스에 가서 전공의과정을 하게 된 것이 후회되었다. 내가 그곳에 가게 된 것에는 나의 무지함이 한몫했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있던 때가 아니었다. 미 전국의 병원에 대한 정보는 삼백 페이지에 달하는 책으로 출판되고, 이 책은 대학교 도서실에서 빌려 보아야 했다. 귀찮은 일은 피해 가고 결정은 빨리하는 성격 때문에 벌어진 실수로 나는 시라큐스에 가게 되었던 셈이다. 적어도 미국 지도를 보고 지원서에 넣을 도시들을 찾아보았어야 했는데, 점검과정을 생략하고 뉴욕주 병원들은 뉴욕시와 가까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에 의존해서 병원지망 원서를 제출했던 곳이었다.

미국은 그때나 지금이나 71일에 전공의프로그램이 시작된다. 도착한 시라큐스는 후덥지근하고 흐렸다. 첫날부터 시라큐스는 맘에 들지 않았다. 그곳에는 의과대학 친구도 한국인 친지도 없었다. 시라큐스는 뉴욕주의 북쪽 지역 업스테이트에 있는 도시로 뉴욕시에서 7시간 정도 운전해야 도착할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한국에서 온 친구들을 만나러 자주 왕복하기에는 먼 거리였다.

그뿐 아니라 기후조차 맘에 들지 않았다. 일 년에 겨우 160일 정도가 맑을 뿐이니 기후에 의한 SAD (Seasonal Affected Disorder)라 불리는 우울증이 생기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해였던가, 옥상에서 한 전공의가 뛰어내려 자살한 겨울도 있었다.

맘에 들지 않던 시라큐스 날씨, 한국이 그리워 때로는 슬펐던 도시 생활에서 만났던 많은 사람 중에, 암 치료를 마다하던 몇몇 환자들에게서 삶의 여러 양상을 배웠다. 표면에 드러나지 않고 보호막이 쳐 있는 가정이라는 공동체, 사랑을 실행하는 텃밭이라는 가정 안에서 아이들은 의외로 트라우마를 받기도 하고, 아픔의 생채기가 없어지지 않아 흔적을 남기는 것을 보았다.

나는 타일러 씨가 아팠던 과거만을 보지 말고 오늘을 살고 앞날을 보아 주기를 바랐다. 남아 있는 시간을 다시 걸을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몰두했다. 많은 말기 환자들은 죽음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을 안다. 안다고 말하지 않을 뿐이다. 타일러 씨도 알고 있을 것 같았다. 그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고 싶었다. 타일러 씨의 마음에 평화가 오면 그는 경계심을 내려놓고 나를 위시한 주위의 간호사들, 테크니션들을 신뢰하고 좋은 상호관계를 만들 것이었다.

타일러 씨에게 그가 당시 겪고 있던 아픔의 정도, 아픈 부위, 먹고 있는 진통제 등에 관해 묻고 그를 조심스레 그리고 이번에는 충분한 마음의 여유를 갖고 진찰하였다. 진찰 후, 타일러 씨와 그의 부인을 의사 면접실로 초대하고 탁상을 가운데 두고 서로 마주 앉았다. 앞으로 받을 방사선 치료에 관해서 설명했다.

타일러 씨, 방사선 치료가 성공적으로 골절 부위를 아물게 하면 걸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생명이 연장되지는 못합니다.”

그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슬픔도 역정도 보여 주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의 부인이 물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살 수 있는지요?”

확실히 알 수는 없습니다만 이런 경우 삼 개월에서 반년 정도 삽니다.”

환자들의 종말을 알려야 하는 일은 의사들의 의무 중의 하나이지만 이러한 의무를 좋아하는 의사는 없다. 방사선 치료를 위해 입원할 이유가 없다는 것과 살아오던 익숙한 환경에서 지나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견해도 주었다. 그의 방사선 치료는 매일 하루에 한 번씩 통원해서 받으면 되는 것이고 정작 방사선이 쪼여지는 치료시간은 10분도 되지 않고, 부작용이 거의 없다는 것도 알려주었다. 그의 아내가 걱정하는 구토는 없다고 설명해 주었다. 내 설명을 듣고 있던 타일러 씨는 느닷없이 내게 질문했다.

왜 제게 가족력에 관해서 물어보았는지 궁금합니다.”

발암 원인을 찾아내는 데 도움이 될 때가 있습니다. 빠른 진단을 위해서 테스트의 방향을 잡아주기도 하고요. 개발되고 있는 실험 중인 약을 쓸 수 있는지도 알게 되는 경우가 있어요.”

가족력을 아는 것은 환자의 병을 알고 치료하는데 필수적인 부분이라고 보면 된다. 미스터리의 마지막 퍼즐 조각을 맞추고 완벽한 퍼즐의 형태를 완성할 수 있을 수도 있다. 특히 유전인자를 물려받아 생긴 병으로 의심될 때는 DNA에 암세포 추적 물질을 달아서 하는 치료 방법도 있고 미래를 준비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갖게 되어 도움이 된다.

타일러 씨의 병은 유전적 요소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해 주었다.

내가 가족력의 연관성에 관해 설명하는 동안 두 손을 비비며 잠자코 듣던 타일러 씨는 천천히 입을 뗐다.

저는 세 살 때 한국에서 하와이에 사는 백인 부부에게 입양됐습니다. 일곱 살쯤 되었을 때, 양부모는 나를 포기했습니다. 그 후 나는 여러 집을 전전하면서 위탁양육을 받았지요.”

그는 그가 파양되었었던 때의 자신의 과거를 차분하게 말했다.

나는 내가 싫었어요. 나를 좋아하는 사람은 내 주위에 아무도 없었어요. 새로 가는 집은 언제나 어설펐지요. 새어머니, 새아버지 때로는 나보다 먼저 와 있는 위탁 아이들이 있기도 했어요.”

새로 만난 가족들과 친해지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겠네요.”

좀 친해지면 다른 집으로 옮겨졌어요. 제가 고등학교 일학년이 되었을 때 마지막으로 살던 집에서 그냥 나왔어요.”

마지막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도 돼요?”

별일은 없었어요. 그냥 다른 집으로 가게 스케쥴이 되어 있다고 했어요. 짐을 싸라고 하더라고요. 다시 또 다른 위탁 가정에 던져지는 것 같아, 끔찍했어요.”

