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황제, 순정효황후 그리고 한국의 여성교육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본적인 지식을 우리는 초등학교부터 고교시절 동안 제공받는다. 왠만한 국가들은 ‘의무교육(compulsory education’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취학학령의 아동을 가진 부모들 한테는 의무가 되고, 취학학령 아동들에게는 권리로 부여된다. 국가는 국민이 내는 세금에서 경비를 충당하게 된다. 나라마다 의무교육기간은 좀 다르다.

Formal schooling 은 보통 12년으로 18살 때 까지 포함하고, 의무교육은 16살 까지라고 되어있다. 미국 federal budget 의 10%가 교육에 할당된다 한다. 각 State 마다 받아 쓰는 재정이 갈라 지방자체기관, State가 공교육 자금조달 책임을 진다.

내가 받은 기본교육은 모두 한국에서 있었고, 고등교육도 한국에서 끝내었다. 미국에서는 수련의 과정을 지내면서 고=고등교육에 참여했다면 틀린 말은 아니다.

한국에서의 공교육의 내용를 별로 기억 하지 못한다. 내가 충실한 학생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두가지, 지금에 와서야 비로소 깨달은 간접적, 직접적 오해의 정보는 ‘한국어’에 대한 것과, 한국의 역사 특히 ‘구한말(舊韓末) 역사’에 대한 것이었다. 내가 공교육을 받을 때는 한국이 독립국가 이었을 때이었지만, 교사들이나 주위의 어른들은 거의 일제강점기 때 교육을 받았던 터이었기에 한국어와 순종황제에 대한 은근한 비하(卑下)적인 코멘트가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한글은 조선인들이 사는 집의 창문에서 그 형태를 따 온 것이라는 것, 순종황제는 능력없는 모자라는 사람이었다는 내용들이었다.

‘한국어진흥재단’ 이사장을 하면서 한글에 대한 우수성, 과학성, 창조의 근원을 더 확실히 알게 되었다. 인간의 구강과 후두를 연구하셨던 세종께서 그 모양으로 만드신 훌륭한 글짜가 한글이다.

조선의 27대 왕 순종황제는 병약하시기는 하였어도 1908년 한국 최초 공립여학교를 칙령으로 만드신, 여성교육에 앞서 가시던 분이었다. 그의 휘는 이척(李坧)으로1874년 3월 25일(음력 2월 8일) 고종과 명성황후의 장남으로 출생, 고종을 받들어 ‘홍범 14조’ 발표에도 함께 하였다한다. 1895년 1월 7일 주한일본공사 이노우에(井上馨)와 내부대신 박영효(朴泳孝)의 권고에 따라, 고종황제는 대원군, 왕세자, 종친 및 군신(群臣)을 거느리고 종묘에 나아가 독립서고문(獨立誓告文)과 함께  발표한 것이었다.

「홍범14조」란 “  청나라의 대한종주권(對韓宗主權) 부인, 대원군과 명성황후의 정치개입 배제, 근대적인 내각제도 확립, 탁지아문 관할하의 재정 일원화, 조세법정주의 및 예산제도 수립, 지방제도 개편, 해외유학생 파견에 의한 외국 선진문물 도입, 국민개병주의에 입각한 군사제도 확립, 법치주의에 의거한 국민의 생명 및 재산권 보호, 문벌 폐지와 능력에 따른 인재등용” 의 내용으로 순한글체•순한문체•국한문혼용체로 각각 작성하여 선포한 것이라고 한다. 이는 갑오개혁의 목표를 강령으로 선언한 비록, 일본공사의 권고에서 비롯되긴 했으나, 당시 개화파 관료들의 개혁의지를 반영한 것으로 한국 최초의 근대적 정책백서이자 최초의 헌법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 국왕이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을 처음으로 내외에 선포한 문서이기도 해서 그 역사적 의의가 크다고 본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따오고, 문장을 읽기 쉽게 변형한 것임.)

순종황제는 한일합방 조약에 날인을 거부했다. 이완용이 대신 날인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순종황제의 첫 황후 사망 후 두번째 황태자비로 책봉된 12세의 순정효황후는 친일파 윤택영의 딸이었지만 오빠 윤홍섭처럼 독립사상이 높으셨던 분이었다. 한일합방 조약 날인을 위해 필요한 임금님의 옥새를 치마폭에 감추었다가 친일파 삼촌에게 강제로 빼앗긴 일화가 있다고 전해진다. 해방 후, 또 한국전 이후 황후는 가난하게 사셨다 전해진다. 친오빠인 윤홍섭 독립유공자께서는 미국에서 신익희씨등 독립운동가를 도왔고, 한국민주당 창당에 동참, 심사부원으로 지내며 대한제국의 초기의 정치인으로 지냈으며 지금의 숙명여고, 숙명여대로 발전한 숙명학원의 3대 이사장을 지냈다. 이 분의 두 딸들이 경기여중고 출신이다.

