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바이러스 팬대믹과 동반한 보육, 가정경제 문제

나는 큰 딸네 집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로 학교가 닫혔고 여섯 살, 여덟 살, 열 살 손주들은 하루를 함께 할 어른이 필요하다. 모든 의료계의 종사자들이 그렇듯이 환자들은 딸과 사위에게 여러 면에서 아이들 보다 우선 순위가 높다.

손주들은 집에서 일정 시간에 학교가 마련한 온라인 클래스에 참여하여야 한다. 아침 9시가 되니 아이들은 각각의 컴퓨터에 로그 인 해서 학교 수업에 참여한다. 일 학년인 막내의 컴퓨터 수업이 제일 시끄럽다. 일 학년 꼬마들은 학우들, 담임 선생님을 영상으로나마 보니 반가운 모양이다. 오늘의 과제는 ‘내가 중요한 사람인 이유’, ‘만약 내가 뒷마당에서 레프리콘을 발견한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이라는 두 토픽을 갖고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오늘이 성 패트릭 데이라서 두 번 째 질문을 만든 모양이었다.

이번 코로나바이러스 (COVID 19) 로 인한 판데믹은 지금부터 102년 전, 일차대전 당시 오스트리아에서 발생한 것으로 추측되는 ‘스페인 독감’, 2009 년 멕시코에서 시작된 ‘돼지 독감’ 에 이어 세 번 째 이다. 사이 사이 이름 붙여진 독감이 있기는 했다. 독감이 박테리아가 아닌 것을 처음 알게 된 것이 1930년 이었고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의 유전체 서열을 완벽하게 알아낸 것이 2005년이다. 인체 쌤플은 알라스카 얼음층에서 발굴한 시체에서 얻었다고 한다.

이번 사태로 처음에는 마스크 품절로, 몇 주가 흐른 지금은 일상용품 축적 경쟁으로 혼란스럽다. 이 중에 어린이들의 보육이 사회 문제로 부상하고 있다. 학교가 쉬고, 집에만 있어야 하는 아이들을 거두기 위해서 직장을 쉬어야 하는 부모들, 그로 인해 흔들리는 가정경제, 비록 일시적이라 하더라도 영업을 접어야 하는 서비스업계, 자영업자들이 겪어내야 하는 경제적 하향 조정등 사태는 미국 뿐 아니라, 많은 나라의 실질적인 과제로 닥아왔다. 연준이 이자율을 두 번이나 내렸지만,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분명하지 않다.

마스크에 대해서 좀 알고 지나갈 필요가 있다. 외과용 마스크는 세 겹으로 되어 있다. 제일 안쪽과 바깥 쪽은 물을 잘 흡수하는 친수성으로 되어 있고 중간은 필터로 되어 있어서 필터의 정전기로 이물질을 잡아준다. 코로나바이러스는 공 모양인데 지름이 120-160 나노미터 (nm=1/십억 미터) 로 작지 않은 RNA 바이러스이다. 암세포 보다는 크고 박테리아보다는 작다.

대부분의 마스크는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를 차단하지 못하지만 5-10 마이크로밀리 (5000-10000 나노미터)의 침방울과 합해져서 기침이나 재채기 할 때는 입 밖을 튀어 나와 이동할 때 쉽게 마스크에 걸릴 수 있다. 한 겹의 헝겊이나 커피 필터로 만든 자가 마스크는 바이러스를 막을 수 없고 먼지나 페인트 같은 큰 이물질을 잡아 줄 수는 있다.

인플렌자를 예방하는데 중요한 사항은 군중과의 격리, 병자 격리 뿐 아니라 의료계가 추천하는 마스크의 적절한 착용과 더불어 위생관념의 준수, 특히 손을 자주 씻어 주는 것이 필수적이다. 마스크만 사용하는 것은 효과가 없음을 임상실험이 밝힌 바 있다.

휴교로 인한 어린이들의 보육, 보육을 위해 직장을 쉬어야 하는 부모들의 경제적 고충, 정규직이 아닌 임시직들의 실직으로 인한 타격, 불황기로 접어드는 세계 경제가 우리를 무겁게 누르고 있다. 하지만 이 시련은 우리 아이들이 물질주의에서 탈피하며 자라게 할 것이고, 가정은 협조하면서 화목해 지고, 세계는 전쟁보다 건강과 평화의 중요함을 위해 더 노력하게 될 것으로 믿고 싶다.

이제, 나는 딸과 사위로 부터 나를 보호해야 하므로, 이젠 손주들을 보아 줄 수 없겠다. 무슨 방도를 찾겠지, 하는 마음으로 이글을 마친다.