그는 태어났을 때 한국에서 버려졌고 일곱 살 때 미국의 양부모에게서 또 한 번 내쳐졌던 셈이었다. 그는 모든 제재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벗어났지만, 그의 삶은 고되었다. 그가 열여섯 살 되던 해였다. 작히 갈 곳이 없던 그는 그때부터 떠돌이가 되어 노동판을 전전하면서 살았다. 이십 대 후반에 들어섰을 때 그는 길에서 함께 지내던 친구들과 하와이섬을 떠나 캘리포니아로 왔다고 했다.

파양이라니? 입양아는 물건이 아니다. 물건은 사고 다시 물리거나 바꿀 수 있다. 그러나 입양한다는 것은 부모 없는 아이를 내 아이로 받아들여 돌보아주고 보호하고 사랑을 나누면서 함께 살아가겠다는 법적 절차일 뿐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의미심장한 약속, 부모가 되겠다는 약속을 자신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낳은 자식에게 문제가 있다고, 말을 안 듣는다고 버릴 수 있는가? 버려서는 안 되고 또 법적으로 버릴 수 없다. 아이를 이해하려 노력하고 아이가 처신을 잘하지 못 하는 이유를 알아내고 싶어 한다. 교사와 면담도 한다. 아이의 친구들을 눈여겨본다. 때로는 부모 자신들이 가정상담소를 찾아 상담을 받기도 한다. 양부모라고 다를 것이 없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자식과 부모의 관계를 끊는 것을 허락하는 파양이라는 법적 제도는 참으로 비도덕적인 법이 아니고 무엇인가 싶었다.

“A”로 시작하는 성을 가진 부모가 법적으로 부모와 자식이라는 관계를 끊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양부모들은 무슨 이유에서든지 아이를 기를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때로는 정부 지원금이 생각보다 적을 때,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파양을 신청한다. 그 외에는 아이와의 원만하지 못한 관계 때문이다.

나는 그가 겪었을 어린 시절의 갈등과 고민을 상상했다.

미운 일곱 살로 접어들면서 고집이 나왔을 수 있어. 또 얼굴색이 노랗다고, 눈이 작다고 급우들에게 놀림을 받았나? 그 화풀이를 양부모에게 했을까? 자기가 부모를 닮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몹시 혼란이 왔을 거야. 내 얼굴은 왜 까맣지? 왜 내 코는 납작해?

밖에서 놀고 집에 돌아와 신발을 잘 닦지 않고 뛰어 들어오는 어린 타일러가 보인다. 양부모에게 야단을 맞는 어린 타일러, 반항하는 어린 타일러. 버려준 너를 데려와 키워주는 우리에게 감사할 줄도 모르는 녀석. 너 오늘은 저녁밥 먹을 수 없어. 네 방에 가서 나오지 마! 양 아빠가 바지 허리에서 굵은 가죽 혁대를 뽑는다……. 아냐, 아냐, 그렇지는 않았을 거야……. 좋게 생각하려 해도 분노가 서서히 내 가슴 깊은 곳에서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인간은 비도덕적인 법에 불복종할 도덕적인 책임이 있다.’라고 마틴 루서 킹 주니어 목사가 한 말이 생각났다. 그렇다. 얼마나 옳은 말인가!

미국에서는 입양된 아이들의 약 1~5%가 양부모에게서 포기 당한다고 한다. 그리되면 우선 정부 관리 기관으로 옮겨진다. 입양됐을 때 나이가 많을수록, 정서적으로 불안할수록, 또는 성적 학대를 받은 경험이 있는 아이들일수록 양부모와의 관계를 쉽게 이루지 못해서 결국 파양에 이르게 된다고 한다. 이런 과정을 겪은 아이들은 성장하여 어른이 되어서도 아무도 믿지 못하는 성격을 갖게 되기 쉽다. 타일러 씨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아무도 믿지 않게 되었다.

나는 나 자신이 싫었습니다.”

…….”

나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었어요. 세상에 미친 사람이나 나 같은 사람을 좋아했을 거예요.”

자신을 아껴 줄 수 없었고 자신을 괴롭혔다고 하였다. 마약도 하고 담배도 피웠지만 아무런 위안이 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거나, 생부나 생모를 찾고 싶지는 않았나요?”

아니요!”

그가 치료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방사선은 위험하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어떻게 치료에 쓸 수 있나요?”

암세포는 어리기 때문에 방사선에 약해요.”

암 치료에 쓰는 방법들을 찬찬히 말해 주었다. 그가 받았던 것 같은 수술이나, 앞으로 받을 방사선에 대해서 이해했다. 다시 걷게 되는 것이 치료의 목적임도 이해했다. 그는 방사선 치료를 받기로 동의했다. 치료를 두 주 동안 열 번으로 나누어서 하루에 많은 양의 방사선을 쪼여 주는 방법으로 가기로 했다. 치료 기간이 너무 길면 생명 연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 치료에 아까운 시간을 잃을 뿐이기 때문이었다. 나를 처음 본 날 그는 첫 치료를 받았다. 다음 치료 때부터는 나를 매일 볼 필요는 없고 치료 기술자, 간호사들이 돌봐 줄 것이라고도 일러 주고 헤어졌다.

그는 오래 살지 못할 것이었다. 며칠을 벌기 위해서 부작용이 심한 약물치료를 받는 것보다는 증상 완화에 초점을 맞추는 호스피스 치료가 그에게는 더 의미 있을 것이었다. 호스피스에서는 항암치료는 하지 않고 증상 치료만 한다. 만약 암 덩어리가 아프게 하면 진통제를 처방해 준다. 진통제 때문에 변비가 생길 수 있으니까 변비 예방약을 미리 주고, 입맛에 도움이 되는 합당한 약을 주기도 한다. 또 열량이 많이 들어 있는 주스를 권장해 주기도 한다. 종말 환자들은 음식을 씹는 것조차도 싫어하기 때문에 단백질과 필수 비타민이 들어 있는 음료수를 마시게 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환자를 굶어서 죽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타일러 씨와 그의 부인에게 호스피스 제도를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호스피스에 의뢰서를 보냈다. 종말 환자들만을 보는 정신과 서비스에도 의뢰서를 보내었다.