이 독립투사, 양반, 귀족의 막내 딸은 나의 친구이다.

‘…내가 구한말에 태어났더라면 너랑 친구가 될 수 없었을거야!                                                              나는 평민이거나 하인이었을터이니?’

‘…무엇이든 마지막은 비운이 감돌아~~~’

‘…우리들의 마지막도 그럴까?’

‘…우리들이 만들기 나름이야.                                                                                                                       모두 흙으로 돌아가잖아…’

임시정부 창립 100주년과 나의 모교, 경기여고

지난 달 4월 19일 USC 에서 ‘ Commemorating The Centennial: Spring 1919,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And The Digitized Archives’ 이라는 제목으로 conference 가 있었다. USC 에 재직하고 있는 한국계통 역사학 교수들과 비혈통계 타 대학 석학들이 한국의 삼일운동, 임시정부를 주제로 그들이 찾아내고, 연구해 온 자료들을 발표했다. 대표적 발표자는 Indiana University 석좌교수 Michael Robinson, Rikkyo University 교수 Mark Caprio, UC Davis Richard Kim 교수이었고 commentary 를 Sunyoung Park, David Yoo, Kristine Dennehy 교수들이 하였다.
이 학회는 한 나절 정도 걸리게 짜여 있었다. 오랫만에 방문한 USC 캠퍼스는 아름다웠다. 잘 가꾸어진 정원, 오래된 나무들, 유서 깊어 보이는 빌딩들, 여유있어 보이는 학생들이 잘 어울려 보였다. 학회 참석자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아쉬웠다.
그곳에서 예전에 몰랐던, 어쩌면 배웠지만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정보들이 논의 되었다. 삼일운동과 상해임시정부는 서로 연통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레 같은 때에 일어났다는 것과 1918년 발표되었던 그당시 미국대통령이었던 W. Wilson 의 ‘Fourteen Points’ 는 유럽의 평화적인 나라 설립 또는 재설립에 관한 것이었지 식민지국가를 겨냥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일본의 조선강점의 과정, 강점 후 징병되어간 조선학병들과 그들의 말로, 전범죄인으로 사형된 한국인들에 대한 언급이 강의 중에 있었다. 이것이 학회의 focus 가 아니었기 때문에 간단한 언급으로 끝났던 항목이다.
Wilson 대통령은 석학들을 고용하여 연구해서 ‘Fourteen Points’를 발표했던 것이라는 것을 학회가 끝난 다음 내가 찾아 본 결과 알게 되었다. 삼일운동은 고종황제 장례식을 기해 곳곳에서 한국민들이 붕기한 독립운동이었다. 고종황제는 1월에 타계했는데, 절차상 장례식 까지 시간이 걸렸고, 당시는 음력을 쓰고 있었기에 약간의 착오는 있을 것이라고 한다.

어떻든 일본인에 의한 동양인들의 학살은 5백만 전후이고, 일본군대로 징병되어 죽어간 젊은청년들, 생체실험의 희생자, 위안부 희생자에 대한 잔혹함은 유대인 홀로코스트보다 알려져 있지 않다. 독일인의 유대인 학살에 대하여 세계와 유대인 자신들이 focus 를 두어조명했던 것과는 강도를 달리한다.
되돌아 보면 나는 제대로 역사과목을 배운 적이 없다. 살아가는데 필요한 현대사를 배우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역사에 대한 무식함을 다음의 이야기로 넘어가면서 토론하고 싶다. 나는 서울 정동에 있던 경기여고를 졸업했다. 가고 싶어서 간 학교도 아니고, 언니가 졸업한 학교니까 당연히 나도 보내진 학교이다. 그랬던 어린시절이다 보니, 학교에 관심이 있을리 없었다. 11년 전, 경기여고는 개교 100주년 행사를 크게 하였고 졸업생들의 모금으로 동창회관도 지었다.
이 때 발행된 기념호에 의하면 내가 다녔던 경기여중고교는 1908년 순종의 칙령에 의해 설립된 한국 최초의 관립 고등여학교이었다고 한다. 들여다 보니, 최초의 교장은 한국인 어윤적 선생이었고 1913년 부터 1945년 동안 다섯명의 교장이 있었는데 그중 네 명은 일본인이었다. 나는 한 번도 일본인 교장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어떻게 교육을 받았는지에 대한 거론도 듣지 못했다.
경기여중고는 지금도 건재한다. 함께 걸어온 명문사립학교 이화여고, 숙명여고등도 건재한다. 그외의 한국여성 교육의 산지였던 많은 중고교들이 지금도 살아 있음에 감사한다. 비록 애교심은 커녕, 무관심하게 교정과 교실을 드나들며 지나버린 학창시절이지만, 알게 모르게 받았던 학교에서의 교육은 가정에서 받은 밥상머리 교육과 함께 내 안에서 지속적인 교육관념으로 자리잡고 있다.

