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주류의 삶을 택한 아이들 2012

아직 뜨거운 날씨지만 9월의 햇빛이 엷다. 미국에서는 노동절이 지나면서부터 가을이 시작된다.

이번 노동절에는 벼르고 벼르던 화분갈이를 했다. 작은 아이가 다섯 살 때였다. 유치원에 다닐 때 엄마에게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학교 바자행사에서 99센트를 주고 사다준 아기 종려나무가 있었다. 그 나무는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잘 살아주고 있다. 처음엔 내 손바닥만 하던 것이 이젠 나보다 키가 크다. 분갈이를 하면서 생명을 존중하는 마음을 행동으로 옮기며 살아 오고 있는 그 애와 그 애의 친구들을 생각했다.

둘째 딸과 그의 무리(?)들은 저희들 나름대로의 이데올로기에 치중하며 우리 기성세대의 스텐다드로 보았을 때 가난하게 산다.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와 사회의 평등을 중시하는 그들은 실상 가난하다기보다는 필요한 물질을 최소한으로만 소유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아마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 것에 대해선 신경을 쓰지 않고 산다는 것이 옳은 표현일지도 모른다.

대학시절에 그들 대부분은 요리된 음식이 제공되는 기숙사보다 자취하는 기숙사를 택했다. 이유인즉 자신의 취향대로 살겠다는 것이었다. 주로 동물 권리 때문에 채식주의자가 된 학생들이 많았다. 중간 상인과 대기업에게 이익금의 많은 부분을 빼앗기는 매사추세츠 지방의 농부들의 권익을 돕는다는 뜻에서 채소는 일주일에 한 번씩 서는 주말장터에서 구입하던 그들이다.

내가 좀 놀랐던 것은 대학에 이런 학생들을 배려하는 큰 맨션이 따로 있다는 것이었다. 부엌을 가보니 집채만한 설거지 기계와 냉장고가 있었다. 이들은 당번을 정해서 메뉴에 따라 재료를 사 들이고 만들고 설거지도 돌아가며 하고 있었다.

그 뿐 아니라 그들의 대부분은 극단주의자로 보아도 될 만큼 무서운게 없다. 재학중인 학교가 있는 보스턴에서 유엔본부가 있는 뉴욕까지 버스를 타고 가서 반전데모에 참가하는가 하면, 개중엔 신경 질병 연구비 기금 마련을 위해 보스턴에서 LA까지 자전거 횡단을 하던 젊은이들이다.

내 심경을 불편하게 하던 둘째 딸과 그 친구들은 공통점이 있었다. 자신의 삶에 매우 성실하고 또 남을 배려한다는 점이었다.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이렇듯 비주류의 삶을 선택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성인이 된 이들은 곳곳에서 역시 열심히 제 길을 걷고 있다. 최근에 들어보니 아무개는 피부과 의사가 되었고 여전히 사회 정의를 위해 봉사하고 있다고 했다. 네팔 어린이들을 위한 자선단체를 만들고 운영한단다. 또 다른 두 친구는 민권 변호사가 되어 하나는 워싱턴에서 다른 하나는 샌프란시스코에서 각각 활동하고 있다고 했다.

그들이 그려 가고 있는 삶의 그림은 흥미롭고 신선하다. 결혼식도 별스럽게 한 모양이다. 이번 여름 한 친구는 워싱턴DC 공원에서, 다른 친구는 태평양 해변에서 결혼식을 했단다. 친구와 가족들만 초빙된 결혼식은 신부나 목사없이 진행되었다고 한다. 양쪽 오빠와 형이 함께 식을 이끌었고 하객들은 주례의 선창에 따라 합창으로 그들의 결혼을 함께 인정했다고 한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검정 개는 검정 개끼리 논단다’ 하시던 말씀이 생각난다. 복합적인 의미가 있겠지만 친구는 내가 선택하는 것이라는 의미도 있을 것이다.

자녀들의 정신적 성장과 감성적 성숙을 위해서 기성 세대 부모들이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다시금 떠오르는 주말이었다. 기성세대의 부모도 차세대의 삶에 동참하고 싶으면 비록 위태로워 보일지도 모르는 그들의 행로를 참견 없이 그냥 지켜봐 주는 용기와 신뢰가 필요한 것 같다.

새로 얻은 나의 딸 2012

오늘 나는 셋째 딸을 얻었다. 이 아이에 대한 생각은 주말 내내 나를 혼잡스럽게 했다.