치료 시작 후 일주일쯤 지났을 때, 중간 치료 성과를 알아보려고 그를 다시 보았다. 아픔이 조금 나아졌고 정신과 의사도 보았다고 하면서 어느 정도 대화를 이어 갈 수 있었다. 고개를 돌려 방구석을 한참 보고 있던 타일러 씨가 말했다.

나는 나의 생모와 생부에 대해서 궁금해 졌습니다.”

그래요?”

나의 한국 성씨가 무엇이었는지 알고 싶어졌어요.”

입양기록에는 있었을지 모른다는 말도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의 뿌리를 찾을 시간이 없었다.

타일러 씨, 한국 이름을 만들어 보는 것이 어떻겠어요?”

좋습니다. 그 이름을 쓸 시간이 없겠지만요.”

이름은 타일러 (Tyler)이고 성()A로 시작되는 그의 이름을 놓고 재미있는 부분이 있다고 말을 꺼내었다. 타일러라는 한국말도 있는데 타이른다.’라는 동사로 쓰인다는 것을 말해 주었다. 말의 뜻도 설명해 주었다. 그렇지만 순수 한국말 타일러세 글자를 이름으로 쓰지는 않는다는 것도 이해시켜야 했다. 한국 이름은 성까지 합쳐서 대개 석 자로 되어 있고, 성은 그의 이름 ‘A’로 시작하는 것처럼 조상에게서 물려받는 것으로 한 글자라는 것, 이름은 대개 두 글자로서 부모나 친지가 지어 준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름은 뜻글자인 중국 글인 한문을 쓴다는 것도 알려 주었다. 좋은 뜻의 이름을 만들어 주기 위해 부모들이나 조부모들이 신경을 많이 쓴다고도 말해 주었다. 한국 풍속은 이름이 주는 뜻대로 인생을 살게 된다고 믿는다니까 그는 이해가 간다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모음, 자음의 한글 문법을 가르쳐 준다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남은 시간은 너무 짧았다. 우선 타일러의 이름이 ‘T()’로 시작하니까 티읕이 들어가는 첫 자를 생각해 보자고 제안했다. , , , , 툭 등의 소리를 낼 수 있는 글자를 우선 검토했다. , , 툭으로 시작되는 이름은 없는 것으로 기억되고 는 내 기억에 이라는 뜻이라서, ‘가 어떻겠냐고 물었더니 좋다고 했다. 이름에 들어가는 자도 여러 개의 한문글자가 있고 글자에 따라 다른 뜻이 있다. 쉽게 가는 것이 우선이어서 태양(太陽)’ ’, 영어로는 ‘sun’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을 제시했다. 그도 좋아했다.

남은 일은 그의 성을 만드는 일이었다. 그의 성씨가 A로 시작하는데 한국말로 소리를 내면 에이가 된다. ‘에이라고 두 자가 들어가는 성은 없다. 그래서 에이의 첫소리 (이응)’으로 찾아보기로 했다. 한국 성씨 중에 이, , , , , 윤 등이 있는데 태양을 집어넣어서 발음을 해 보라 했다.

이 태양, 오 태양, 유 태양, 육 태양, 예 태양, 윤 태양···. 이렇게요. 어때요?”

···, ···, ···, ···, ···, ······?”

여러 번 그는 소리 내서 반복했다.

윤태양이 맘에 들어요. 윤태양이 좋아요!”

조선 시대 때에는 양반, 무인, 상인 등의 계급제도가 있었고, 양반 계급은 부자로 살면서 정치적으로 세도가 컸다는 것과 덧붙여 윤 씨는 조선 시대 때 양반의 성씨였다니까 처음으로 그가 빙그레 웃었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양반제도가 있었던 500년 조선 시대 때 대여섯 명의 황후가 윤씨 성을 가졌었다는 이야기도 해 주었다. 마지막 황후 순종 효 황후는 나의 어릴 적 친구의 고모(aunt)였다는 것도 자랑삼아 말했다.

타일러 씨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는 조선의 마지막 황후가 있었을 때는 반세기도 더 전의 역사라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덧붙여 설명을 해 주는 것이 좋을 듯했다. 나의 친구는 황후 친오빠의 두 번째 부인에게서 태어난 막내이었다고 말해 주었다. 그리고 내가 태어났을 때의 이야기도 덧붙여 해 주었다. 나도 늦게 태어난 막둥이였다는 것과 내가 간접적으로 알게 된 당시의 상황을 말했다. 내 어머니가 40대 중반에 나를 임신했고, 낙태시키고 싶었지만 임신 중절의 방법이 없던 때여서 내가 태어나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어머니가 누군가에게 말하는 것을 내가 우연히 들어 알게 된 원하지 않았던 임신과 출생에 대한 비밀은 무척 충격이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사실 나는 반항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느 날 어머니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나는 배 안에 있던 인 줄 몰랐었어.

무슨 말이야?

를 낳고 나니까 가 바로 였어.

타일러 씨는 내 출생에 얽힌 이야기를 재미있어했다. 그리고 다시 빙그레 웃었다.

, 타일러 씨, 당신의 이름은 윤태양입니다!”

그날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다.

타일러 씨가 한국에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것도 짧은 기간 동안 말이다. 그때쯤, 곳곳에 구멍 난 그의 마음을 한국적인 것으로 채워줄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욕심이 생겼다. 치료를 끝내는 날 그에게 선물을 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이제 그는 한국, 한국적인 것, 한국 사람, 한국 의사가 불편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한인 타운에 가면 쉽게 한국에서 수입한 물건을 살 수 있겠지만, 그의 이름과 관련된 선물은 없을 것이었다. 궁리 끝에 하늘에 날리는 연(kite)에 그의 새 이름을 그려 넣어 윤태양의 특별한 연을 만들어 주기로 마음먹었다. 연은 세계 어느 나라에 가도 나이와 관계없이 아이, 어른 모두에게 사랑받는 놀이기구가 아닌가? 나라마다 연의 모습도 다르다. 윤태양 씨만의 특수한 연을 만들어 선물하면 그가 기뻐할 것 같았다. 다리가 아물고 걸을 수 있는 윤태양이 한국 그림이 그려지고 자기의 이름이 쓰인 연을 바람에 태워 멀리 날리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실천할 수 있는 일이라는 자신감이 들었다.

