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트렌드가 아닌 트렌스

 

오랫만에 고교 졸업식에 참석했다. 여학교인 이 학교 졸업생들은 흰 드레스를 입고, 교사들은 가운과 사각모를 쓰고 입장했다. 졸업생들의 등장하는 모습은 멋 있었다. 인생의 새로운 챕터를 쓸 준비를 하며, 이들은 졸업식장을 나설 것이다.

흰 드레스를 입고 입장하는 졸업생들 중에 회색 양복에 핑크색 부케를 양복주머니 위에 꽂은 두명의 핸섬한 청년들이 끼어 있었다. 그들은 트렌스젠더(이하 트렌스)라고 했다. 고교 3학년 때 자신의 아이덴티디를 알게되고, 외모상의 성전환을 실행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신체내부의 변경 여부는 모른다. 트렌스가 아니고 인터섹스 (間性)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학교는 이들을 퇴학시키지 않았다. 학교의 결정은 옳은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여자 800m 국제경기에서 두번의 금메달을 받은 경력이 있는 육상선수 세메냐 (Mokgadi Caster Semenya)에 대한 기사가 눈을 끈다. 그녀의 재능이 남성적 외모와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녀가 트렌스 또는 인터섹스일지 모른다는 추측이다. 스포츠중재재판소는 그녀에게 약물로 남성호르몬 수치를 낮춰야 육상 여자부 경기에 출전할 수 있다고 통고했다고 보도되었다. 의아하다. 기본권의 침범으로 보인다.

남성호르몬 수치가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외부투약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한다. 그렇다면 이 판결은 인권침해라는 관점 이외에도, 한 개인의 생리적인 타고난 상태에 대한 공개적 도전으로도 볼 수 있고, 위험한 판례 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트렌스, 인터섹스는 호모, 게이 같은 성취향성과 다르다. 트렌스는 태어났을 때 주어진 성별(性別gender)이 싫어서 자라면서 반대의 성별을 추구할 때 일커르는 말이다. 인터섹스는 선천적으로 밖으로 보이는 성별과 내부적인 성별이 일치하지 않는 애매한 경우를 말한다. 즉 남자 또는 여자, 그 어느 카테고리에도 맞추기 어려운 생식기관을 갖고 태어난 사람들을 말한다.

참고로 우리들에게는 반대 성의 호르몬이 소량씩 분비된다. 또 트렌스 남성은 임신 할 수도 있다. 유난히 체구가 큰 여성이 전립선암으로, 또 키작은 털보 남성이 유방암으로 의뢰되어 왔던 기억이 새롭다.

졸업생 트렌스 청년들, 또 세메냐 선수가 겪고 있는 입장을 그냥 부인할 수는 없는 시대이다. 미국에는 약 백 사십만 명의 성인들이 자신은 트렌스라고 표현하는데, 실상 그 숫자는 더 많을 것으로 추산된다. 인터섹스는 생각보다 많은 100명 중 한명이라 보고되어 있다.

트렌스의 대다수는 밀레니아 즉 현제 20세에서 39세 사이의 젊은이들로 증가추세 (현재8.1%) 이고, 여성들이 남성보다 많다. 10대들의 실제 숫자는 불분명하지만 미네소타 대학 닉 라이더 연구원의 보고에 의하면, 2016년 미네소타 주의81,000명 십대 청소년들을 상대로 한 연구에서 2,200명 즉 2.7%가 자신은 트랜스 또는 ‘성(性)비확인그룹 (gender non-confirming)’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과연 트렌스가 증가추세일까?

아닐 것이다. 태고적 부터 있었다. 세계 대전을 치른 후, 세상은 인권의 존중, 언론의 자유, 포용하는 사회를 만들려 노력하여 왔고, 이는 덤으로 알게 된 통계, 정보가 아닐까 싶다. 포용하는 사회라 하지만 트렌스나 인터색스들을 ‘죄인’처럼 단죄하는 우리들이다. 차별당하고 기본권이 무시되고, 증오범죄의 대상이 되는 사례를 흔히 보아왔다.

졸업식장에서 본 두 청년, 세메냐의 안전을 빌자. 젊은 그들이 걸어야 하는 길이 평탄하지 않고, 험난할 수도 있을 것을 알므로, 마음이 편치 않다.

여든 다섯 살 동생이 스물 여섯살 형을 만나다

‘형, 나 왔어.’ 85세 유경이 말했다.
‘수고했다, 나 대신.’ 26살 형, 응경이 답했다.

유경은 다시 말했다.
‘형, 수고한 것 없어. 형수를 돌보아주지 않았지. 난 형수를 싫어 했어. 형은 내가 왜 그랬는지 알지… 그리고 형수는 아주 이악(利惡 or이약 利掠)했어. 어머니, 아버지와 동생들 힘들 때 아주 잘 살았어.’