‘여성 역사의 달’에 한국 여성 리더들을 생각하다

 

1988년 로널드 레건 대통령 재임 때 ‘여성 역사의 달’ 이라 선포된 3월이 왔다. 올해 3월은 과거 세상사가 남성 위주였다는 인식을 뒤 돌아 보려는 노력이 두드러게 보인다. 가려졌던 여성들의 공로를 찾아 보고 알리자는, 좀 색 다른 3월인 것 같다.

미국 2대 대통령의 아내이자 6대 대통령의 어머니인 아비게일 아담스는 여성들의 사회참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남편인 죤 아담스 대통령에게 상기시켰다. 그러나 여성 참정권이 부여된 1920년 까지 140여년이 걸렸다. ‘여성의 달’은 1988년 제정되었으니 거의 200년이 지난 셈이다. 여성의 참정권리 뿐 아니라 인권을 위해 싸워 왔던 많은 여성들, 그리고 남성들이 있다. 여성들은 백인도 있고 유색인종들도 있었다. 참고로 한국여성들의 투표권은 일제강점기가 끝난 1945년 부터 있었다. 한국은 그런 면에서 개화된 나라라는 생각이 든다. 1945년에 한국남성들도 처음으로 투표권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인권을 위해서 뿐 아니라 한국 같은 경우는 유관순 독립의사 같이 인권과 국권을 위해서 항쟁했던 위대한 여성들도 있다. 또 의료부분에서도 전례를 깨고 의과대학에 입학원서를 내고 당당히 첫 의대생이 된 이민자인 엘리사벳 블렉웰도 잊을 수 없다.

지난 주 3월 8일은 ‘세계 여성의 날’이었다. 이에 맞추어 타임(Time) 메거진은 ‘올해의 여성’이라는 제목을 붙여 과거 100년 동안을 회고하고 한 해에 한 명의 여자들을 선정해서 3월 호를 출판했다. 타임지는 1927년 ‘올해의 남성’이라는 칼럼을 만들었고 1999년 ‘올해의 인물’로 선정 범위를 바꾼 후, 여성들도 뽑기는 했지만 72년 동안 많은 여성들을 놓쳤음을 인식했던 것이다.

여담이지만 ‘올해의 남성’이라는 칼럼은 메거진이 구태의연하고 활기를 잃어 가고 있을 때 새로운 도약의 도구로 구상해 내었던 것이었다 한다. 또 다른 이유로는 대서양을 비행기로 최초 횡단했던 챨스 린드버그를 적당한 시기에 대서특필 하지 못한 실수 때문에 한 해를 마감하면서 공인하는 의미에서 만들었다고도 한다. 하여간 챨스 린드버그는 타임지의 첫 번째 ‘올해의 남성’이었다.

다시 여성의 이야기로 돌아간다. 1920년 부터 2019년 까지 한 세기를 아우르는 세월 속에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힘든 일들을 해 낸 여성 참정권을 성공시킨 여인들 부터, 에이즈 바이러스를 발견한 프랑소아 바레-시누씨 (1983),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필리핀의 코라존 아퀴노, 세상에서 가장 빨리 달리는 여인 플로렌스 조이너, 인권 보호의 타이틀 나인(Title IX)을 통과시킨 하와이의 팻치 타케모도 밍크 하원의원, 그외에 가수, 작가, 여왕, 공주, 수상, 대통령, 대통령 영부인등이 있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마담 마리 큐리는 보이지 않는다. 마담 큐리는 폴랜드 출신의 물리학자, 화학자로 프랑스 국적을 갖고 있던 우리 같은 디아스포라였다. 물리와 화학의 두가지 노벨상을 받은 유일한 과학자이며 최초의 여성 노벨상 수상자이다. 폴로니움과 레디움 동위원소를 발견한 여인으로 발견한 동위원소를 모국을 기리는 의미에서 폴로니움이라 명명했던 여성이다. 그녀의 공로로 현재 발암 환자의 약 50%는 완치목적 또는 증상완화 목적으로 방사선 치료를 받고 있다.

동양 나라 중에 중국, 일본, 필리핀, 인도 출신의 여성들은 있는데 한국 여성은 없다. 한국 여성들이 반열에 오를 때 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으면 좋겠다.

‘여보’ 라는 말

‘여보’ 라는 말을 생각하면 마음이 따뜻해 진다. 이 말은 특별한 뜻을 갖고 나에게
닥아 온다. 내가 세상에서 단 한 사람에게만 주는 이름, 또 부르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내 주위에는 부부끼리 ‘아무개 씨’하고 부르는 커플들이 있다. 우리 부부도 그렇게 세속
이름이나 별명으로 서로를 부르던 시절이 있었다. ‘아무개 씨’는 삼인칭 호칭이고, ‘여보’는 이인칭 호칭이다. 아주 가까운 관계 속의 이인칭의 부름이 여보라는 것일게다.

