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역 한 다발

“자, 모두 조용하그라!”

“…….”

“곧 부활절이 다가오니께, 예수님에 대한 글짓기를 해 볼까?”

중학교에 입학한 지 한 달쯤 지난 어느 날, 국어 선생님은 열댓 명 되는 급우들에게 누렇게 변한 오래된 갱지를 하나씩 나누어 주시며 말씀하셨어요.

나는 쓸 말이 없었어요. 나는 예수님을 알지 못했거든요.

그리고 나는 하느님을 믿지 않았어요.

우리 반 학생들이 갱지를 메꾸지 못하는 것을 보신 선생님은 마음을 바꾸셨어요.

“그냥 마음에 내키는 대로 아무 글이나 써 보그라.”

“…….”

‘눈을 감으라 하신다.

그러면 보인다고 하신다.

세상이 온통 까맣다.

아무것도 안 보인다.

할머니는 보인다고 하신다.

눈을 더 꼬~옥 감아 보라 하신다.

그래도, 그래도

하느님은 보이지 않는다.

엄마 얼굴이 보인다.’

나는 끄적인 작문 종이를 서둘러 선생님에게 드리고 빨리 교실을 빠져나왔어요. 왠지 나는 초등학교 시작 할 때부터 선생님들과 가까이 있는 것이 편하지 않았어요.

나는 경상북도 시골에 외할머니하고 살았어요. 일 학년 반 급우들뿐 아니라 전교생은 모두 밭에 붙어 있는 집에서 살았어요. 근방 도시에서 버스로 한 시간 남짓 들어와야 하는 곳이었어요. 한 학년에 한 반이 있는 조그만 학교였어요. 교장 선생님은 수녀님이었어요. 교장 선생님 말고도 영어 선생님, 수학 선생님 그리고 국어 선생님 이렇게 세 분이 더 계셨어요. 한 선생님이 두 학년을 담당하셨어요.

영어 선생님이 우리 반 담임이셨어요. 선생님은 우리 학교에 오시기 바로 전에 대학을 졸업했다고 했어요. 반 친구들이 선생님에게는 애인이 있다고 쑥덕거렸어요. 웃는 얼굴이 예뻤어요. 웃으면 덧니가 조금 보였어요.

작문을 지어내고 한 달포가 지난 어느 날, 담임 선생님은 방과 후에 나를 남으라 하셨어요. 참, 내 이름은 추석형(錫亨)이에요.

“추‧석‧형, 집에 엿 붙여 놓고 온 기~가? 학교 끝나면 우찌 그리 빨리 도망가노?”

“…….”

“석행이 식구는 몇 맹이고?”

선생님은 처음에만 나를 ‘석형’이라 부르셨고 그다음부터는 ‘석행’이라고 부르셨어요.

“하나요”

“하나?”

“누꼬?”

“외할무니요…”

“엄매랑 아부지 어디 계시노?”

“…….”

“서울 가셨나?”

“…….”

“무라 캤노?”

“아부지는 엄매가 나 낳기 전에 죽었다카데요.”

“뭐라꼬? 아부지가? 그럼 엄매는?”

“죽었에요.”

“뭐라켔노? 돌아가셨다고?”

“…….”

“……언제?”

“삼 년 전에요.”

내가 쓴 작문을 국어 선생님에게서 받아 읽으셨던 스물 몇 살 선생님은 말없이 한참을 창밖만 보고 계셨어요.

“석행아, 오늘은 그만 가그라. 할머니가 기다리시겠꼬망.”

학교가 있는 곳에 장터랑 작은 성당이 있었어요. 나는 외할머니를 따라서 미사가 있는 주일 날에는 성당에 가곤 했어요. 미사는 한 달에 한 번 장이 파한 오후에 근처 도시에서 신부님이 오셔서 들여 주셨어요.

성당에 가는 일은 정말 맘에 들지 않는 일이었어요.

나는 하느님을 믿지 않았어요.

외할머니는 하느님은 좋으신 분이시고 어떤 기도도 다 들어주신다고 하셨어요. 엄마가 아플 때, 나는 정말 열심히 기도했어요. 아침에도, 학교에서도, 잠자리에서도 엄마를 꼭 낫게 해 주시라고 기도했어요. 하느님은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어요.

