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 고양이 네로 2015

‘네로’가 갔다. 네로는 내가 입양했던 고양이 중 하나인데 작고 까매서 ‘네로’라고 불렀다. 어려서 듣던 이탈리아 동요 ‘검은 고양이 네로’에서 따온 이름이다.

나는 한 동안 고양이 구조활동에 참여한 적이 있다. 어느 날 오•피스 근방에 있는 홈디포에 갔다가 집 없는 여러 마리의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는 사람을 우연히 만났다. 그 때 이런 홈리스 고양이들을 개인적으로 구조하는 사람과 또 그런 활동을 하는 단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모두 인도적인 차원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었고 대부분은 과외로 자신의 시간과 돈을 쓰고 있었다. 그들은 구조한 개나 고양이가 동물보호소에서 안락사 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고 했다. 구조하고, 불임시술을 해주고, 예방주사까지 맞게 한 후 최선을 다해 입양을 시키는 일을 하고 있었다.

미국에는 1만3600개의 동물보호소가 있다. 동물보호소는 19세기 말 뉴욕, 보스턴, 필라델피아에서 개를 임시로 맡기기 위해 생긴 것에서 유래한다. 요즘은 전국적으로 매년 약 760만 마리의 동물이 보호소를 거쳐가고(개 400만, 고양이 340만) 이중 약 36%가 안락사를 당한다고 한다(지역에 따라 30~70%). 일정 기간 안에 입양이 안 되면 건강하더라도 죽인다. 우리는 이것을 안락사라고 하지만 실상 병들어 죽여지는 동물은 그리 많지 않다.

시(市)나 카운티에서 안락사를 시키는 근본적 이유는 빠듯한 예산 때문이다. 또 미국 가정의 30~50%가 이미 한 두 마리 이상의 애완동물과 살고 있어 이들을 품어 줄 가정이 많지 않기 때문이기도하다. 길거리에 나돌아 다니는 이 녀석들의 출산조절만이라도 할 수 있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인데 참으로 난감하지 않을 수 없다. 고양이 예를 들어보자. 새끼 고양이는 약 6개월만 자라면 임신이 가능하고 1년에 두 번 임신할 수 있다. 한 번에 4~6마리 새끼를 낳을 수 있으니 피임을 시키지 않는다면 기하급수적으로 숫자가 늘어날 것이다. 개는 1년에 한 번이다. 그러므로 홈리스 동물들의 임신조절만 해 줄 수 있다면 이 악순환을 깰 수 있다.

어떻든 네로가 우리 식구가 되었을 때 녀석의 나이는 알 수 없었지만 한 번 잡혀서 불임수술을 받은 흔적이 있었다. 오른쪽 귀의 자그마한 부분이 절제되어 있었다. 잡은 고양이는 불임시술을 해 주고 풀어 줄 때 귀 일부분을 짤라 표시 해 주는 것이 통례로 되어있다. 그러니까 네로는 TNR(trap-neuter-return 포획-불임수술-돌려보내짐) 프로그램대로 잡혀 불임수술을 받았지만 입양되지 못해 다시 길로 풀려 났거나 입양 후 어떤 사연이 있어 다시 버려진 것 같았다.

동물애호협회와 동물관리국이 지원하는 TNR프로그램은 미국 이외에 영국, 이탈리아, 캐나다에서도 시행되고 있으며 다시 풀어 준 동물의 수명은 그다지 나쁘지 않다고 한다.

나는 네로 이외에도 여러 마리의 홈리스 고양이를 입양시키고 직접 입양도 했는데 그 과정에서 국가가 정한 법, 그리고 그 법을 준수하게끔 돕는 관리기관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64년 한 여성이 쓴 ‘동물 기계 (Animal Machines)’이라는 책이 영국을 흔들었고 1년 후인 1965년 지구상 최초로 영국에서 동물복지를 위한 위원회가 조성되었다는 것도 배웠다.

네로 같은 생명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내용을 다음 기회에 더 쓰기로 하고 네로 녀석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접으며 오늘을 마감한다.