한글, 문교부 그리고 ‘한국어진흥재단’

열 살도 되기 전 어느 여름날이었다. 비가 부슬 부슬 내리고 있었다.  여름비를 맞고 있는 닭들이 슬퍼 보였다.  갈 곳이 없다는 머언 아버지 지인의 아들이라는 아저씨가 우리 집에 얹혀 살고 있었다. 여름비가 오던 그 날, 아저씨는 구속되었다. 병역기피 죄목으로 끌려가던 아저씨의 뒷모습이 초라해서 슬펏다. 비 맞고 있는 보라색 백일홍 꽃도 슬퍼 보였다.

청소년 시절을 한국서 지나고 나는 뉴욕주 Upstate, Syracuse 에 있는 뉴욕주립대학병원에서 종양방사선학 수련의 과정 후 엘에이에 정착했다. 어느 날 오피스 근처 홈디포에서 집 없는 까만 고양이를 보았다. 애처러운 마음에 가던 길을 멈추고 녀석을 보았다.   내 기억 속에 남아있던 아저씨의 초라했던 어깨는 위험을 무릅쓰고 던져주는 밥에  살금살금 가까이 오던 홈리스 까만 고양이의 매말라 드러난 등판의 등골뼈 위로 겹쳐저 다가왔다.

이렇게 홈리스 고양이들 때문에 연관이 된 기관이 한국어진흥재단이다.

‘무슨 소리?’ 라는 반문은 ‘한국어진흥재단’으로 돌아간다. 당시 ‘한국어진흥재단’ 이사장으로 있던 문애리 교수와 나는 홈리스 고양이들 때문에 얽힌 사이이었던 것이다!

UCLA 사회학과 교수님과 종양방사선학 전문의인 나는 개인적으로는 서로 모르는 사이이었고,  각각 다른 곳에서 고양이들을 rescue 하고 있었다.  우리들은 가끔 신문기사를 통해서 상대방을 인지하고 있는 정도이었다. 우리는 고양이구제 사업을 하다가 밸리에 있는 성요셉 성당에서  만나게 되었다. 성요셉 성당 마당에는 지금의 성당 재건축 전에, 여러 선데이 스쿨 트레일러가 있었는데  ‘밸리 출신’의 홈리스 고양이들이 트레일러 밑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이야기가 옆으로 새지만, 홈디포의 까만 고양이, 성당안의 다섯마리 새끼를 낳은 어미고양이는 내가 입양했고, 까만 고양이는 몇 년을 내 집에서 살다가 삼 년 전에 죽었다.

SATII Korean을 College Board 에 상정하기 위한 petition drive에 참여했던 엘에이 주민들, 교민사회의 리더들, 한국기업의 재정적인 도움 (예: 삼성)으로  SATII Korean 이 College Board 에 의해 1994년 채택되었다. 당시의 열정은  AP Korean 을 위해 이어지고 그래서 탄생한 것이  비영리단체 ‘한국어진흥재단’ 이다.  홈리스 고양이 구출작업에 시간을 쓰고 있던 당시 문애리 교수는  ‘한국어진흥재단’의 이사장이었고, 그는 나를 이사회로 이끌었다.