하얀색 한지로 앞면에는 한글로 내 이름은 윤태양이라고 파랑과 빨간색 마커 펜으로 쓰고 밑에는 한자로 윤(尹)(太)(陽) 세자를 까만색으로 토를 달아 장식했다. 뒷면에는 알록달록한 색동저고리 한복 입은 남아, 여아의 그림과 태양(sun)’을 뜻한다는 영어 주석을 쓴 종이를 오려서 붙였다. 한지는 얇아서 잉크가 퍼졌기 때문이었다. 연을 완성하고, 질기고 가벼운 긴 끈을 달았다. 연은 다이아몬드 모양이었고 꼬랑지 끝쪽에 같은 한지로 가늘고 긴, 맵시 나는 꼬리를 만들어 달았다. 하지만 마지막 치료를 받아야 하는 날 윤태양은 병원에 오지 않았다. 윤태양만의 연은 윤태양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삼 개월이 흐른 후, 호스피스 간호사에게서 이메일이 도착했다.

타일러 A 씨가 OOOO00OO00OO분에 운명한 것을 알립니다.”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호스피스 통고를 받고 난 지 몇 달 후 그의 아내는 짤막한 사연을 쓴 카드를 보내왔다. 그는 죽기 한 달 전부터 걸을 수 있었고, 그의 마지막 날들은 아프지 않고 편안했다는 내용과 함께.

윤태양 씨를 치료했던 때는 시라큐스에서 로스 안젤레스로 이사 온 지 7년 정도 지났을 때였다. 지금도 나는 로스앤젤레스에 살고 있다. 뉴욕 업스테이트와는 달리 나 같은 동양인들과 히스패닉, 흑인들이 많아 위축되지 않고 당당히 가슴을 펴고 활보할 수 있는 곳이다. 내가 합류한 메디컬 그룹 동료 의사들은 거의 백인들이다. 간호사들은 필리핀 사람들이 많고 테크니션들은 역시 백인이 많지만, 인종차별의 기색이 없다. 거의 반세기가 흐른 지금 미국은 다문화를 받아들이고 여러 외국말을 외국어 ‘foreign language’라고 하지 않고, 세계언어 월드 랭귀지(world language)’라고 할 정도로 바뀌었다. 정규 학교에 한국계, 비한국계, 한국계이지만 한국말을 못 하는 학생들에게 한국어 선택과목이 주어지는 중고등 학교도 전국에 2백 개에 육박하고 있다. 나도 자연스레 타국에서 온 백색 타 인종들과 유색 타 인종들에 대해서 알아가고 있다. 또 나의 모국인 한국에 대해서도 더 많은 관심을 두게 되었는데 그것은 윤태양과의 만남이 한몫을 했다고 생각된다. 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백인 양부모에게 입양되어 동양인이 별로 없던 미국 도시에서 삶을 시작했던 청년의 외롭고 힘들었던 짧은 생애는 내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 잊혀지지 않는다.

어느 누구의 태양이 될 수 없어 아팠던 윤태양, 짧게 있었던 지구라는 땅에서 태양을 찾아 헤맸던 윤태양, 보이지 않는 태양이었기에 자신을 짐짝처럼 구박하던 윤태양은 오늘도 구름 한 점 없는 로스 안젤레스의 푸른 하늘에서 태양으로 떠올라 온몸을 태우며 우리를 비춰 주고 있다. 윤태양은 태양을 찾지 못해 헤매었던 자신처럼, 또 ‘짐짝’이라 학대하던 아팠던 자기처럼 외로운 아이들의 가슴에 온몸을 아끼지 않고 따뜻한 볕을, 밝은 빛을 비춰 주고 있다.

제 22회(2020년) 해외동포재단 수상작이다.

미역 한 다발

“자, 모두 조용하그라!”

“…….”

“곧 부활절이 다가오니께, 예수님에 대한 글짓기를 해 볼까?”

중학교에 입학한 지 한 달쯤 지난 어느 날, 국어 선생님은 열댓 명 되는 급우들에게 누렇게 변한 오래된 갱지를 하나씩 나누어 주시며 말씀하셨어요.

나는 쓸 말이 없었어요. 나는 예수님을 알지 못했거든요.

그리고 나는 하느님을 믿지 않았어요.

우리 반 학생들이 갱지를 메꾸지 못하는 것을 보신 선생님은 마음을 바꾸셨어요.

“그냥 마음에 내키는 대로 아무 글이나 써 보그라.”

“…….”

‘눈을 감으라 하신다.

그러면 보인다고 하신다.

세상이 온통 까맣다.

아무것도 안 보인다.

할머니는 보인다고 하신다.

눈을 더 꼬~옥 감아 보라 하신다.

그래도, 그래도

하느님은 보이지 않는다.

엄마 얼굴이 보인다.’

나는 끄적인 작문 종이를 서둘러 선생님에게 드리고 빨리 교실을 빠져나왔어요. 왠지 나는 초등학교 시작 할 때부터 선생님들과 가까이 있는 것이 편하지 않았어요.

나는 경상북도 시골에 외할머니하고 살았어요. 일 학년 반 급우들뿐 아니라 전교생은 모두 밭에 붙어 있는 집에서 살았어요. 근방 도시에서 버스로 한 시간 남짓 들어와야 하는 곳이었어요. 한 학년에 한 반이 있는 조그만 학교였어요. 교장 선생님은 수녀님이었어요. 교장 선생님 말고도 영어 선생님, 수학 선생님 그리고 국어 선생님 이렇게 세 분이 더 계셨어요. 한 선생님이 두 학년을 담당하셨어요.

영어 선생님이 우리 반 담임이셨어요. 선생님은 우리 학교에 오시기 바로 전에 대학을 졸업했다고 했어요. 반 친구들이 선생님에게는 애인이 있다고 쑥덕거렸어요. 웃는 얼굴이 예뻤어요. 웃으면 덧니가 조금 보였어요.

작문을 지어내고 한 달포가 지난 어느 날, 담임 선생님은 방과 후에 나를 남으라 하셨어요. 참, 내 이름은 추석형(錫亨)이에요.

“추‧석‧형, 집에 엿 붙여 놓고 온 기~가? 학교 끝나면 우찌 그리 빨리 도망가노?”

“…….”

“석행이 식구는 몇 맹이고?”

선생님은 처음에만 나를 ‘석형’이라 부르셨고 그다음부터는 ‘석행’이라고 부르셨어요.

“하나요”

“하나?”

“누꼬?”