나는 하느님이 미웠어요. 가끔 하느님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세상을 만들고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하느님이라면 외할머니와 나를 내버려 두고 아버지와 어머니를 우리에게서 빼앗아 갈 리가 없을 것이니까요.

할머니는 몇 대 안 되는 상추랑 풋고추를 키우고 장이 서는 날 갖고 나가 팔곤 하셨어요. 나는 할머니를 따라 장에 가는 것을 좋아했어요. 장에는 볼 것들이 정말 많았거든요. 여름철에는 일주일에 두 번 주일날과 수요일에 장이 섰어요.

여름 방학이 되었어요. 친구들과 따로 만나서 놀지도 못했어요. 모두 밭일을 도와야 했거든요. 운이 좋은 날은 장터에서 친구들을 만나 잠깐이라도 함께 돌아다니면서 놀 수 있었어요. 비 오는 날에도 장은 섰어요.

장이 선 어느 날 오후 천막이 처 있지 않은 한 귀퉁이에서 할머니가 펼쳐 놓은 상추랑 풋고추를 허리를 굽혀 들여다보고 계시는 영어 선생님을 친구랑 돌아다니면서 놀다가 장터 한끝에서 보았어요. 그날 아침나절에는 비가 왔었거든요. 우산은 할머니랑 나를 모두 가려주기에는 작았어요. 비 맞아 꾸겨진 적삼 밑으로 늘어진 할머니의 젖가슴을 듬성듬성 기운 치마 주름이 가리고 있었어요. 외할머니 발등 쪼글쪼글한 주름 사이에는 맨발로 걸으면서 모여든 먼지가 땀이랑 빗방울이랑 어우러져 자리 잡고 있었어요. 그날따라 멀리서 본 할머니 얼굴에는 굵은 주름이 더 많았어요.

할머니가 창피했어요. 나는 선생님 눈에 띄지 않으려고 서둘러 천막이 처 있는 옆 골목으로 도망쳤어요. 선생님이 채소를 팔고 있는 할머니가 내 외할머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싫었어요.

여름 방학 두 번째 일요일에는 신부님이 오셔서 미사를 해 주신다고 할머니가 방학 시작하는 날부터 매일 노래를 부르시다시피 돼 뇌이셨어요. 할머니는 밭터에서 채소를 가꾸는 일 이외에 중얼중얼하면서 묵주 알을 굴리시는 것이 하루 일의 전부이었어요. 할머니의 묵주는 동그랗게 깎은 나무 알들로 된 것이었어요. 나무 알들은 내 엄지손가락의 첫마디만 했어요. 나무 알맹이 가운데로 구멍이 뚫려 있고 그 구멍으로 꼬여진 실이 지나가면서 연결되어 있었어요. 끝도 시작도 없어 보이는 나무 알 고리였는데 한 부분에 펜던트처럼 몇 개의 알이 더 달려 있었고, 그 끝에 십자가가 마무리하고 있었어요.

할머니의 묵주는 엄마가 남긴 것이었다고 했어요. 가끔 할머니 몰래 묵주를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아보곤 했어요. 엄마 냄새는 어떤 것이었을까…. 기억나지 않았어요.

주일 날이 왔어요. 미사는 오후 5시에 시작된다고 하였어요. 동네 사람들이 하나씩 둘씩 성당으로 모여들었어요. 나는 도망칠 수 없었어요. 풋고추와 상추를 이른 오후까지 모두 팔 수 있었던 할머니는 내 손목을 잡아끌고 제대 가까이 맨 앞줄로 가셨어요. 할머니 힘이 그렇게 센 줄은 미처 몰랐었어요. 자리를 비집고 나를 앉히고 당신도 앉았어요.

곧 지루한 미사가 시작될 판이었어요. 미사에 참석해야 한다는 것은 정말 맘에 들지 않는 일이었어요. 무슨 뜻인지도 모를 말을 지껄이는 신부님, ‘일어서라, 앉아라, 무릎을 꿇어라’ 하시는 할머니의 잔소리도 싫었어요.

뒤에서 누군가 조용하게 말을 붙여왔어요.

“석행이 잘 지냈나?”

뒷자리에 앉아 계셨던 영어 선생님을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이었어요. 선생님은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하얀 레이스로 된 미사 보를 쓰고 있었어요. 선생님은 예뻤어요. 나를 보고 환히 웃으셨어요. 선생님은 나를 좋아하시는 것 같았어요.