‘한국어진흥재단(이하 재단)’은 미 주류사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전문인 이사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재단의 활동은 주말학교의 그것과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주말학교는 우리 한국인의 혈통 자녀들이 한국어를 배우는 시스템으로 외교부 산하 재외동포재단의 재정적인 도움을 받는다. 한국아이들이기 때문에 한국에서 출판된 교과서로 배우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재단’의 활동은 비혈통, 혈통 자녀들을 타겟으로 한다. 정규학교에 Spanish, French, Chinese, Japanese 등과 동등하게 class를 넣어, 한국어를 외국어로 채택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이 활동에 관여된 여러개의 사업은 필수적인 것으로 비혈통 학생들을 위한 교과서 만드는 일 이외에도, 한국어교사양성, 한국어교사시험준비등이 그 예로 ‘재단’은 공식적으로 9가지 사업을 하고 있다.

한국정부의 교육부를 통해 재정적 지원을 교육원이 대행하고, 지원받는 funding의 밸런스는 언제나 ‘zero (0)’ 로  한 해를 마감한다. 사업에 쓸 만큼만 신청하기 때문에 밸런스가 zero 인 것은 당연하다. 이사들은 무료봉사를 하고, 약 20명이 있다.

뒤돌아 보니, 나는 실상 의학과 때 문교부 장학금을 받은 적이 있다. merit base 로 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연결되었던 문교부. 많은 세월이 지난 후 다시 연결된 문교부, 모국을 떠난 새로운 내 나라에서 모국의 언어와 관련된 활동을 하고 있는 나를 생각해 본다. 2년 전 내가 이사장이 되었고, 작년 한글날에 ‘재단’은 그 업적을 한국정부에서 인정받아 대통령상을 한글날에 받았다.

그리고 나는 한글로 미주 중알일보 ‘오픈 업’이라는 컬럼에 글을 쓰고 있지 않은가! 한글, 문교부, ‘한국어진흥재단’, ‘재단’ 이사장직, 올해  한글날에 있을 25주년 기념 갈라, 25주년 기념 책자발행, 한식세계화협회와의 동업으로 효율적인 한국문화와 한글의 진흥.

없었던 모국에 대한 애국심을 싹 틔우고 있는 활동에 여념 없는 자신을 들여다 보고 있는 아침이다.

특별했던 행사: Asian Pacific American Heritage Month 에 부치다 (사진참조)

한국혈통의 미국교민들에게 5월은 특별한 달이다. 모국의 5월 5일 어린이날, 5월 8일 어머니날, 5월 15일 스승의 날 뿐 아니라 지금의 내나라가 된 미국의 5월 한달이 아시아 태평양 문화유산의 달 ( 이하: 아태문화유산의 달Asian Pacific American Heritage Month)이기 때문이다. 1896년 미국대륙횡단 기차길이 중국인 노동자들에 의해서 5월에 완성 되었고, 1943년 일본인 이민자들이 이 땅에 발을 처음 디딘 달이 5월이어서 미국은 1978년에 5월을 동양문화 유산의 달로 선포하게 되었다.

지난 주말, 5월 11일 그라나다 힐스 공립 도서관에서 한국혈통을 가진 어린이들과 한국태생 일세, 1.5세 이민자들이 한국 전통음악과 무용으로 아태문화유산의 달을 기념하는 행사를 가졌다. 5세 부터 70세에 이르는 유희자 전통 음악 무용학원 학생들 24명은 부채춤으로 시작해서 가야금, 양금, 아쟁 세가지의 현악기와 하나북, 난타북, 장고, 징, 굉가리등 5가지 종류의 타악기를 써서 자진모리, 농악, 꼭두각시, 휘모리, 가야금산조 전통음악을 연주하고 사물놀이 협연을 마지막으로 음악회를 마쳤다.

다섯살 짜리 두명의 각시들은 색동저고리에 짧은 치마를 입고, 여섯살 자리 꼭두는 신랑맵시를 하고 꼭두각시 춤을 추어 관객을 사로 잡았다. 또 자패증을 앓고 있는 쌔미 김 아동은 장고 를 즐겁게 치면서 음악으로 치유의 길 찾고 있는 모습이 좋았다.

서양곡과 찬송가를 가야금으로, 한국전통 악기들로 협연할 수 있다는 것은 놀랍다. ‘You raised me up!’ 을 가냘프게, 때로는 힘차게 가야금이 튕겨주었고, 가야금, 양금, 아쟁, 장고가 ‘Amazing Grace’를 연주하여 우리들의 속죄와 감사함을 높으신 분에게 올려드렸다. 쟌 뉴톤은 아마도 그의 하느님으로 향한 시(詩)가 한국 전통악기로 연주되리라는 것을 18세기에 알지 못했을 것이었다.