“외할무니요…”

“엄매랑 아부지 어디 계시노?”

“…….”

“서울 가셨나?”

“…….”

“무라 캤노?”

“아부지는 엄매가 나 낳기 전에 죽었다카데요.”

“뭐라꼬? 아부지가? 그럼 엄매는?”

“죽었에요.”

“뭐라켔노? 돌아가셨다고?”

“…….”

“……언제?”

“삼 년 전에요.”

내가 쓴 작문을 국어 선생님에게서 받아 읽으셨던 스물 몇 살 선생님은 말없이 한참을 창밖만 보고 계셨어요.

“석행아, 오늘은 그만 가그라. 할머니가 기다리시겠꼬망.”

학교가 있는 곳에 장터랑 작은 성당이 있었어요. 나는 외할머니를 따라서 미사가 있는 주일 날에는 성당에 가곤 했어요. 미사는 한 달에 한 번 장이 파한 오후에 근처 도시에서 신부님이 오셔서 들여 주셨어요.

성당에 가는 일은 정말 맘에 들지 않는 일이었어요.

나는 하느님을 믿지 않았어요.

외할머니는 하느님은 좋으신 분이시고 어떤 기도도 다 들어주신다고 하셨어요. 엄마가 아플 때, 나는 정말 열심히 기도했어요. 아침에도, 학교에서도, 잠자리에서도 엄마를 꼭 낫게 해 주시라고 기도했어요. 하느님은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어요.

나는 하느님이 미웠어요. 가끔 하느님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세상을 만들고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하느님이라면 외할머니와 나를 내버려 두고 아버지와 어머니를 우리에게서 빼앗아 갈 리가 없을 것이니까요.

할머니는 몇 대 안 되는 상추랑 풋고추를 키우고 장이 서는 날 갖고 나가 팔곤 하셨어요. 나는 할머니를 따라 장에 가는 것을 좋아했어요. 장에는 볼 것들이 정말 많았거든요. 여름철에는 일주일에 두 번 주일날과 수요일에 장이 섰어요.

여름 방학이 되었어요. 친구들과 따로 만나서 놀지도 못했어요. 모두 밭일을 도와야 했거든요. 운이 좋은 날은 장터에서 친구들을 만나 잠깐이라도 함께 돌아다니면서 놀 수 있었어요. 비 오는 날에도 장은 섰어요.

장이 선 어느 날 오후 천막이 처 있지 않은 한 귀퉁이에서 할머니가 펼쳐 놓은 상추랑 풋고추를 허리를 굽혀 들여다보고 계시는 영어 선생님을 친구랑 돌아다니면서 놀다가 장터 한끝에서 보았어요. 그날 아침나절에는 비가 왔었거든요. 우산은 할머니랑 나를 모두 가려주기에는 작았어요. 비 맞아 꾸겨진 적삼 밑으로 늘어진 할머니의 젖가슴을 듬성듬성 기운 치마 주름이 가리고 있었어요. 외할머니 발등 쪼글쪼글한 주름 사이에는 맨발로 걸으면서 모여든 먼지가 땀이랑 빗방울이랑 어우러져 자리 잡고 있었어요. 그날따라 멀리서 본 할머니 얼굴에는 굵은 주름이 더 많았어요.

할머니가 창피했어요. 나는 선생님 눈에 띄지 않으려고 서둘러 천막이 처 있는 옆 골목으로 도망쳤어요. 선생님이 채소를 팔고 있는 할머니가 내 외할머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싫었어요.

여름 방학 두 번째 일요일에는 신부님이 오셔서 미사를 해 주신다고 할머니가 방학 시작하는 날부터 매일 노래를 부르시다시피 돼 뇌이셨어요. 할머니는 밭터에서 채소를 가꾸는 일 이외에 중얼중얼하면서 묵주 알을 굴리시는 것이 하루 일의 전부이었어요. 할머니의 묵주는 동그랗게 깎은 나무 알들로 된 것이었어요. 나무 알들은 내 엄지손가락의 첫마디만 했어요. 나무 알맹이 가운데로 구멍이 뚫려 있고 그 구멍으로 꼬여진 실이 지나가면서 연결되어 있었어요. 끝도 시작도 없어 보이는 나무 알 고리였는데 한 부분에 펜던트처럼 몇 개의 알이 더 달려 있었고, 그 끝에 십자가가 마무리하고 있었어요.

할머니의 묵주는 엄마가 남긴 것이었다고 했어요. 가끔 할머니 몰래 묵주를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아보곤 했어요. 엄마 냄새는 어떤 것이었을까…. 기억나지 않았어요.

주일 날이 왔어요. 미사는 오후 5시에 시작된다고 하였어요. 동네 사람들이 하나씩 둘씩 성당으로 모여들었어요. 나는 도망칠 수 없었어요. 풋고추와 상추를 이른 오후까지 모두 팔 수 있었던 할머니는 내 손목을 잡아끌고 제대 가까이 맨 앞줄로 가셨어요. 할머니 힘이 그렇게 센 줄은 미처 몰랐었어요. 자리를 비집고 나를 앉히고 당신도 앉았어요.

곧 지루한 미사가 시작될 판이었어요. 미사에 참석해야 한다는 것은 정말 맘에 들지 않는 일이었어요. 무슨 뜻인지도 모를 말을 지껄이는 신부님, ‘일어서라, 앉아라, 무릎을 꿇어라’ 하시는 할머니의 잔소리도 싫었어요.

뒤에서 누군가 조용하게 말을 붙여왔어요.

“석행이 잘 지냈나?”

뒷자리에 앉아 계셨던 영어 선생님을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이었어요. 선생님은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하얀 레이스로 된 미사 보를 쓰고 있었어요. 선생님은 예뻤어요. 나를 보고 환히 웃으셨어요. 선생님은 나를 좋아하시는 것 같았어요.

“선생님, 안녕 하신교?”

나는 얼른 일어나서 선생님 쪽으로 돌아섰어요. 그리고 선생님에게 비스듬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어요.

“얼굴이 까맣게 탔네. 옆에 계신 분이 할머니싱~가?”

옆에 있던 외할머니도 뒤로 돌아서시어 굽은 등을 더 굽혀서 깊이 선생님께 인사를 하셨어요.

“아~고, 선상님이요, 석행이 할매요. 이 동네에 사시능교?”