응경이 답했다.
‘알고 있다. 형수도 이곳에 왔지. 우리 모두 다~ 불쌍한 삶을 산 것이 아니었겠니?’

 

 

 

큰오빠 생각을 종종한다. 나에게 큰오빠는 유경이다. 응경은 한국전에서 전사했고, 나는 그 때 세살이었다. 응경은 두 딸과 젊은 아내를 남기었다. 유경은 2년 전에 소천했다.

참, 삶이란 허무하기만 하다.

빚을 얻어 의과대학을 다녀야 하는 세상을 치료하는 비젼

 

은퇴는 말로만 한 것 같다. 지난 주 자궁경부암 근접치료 시술을 하러 근무했어야 했다. 아직도 의업을 뒤로 하지 못하고 있는 내 자신을 본다. 환자들을 의식한다. 차세대가 겪고 있는 의료업의 어려움에 대한 생각에 마음이 쓰인다.

지난 주에 한국판 뉴스에서 “레지던트 ‘위험한 알바’ 45만원 받고 요양병원 당직” (2019.5.21) 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읽었다. 81세의 할머니가 입원 20일 만에 사망했다는 기사였다. 내용은 요양병원의 당직시스템의 허술함에 대한 것이었다. 단순히 풀어 말하자면, 병원장은 레지던트들을 하루 밤 45만원(약 390달러)을 지불하고 야간근무를 의뢰해 왔다고 한다. 하루 밤이란 12시간 이상의 시간을 말하는 것이다.

정리해서 생각해 보면, 요양병원에는 의사수가 모자라거나, 수익부족 또는 적자운영이라는 암시이다. 또 레지던트들은 월급 이외에도 돈을 벌어야 하는 처지에 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 환경이 한국이라면, 여기 미국은 어떤가? 이곳은 병원운영은 더 합리적이겠지만 장시간 노동, 수면부족의 전공의들의 삶의 형태는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이곳 전공의들은 한국의 수직적 관계안에서의 교육환경이 아닌 수평적 관계안에서 배우고 있어 스트레스가 적은 분위기에서 공부하고 있다.

간혹 레지던트들이 ‘어제 밤에는 문 라이트 (moonlight) 했습니다’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들도 한국 전공의들과 마찬가지로 학자금 빚도 많고, 생활비도 부족하다. 그래서 문라이트를 한다. 이는 레지던트 근무 시간이 끝난 후에, 타 병원이나 또는 같은 병원내의 다른 과(科), 주로 응급실이나 외과에서 12시간을 더 근무한 다는 뜻이다. 아침이 되면 고단한 몸으로 본인의 자리로 출근해야 한다.

전공의들이 처하여 있는 과중한 업무, 긴 업무시간, 법적인 보호가 없는 노동아닌 노동으로 인한 과로, 수면부족에 대하여 많은 연구논문이 발표되었다. 또 수련병원은 전공의 급여담당, 행정비용 담당, 시설 제공을 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이것은 업무예산의 일부이다. 실상 수련병원은 전공의사 두명의 인력을 전문의 한명의 그것으로 계산해서 병원 업무예산을 맞춘다.

다시 요양병원 사건으로 돌아가 본다. 미국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며, 배우고 있는 전공의들, 업무예산의 부족으로 힘드는 요양병원, 노인학 전문의들의 부족 때문에 노인병원은 앓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모든 의료계는 앓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에 대해 한국사회는 비판만 할 수는 없지 않을까 싶다.

또 접수된 고소장으로 아직도 의료사고가 형사법으로 처리되는 한국사회인지라 감옥형이 만행하는 우려도 있다. 미국은 의료사고가 사법으로 대부분 처리되고, 법정으로 가도 90%는 의사의 혐의가 풀린다고 보고되어 있다.

이런 어두운 면이 있는데도 의사의 길은 가고저 하고 있는 차세대 의사들이 지는 빚은 도대체 얼마일까? 학부까지 합쳐서 최소 3십만불이다. 사립대학이라면 이의 갑절이다. 한국 의대생들이 휴학하는 이유 중의 제일 많은 이유는 학비를 벌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의과대학 학비 전액 면제를 해 주는 뉴욕 랭곤의대의 입학신청이 올해 47% 증가 한 것은 이해가 된다. (약 100명 자리에 작년 6,069명에서 올해 8,932명). 과로와 수면부족, 학자금 빚의 두가지 큰 장애물 중 한가지를 없앨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후련하고 감사한 일인가. 학자금 전액면제를 가능하게 한 랭곤 홈디포 공동창업자의 사회를 위한 긴 안목에 다시 한번 감탄한다.