“선생님, 안녕 하신교?”

나는 얼른 일어나서 선생님 쪽으로 돌아섰어요. 그리고 선생님에게 비스듬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어요.

“얼굴이 까맣게 탔네. 옆에 계신 분이 할머니싱~가?”

옆에 있던 외할머니도 뒤로 돌아서시어 굽은 등을 더 굽혀서 깊이 선생님께 인사를 하셨어요.

“아~고, 선상님이요, 석행이 할매요. 이 동네에 사시능교?”

“아니예, 볼일이 있어서 신부님하고 왔슴니더.”

“아고, 넘 반갑습니더!”

“지난번 장터에서 뵈었습니더. 그때는 몰라뵈었는데, 석행이 할머니라카니, 정말 반갑습니더.”

“선상님, 불쌍한 우리 석행이 잘~부탁드립니더.”

선생님은 장터에서 풋고추를 팔던 할머니의 손주가 나라는 것을 그때 알게 된 것이었어요. 그리고 지루한 미사는 시작되었어요.

자꾸 선생님이 내 뒤통수만 보고 계시는 것 같았어요.

친했던 친구가 서울로 이사 간 것을 빼고 개학한 학교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어요. 친구는 자기 삼촌이 타시던 헌 자전거를 나에게 주고 갔어요. 낡기는 했지만, 자전거를 갖고 있다는 것이 왠지 멋지게 생각되었어요. 가끔 허름한 안장이랑 바퀴에서 먼지를 닦아 내고, 바큇살과 손잡이에 광을 내어주기도 했어요. 자전거로 학교를 다닐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편한지 그제야 알게 되었어요.

새 학기에 나는 될 수 있으면 더 자주 영어 선생님을 피해 다녔어요. 왠지 선생님과 마주친다는 것이 창피했어요. 영어 시간에도 선생님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어느덧 가을이 되었어요. 외할머니 생신은 가을이었어요. 엄마가 살아계셨을 때는 흰 쌀밥에 미역국과 소고기 동그랑땡을 만들곤 하셨어요. 나는 동그랑땡을 무척 좋아했어요. 엄마가 돌아가신 후에는 당신 생일날에 미역국 먹을 일이 없다고 할머니는 한 번도 미역국을 끓이지 않으셨어요. 그러니까 벌써 세 번이나 미역국을 먹지 못하고 할머니 생신이 지나간 셈이에요.

그날도 학교가 파하자마자 나는 서둘러 교실을 나왔어요.

“석행아! 거기 좀 스래이!”

학교 정문 쪽을 향해서 속도를 내어 페달을 밟고 있을 때, 누군가가 뒤에서 나를 향해 외치고 있었어요. 뒤돌아보니 영어 선생님이었어요. 무엇인가를 흔들면서 나를 향해 뛰어오고 있었어요. 멀리서 보니 뭔지 갈피가 잡히지 않는 얇고 넓적한 것을 한 손에 높이 들고 흔들면서 말이에요. 허물어져 가는 열 개의 교실을 담은 학교를 뒤로하고 달리어 오고 있는 선생님과 바람에 날리고 있는 선생님의 머리칼이 왠지 낯설게 느껴졌어요.

“와 그래요?”

“잠깐 서 보래이! 이눔 아~야!”

“…….”

“이것 갖다가 내일 아침 할마이 미역국 끓여 드리레이.”

“…….”

선생님은 낡은 자전거 뒷자리에 마른미역 한 판을 꽁꽁 묶어 달아 주셨어요.

내가 말을 안 들으면 내 이름 석형(錫亨)의 석(錫) 자는 ‘돌대가리’ 석(石) 자로 변한다고 위협하던 선생님, 낡은 자전거 뒷자리에 마른미역 한판을 달아 주시던 선생님,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셨던 그 영어 선생님은 삼 십 년도 더 지난 후에 할머니 수녀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오셨어요.

선생님의 애인은 예수님이었어요. 꿈으로 채워졌던 천여 날의 나의 세계, 반나절 걸어서야 갈 수 있었던 장터, 할머니가 마음을 묻으셨던 작고 초라한 성당이 있던 그곳으로 말이지요.