“아니예, 볼일이 있어서 신부님하고 왔슴니더.”

“아고, 넘 반갑습니더!”

“지난번 장터에서 뵈었습니더. 그때는 몰라뵈었는데, 석행이 할머니라카니, 정말 반갑습니더.”

“선상님, 불쌍한 우리 석행이 잘~부탁드립니더.”

선생님은 장터에서 풋고추를 팔던 할머니의 손주가 나라는 것을 그때 알게 된 것이었어요. 그리고 지루한 미사는 시작되었어요.

자꾸 선생님이 내 뒤통수만 보고 계시는 것 같았어요.

친했던 친구가 서울로 이사 간 것을 빼고 개학한 학교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어요. 친구는 자기 삼촌이 타시던 헌 자전거를 나에게 주고 갔어요. 낡기는 했지만, 자전거를 갖고 있다는 것이 왠지 멋지게 생각되었어요. 가끔 허름한 안장이랑 바퀴에서 먼지를 닦아 내고, 바큇살과 손잡이에 광을 내어주기도 했어요. 자전거로 학교를 다닐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편한지 그제야 알게 되었어요.

새 학기에 나는 될 수 있으면 더 자주 영어 선생님을 피해 다녔어요. 왠지 선생님과 마주친다는 것이 창피했어요. 영어 시간에도 선생님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어느덧 가을이 되었어요. 외할머니 생신은 가을이었어요. 엄마가 살아계셨을 때는 흰 쌀밥에 미역국과 소고기 동그랑땡을 만들곤 하셨어요. 나는 동그랑땡을 무척 좋아했어요. 엄마가 돌아가신 후에는 당신 생일날에 미역국 먹을 일이 없다고 할머니는 한 번도 미역국을 끓이지 않으셨어요. 그러니까 벌써 세 번이나 미역국을 먹지 못하고 할머니 생신이 지나간 셈이에요.

그날도 학교가 파하자마자 나는 서둘러 교실을 나왔어요.

“석행아! 거기 좀 스래이!”

학교 정문 쪽을 향해서 속도를 내어 페달을 밟고 있을 때, 누군가가 뒤에서 나를 향해 외치고 있었어요. 뒤돌아보니 영어 선생님이었어요. 무엇인가를 흔들면서 나를 향해 뛰어오고 있었어요. 멀리서 보니 뭔지 갈피가 잡히지 않는 얇고 넓적한 것을 한 손에 높이 들고 흔들면서 말이에요. 허물어져 가는 열 개의 교실을 담은 학교를 뒤로하고 달리어 오고 있는 선생님과 바람에 날리고 있는 선생님의 머리칼이 왠지 낯설게 느껴졌어요.

“와 그래요?”

“잠깐 서 보래이! 이눔 아~야!”

“…….”

“이것 갖다가 내일 아침 할마이 미역국 끓여 드리레이.”

“…….”

선생님은 낡은 자전거 뒷자리에 마른미역 한 판을 꽁꽁 묶어 달아 주셨어요.

내가 말을 안 들으면 내 이름 석형(錫亨)의 석(錫) 자는 ‘돌대가리’ 석(石) 자로 변한다고 위협하던 선생님, 낡은 자전거 뒷자리에 마른미역 한판을 달아 주시던 선생님,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셨던 그 영어 선생님은 삼 십 년도 더 지난 후에 할머니 수녀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오셨어요.

선생님의 애인은 예수님이었어요. 꿈으로 채워졌던 천여 날의 나의 세계, 반나절 걸어서야 갈 수 있었던 장터, 할머니가 마음을 묻으셨던 작고 초라한 성당이 있던 그곳으로 말이지요.

돌대가리 석형이가 아닌 무신론자 석형이에게 선생님, 아니 수녀님은 연락을 주셨어요. 선생님이 계신다는 수녀원으로 찾아갔어요. 수녀들이 쓰는 검은 ‘머릿수건’ 사이로 몇 줄기 백발이 보였어요. 야위신 선생님에게 수도복은 너무 커 보였어요. 수녀님의 눈동자는 고요하고 맑았고, 얼굴은 창백하지만 평화로웠지요. 나를 껴안아 주는 수녀님은 낙엽처럼 가벼웠어요.

“이젠 영감이 되어가고 있구나, 석행아!”

“선생님은 이제 할매네요!”

“석행이 니는 아직도 신이 없다고 생각하는기가?”

“하느님 생각, 하지 않고 산 지 오래됩니더.”

수녀님과 함께한 그 가을날 오후는 왠지 쓸쓸했어요. 수녀님은 나의 청년기에 대해서, 또 외할머니에 관해서 물으셨어요. 나는 어려웠던 대학 시절이나 마지막 몇 해를 힘들게 사셨던 할머니를 잊고 싶어 했었거든요. 수녀님은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그즈음에 수녀가 되신 것이었어요.

수녀님도 그리고 나도 이유는 다르지만, 가족 없이 외로운 삶을 살아왔더라고요.

미국에는 여러 곳에 한국이민 교회가 있다고 하셨어요. 삼십 년도 넘게 사목을 하셨던 것이었어요. 선생님은 주로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나 성당을 갈 수 없는 사람들을 찾아다니시면서 일을 하셨던 것이었어요. 친구도 많았데요. 친구 중에는 집 없는 거지들도 있었나 봐요. 먹을 것을 갖다 주기도 하셨고, 추운 겨울에는 기부받은 양말이랑 옷들을 모았다가 나누어 주곤 했었데요.

“석행아, 니 할머니한테 유산 받았나?”

“유산이라꼬요? 빤히 다 아시면서 무슨 소리하능기요?”

“나는 미국에서 유산 받았데이!”

“뭐라카요, 수녀님?”

어느 겨울밤 수녀님은 경찰서에서 전화를 받았데요. 늦은 밤이지만 경찰서에 출두해서 확인해 주었으면 하는 일이 있다는 것이었데요. 어느 노숙자가 길에서 죽었는데 그 노숙자의 주머니에서 유서가 발견되었다고 했어요.

‘내가 죽으면 한국인 OOOO 수녀에게 감사하였다고 전해 주십시오. 그리고 나의 전 재산을 수녀님에게 남깁니다.’

노숙자의 유산은 $512.00불이었다고 했어요. 수녀님은 그 이야기를 하시면서 웃지 않으셨어요.

