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물 경기

****이 글을 쓰게 한 플랜트****

장 교수님*, 벼르고 벼르던 분갈이를 했습니다. 실내에서 근근히 목숨을 이어왔던 이 식물의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만 아열대 과(科)에 속해서 일 년 내내 푸르고, 잎이 두껍고, 길쭉하고 단단합니다. 잎은 가을에만 지지 않고, 때가 되면 누렇게 생명을 잃어갑니다. 사람과는 달리, 세상 빛을 본 순서대로 생명을 돌려보냅니다. 숨 없는 잎은 그냥 몸체에 오랫동안 붙어 있지요. 나무라고 부르기에는 작고, 풀도 아니고, 꽃을 피우지 않기에 화초라고 부를 수가 없네요.

이 식물에 대해서 장황하게 이야기를 늘어놓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 식물은 고통의 삶을 끈질기게 잘 버티었어요. 생명의 신비로운 힘에 대해서 숙고하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교수님의 뜻깊었던 생애의 시작 부분이 이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서 연관을 짓게 된 것 같습니다. 나에게 병이라면 병일 수도 있는, 사고비약(思考飛躍: flight of idea) 증상이 발동한 듯 합니다. 제 생각이 외람되다면, 용서해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이 플랜트가 메마른 흙 속에 뿌리를 박고, 갈증을 참으면서 사 반세기를 살아 남은 흔적은 꺼끌꺼글하고 울퉁불퉁한 거친 표면, 굽고, 뒤틀린 줄기, 하늘 대신 땅을 보고 있는 머리채에서 볼 수 있지요. 큰 딸아이에게서 나는 이 식물을 입양했습니다. 입양된 내 집에서도 오늘 분갈이를 받을 때까지 힘겹게 몇 해를 더 지났습니다. 분갈이라는 밀렸던 숙제를 하고 나니, 나는 비로소 통회의 고백성사(告白聖事)를 하고, 보속(補贖)을 끝낸 기분입니다. 이 플랜트가 인생은 ‘장애물 경기’라고 표현했던 당신을 만나보라고 나에게 말합니다.

이 플랜트가 인도 한 곳은, 은퇴하면 읽는다고 쌓아 둔 책더미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그대 만난 뒤 삶에 눈떴네’라는 책이 눈에 띄었습니다. 소아암 전문의였던 레이첼 나오미 레멘 박사가 쓴 ‘Kitchen Table Wisdom’을 예수회 신부이자 서강대 교수, 당신이 암으로 입원해 있을 당시 원목 사제로 활동하던 당신의 후배인 류해욱 신부가 번역한 책이지요. 책을 읽으면서, 내가 몰랐던 당신에게, 이제야 책을 통해서 조금 알게 된 당신에게, 세상은 당신을 절대로 잊을 수 없고,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졌습니다.

왠지 아십니까? 이 책은 당신이 쓴 것도, 당신이 번역한 것도 아니지만, 당신의 혼이 듬뿍 묻어 있기 때문이어요. 레멘 박사가 쓴 원서에는 이 한국어 번역본의 서문에 언급된 당신에 관한 이야기가 없지요. 책이 한국에서 출판되고 나서 3년이 지난 후, 당신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는 당신에 대해서 알고 싶어졌습니다. 인터넷에서 당신에 대한 글, 사진들을 찾아 읽었고, 보았습니다. 소아마비라는 전염병이 하필이면 한 다리가 아닌, 두 다리 모두를 강타했는지 안타깝더라고요. 그런 경우는 드문데 말입니다. 신체장애가 없는 사람들은 두 번 생각하지 않고 하는 일상의 일들, 학교 활동이 도움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었겠지요. 당신의 발이 되어 화장실까지도 안아다 주셨다던 어머님, 신체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상급학교 입학원서조차 거부당하였을 때마다 필사적인 노력을 하시었고 방파제가 되어 주셨다던 서울대 영문과 교수이었던 아버님, 사회정의가 없는 미개했던 한국 사회와 한국 교육계의 관습을 과감히 깨 주신 파란 눈의 서강대학 영문과 학과장 (고) 브르닉 신부님(미국명: Jerome E. Brewing), 그리고 앞서가던 서강대학이야말로 당신이 장애물 경기를 훌륭히 해 낼 수 있게 함께 했습니다. 무엇보다, 선수이었던 당신은 횃불을 들고, 멋있게 결승선을 통과했습니다. 박수를 보냅니다!