돌대가리 석형이가 아닌 무신론자 석형이에게 선생님, 아니 수녀님은 연락을 주셨어요. 선생님이 계신다는 수녀원으로 찾아갔어요. 수녀들이 쓰는 검은 ‘머릿수건’ 사이로 몇 줄기 백발이 보였어요. 야위신 선생님에게 수도복은 너무 커 보였어요. 수녀님의 눈동자는 고요하고 맑았고, 얼굴은 창백하지만 평화로웠지요. 나를 껴안아 주는 수녀님은 낙엽처럼 가벼웠어요.

“이젠 영감이 되어가고 있구나, 석행아!”

“선생님은 이제 할매네요!”

“석행이 니는 아직도 신이 없다고 생각하는기가?”

“하느님 생각, 하지 않고 산 지 오래됩니더.”

수녀님과 함께한 그 가을날 오후는 왠지 쓸쓸했어요. 수녀님은 나의 청년기에 대해서, 또 외할머니에 관해서 물으셨어요. 나는 어려웠던 대학 시절이나 마지막 몇 해를 힘들게 사셨던 할머니를 잊고 싶어 했었거든요. 수녀님은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그즈음에 수녀가 되신 것이었어요.

수녀님도 그리고 나도 이유는 다르지만, 가족 없이 외로운 삶을 살아왔더라고요.

미국에는 여러 곳에 한국이민 교회가 있다고 하셨어요. 삼십 년도 넘게 사목을 하셨던 것이었어요. 선생님은 주로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나 성당을 갈 수 없는 사람들을 찾아다니시면서 일을 하셨던 것이었어요. 친구도 많았데요. 친구 중에는 집 없는 거지들도 있었나 봐요. 먹을 것을 갖다 주기도 하셨고, 추운 겨울에는 기부받은 양말이랑 옷들을 모았다가 나누어 주곤 했었데요.

“석행아, 니 할머니한테 유산 받았나?”

“유산이라꼬요? 빤히 다 아시면서 무슨 소리하능기요?”

“나는 미국에서 유산 받았데이!”

“뭐라카요, 수녀님?”

어느 겨울밤 수녀님은 경찰서에서 전화를 받았데요. 늦은 밤이지만 경찰서에 출두해서 확인해 주었으면 하는 일이 있다는 것이었데요. 어느 노숙자가 길에서 죽었는데 그 노숙자의 주머니에서 유서가 발견되었다고 했어요.

‘내가 죽으면 한국인 OOOO 수녀에게 감사하였다고 전해 주십시오. 그리고 나의 전 재산을 수녀님에게 남깁니다.’

노숙자의 유산은 $512.00불이었다고 했어요. 수녀님은 그 이야기를 하시면서 웃지 않으셨어요.

“수녀님, 나는 외할머니에게서 엄마 묵주를 유산으로 받았어예.”

나는 상의 왼쪽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묵주를 선생님께 꺼내어 보여 드렸어요.

“니는 그걸 장식으로 갖고 다니나?”

“…….”

“언제 그 나무 알들이 묵주로 될끼가?”

“…이제 수녀님 오셨으니까, 생각해 보겠십니더.”

선생님은 고향 수녀원에 돌아오신 그해 흰 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날에 소천하셨어요.

수녀님의 장례미사 때 나는 할머니의 묵주를 꺼내어 코에 대어 보았어요. 엄마 냄새랑 할머니의 풋고추 향내가 풍겨 나왔어요. 그리고 나는 수녀님의 애인을 볼 수 있었어요.

친구 김파코미아 수녀에게 바친다.

앵무새와 친구들 (동화)

앵무새 날개는 뽀얀 하늘색이었어요. 손끝이 닿으면, 파란색은 보송보송할 것 같았어요. 그런데 색깔은 만지는 것이 아니잖아요? 가슴 털은 아주 찐~한 노란색이었고요. 지난주, 나를 방문했던 앵무새는 샌디에이고 동물원에서 살고 있다 했어요. 샌디에이고 동물원에는 환자를 방문하는 동물 대사들이 살고 있데요. 병원에는 사람들만 병문안할 수 있고 동물 식구들은 병원 안을 들어 올 수 조차 없데요. 그런데 동물 대사들은 예외래요.