순종황제, 순정효황후 그리고 한국의 여성교육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본적인 지식을 우리는 초등학교부터 고교시절 동안 제공받는다. 왠만한 국가들은 ‘의무교육(compulsory education’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취학학령의 아동을 가진 부모들 한테는 의무가 되고, 취학학령 아동들에게는 권리로 부여된다. 국가는 국민이 내는 세금에서 경비를 충당하게 된다. 나라마다 의무교육기간은 좀 다르다.

Formal schooling 은 보통 12년으로 18살 때 까지 포함하고, 의무교육은 16살 까지라고 되어있다. 미국 federal budget 의 10%가 교육에 할당된다 한다. 각 State 마다 받아 쓰는 재정이 갈라 지방자체기관, State가 공교육 자금조달 책임을 진다.

내가 받은 기본교육은 모두 한국에서 있었고, 고등교육도 한국에서 끝내었다. 미국에서는 수련의 과정을 지내면서 고=고등교육에 참여했다면 틀린 말은 아니다.

한국에서의 공교육의 내용를 별로 기억 하지 못한다. 내가 충실한 학생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두가지, 지금에 와서야 비로소 깨달은 간접적, 직접적 오해의 정보는 ‘한국어’에 대한 것과, 한국의 역사 특히 ‘구한말(舊韓末) 역사’에 대한 것이었다. 내가 공교육을 받을 때는 한국이 독립국가 이었을 때이었지만, 교사들이나 주위의 어른들은 거의 일제강점기 때 교육을 받았던 터이었기에 한국어와 순종황제에 대한 은근한 비하(卑下)적인 코멘트가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한글은 조선인들이 사는 집의 창문에서 그 형태를 따 온 것이라는 것, 순종황제는 능력없는 모자라는 사람이었다는 내용들이었다.

‘한국어진흥재단’ 이사장을 하면서 한글에 대한 우수성, 과학성, 창조의 근원을 더 확실히 알게 되었다. 인간의 구강과 후두를 연구하셨던 세종께서 그 모양으로 만드신 훌륭한 글짜가 한글이다.

조선의 27대 왕 순종황제는 병약하시기는 하였어도 1908년 한국 최초 공립여학교를 칙령으로 만드신, 여성교육에 앞서 가시던 분이었다. 그의 휘는 이척(李坧)으로1874년 3월 25일(음력 2월 8일) 고종과 명성황후의 장남으로 출생, 고종을 받들어 ‘홍범 14조’ 발표에도 함께 하였다한다. 1895년 1월 7일 주한일본공사 이노우에(井上馨)와 내부대신 박영효(朴泳孝)의 권고에 따라, 고종황제는 대원군, 왕세자, 종친 및 군신(群臣)을 거느리고 종묘에 나아가 독립서고문(獨立誓告文)과 함께  발표한 것이었다.

「홍범14조」란 “  청나라의 대한종주권(對韓宗主權) 부인, 대원군과 명성황후의 정치개입 배제, 근대적인 내각제도 확립, 탁지아문 관할하의 재정 일원화, 조세법정주의 및 예산제도 수립, 지방제도 개편, 해외유학생 파견에 의한 외국 선진문물 도입, 국민개병주의에 입각한 군사제도 확립, 법치주의에 의거한 국민의 생명 및 재산권 보호, 문벌 폐지와 능력에 따른 인재등용” 의 내용으로 순한글체•순한문체•국한문혼용체로 각각 작성하여 선포한 것이라고 한다. 이는 갑오개혁의 목표를 강령으로 선언한 비록, 일본공사의 권고에서 비롯되긴 했으나, 당시 개화파 관료들의 개혁의지를 반영한 것으로 한국 최초의 근대적 정책백서이자 최초의 헌법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 국왕이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을 처음으로 내외에 선포한 문서이기도 해서 그 역사적 의의가 크다고 본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따오고, 문장을 읽기 쉽게 변형한 것임.)

순종황제는 한일합방 조약에 날인을 거부했다. 이완용이 대신 날인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순종황제의 첫 황후 사망 후 두번째 황태자비로 책봉된 12세의 순정효황후는 친일파 윤택영의 딸이었지만 오빠 윤홍섭처럼 독립사상이 높으셨던 분이었다. 한일합방 조약 날인을 위해 필요한 임금님의 옥새를 치마폭에 감추었다가 친일파 삼촌에게 강제로 빼앗긴 일화가 있다고 전해진다. 해방 후, 또 한국전 이후 황후는 가난하게 사셨다 전해진다. 친오빠인 윤홍섭 독립유공자께서는 미국에서 신익희씨등 독립운동가를 도왔고, 한국민주당 창당에 동참, 심사부원으로 지내며 대한제국의 초기의 정치인으로 지냈으며 지금의 숙명여고, 숙명여대로 발전한 숙명학원의 3대 이사장을 지냈다. 이 분의 두 딸들이 경기여중고 출신이다.

이 독립투사, 양반, 귀족의 막내 딸은 나의 친구이다.