내가 밥과 빵을 질력 내지 않고 좋아하는 것이나, 바크의 음악을 들으며 평화의 싸이클로
들어가는 것도 비슷한 의미를 갖는 것일지도 모른다. 무의미 한 것 같기도 하고, 평범한 것 같으며, 때로는 지루한 것 같은데, 없으면 찾고, 먹을 수록 들을 수록 편하고 좋다.
안심하고 편안하게 나를 내어주고 접할 수 있기 때문인가 보다.

‘여보’란 말은 평범한 단어 안에 깊고 맑은 사랑의 샘을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여보’란
평범한 말이 아닌 것 같다. 세상에서 한 사람만 빼고 나를 ‘여보’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나를 ‘아무개 씨’라고 부르는 사람은 그 한 사람만 빼고 전부라도 과언은 아닐게다.

‘여보’라는 말.
처음 만났을 때 가졌던 차갑고 예리했던 이성도, 뜨겁고 부풀었던 열정도, 사랑하므로
느꼈던 아픔도 이제는 내가 매일 먹는 밥 처럼, 그렇다-.

그러나 그 ‘여보’라는 말은 소망을 갖고 언제나 나를 감싸고 있다. 그리고 그 ‘여보’는 연륜이 지어준 편안한 주름, 희끗 희끗한 반백의 머리칼, 여전히 깊고도 차가운 듯 싶은 눈으로
소망을 함께 하자고 말 없이 말한다.

 

***오래 전에 썻던 글을 줄여서 올립니다. 중앙일보에는 ‘김영률’ 이라는 이름으로 나갔지요. 제 어머니의 이름입니다.****

인종차별, 인체실험과 의사들

인근 대학의 연구소장으로 있는 작은 딸은 공립 중고등 학교가 컴퓨터 사이언스 교육을 공평하게 인종에 차별 없이 행하고 있는지에 대한 연구차 미시시피 주에 출장을 다녀왔다. 백인과 흑인들이 사는 동네가 아직도 분리되어 있고 빈부의 차이는 현저했다고 했다. 딸은 14살 때 흑인이기 때문에 부당하게 린치 당하고 살인 된 에멭 틸을 기리는 뮤지엄을 돌아 보았다고 한다. 어떤 백인이 에멭 틸의 동상을 회손하였던 것을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곳에는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가 있을 것이다.
2월은 ‘흑인 역사를 기리는 달’이다. 곧 이어 조선 독립 항쟁 기념일인 ‘삼일절’이 닥아온다. 인류의 평등함이 실현 되지 못 하여 일어났던 재앙을 숙고 하게 한다.
400년 동안 2천 오백 만 명의 아프리카 사람들이 유럽, 중동, 미국으로 노예가 되어 끌려 가 겪었던 역경과 인간이 평등하다는 법적인 확인에도 아랑곳 없이 지금껏 인종차별은 변형된 형태로 이어져 오고 있다. 인권운동은 공식적으로 1968년 ‘공평한 주택 법안’을 존슨 대통령이 싸인 함으로서 끝났다고 해도, 인간의 습관은 쉽게 변하지 않는 것 같다.
또 임페리얼리즘 일본인들에게 실험 당하고 죽어 간 우리 조상들은 어떤가? 당시 식민지인들에게 가한 인체 실험을 통해서 얻은 의학 지식은 맥아더 장군이 일본 전범자를 사면해 주는 조건으로 미국에 넘겨졌고 그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
법과 법의 실천에는 시행착오가 종종 있다. 예를 들어 보면, 인종차별을 금하는 ‘행정 명령 9981’은 1948년 해리 트루만 대통령 때 내려진 것이었다. 그 후 여러차례에 거쳐 인권운동이 있었고 미국의 법은 인종의 평등을 강조하고 이에 힘을 가했다.
그러나 인종차별의 관습은 금방 개선되지 못했다. 인체 실험 ‘터스키기 실험(Tuskegee Experiment)’ 이 가장 좋은 예이다. 이 실험은 흑인은 인간이 아니라는 숨은 인식 때문에 소작 농부 매독 환자 399명은 1932년 부터 1972년 까지 치료 받지 못하고 관찰만 되었던 것이다. 미국 정부와 의사들은 매독의 자연적 코스를 알고 싶었다. 399명 중 128명 (32%)은 매독 때문에 죽었고, 40명(10%)의 배우자들이 전염되었으며, 19명의 아이들은 선청성 매독을 갖고 태어났다. 19% (74명)만이 실험이 끝난 1972년에 살아 있었다.
미국은 과태말라인들에게도 유사한 실험을 하였다. 그 외에 정부가 준 펀딩으로 의사들은 발암 흑인 환자들에게 의도적으로 방사선 방출실험을 했다.
의사 자격을 받으면서 대부분의 의사들(약 60%)은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한다. 선서를 하지 않아도 ‘의학의 윤리’에 대한 지침은 다를 바 없다. 의사들은 정치적 암살자로 고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위에 말한 인체실험의 앞잡이가 된 사람들은 의사들이 아니었던가? 어윈 섀쯔 라는 젊은 의사와 피터 벅스툰이라는 예방의학연구원이 저널에 보냈던 ‘터스키기 실험’에 대한 공식적 반대 의견은 소리가 작았다. 묵살되었다. 결국 미디어에 사실을 터트리게 된 후에야 죄악은 세상에 알려졌던 것이다.
오랜 세월이 흐르고 난 1977년 빌 클린턴 대통령은 몇 안되는 생존자들과 자손들에게 국가를 대표해서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인간의 고통과 목숨을 놓고 타협하고 있는 의사들이 있을지 모른다. 의사가 되기 전에 먼저 참된 인간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긍정적인 생각과 성공적 암 치료