나는 이 아이를 만난 적이 없고 사진을 본 적도 없다. 미국 중부 백인들이 밀집해 사는 곳에 한국에서 입양되어 온 열 살 가까이 된 아이다. 오늘 기도 중에 이 아이를 내 아이처럼 영적으로 거둬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연은 이랬다. 몇 년 전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은 이 아이의 행동이 자연스럽지 못하고 주위에 대한 반응이 정상이 아닌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지금 알게된 것이지만 입양아를 관리하는 기관은 입양 첫 해엔 몇 번 입양가족을 방문하지만 장기 계획에 따른 확인방문은 1년 후에 한 번 하는 것으로 마친다고 한다.

소셜서비스국에서 이 아이가 입양된 가정을 급습했을 때 아이는 장난감은 커녕 책상도, 침대도 없이 방바닥에 깔린 매트레스 뿐인 공간에서 감금되다시피 살고 있었다고 한다. 또 아이의 양아버지는 성적(性的) 해소의 도구로 아이를 학대해 왔고 양어머니는 이 사실을 알면서도 묵인했다는 것이 더 충격을 주었다.

놀랍게도 법은 이 양부모들에게 너무 관대해 양부모는 겨우 3년의 감옥형을 받았을 뿐이다. 이야말로 미국판 ‘도가니’가 아니고 무엇이랴. 더욱 한심했고 분노스런 일은 파양해도 된다는 법의 해석이었다. 이 아이를 다시 한국으로 돌려 보내도 된다는 것이었다. 한국 누구에게로? 도대체 입양아가 물건이란 말인가.

이런 아픈 사례와 달리 세상에는 성공적인 입양 사례도 많다. 그들이 만들어 온 삶의 이야기는 가슴을 따뜻하게 한다. 얼마 전 프랑스 대선에서 승리한 집권당이 한국 입양아 출신 여성 •플뢰르 펠르랭 (Fleur Pellerin 한국명 김종숙)을 중소기업 디지털 경제장관으로 발탁했다는 이야기가 그랬다.

고아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있었지만 대다수의 고아를 만든 것은 전쟁이었다. 현대 역사에서는 두 번의 세계대전, 한국전, 베트남 전쟁, 크로아티아 전쟁등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플뢰르 펠르랭은 나이로 보았을 때 전쟁고아는 아니었던 것 같다.

2000년 미국 센서스에 의하면 18세 미만의 어린이 중에 2.5%에 달하는 200만명이 입양된 아이들이었고 이것의 두 배 정도되는 440만 명이 양부모 밑에서 자라는 아이들이라고 한다.

한국은 6•25 전쟁이 휴전 된 1953년 부터 2001년 사이에 15만명의 고아를 외국으로 입양시켰고 이 숫자의 반이 채 못되는 6만 2000명의 어린이가 자국민에게 입양되었다고 한다. 미군 병사들과의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들은 거의 대다수가 미국으로 왔다. 1953년 전후에 입양된 입양아라면 지금 55세에서 59세가 되었을 것이다.

•플뢰르 펠르랭의 성장과정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아시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특별히 한국에 대한 감정이 없다’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이 말은 많은 뜻을 함축하고 있다. 그녀도 아마 아픔의 시기가 있었을 것이고 치유의 시기를 지났을 것이다. 그 녀와 그 녀의 부모님들에게 참 잘 해 내었다고 박수쳐 주고 싶다.

이제 나의 셋째 딸도 아픔을 이기고 치유의 날에 꽃처럼 활짝 피어나고 세계를 향한 성공한 여성으로 ‘나는 세계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어서 오기 바란다.

또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도 각자의 신(神)에게 이 아이를 위해서, 아니 이런 이이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하고 싶다.

남자 의사, 여자 의사

20대 후반의 백인 청년환자가 나에게 보내졌다. 젊은 남성들에게 흔치 않은 고환암으로 진단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터였다. 늘 하듯이 환자의 과거 병력, 가정 병력을 진찰실로 들어가기 전에 검토 했더니 젊어서그런지 병력이 무척 간단했다. 청년은 진찰실로 들어서는 나를 보더니 무척 당황해 했다.

옷을 벗고 가운으로 갈아 입으라 했더니 “성서에 의하면 남자의 몸은 여자가 만지도록 할 수 없다고 쓰여 있다”면서 진찰을 거부했다.

그는 극단 기독교 종파에 속한 사람으로 엄격한 종교의식을 하면서 살아 온 모양이었다. 그는 그 때 까지 여자가 남자 몸을 만질 수 없다고 배웠기 때문에 여자 의사인 나를 보고 난감해 했던 것이다.