‘…내가 구한말에 태어났더라면 너랑 친구가 될 수 없었을거야!                                                              나는 평민이거나 하인이었을터이니?’

‘…무엇이든 마지막은 비운이 감돌아~~~’

‘…우리들의 마지막도 그럴까?’

‘…우리들이 만들기 나름이야.                                                                                                                       모두 흙으로 돌아가잖아…’

임시정부 창립 100주년과 나의 모교, 경기여고

지난 달 4월 19일 USC 에서 ‘ Commemorating The Centennial: Spring 1919,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And The Digitized Archives’ 이라는 제목으로 conference 가 있었다. USC 에 재직하고 있는 한국계통 역사학 교수들과 비혈통계 타 대학 석학들이 한국의 삼일운동, 임시정부를 주제로 그들이 찾아내고, 연구해 온 자료들을 발표했다. 대표적 발표자는 Indiana University 석좌교수 Michael Robinson, Rikkyo University 교수 Mark Caprio, UC Davis Richard Kim 교수이었고 commentary 를 Sunyoung Park, David Yoo, Kristine Dennehy 교수들이 하였다.
이 학회는 한 나절 정도 걸리게 짜여 있었다. 오랫만에 방문한 USC 캠퍼스는 아름다웠다. 잘 가꾸어진 정원, 오래된 나무들, 유서 깊어 보이는 빌딩들, 여유있어 보이는 학생들이 잘 어울려 보였다. 학회 참석자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아쉬웠다.
그곳에서 예전에 몰랐던, 어쩌면 배웠지만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정보들이 논의 되었다. 삼일운동과 상해임시정부는 서로 연통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레 같은 때에 일어났다는 것과 1918년 발표되었던 그당시 미국대통령이었던 W. Wilson 의 ‘Fourteen Points’ 는 유럽의 평화적인 나라 설립 또는 재설립에 관한 것이었지 식민지국가를 겨냥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일본의 조선강점의 과정, 강점 후 징병되어간 조선학병들과 그들의 말로, 전범죄인으로 사형된 한국인들에 대한 언급이 강의 중에 있었다. 이것이 학회의 focus 가 아니었기 때문에 간단한 언급으로 끝났던 항목이다.
Wilson 대통령은 석학들을 고용하여 연구해서 ‘Fourteen Points’를 발표했던 것이라는 것을 학회가 끝난 다음 내가 찾아 본 결과 알게 되었다. 삼일운동은 고종황제 장례식을 기해 곳곳에서 한국민들이 붕기한 독립운동이었다. 고종황제는 1월에 타계했는데, 절차상 장례식 까지 시간이 걸렸고, 당시는 음력을 쓰고 있었기에 약간의 착오는 있을 것이라고 한다.

어떻든 일본인에 의한 동양인들의 학살은 5백만 전후이고, 일본군대로 징병되어 죽어간 젊은청년들, 생체실험의 희생자, 위안부 희생자에 대한 잔혹함은 유대인 홀로코스트보다 알려져 있지 않다. 독일인의 유대인 학살에 대하여 세계와 유대인 자신들이 focus 를 두어조명했던 것과는 강도를 달리한다.
되돌아 보면 나는 제대로 역사과목을 배운 적이 없다. 살아가는데 필요한 현대사를 배우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역사에 대한 무식함을 다음의 이야기로 넘어가면서 토론하고 싶다. 나는 서울 정동에 있던 경기여고를 졸업했다. 가고 싶어서 간 학교도 아니고, 언니가 졸업한 학교니까 당연히 나도 보내진 학교이다. 그랬던 어린시절이다 보니, 학교에 관심이 있을리 없었다. 11년 전, 경기여고는 개교 100주년 행사를 크게 하였고 졸업생들의 모금으로 동창회관도 지었다.
이 때 발행된 기념호에 의하면 내가 다녔던 경기여중고교는 1908년 순종의 칙령에 의해 설립된 한국 최초의 관립 고등여학교이었다고 한다. 들여다 보니, 최초의 교장은 한국인 어윤적 선생이었고 1913년 부터 1945년 동안 다섯명의 교장이 있었는데 그중 네 명은 일본인이었다. 나는 한 번도 일본인 교장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어떻게 교육을 받았는지에 대한 거론도 듣지 못했다.
경기여중고는 지금도 건재한다. 함께 걸어온 명문사립학교 이화여고, 숙명여고등도 건재한다. 그외의 한국여성 교육의 산지였던 많은 중고교들이 지금도 살아 있음에 감사한다. 비록 애교심은 커녕, 무관심하게 교정과 교실을 드나들며 지나버린 학창시절이지만, 알게 모르게 받았던 학교에서의 교육은 가정에서 받은 밥상머리 교육과 함께 내 안에서 지속적인 교육관념으로 자리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