나는 밥 먹듯이 환자들에게 긍정적인 생각이 암 치료를 쉽게 받을 수 있게 하고, 완치를 향한 지름길이 된다고 말하곤 했다. 그야말로 모두에게. 실상 나는 긍정적인 정신과 태도가 또는 대체의학이 병을 완치하게 한다는 학설에 회의적이다. 마음을 읽는 환자들은 나의 위로 섞인 충고를 헛소리라고 느꼈을 확률이 높다. 그러나 긍정적인 태도로 치료에 임하면 부작용도 쉽게 받아 들이고,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긍정적 사고방식 (positive thinking)’ 에 대한 세미나, 출판 서적등이 난무하는 곳이 미국이다. 이것은 19세기 파이네아스 큄비의 ‘새로운 사고방식 운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리된다. 그의 제자였던 매리 베이커 에디가 쓴 ‘과학과 건강’이라는 책 때문에 이 아이디어는 자연스레 의료계 까지 침투되었다고 본다. 질병이란 마음에서 부터 오는 것이라는 견해였다. 건강한 마음을 갖고 전능하신 분에게 기도하고 용기, 희망, 믿음으로 의심이나 공포심, 걱정 같은 부정적인 생각을 몰아내면 육신의 병이 치유된다고 믿었다. 요즘 그런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그러나 거기서 파생된 자긍심, 자가발전, 자립에 대한 아이디어는 상품화 되어, 거대한 사업으로 번창해 왔다. 이는 의료계를 좋은 쪽으로 돕기도 했지만 반대로 환자들이 입증된 올바른 치료에서 멀어지게 하는데 일조를 함으로 비윤리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의학윤리 및 의학사 저널’에 발표된 논문 ‘의료 안에 긍정적 생각이 차지하는 윤리’라는 제목의 논문 (Gabriel Andrade, 2019)이 대표적이다.

이 시점에서 친구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친구는 암 4기에 걸려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평화로웠다. 암을 치유해 달라는 기도를 하기 보다는 자신의 삶을 뜻 깊게 해준 가족들, 친구들에게 진정으로 감사했다. 이 감사의 마음은 그녀에게 긍정적인 생각과 태도라는 태두리 안에 머물게 했다.

주치의가 ‘당신은 암 4기 입니다’ 하고 말했을 때, ‘감사합니다.’하고 대답했던 그녀다. 의사가 다시 ‘당신은 내가 한 말을 이해했습니까?’ 하고 되 물었을 때 ‘그렇습니다.’ 하였다. 친구는 세상을 떠날 준비를 했다. 가사에 관계된 모든 것을 남편에게 알렸고, 책임을 남편에게 건네 주는 과정도 거쳤다. 설것이 하는 방법, 가계부 적는 형식, 은행업무, 자산 수입관리에 대해서 가르쳤다. 친구의 남편은 일만 하였지 관리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고 살아왔던 터였다.

투병 중에 우리 인간들은 외롭고 비참한 마음이 들기 쉽다. 그러나 친구는 긍정적 태도로 완치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억지무장하지 않고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치료를 받았고, 고마운 마음을 갖고 그 마음을 알리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녀는 완치되었다.

생존율 그라프는 암 진단 때 100%에서 시작되고 시간이 지나면서 하강 선을 그린다. 아무리 악성인 암이라 해도 생존율이 2-3년 내에 0%가 되어 밑 바닥을 치지는 않는다. 꼬리부분은 예후가 나쁜 경우에도 3% 또는 5% 선을 그으면서 이어진다. 이 꼬리부분은 어떤 병, 어떤 치료라도 상관이 없이 남아있어 나는 이 점을 늘 신기하게 생각했었다. 이번에 내가 느끼게 된 것은 바로 이 꼬리부분이 긍정적 삶을 실천 하는 소수가 얻게 되는 성공적 치료의 사례라는 것이었다.

회의적인 나에게 친구는 논리를 보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