우리 집에는 일곱 살 된 고양이, 몬티가 있어요. 나는 몬티가 보고 싶었어요. 내가 백혈병에서 완치된 7년 전 생일날, 새끼 고양이 몬티는 동물 보호소에서 우리 집으로 입양되었어요. 몬티는 나를 보러 올 수 없데요. 병원 원칙이라 했어요. 슬퍼하는 나에게 동물 대사가 대신 찾아온 것이었어요. 알록달록한 앵무새가요!

동물 대사들은 여우, 원숭이, 거북이, 독수리, 앵무새들이 대부분이래요. 길들인 뱀도 있데요. 이 동물 대사들은 원래 산이나 바다에서 살았데요. 어쩌다 몸을 다쳐서 동물 응급실에서 치료를 받게 되면서, 사람들과 가까워진 것이래요. 다친 동물들은 상처가 아물어도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경우가 많데요. 혼자 먹이를 찾기도 어렵고, 다른 동물들에게 먹히는 예도 있데요. 동물원에 그냥 머물게 된 동물원 식구 중에서 성품이 온순한 동물들은 특별한 훈련을 받고 대사가 된다고 했어요.

앵무새 동물 대사를 가지고 온 아저씨는 병실에 들어오시자마자, 새장 문을 열었어요. 날개를 펴고 앵무새가 방안을 빙~빙 날았어요. 아주 잠깐이요. 그러더니 앵무새는 날개를 접고 침대 이불 위에서 띠뚝 띠뚝 몇 발자국 걸었어요. 내 종아리 즈음에서 멈추어 섰어요. 그리고 한참 동안 나를 빤히 보았어요.

아저씨가 ‘하우 아 유?’ 하니까 앵무새는 ‘하우 아 유!’ 하고 나에게 말하는 것이었어요! 나는 너무나 신기해서 어떻게 앵무새에게 대답을 할지 몰랐답니다. 아빠와 엄마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어요.

오늘 아침나절, 아빠는 창문 넘어 먼 곳에 눈을 멈추고 한참을 계셨어요. 아빠 옆에 서 있던 엄마도 아주 아주 먼 곳에서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 듯했어요. 아빠랑 엄마는 나의 의사 선생님을 만나고 오신 참이었어요. 그리고 보니, 참, 오랜만에 아빠와 엄마는 같은 방에 있네요.

아빠와 엄마는 이혼했어요. 내가 초등학교 2학년, 그러니까 일곱 살 때이었어요. 키모테라피 받느라 무척 아팠던 때였어요. 엄마와 아빠는 자주 싸웠어요. 나 때문에 언제나 다투셨던 것 같아서, 속상했었어요. 내가 기억하는 나는 언제나 아팠던 것 같아요. 아빠랑 둘이서만 살게 되었던 어느 날, 나 때문에 이혼했느냐고 아빠에게 물었어요. 아빠는 그냥 나를 안아 주었지요. 아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어요.

내가 중환자실에서 일반 호스피스 소아 병실로 옮겨진 지, 이제 두 주가 되어가요. 나는 작년에 중학교에 입학했어요. 친구들 율이와 보니를 정말 좋아해요. 턱에 수염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는 율이를 보니와 나는 자주 놀렸어요. 우리는 합창반에 있었는데, 테너 파트였던 율이가 갑자기 할아버지 목소리를 내는 바람에, 함께 합창을 할 수 없게 되었어요. 보니는 나보다 키가 머리 하나 정도 커요. 보니도 나처럼 아빠랑 살고 있어요.

그러니까 새 학년이 시작되었을 때, 백혈병이 다시 나를 찾아온 것이었어요. 이번에는 배가 많이 아팠어요. 다시 약물치료를 시작했어요. 의사 선생님은 방사선 치료를 배 전체에다 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했어요. 그리고, 오늘 아침, 오랜만에 병실에서 만난 아빠와 엄마는 주치의의 불림을 받았던 것이었어요.

아빠는 내가 올여름 방학 때 엄마 집에 갈 수 없으리라 말씀하셨어요. 방학이 되면, 두 주 동안 나는 엄마네 집에 가서 지나곤 했거든요. 아빠는 이어서 느리게, 더듬거리면서 키모테라피는 고만하자고 말씀하셨어요. 나를 바라보시는 아빠의 눈은 깊고 진하고 어두웠어요. 나는 아빠의 이런 눈을 본 적이 있어요. 백혈병이 다시 나를 찾아왔을 때, 의사 선생님을 만나고 오신 후, 나를 바라보시던 아빠의 눈이 그랬어요.