이쯤에서 나는 다음 이야기를 꼭 쓰고 싶습니다. 정의나 평등에 둔감했던 교육자들, 그들의 군집단체인 교육계의 미개함과 그들이 행하였던 행패에 분노하는 나 자신을 봅니다. 신체장애를 가졌다고 입학원서조차 제출할 수 없었던 한국의 씨스템, 교육자로서 그런 부조리함을 스스로 교정하지 않았던 비겁한 사람들의 온상이었던 나의 모국 한국이었습니다. 작은 예를 들어봅니다. 서강대학에서 체육이 필수 교양 과목이었던 당시, 두 다리를 쓸 수 없는 당신에게 체육은 할 수 없으니, 앉아서 수업을 참관하여야 학점을 준다고 했다면서요? 그런데 체육관은 어디에 있었나요? 교정 외곽, 비탈 위에 있다 했습니다. 비 오는 날에, 층계도 없는 미끄러운 둔덕을 목발에 의지해서 땀흘리며 올라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다가, 나도, 브르닉 신부님처럼 울분했고, 신부님처럼 울었습니다.

척박한 환경을 겪어내며 살아 준 나의 플랜트가 저를 침묵하게 합니다. 희망과 용기를 날렀던 전사(戰士)이었던 당신은 서강대학 영문과 교수이자, 학자, 수필가로서 차세대 후배들에게 퍼즐을 맞추는 지혜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나도 이 길고 험한 장애물 경기에서 우승해서 승리의 횃불을 높이 처들고, 언젠가 내 고향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곧 준비를 시작하려 합니다.

*(고) 장 영희 (1952-2009) 서강대학교 영문과 교수, 수필가

새 집을 사다

드디어 미루었던 일을 했다. 숙제를 끝내고 나니 후련하다. 오랫동안 하지 못했던 숙제는 우리 부부가 지낼 마지막 집을 사는 일이었다. 집을 사기로 마음을 먹고, 어느 동네에 살지, 어떤 크기로 살지 대충 의논하고, 직접 방문하여 보니 좋았다. 즉시 계약서에 서명하고 집으로 돌아오니 기쁘기까지 했다.

세상에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 많지만, 노력하면 대부분 해낼 수 있는 것이 또한 세상 일이다. 그러나 부모가 나에게 묻지 않고 나를 세상으로 데리고 나온 일, 세상과 하직하는 날짜를 조물주께서 나에게 의논하지 않고 정하시게 될 상황, 그런 일이 벌어진 다음, 영(靈)이 떠나버린 나의 몸을 내자신이 처리하고 떠날 수 없다는 불가피한 사건—이 세 가지는 이리저리 들여다보아도 불공평하다.

모든 사람은 내 의사와 관계없이 세상에 온다. 그래도 우리 모두는 열심히 살고, 그러려고 최선을 다한다. 간혹 피할 수 없는 불상사를 당하기도 한다. 내가 당할 수도 있고, 가족일 수도 있다. 건강할 때, 정신이 있을 때, ‘사전 연명 의료 지향서(’Advanced Directive’)를 만들어 놓는 것은 강조가 필요 없을 만큼 중요하다.

예기치 않던 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질 수 있고, 뇌출혈이나 뇌일혈로 기억상실증, 실어증이 올 수 있고, 때로는 치매에 걸릴 수도 있다. ‘사전 연명 의료 지향서(’Advanced Directive’)가 있으면 배우자나 자녀들 뿐 아니라 의료진이 큰 부담 없이, 지체하지 않고 지향서에 명시한 대로 병상에서의 나날을 꾸려줄 수 있다.

만약 내가 혼수상태에 빠졌다고 치자. 차 사고로 또는 4기 뇌암에 걸려서 불치 상태일 경우 몇 달 동안 정도라도 살 확률이 낮다면, 과연 나는 코에 낀 고무 호수를 통해 배달되는 음식으로 연명하는 것을 원할 것인가? 답은 물론 갖가지이다. 많은 경우 가족들의 의견 또한 다르다. 100% 동의안을 받아내기 어렵다. 장기이식 기부자로 등록된 것을 가족들이 모를 수도 있다. 이런 경우 ‘사전 연명 의료 지향서’가 의료진의 치료 방침을 인도해 준다.