“수녀님, 나는 외할머니에게서 엄마 묵주를 유산으로 받았어예.”

나는 상의 왼쪽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묵주를 선생님께 꺼내어 보여 드렸어요.

“니는 그걸 장식으로 갖고 다니나?”

“…….”

“언제 그 나무 알들이 묵주로 될끼가?”

“…이제 수녀님 오셨으니까, 생각해 보겠십니더.”

선생님은 고향 수녀원에 돌아오신 그해 흰 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날에 소천하셨어요.

수녀님의 장례미사 때 나는 할머니의 묵주를 꺼내어 코에 대어 보았어요. 엄마 냄새랑 할머니의 풋고추 향내가 풍겨 나왔어요. 그리고 나는 수녀님의 애인을 볼 수 있었어요.

친구 김파코미아 수녀에게 바친다.

앵무새와 친구들 (동화)

앵무새 날개는 뽀얀 하늘색이었어요. 손끝이 닿으면, 파란색은 보송보송할 것 같았어요. 그런데 색깔은 만지는 것이 아니잖아요? 가슴 털은 아주 찐~한 노란색이었고요. 지난주, 나를 방문했던 앵무새는 샌디에이고 동물원에서 살고 있다 했어요. 샌디에이고 동물원에는 환자를 방문하는 동물 대사들이 살고 있데요. 병원에는 사람들만 병문안할 수 있고 동물 식구들은 병원 안을 들어 올 수 조차 없데요. 그런데 동물 대사들은 예외래요.

우리 집에는 일곱 살 된 고양이, 몬티가 있어요. 나는 몬티가 보고 싶었어요. 내가 백혈병에서 완치된 7년 전 생일날, 새끼 고양이 몬티는 동물 보호소에서 우리 집으로 입양되었어요. 몬티는 나를 보러 올 수 없데요. 병원 원칙이라 했어요. 슬퍼하는 나에게 동물 대사가 대신 찾아온 것이었어요. 알록달록한 앵무새가요!

동물 대사들은 여우, 원숭이, 거북이, 독수리, 앵무새들이 대부분이래요. 길들인 뱀도 있데요. 이 동물 대사들은 원래 산이나 바다에서 살았데요. 어쩌다 몸을 다쳐서 동물 응급실에서 치료를 받게 되면서, 사람들과 가까워진 것이래요. 다친 동물들은 상처가 아물어도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경우가 많데요. 혼자 먹이를 찾기도 어렵고, 다른 동물들에게 먹히는 예도 있데요. 동물원에 그냥 머물게 된 동물원 식구 중에서 성품이 온순한 동물들은 특별한 훈련을 받고 대사가 된다고 했어요.

앵무새 동물 대사를 가지고 온 아저씨는 병실에 들어오시자마자, 새장 문을 열었어요. 날개를 펴고 앵무새가 방안을 빙~빙 날았어요. 아주 잠깐이요. 그러더니 앵무새는 날개를 접고 침대 이불 위에서 띠뚝 띠뚝 몇 발자국 걸었어요. 내 종아리 즈음에서 멈추어 섰어요. 그리고 한참 동안 나를 빤히 보았어요.

아저씨가 ‘하우 아 유?’ 하니까 앵무새는 ‘하우 아 유!’ 하고 나에게 말하는 것이었어요! 나는 너무나 신기해서 어떻게 앵무새에게 대답을 할지 몰랐답니다. 아빠와 엄마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어요.

오늘 아침나절, 아빠는 창문 넘어 먼 곳에 눈을 멈추고 한참을 계셨어요. 아빠 옆에 서 있던 엄마도 아주 아주 먼 곳에서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 듯했어요. 아빠랑 엄마는 나의 의사 선생님을 만나고 오신 참이었어요. 그리고 보니, 참, 오랜만에 아빠와 엄마는 같은 방에 있네요.

아빠와 엄마는 이혼했어요. 내가 초등학교 2학년, 그러니까 일곱 살 때이었어요. 키모테라피 받느라 무척 아팠던 때였어요. 엄마와 아빠는 자주 싸웠어요. 나 때문에 언제나 다투셨던 것 같아서, 속상했었어요. 내가 기억하는 나는 언제나 아팠던 것 같아요. 아빠랑 둘이서만 살게 되었던 어느 날, 나 때문에 이혼했느냐고 아빠에게 물었어요. 아빠는 그냥 나를 안아 주었지요. 아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어요.

내가 중환자실에서 일반 호스피스 소아 병실로 옮겨진 지, 이제 두 주가 되어가요. 나는 작년에 중학교에 입학했어요. 친구들 율이와 보니를 정말 좋아해요. 턱에 수염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는 율이를 보니와 나는 자주 놀렸어요. 우리는 합창반에 있었는데, 테너 파트였던 율이가 갑자기 할아버지 목소리를 내는 바람에, 함께 합창을 할 수 없게 되었어요. 보니는 나보다 키가 머리 하나 정도 커요. 보니도 나처럼 아빠랑 살고 있어요.

그러니까 새 학년이 시작되었을 때, 백혈병이 다시 나를 찾아온 것이었어요. 이번에는 배가 많이 아팠어요. 다시 약물치료를 시작했어요. 의사 선생님은 방사선 치료를 배 전체에다 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했어요. 그리고, 오늘 아침, 오랜만에 병실에서 만난 아빠와 엄마는 주치의의 불림을 받았던 것이었어요.

아빠는 내가 올여름 방학 때 엄마 집에 갈 수 없으리라 말씀하셨어요. 방학이 되면, 두 주 동안 나는 엄마네 집에 가서 지나곤 했거든요. 아빠는 이어서 느리게, 더듬거리면서 키모테라피는 고만하자고 말씀하셨어요. 나를 바라보시는 아빠의 눈은 깊고 진하고 어두웠어요. 나는 아빠의 이런 눈을 본 적이 있어요. 백혈병이 다시 나를 찾아왔을 때, 의사 선생님을 만나고 오신 후, 나를 바라보시던 아빠의 눈이 그랬어요.

그날 밤, 나는 커다란 독수리를 타고 하늘을 훨훨 신나게 나르는 꿈을 꾸었어요. 동물 대사로 왔던 노랗고 파란 앵무새가 친구 열 두 마리를 데리고 와서 내 옆에서 함께 날랐어요. 정말 멋있었어요. 하늘에서 내려다본 우리 학교 마당에는 율이와 보니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어요. 친구들은 활짝 웃으면서 나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어요.