이때 나는 문득 나 자신이 하나의 피해자(?)가 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가 갖고 있는 극단적인 편견의 대상이 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병을 고쳐야 하는 의사인 나로서는 나에게 편견을 가한 가해자(?)를 어떻게 납득시키느냐가 문제였다. 의사와 환자의 벽이 높게만 느껴졌다.

나는 지혜로우려고 침착히 생각 할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말했다. “나는 여자가 아닙니다.” 이 말은 말 그대로 볼 때 이상할 뿐 아니라 대단한 비밀을 선포한 것처럼 들린다. 그는 깜짝 놀랐다. “내가 오늘 당신을 보는 것은 여자의 입장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 청년은 한 동안 말없이 나를 바라 보았다. 나는 설명이 더 필요함을 느꼈다. “내가 환자를 볼 때는 나는 여자가 아니고 의사라는 뜻이지요.” 청년은 그제서야 옷을 벗고 가운을 갈아 입었다.

이와 비슷한 예로 나의 맏딸이 초등학교 2학년일 때 “엄마 제시카가 그러는데 미세즈 노블은 굉장히 무섭고 동양아이들을 싫어한데!” 하며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 제시카는 학년이 하나위인 한국 아이로 딸의 친구였다. 딸아이는 미세즈 노블에게 수학만을 배우게 되어 있었고 한 해 뒤에는 담임으로 될 확률도 높은 선생님이었다. 딸아이에게 선생님이 동양인에게 편견이 있다면 너는 동양인으로 선생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학생으로 만나는 것이라는 점을 보여 주어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그리고 “무슨 일이든지 자신이 겪어 보지 않고 남의 말만 듣고 미리 판단하는 것은 자신에게 손해”라고 말해줬다.

편견 때문에 혼돈스런 사고방식이 내 안에서 자라고 비정상적인 대인관계를 초래하기 쉽다. 이것은 의사와 환자 뿐아니라 어린 딸처럼 학교 그리고 사회 구석구석에서 발생한다. 편견은 상처를 주거나 받게 하고 치유되는데 시간이 걸리기도 하고, 잘 안 될 수도 있다. 법정싸움이 되는 경우도 있다.

편견이 우리의 마음을 좀 먹기 전에 빨리 교정을 보는 것이 좋다. 살아보면 이같은 선입견때문에 스스로 불필요한 에너지를 낭비하고 손해를 본다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편견은 진실과 멀다.

자녀를 기르는 부모들에게 특히 부탁하고 싶은 말이다. 어른인 우리들은 자신이 겪지 않으면 좁은 세계에서 벗어나기 어려울지 모른다. 다시 말해서 여러가지 핑게를 갖고 우물안의 개구리로 그냥 그렇게 살아가기 쉽다. 부모인 우리들이 그렇게 살면서 우리의 자녀들에게는 넓고 좋은 세상, 많은 길을 보여 주고 싶어하는 아이러니가 있다. 편견과 선입관에 물들여지지 않고 자신의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도와주자. 그래서 그들은 자신있게 그들의 길을 갈 수 있지 않겠는가

마음 열게 한 북클럽 2012

작은 딸은 매년 크리스마스에 프레첼 만드는 파티를 한다.

프레첼은 유럽에서 유래된 일종의 빵으로 매듭 모양으로 되어 있다. 쿠키라고 부르기는 어려운 것이 전혀 달지가 않기 때문인데 이탈리아의 수도원에서 시작된 것이라고도 하고 남 •프랑스 또는 독일에서 시작되었다고도 한다. 딸네는 프레첼의 종류를 그 해의 기분에 따라 변형해서 만드는데 이번에는 두어가지 통상적인 것 이외에도 김치 프레첼도 만들었다.