‘사전 연명 의료 지향서’는 단어의 선택이 조금씩 달라 다른 이름 즉 ‘사전 지시서’, ‘사망선택 유언장’, ‘건강관리 지시서’, ‘항구적 대리 위임장’ 등으로도 불리는데, 근본적인 뜻은 같다. 변호사에게 위임해서 종이로 작성하여 의료 차트와 유언장에 함께 철해 놓는 것이 상례이다. 또 가족들이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에 놓아 두는 것을 추천한다.

사람들의 건강상태는 변하기 때문에, 적어도 매 10년마다, 아니면 건강상태가 변하거나, 가족 상황이 변할 때 새 정보를 입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가족 상황의 변화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혼이나 가족 멤버의 사망한 경우를 예로 들 수 있다. 참고로 변호사에게 의뢰하지 않고 온라인 서류를 작성해서 공증받아 보관해도 된다. 한국어로 된 서류도 온라인에 있다.

내가 나의 마지막 누울 곳을 마련하는 것에 많은 시간을 끈 것과 비슷하게, 미국 성인 37% 만이 ‘사전 연명 의료 지향서’를 준비해 놓았고( 2000년-2015년 사이 796,000명 설문 조사), 55%가 유언장 없이 죽는다고 한다 (허핑턴 포스트 2016 보고).

사망 후, 유족들이 겪어야 하는 어려운 일 중의 하나가 장례절차이다. 장지(葬地)가 준비되지 않았을 경우, 유족들은 서둘러 마땅한 장소를 찾아야 하고, 목돈을 지불 해야 하는 등, 세부적으로 결정해야 하는 목록이 적지 않다.

숙제로 남아 있던 내가 영원히 쉴 집, 나의 새집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엘에이에 있다. 아이들이 얼마나 자주 찾아올지는 모르지만, 가깝다. 겨우 길이 12인치에 폭 24인치의 작은 납골당이다. 그래도 나의 쉴 집을 산 것은 참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누가 노동은 신선한 것이라고 했던가?

거의 20년은 되었을 것이다. 이 유화작품을 본 것은. JAMA(Journal of American Medical Association)은 Theodore Gericault (1791-1824)라는 프랑스 화가의 유화 ‘Portrait Study’을 실었다. 이 작품에 대한 설명은 많지 않다. Google Arts & Culture 에 의하면 Medusa 라는 배가 1816년 아프리카 바다에서 파선했을 당시를 그린 ‘Raft of Medusa’ 로 유명해진 화가이라한다. 그가 준비기간 동안 연습한 작품이 위의 그림이다. 모델은 요세프라는 이름을 가졌던 모양이다. 참고로 메두사배에는 140명이 타고 있었고 13일간 표류했다한다. 14명이 살아남았다고 한다.

1818-1819년은 프랑스 노예해방이 없던 때였다. 그는 이 배에 탔던 노예를 생각하고 그린 것이었을까?

흥미로운 사실은 이 화가가 제 정신이 아닌 사람들의 초상화(Portrait of Insane) 을 그린 것으로도 유명하다. ‘제 정신이 아닌 사람들’… 그들은 거의 중년 이상의 남, 녀들이었다. 화가 자신도 좀 제 정신이 아닌 사람축에 들었다고 하는데, 그런 그림을 그리게 된 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추정된다. 자신의 정신질환의 테라피라는 설이 가장 유리하다고 한다.

디카수필 시작한다: ‘빈사의 사자상’

카메라에 어느 순간을 담는다. 그 순간을 누군가에게 주면서, 당시에 얻었던 마음을 나누는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은 뜻깊은 일일 것이다. 나에게는 새로운 방식의 나눔이다. 보여주고 싶은 자연이나 역사-때로는 피비린내 나는 역사-가 배여 있는 오래된 건물들, 방문한 나라나 고장의 문화를 표현하는 물건들을 글로 표현하려면, 글 쓰는 이는 힘들고, 읽는 사람은 상상력을 동원해야 하는 지루한 일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우선 ‘디카수필’ 예찬에 대한 나의 마음을 싣는다.