그날 밤, 나는 커다란 독수리를 타고 하늘을 훨훨 신나게 나르는 꿈을 꾸었어요. 동물 대사로 왔던 노랗고 파란 앵무새가 친구 열 두 마리를 데리고 와서 내 옆에서 함께 날랐어요. 정말 멋있었어요. 하늘에서 내려다본 우리 학교 마당에는 율이와 보니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어요. 친구들은 활짝 웃으면서 나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어요.

중앙일보 6월 25일 2021년 발표되었다.

열무김치를 담그며

이 수필은 2021년 8월 8일 중앙일보 문예난에 발표됨.

오늘 오후 열무김치를 담그는 대대적인 행사를 치렀다. 내가 ‘작이’가 되는 날이었다. 많이 만들던, 조금 만들던, 김치를 만든다는 것은 나에게는 큰일이다. 담구어 놓은 김치를 사서 밥상에 올리면 쉽겠지만 만들어 먹는 습관이 된 지 오래된 터라 단순한 내 김치 맛에 길들여진 나와 식구들이다.

나는 새색시이고 남편은 풋풋한 청년이었던 시절에 우리는 한국식당, 한국 식품점이 없는 뉴욕주 북쪽 대학촌에서 쉽지 않은 미국 생활을 시작했다. 영어와 관습에 서툴러 눈치 보며 위축되는 경우가 많았던 때였다. 수련의 중에, 악센트는 있어도 의사소통이 원만한 인도나 필리핀, 중동 출신들에게 밀리는 기분이 자주 들었다.

중동사람들은 늘 당당해 보였다. 그들의 음식점은 대학가에 몇 군데 있었고, 중동 문화와 음식에 친근감을 나타내는 교수도 있어서 부러웠다. 이차대전 후, 일본이 패망했다 해도 미국과 일본이 엮인 역사가 미국인들이 일본인을 무시하지 않게 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주류 백인들은 비록 스시는 안 먹어도 템푸라 맛에 호들갑을 떨곤 했다. 중국과 국교는 단절되어 있던 때이지만, 중국 음식은 이미 세계에 알려져 있던 터였다. 고린내 나는 치즈를 먹으면서도, 인도사람들이 풍기는 카레 체취, 극동 사람들에게서 스며나오는 마늘 냄새를 공공연히 불쾌하다 해도 되는, 문화적으로 둔감하던 시절의 미국이었다. 그런 새 세상에 사는 우리 부부에게 반드시 있어야 하는 음식은 밥과 김치였다. 갓 난 장이 큰 딸아이에게 김치를 씻어 먹이곤 했다.

김치는 한국말과 같이 항상 우리와 함께 있어 왔다.

그때까지 나는 김치를 담가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음식을 만들어 본 경험이 없었다. 맛은 잘 기억하고 있었기에 추억 속의 맛을 찾아가면서 김치와 여러가지 음식을 만드는 실험이 시작되었다. 그 실험은 50여 년 가까이 된 미국 생활 안에서 지금껏도 지속되고 있다. 뭐 대단한 연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 레시피가 복잡하니까 내 식대로 재료를 생략하거나, 미국 특유의 식재로 바꾸어 넣는 실험을 해 본다는 의미이다. 당시 그곳에는 한국인들이 먹는 배추가 없어서 단단한 편에 속하는 브로콜리나 양배추 같은 것을 썼던 것이 첫 실험이었다. 브로콜리 김치는 그런대로 맛이 좋았다. 그러나 브로콜리 값이 너무 비싼 것이 흠이었다.

오늘 오후, 열무를 상처 나지 않게 살살, 조심히 씻었다. 그러고 나서 소금을 뿌렸다. ‘작이’가 하던 대로 나는 ‘작이’ 처럼 열무를 씻고, 소금도 ‘작이’ 흉내를 내면서 뿌렸다. ‘작이’는 승무를 추는 여승처럼, 팔을 위로 뻗고 공중에서 원을 그렸다. 엷은 바람결에 흔들리던 여승의 옷자락처럼 작은 손에 움켜쥔 소금을 흔들어서, 열무 위에 뿌렸다. 마당에서 진행된 ‘작이’의 여름 열무김치를 담그는 특별 공연은 그랬다. 그렇게 ‘작이’가 담그던 열무김치는 싱그럽고 담백했다.