파티에서 젊은이들과 어울려 한 해 동안 있었던 마음에 남는 이야기, 슬프거나 아팠던 일 특이하고 재미 있었던 일들을 나누었다. 딸의 친구들은 주로 작가 희망생들이거나 선생 또는 박사과정 중의 젊은이들이다. 어떤 면에서는 극좌 극우파들이다. 오염되지 않아 싱싱하기만 하다. 이들도 나이가 들면서 극우 극좌에서 중도를 걷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날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는 ‘쇼펜하우어 북 클럽’을 만든 제이슨에 관한 것이었다. 나도 10여년 전 제이슨의 집에서 그를 한 번 만난 적이 있는데 둘째 딸 아이와 제이슨의 여동생 •로라가 친구였던 것이다. 그 때 본 제이슨은 표정이 없었고 집은 썰렁했다. 나중에 제이슨과 •로라의 집안이 겨울날 고드름처럼 춥게 느껴지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이 아이들의 아버지는 아이들이 어렸을 때 겨울 등산을 갔다가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뉴잉글랜드 지방에 눈사태 예보가 있었는데 제이슨의 아버지는 이를 무시하고 길을 나섰다가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랜 기간 마음의 문을 닫고 지냈던 제이슨이 북클럽을 만들고 인터넷에 회원모집 광고를 올린 것이 2년 전이었다. 제이슨만 알고 있던 가입 조건은 남자는 못 생길 것, 여자는 예뻐야 할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모든 종류의 책을 적당한 시간 안에 읽어내고 분해하며, 토론에 참여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신청서에는 이력서와 사진을 동봉하여야 했고 멤버들은 진지하게 책을 선정해서 읽고 토론하였다. 영화로 만들어진 책은 함께 영화를 보았고 다시 작품평을 했다고 한다. 이런 과정 중에 제이슨은 맘에 꼭드는 아가씨를 만났다. 그리고 그들은 올해 결혼했다.

깊이 알지는 못하지만 쇼펜하우어는 박애정신을 가진 순수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점철된 잦은 실패와 사회적 소외가 비관적인 안목의 대가(大家)로 만든 것이 아닌가 싶다.
‘결혼을 한다는 것은 나의 권리를 반절로 깎고 의무는 갑절로 올리는 것이다’ 라든가 ‘결혼이란 눈을 가리고 뱀이 우글대는 주머니에 뱀장어를 꺼내리라는 희망을 갖고 손을 넣는 행위’ 또 ‘인생은 운영비가 커버되지 않는 비즈니스이다’라고도 하였다.

제이슨은 북클럽을 통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룹 •테라피를 받은 셈이다. 그룹 테라피를 표현하자면 손잡이가 긴 숟가락으로 자신의 입에 음식을 퍼 넣을 수 없는 것을 옆의 사람이 멀찌감치에서 먹여 주는 것과 같다.

‘쇼펜하우어 북 클럽’ 회원들은 쇼펜하우어가 한 발자국 더 나아가지 못하고 끝냈던 비관의 삶과는 달리 영양밥, 사랑의 반찬을 제이슨에게 먹여주었던 것이다.

‘여보’라는 말

나는 ‘여보’라는 말을 생각하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이 말은 특별한 의미를 갖고 나에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내가 세상에서 단 한 사람에게만 주는 이름이고 또 부르는 이름이다.

내 주위에는 남편이나 아내에게 ‘아무개 씨!’하고 부르는 부부들이 많다. 또 요즘은 ‘오빠!’ 또는 ‘자기야!’ 하고 부르는 것이 유행인 모양이다. 우리 부부도 그렇게 세속 이름이나 별명으로 서로를 부르던 시절이 있었다.

내가 밥과 빵을 싫증내지 않고 좋아하는 것이나 바하의 음악을 늘 듣는 것도 바로 비슷한 의미가 아닐까 생각된다.

무의미한 것 같기도 하고 평범한 것 같으며 때로는 지루한 것 같은데, 없으면 찾고 먹을수록 들을수록 편하고 좋다. 왠지 안심하고 편안하게 나를 내어주고 접할 수 있다.

‘여보’란 말은 평범한 이름 안에 깊고 맑은 사랑의 샘을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여보란 말은 평범한 말이 아닌 것 같다. 세상에서 한 사람만 빼고 나를 여보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나를 모니카라고 부르는 사람은 그 한 사람만 빼고 전부라도 과언이 아니다.

‘여보’라는 말.

처음 만났을 때 가졌던 차갑고 예리했던 이성도, 뜨겁고 부풀었던 열정도, 사랑함으로 느꼈던 아픔도 이제는 내가 매일 먹는 밥처럼 그렇고 그렇다. 그러나 그 여보라는 말은 소망을 갖고 언제나 나를 아껴주고 있다.

그리고 그 여보는 연륜이 지어 준 편안한 주름, 희끗희끗 한 반백의 머리, 여전히 깊고도 차가운 듯 싶은 눈으로 소망을 함께 하자고 말없이 말한다.

세상을 가득 채워주는 햇빛처럼 나는 하루를 평화로 채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