참으로 특별하고 훌륭한 음악회이었다.

잊고 살았다!

분주하다는 핑게로 한동안 정리하지 못했던 서류들, 여기 저기 널려 있는 글들, 일기를 쓴 책들을 구분해서 치우다가 40년 하고도 한 달 전인 1979년 3월 29일, 낮에 썼던 일기를 보았다. 수련과정 마지막 해로 병리학 교실에 순환근무를 갔던 때이라고 적혀 있다. 나는 종양방사선학 수련의 과정을 뉴욕주립대학 업스테이트 과학센터에서 받았다. 수련의들은 본인의 전문분야와 관련된 또 다른 특수 전문과에 순환근무를 하므로서 본인의 전문성의 판도를 넓히고 심도 깊은 의학을 연수해 간다. 나의 전문직에는병리학, 진단방사선학, 종양내과학, 종양외과학이 필수적인 로테이션이다.

일기 이야기를 조금 하고 지나간다. 나는 의과대학 시절 부터 일기를 가끔씩 써 왔다. 일기를 아무 때나 쓴다. 어떤 때는 하루에도 여러번 끼적인 경우도 있다. 매일 쓰지도 않는다. 되 돌아가 읽는 적은 드물다. 언젠가 쌓여 있는 일기책들을 모두 소각하리라 마음 먹고 있다.

이 40 여년 전에 쓴 일기는 반 페이지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그 날 큰 딸에게 편지 형식으로 일기를 쓰고 있다. 큰 딸은 세살이 채 되기 전이었다. 여러가지 일을 동시에 해야 하는 젊은 엄마, 그래서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이 짧아 안타까와 하는 마음으로 엄마는 시대적 우울 그리고 인종차별에 대해 쓰면서 엄마의 바람을 말하고 있다. 엄마는 아이가 커서 훌륭한 의사가 되어 ‘시시껄렁한 미국사람들 코를 납작하게 해 주기를’ 바란다고 쓰고 있다. 여기서 미국사람들이란 백인 남자 의사들을 칭하는 것일 것이다. 아이는 이 일기를 읽은 적이 없고, 앞으로도 읽게 되지 않을 것이다.

세월이 흘렀다. 내가 일기장 노트의 공간에 인종차별에 대한 내 마음을 끄적였던 1979년 보다 일 년 전인 1978년에 다민족 사회의 미국은 5월 첫 열흘을 ‘아시아 태평양 문화유산 (이하 아태문화유산)의 날’로 정했다. 5월은 일본인 이민자들이 이 땅에 발을 처음 디딘 달(1943년)이고, 중국인들의 노고로 미국대륙횡단 기차길이 완성된 달(1896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14년 후인 1992년 상원은 열흘이 아닌 5월 한 달 동안으로 늘렸다.

미국의 인권운동이 있었던 1960년 대 이전에는 동양인을 ‘오리엔털’이라 불렀다. 이 단어는 약간 모욕적인 의미가 들어 있다. 샌프란시스코 대학가에서 중국, 필리핀, 일본계 학생들의 끈임없는 투쟁과 하와이 상원의원이었던 일본계 팻지 밍크, 미시간 디트로이트에서 있었던 중국계 청년 빈센트 친 인종오해-살인사건등이 ‘아태문화 유산의 달’을 확고히 하는데 일조를 했다고 보아도 된다.

빈센트 친은 자동차업조계 노동자였던 아버지와 양아들에 의해 살해된 청년이다. 당시 일본산 작은 자동차들의 수입으로 미국 자동차 업계는 경제적 타격을 크게 받았다. 빈센트를 일본인으로 오해하고, 증오감에서 저지른 살인범죄였다. 감옥형이 아닌 3천불의 벌금과 집행유예로 가볍게 처리된 이 사건을 ‘삼천불 짜리 살인 면허’라고 할 정도로 많은 파문을 일으켰다.

1860년에 미국 인구의 0.1%였던 아태계는 150년이 지난 2010년에도 겨우 4.8%를 차지하고 있다. 40대 중반이 된 큰 딸은 나 처럼 종양방사선 전문의가 되었고, 교육에 관심을 둔 박사인 둘째 딸은 미국공립중고교 내의 기기(器機)의 불평등한 분배에 대한 연구를 발표한 바 있다. 화내지 않고 시간은 걸리지만 실력을 쌓고 내공을 기르면 된다. 그리고 우리는 잊고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