‘작이’는 열무가 절여지는 동안 물 폭탄을 쏘면서 마당을 구석구석 청소하곤 했다. ‘작이’는 외로운 마음을 물로 씻어 내버리면서 달래었는지도 모르겠다. ‘작이’에게는 크고 작은 생각하기 싫은 티끌들이 많았을지 모른다. 어린 나이에 집안의 생계를 도와야 했던 꼬마 ‘작이’. 고향을 떠나와 번잡한 서울에서 겁 없이 시작했던 더부살이 직장이 힘들었을 것이다. 때로는 외롭고 슬펐을 것이다.

‘작이’. ‘작이’는 내가 어렸을 때 우리와 함께 살던 가사도우미였다. 작은아이라는 말을 줄여서 ‘작이’라 불렀다.

내가 어렸을 때, 한국은 가난했다. 농촌은 더 가난했다. 작히 부유하다고 할 수 없는 우리 집 같은 가정에서도 도우미를 쓰며 살았다. 도시 사람들은 ‘작이’네 고향 사람들보다 상대적으로 부자였다. 1960년대에는 한 집 건너 가사도우미를 고용하던 시대였다. 자신의 주린 배를 채울 수 있고, 무능한 부모에게 쥐꼬리만 한 모은 번 돈을 보내어 식구들을 먹여 살릴 방법이라고는 도우미가 되는 길밖에 없었다. 도우미 고용주를 입맛에 맞게 선별, 선택할 옵션은 상상조차도 할 수 없던 시절이었다. 열악한 환경도 마다하지 않고 일했다는 연구 보고서를 읽었다. 그 보고서에는 가사도우미 소녀들의 한 달 월급이 주인아저씨 담뱃값 정도였다고 한다. ‘작이’네를 도와주지 못했던 내 부모님들의 가정, 내 모국의 슬픈 역사이다.

한국을 떠난지 거의 반세기가 되어간다. 긴 세월이 흘렀건만, 여전히 나는 김치를 먹고, 김치를 좋아하고, ‘작이’가 가르쳐준 대로 김치를 담근다. 내 나이 도래이었던 ‘작이’도 나처럼 할머니가 되었겠지. 이젠 편히 살고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손주들에게 맛깔나는 여름 열무김치를 담가 먹이면서, 어려서 견디어내든 힘들었고 외로웠던 여름날들을 이야기해 주겠지. ‘작이’는, 그러면서, 제 손주들을 축복해 줄 것이다.

장애물 경기

장 교수님*, 벼르고 벼르던 분갈이를 했습니다. 실내에서 근근히 목숨을 이어왔던 이 식물의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만 아열대 과(科)에 속해서 일 년 내내 푸르고, 잎이 두껍고, 길쭉하고 단단합니다. 잎은 가을에만 지지 않고, 때가 되면 누렇게 생명을 잃어갑니다. 사람과는 달리, 세상 빛을 본 순서대로 생명을 돌려보냅니다. 숨 없는 잎은 그냥 몸체에 오랫동안 붙어 있지요. 나무라고 부르기에는 작고, 풀도 아니고, 꽃을 피우지 않기에 화초라고 부를 수가 없네요.

이 식물에 대해서 장황하게 이야기를 늘어놓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 식물은 고통의 삶을 끈질기게 잘 버티었어요. 생명의 신비로운 힘에 대해서 숙고하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교수님의 뜻깊었던 생애의 시작 부분이 이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서 연관을 짓게 된 것 같습니다. 나에게 병이라면 병일 수도 있는, 사고비약(思考飛躍: flight of idea) 증상이 발동한 듯 합니다. 제 생각이 외람되다면, 용서해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이 플랜트가 메마른 흙 속에 뿌리를 박고, 갈증을 참으면서 사 반세기를 살아 남은 흔적은 꺼끌꺼글하고 울퉁불퉁한 거친 표면, 굽고, 뒤틀린 줄기, 하늘 대신 땅을 보고 있는 머리채에서 볼 수 있지요. 큰 딸아이에게서 나는 이 식물을 입양했습니다. 입양된 내 집에서도 오늘 분갈이를 받을 때까지 힘겹게 몇 해를 더 지났습니다. 분갈이라는 밀렸던 숙제를 하고 나니, 나는 비로소 통회의 고백성사(告白聖事)를 하고, 보속(補贖)을 끝낸 기분입니다. 이 플랜트가 인생은 ‘장애물 경기’라고 표현했던 당신을 만나보라고 나에게 말합니다.