여름밤 콘서트와 음악 교육의 추억 2016

나는 모든 계절을 좋아한다. 봄은 봄대로, 여름은 여름대로 그 아름다움이 깊다. 향기가 다르다. 빛도 다르다. 사계절이 분명하지 않은 엘에이라지만 빛으로 말하면 초겨울 엘에이 빛이 제일 오랫동안 생각을 멈추게 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초여름이다. 엘에이 기후가 화씨 110도를 오르내리고 잔인스런 열풍이 불어도 이를 견뎌주는 여름은 역시 풍성해서 고맙다. 폭염을 견딘 연약해 보이는 잎새들이 파릇파릇 살아 반짝이는 것을 보면 신기하다.

여름이 되면 참외의 향기로움을 생각하게 된다. 어린시절 여름방학이 되면 친구들은 여행을 가거나 과외공부 중이라 바쁘고 홀로 남은 나의 나날은 무료하기만 했다. 이럴 때 엄마가 깍아 주던 참외는 달고 향기로왔다. 그리고 여름이 되면 또 생각나는 일이 있다.처음 보았던 야외 음악회이다.

고등교육을 받지 못했던 엄마는 클래식을 들으며 살던 분이 아니었다. 그런 엄마가 나를 야외 음악회에 데리고 갔던 일이 있다. 내 희미한 기억에는 그 곳이 덕수궁이었고 연주자는 요한 스트라우스의 후손인 스트라우스라는 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의 이름의 다른 부분은 기억나지 않고 그가 연주한 곡도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여름 저녁이 덥고 후덥지근 했고 모기가 성가셨다는 것이 기억에 있을 뿐이다.

어린 시절에 갔었던 또 다른 음악회가 기억난다. 신동 피아니스트로 알려진 한동일씨는 13세에 미국에 유학 갔다. 4년 후 처음으로 귀국해서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피아노 연주회를 가졌다. 그 당시 한국에는 이화여대 대강당이 제일 큰 연주회장이었다. 엄마는 나를 그 음악회에 또 데리고 갔다. 내가 몇 살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아서 인터넷을 찾아 한동일씨의 개인 역사를 찾아 보고 거꾸로 계산 해 보니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나이였다. 그는 무늬 사이로 맨살이 비쳐 보이는 까만 명주 양말에 반짝이는 까만 에나멜 구두를 신고 피아노 패달을 바삐 밟으며 모짜르트의 터키 행진곡을 연주 했다. 정말 터키 행진곡을 연주 했는지 누가 묻는다면 장담 할 수는 없지만, 나는 그 후에 ‘딴딴 딴 딴딴 딴딴 딴딴 딴딴 딴 딴딴!!!’ 터키 행진곡을 노래하면서 집안을 돌아 다녔던 것이다. 지금도 가끔 행진곡이 들리는 듯 할 때가 있다.

그랬던 엄마이였지만 나는 실상 아무 악기도 다룰 줄 모른다. 집안 형편상 내가 받은 교육의 범위는 학교에서 배푸는 학과목이 전부이었다. 그렇지만 내가 중고교 때 받은 한국의 음악교육은 광범위했고 음악은 많은 이야기를 갖고 나에게 머물었던 것 같다. 한국의 음악교육은 내가 살아가는데 조금도 손색이 없이 삶의 기본을 이해시켜 주었던 것이다. 작품에 숨겨진 이야기들, 끈임없이 고쳐지며 완성된 복잡한 곡들, 그들이 남겨 놓은 난해한 악보를 보면서 감탄하던 순간들. 인간의 ‘영’을 흔들는 신비스런 곡이 있는가 하면 가슴을 멍들게 하는 아픈 곡들도 있다.

올해는 운 좋게 지인이 가정집에서 주최한 컨서트를 다녀왔다. 바하의 첼로 스윗 일 번 전곡(全曲)을 들으며 행복한 저녁시간을 보냈다. 아무리 시대가 발달해서 컴퓨터와, 전화기를 통해 좋아하는 음악을 골라 들으며 살수 있다해도 나에게 음악의 변두리에서 무한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마음을 갖게 해 준 엄마처럼, 나도 올 여름에는 세살박이 부터 여덟살이 되는 손주들과 함께 할리우드 볼에 가야 할까 보다. 불꽃놀이도 볼 수 있는 밤을 골라서.