중앙일보 6월 25일 2021년 발표되었다.

열무김치를 담그며

이 수필은 2021년 8월 8일 중앙일보 문예난에 발표됨.

오늘 오후 열무김치를 담그는 대대적인 행사를 치렀다. 내가 ‘작이’가 되는 날이었다. 많이 만들던, 조금 만들던, 김치를 만든다는 것은 나에게는 큰일이다. 담구어 놓은 김치를 사서 밥상에 올리면 쉽겠지만 만들어 먹는 습관이 된 지 오래된 터라 단순한 내 김치 맛에 길들여진 나와 식구들이다.

나는 새색시이고 남편은 풋풋한 청년이었던 시절에 우리는 한국식당, 한국 식품점이 없는 뉴욕주 북쪽 대학촌에서 쉽지 않은 미국 생활을 시작했다. 영어와 관습에 서툴러 눈치 보며 위축되는 경우가 많았던 때였다. 수련의 중에, 악센트는 있어도 의사소통이 원만한 인도나 필리핀, 중동 출신들에게 밀리는 기분이 자주 들었다.

중동사람들은 늘 당당해 보였다. 그들의 음식점은 대학가에 몇 군데 있었고, 중동 문화와 음식에 친근감을 나타내는 교수도 있어서 부러웠다. 이차대전 후, 일본이 패망했다 해도 미국과 일본이 엮인 역사가 미국인들이 일본인을 무시하지 않게 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주류 백인들은 비록 스시는 안 먹어도 템푸라 맛에 호들갑을 떨곤 했다. 중국과 국교는 단절되어 있던 때이지만, 중국 음식은 이미 세계에 알려져 있던 터였다. 고린내 나는 치즈를 먹으면서도, 인도사람들이 풍기는 카레 체취, 극동 사람들에게서 스며나오는 마늘 냄새를 공공연히 불쾌하다 해도 되는, 문화적으로 둔감하던 시절의 미국이었다. 그런 새 세상에 사는 우리 부부에게 반드시 있어야 하는 음식은 밥과 김치였다. 갓 난 장이 큰 딸아이에게 김치를 씻어 먹이곤 했다.

김치는 한국말과 같이 항상 우리와 함께 있어 왔다.

그때까지 나는 김치를 담가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음식을 만들어 본 경험이 없었다. 맛은 잘 기억하고 있었기에 추억 속의 맛을 찾아가면서 김치와 여러가지 음식을 만드는 실험이 시작되었다. 그 실험은 50여 년 가까이 된 미국 생활 안에서 지금껏도 지속되고 있다. 뭐 대단한 연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 레시피가 복잡하니까 내 식대로 재료를 생략하거나, 미국 특유의 식재로 바꾸어 넣는 실험을 해 본다는 의미이다. 당시 그곳에는 한국인들이 먹는 배추가 없어서 단단한 편에 속하는 브로콜리나 양배추 같은 것을 썼던 것이 첫 실험이었다. 브로콜리 김치는 그런대로 맛이 좋았다. 그러나 브로콜리 값이 너무 비싼 것이 흠이었다.

오늘 오후, 열무를 상처 나지 않게 살살, 조심히 씻었다. 그러고 나서 소금을 뿌렸다. ‘작이’가 하던 대로 나는 ‘작이’ 처럼 열무를 씻고, 소금도 ‘작이’ 흉내를 내면서 뿌렸다. ‘작이’는 승무를 추는 여승처럼, 팔을 위로 뻗고 공중에서 원을 그렸다. 엷은 바람결에 흔들리던 여승의 옷자락처럼 작은 손에 움켜쥔 소금을 흔들어서, 열무 위에 뿌렸다. 마당에서 진행된 ‘작이’의 여름 열무김치를 담그는 특별 공연은 그랬다. 그렇게 ‘작이’가 담그던 열무김치는 싱그럽고 담백했다.

‘작이’는 열무가 절여지는 동안 물 폭탄을 쏘면서 마당을 구석구석 청소하곤 했다. ‘작이’는 외로운 마음을 물로 씻어 내버리면서 달래었는지도 모르겠다. ‘작이’에게는 크고 작은 생각하기 싫은 티끌들이 많았을지 모른다. 어린 나이에 집안의 생계를 도와야 했던 꼬마 ‘작이’. 고향을 떠나와 번잡한 서울에서 겁 없이 시작했던 더부살이 직장이 힘들었을 것이다. 때로는 외롭고 슬펐을 것이다.

‘작이’. ‘작이’는 내가 어렸을 때 우리와 함께 살던 가사도우미였다. 작은아이라는 말을 줄여서 ‘작이’라 불렀다.

내가 어렸을 때, 한국은 가난했다. 농촌은 더 가난했다. 작히 부유하다고 할 수 없는 우리 집 같은 가정에서도 도우미를 쓰며 살았다. 도시 사람들은 ‘작이’네 고향 사람들보다 상대적으로 부자였다. 1960년대에는 한 집 건너 가사도우미를 고용하던 시대였다. 자신의 주린 배를 채울 수 있고, 무능한 부모에게 쥐꼬리만 한 모은 번 돈을 보내어 식구들을 먹여 살릴 방법이라고는 도우미가 되는 길밖에 없었다. 도우미 고용주를 입맛에 맞게 선별, 선택할 옵션은 상상조차도 할 수 없던 시절이었다. 열악한 환경도 마다하지 않고 일했다는 연구 보고서를 읽었다. 그 보고서에는 가사도우미 소녀들의 한 달 월급이 주인아저씨 담뱃값 정도였다고 한다. ‘작이’네를 도와주지 못했던 내 부모님들의 가정, 내 모국의 슬픈 역사이다.

한국을 떠난지 거의 반세기가 되어간다. 긴 세월이 흘렀건만, 여전히 나는 김치를 먹고, 김치를 좋아하고, ‘작이’가 가르쳐준 대로 김치를 담근다. 내 나이 도래이었던 ‘작이’도 나처럼 할머니가 되었겠지. 이젠 편히 살고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손주들에게 맛깔나는 여름 열무김치를 담가 먹이면서, 어려서 견디어내든 힘들었고 외로웠던 여름날들을 이야기해 주겠지. ‘작이’는, 그러면서, 제 손주들을 축복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