‘빈사의 사자상(The Lion Monument)’은 스위스 루체른에 있는 작은 공원의 절벽에 자연석을 이용해서 만든 작품이다. 실제 사자보다는 큰(10 x 6m) 거대한 조각품으로 죽어가는 사자를 표현하고 있다. 덴마크 버텔 토르발센(Bertel Thorvaldsen) 조각가가 1821년 완성한 작품이다. 앞에 있는 작은 연못 표면은 항상 죽어가는 사자의 모습을 반영한다. 그러나 이 사자는 아직도 살아 있다.

사자는 머리를 반쯤 숙이고, 마지막 숨을 거두는 모습이다. 사자의 오른쪽 앞발은 프랑스 왕가를 나타내는 백합이 새겨진 방패를 누르고, 발톱은 웅크리고 있다. 아파서 일까? 아니면 누군가를 할퀴려는 최후의 동작이었을까? 스위스 문장이 그려진 다른 방패에 사자는 머리를 기대고 있다. 그리고 부러진 창은 옆구리에 꽂힌 채이다. 비통한 모습이다.

이 조각의 사연은 이렇다. 스위스는 1700년대에 가난했다. 젊은이들은 돈을 받고 프랑스의 용병으로 근무가게 된다. 그러던 중, 230년 전, 1792년에 프랑스에 혁명이 일어난다. 루이 16세를 충성을 다해서 보호하던 스위스 용병 1,100명 중에서 760명이 전사했다.

이들의 용맹과 충성을 기리기 위해서 만든 비통한 모습의 ‘빈사의 사자상’을 일 년에 약 백 십만 명의 관광객이 방문한다고 한다.

우크라이나와 노블리스 오블리제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에서 약 4만 명의 미국 젊은이들과 약 140,000명의 한국 군인들이 전사했다. 무모한 전쟁이었다. 전쟁으로 한창나이의 젊은이들은 죽었고, 출전했다가 다행히 살아남은 청년들은 진학할 기회를 잃었다. 나의 큰 오빠는 전사했고, 둘째 큰 오빠가 대학으로 진학할 기회를 놓친 장본인이었다.

휴전되고 나서, 미국의 한 독지가 여성은 나의 둘째 큰 오빠 같은 청년들에게 미국 유학의 길을 제안했다. 그렇게, 둘째 큰 오빠는 미국에서 학부를 마칠 수 있었다. 그는 귀국해서 골프채 만드는 회사 사장, 또 다른 사업체들의 CEO, COO 로 활약했다.

전쟁을 겪고 한강의 기적을 만드는데 이바지한 오빠 세대들이 받았던 도움을, 한국인 디아스포라가 이 미국 땅에서 되돌려 베풀고 있다. 바로 내 고등학교 동문이 마음을 모아서 한 일이다.

남가주에는 700 명이 넘는 동문이 살고 있다. 동문회의 미션 중의 하나가 사회봉사이다. 동문을 만나 그리움을 달래고, 회포를 푸는 것은 디아스포라 삶에 중요하다. 그리고 사회봉사의 미숀도 그 이상으로 의미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동문회는 Hurricane Katrina가 있었던 2005년에는 경제적으로 힘든 태풍 피해자들을 도왔고, 코비드 사태가 시작된 2020년에는 오고 갈 곳이 없이 락다운 된 한국출신 유학생들을 도왔다. 올해는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이곳에 유학중인 학생들을 찾아 내어 장학금이 아닌, 생활보조금 $18,000불을 모아서 나누고 있다.

뒷담이지만, 우크라이나 유학생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워싱턴 DC에 있는 우크라이나 대사관, 샌프란시스코 총영사관, 엘에이에 있는 우크라이나 문화센터에 연락을 넣었을 때,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감동하고, 감사하면서 학생들의 데이터를 찾아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행정부와 문화센터에는 유학생에 대한 data base 가 없었다.

결국, UC 대학들에 연락을 하고, 학생들을 찾아내었다. 연락된 학생들은 모두 힘든 시간을 지내고 있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일차적으로 CSUN(Cal State University of Northridge) 세명의 학생들과 관계자들을 만났다. 한 학생당 $2,000불을 전달했다. UCLA 한명, UC Berkeley 5명에게 역시 같은 금액이 곧 전달된다.

오빠 같은 청년들에게 진학의 길을 열어 준 그 여성 독지가처럼, 우리 디아스포라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행할 때이다. [끝]

한국일보 ‘발언대’

류모니카/한국어진흥재단 이사장/남가주 경운회 2020-2021 동창회장/2022 사회복지부 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