이 플랜트가 인도 한 곳은, 은퇴하면 읽는다고 쌓아 둔 책더미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그대 만난 뒤 삶에 눈떴네’라는 책이 눈에 띄었습니다. 소아암 전문의였던 레이첼 나오미 레멘 박사가 쓴 ‘Kitchen Table Wisdom’을 예수회 신부이자 서강대 교수, 당신이 암으로 입원해 있을 당시 원목 사제로 활동하던 당신의 후배인 류해욱 신부가 번역한 책이지요. 책을 읽으면서, 내가 몰랐던 당신에게, 이제야 책을 통해서 조금 알게 된 당신에게, 세상은 당신을 절대로 잊을 수 없고,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졌습니다.

왠지 아십니까? 이 책은 당신이 쓴 것도, 당신이 번역한 것도 아니지만, 당신의 혼이 듬뿍 묻어 있기 때문이어요. 레멘 박사가 쓴 원서에는 이 한국어 번역본의 서문에 언급된 당신에 관한 이야기가 없지요. 책이 한국에서 출판되고 나서 3년이 지난 후, 당신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는 당신에 대해서 알고 싶어졌습니다. 인터넷에서 당신에 대한 글, 사진들을 찾아 읽었고, 보았습니다. 소아마비라는 전염병이 하필이면 한 다리가 아닌, 두 다리 모두를 강타했는지 안타깝더라고요. 그런 경우는 드문데 말입니다. 신체장애가 없는 사람들은 두 번 생각하지 않고 하는 일상의 일들, 학교 활동이 도움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었겠지요. 당신의 발이 되어 화장실까지도 안아다 주셨다던 어머님, 신체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상급학교 입학원서조차 거부당하였을 때마다 필사적인 노력을 하시었고 방파제가 되어 주셨다던 서울대 영문과 교수이었던 아버님, 사회정의가 없는 미개했던 한국 사회와 한국 교육계의 관습을 과감히 깨 주신 파란 눈의 서강대학 영문과 학과장 (고) 브르닉 신부님(미국명: Jerome E. Brewing), 그리고 앞서가던 서강대학이야말로 당신이 장애물 경기를 훌륭히 해 낼 수 있게 함께 했습니다. 무엇보다, 선수이었던 당신은 횃불을 들고, 멋있게 결승선을 통과했습니다. 박수를 보냅니다!

이쯤에서 나는 다음 이야기를 꼭 쓰고 싶습니다. 정의나 평등에 둔감했던 교육자들, 그들의 군집단체인 교육계의 미개함과 그들이 행하였던 행패에 분노하는 나 자신을 봅니다. 신체장애를 가졌다고 입학원서조차 제출할 수 없었던 한국의 씨스템, 교육자로서 그런 부조리함을 스스로 교정하지 않았던 비겁한 사람들의 온상이었던 나의 모국 한국이었습니다. 작은 예를 들어봅니다. 서강대학에서 체육이 필수 교양 과목이었던 당시, 두 다리를 쓸 수 없는 당신에게 체육은 할 수 없으니, 앉아서 수업을 참관하여야 학점을 준다고 했다면서요? 그런데 체육관은 어디에 있었나요? 교정 외곽, 비탈 위에 있다 했습니다. 비 오는 날에, 층계도 없는 미끄러운 둔덕을 목발에 의지해서 땀흘리며 올라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다가, 나도, 브르닉 신부님처럼 울분했고, 신부님처럼 울었습니다.

척박한 환경을 겪어내며 살아 준 나의 플랜트가 저를 침묵하게 합니다. 희망과 용기를 날렀던 전사(戰士)이었던 당신은 서강대학 영문과 교수이자, 학자, 수필가로서 차세대 후배들에게 퍼즐을 맞추는 지혜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나도 이 길고 험한 장애물 경기에서 우승해서 승리의 횃불을 높이 처들고, 언젠가 내 고향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곧 준비를 시작하려 합니다.

*(고) 장 영희 (1952-2009) 서강대학교 영문과 교수, 수필가

이 수필은 중앙일보 ‘문예난’ 에 2021년 10월 15일 발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