알프스 산록에서 띄운 편지 2015

직장에서 반쯤 물러나 있는 ‘반은퇴’의 삶이 싫지는 않다. 이전의 날들을 멀찌감치에서 돌아볼 수 있는 여유도 생긴다. 나이가 허락하는 정신적, 정서적인 혜택인가 보다. 반쯤 은퇴를 했지만 일정은 예전과 다름 없이 빼꼭히 차 있다.

지금도 환자들의 삶에 어느 정도 관련돼 있는 나에게 가끔 환자들은 관심을 보내온다. 여행은 다니는지, 과외활동은 하는지, 진료 외에 음악이나 미술에 관심이 있는지 알고 싶어한다. 사실 나는 여행을 잘 다니는 타입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여러군데를 다녀오고 앞으로도 갈 계획을 세운다. 최근에는 알프스와 그 산을 둘러 싼 나라들을 여행하고 왔다. 내가 진료하는 환자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들도 많이 생겼다.

알프스 산맥은 웅장한 모습으로 백년설을 고깔모자처럼 쓰고,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서 있었다. 가슴을 펴고 산을 바라 보았다. 올라갈 때 진눈깨비로 모습을 숨기고 있었던 산에 눈보라가 그치니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산 중턱부터 걸어서 하행을 하는데 강추위에도 살아 남은 흰색, 보라색, 분홍색의 이름 모를 꽃들이 땅 바닥에 몸을 낮추고 피어 있었다.

‘빈사의 사자상’을 보기 위해 들른 곳은 스위스 루체른이었다. 죽어가는 사자상을 조각한 작품이다. ‘빈사의 사자상’은 거대했고 고통의 표현이 보는 사람들에게 아픔으로 다가올 정도로 걸작이었다. 조각은 자연석을 이용해 절벽에 만들어져 있었고 머리를 반쯤 숙인 사자는 마지막 숨을 거두고 있는 듯 보였다. 사자의 오른쪽 앞발은 프랑스 왕가를 나타내는 백합이 그려진 방패 위에 놓여 있고, 발톱은 웅크리고 있다. 아파서 일까 아니면 누구를 할퀴기 위한 최후 동작이었을까. 스위스의 문장이 그려진 또 다른 방패에 사자는 머리를 기대고 있다. 그리고 사자의 옆구리에는 부러진 창이 꽂혀 있다.

스위스가 잘 살지 못했을 때 용병들이 외국으로 팔려 갔는데 ‘빈사의 사자상’은 프랑스 혁명 때 희생된 약 760명의 용병을 기리기 위해 만든 작품이다. 국가와 가정이라는 울타리는 군인들을 포함한 우리에게 어떤 보호를 해 줄 수 있는 것일까? 착잡한 생각이 들었다.

루체른을 뒤로 하고 대학의 도시 하이델베르그에 갔다. 19세기 말 ‘오래된 하이델베르그’라고 쓰여진 원작이 그후 희곡, 오페라, 무성영화, 뮤지컬 영화 등으로 재탄생했는데 그 무대가 됐던 도시다. 그곳의 대학은 내가 알고 있는 한국이나 미국 대학보다 좁았다. 도서관에는 꽤 많은 학생들이 무엇인가 열심히 하고 있었다. 그들도 13세기부터 유럽에서 전통으로 내려오는 ‘축제의 노래’를 뮤지컬 영화 ‘황태자의 첫 사랑(원명: 학생 황태자)’에서처럼 지금도 부를 것이다. 미국에서도 부르는 이 노래는 브람스가 편집해서 편곡한 것이라고 한다.

‘기뻐하자, 그러므로(라틴어, gaudeamus igitur•가우데아무스 이기투르)/ 우리가 젊은 동안/ 즐거웠던 소년시절이 가고/ 문제투성이 늙음도 가고 나면/ 흙은 우리를 받아주리.’ 젊음이 가고 나면 우리가 흙으로 돌아가는 것까지도 노래해 주어 고맙기만 하다.

웅장한 자연은 인간의 한계와 무상을 재확인해 주었다. 역사적 작품들은 부귀영화의 쟁탈전에서 노고를 강요받았던 숨겨진 희생과, 부귀영화의 무상함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대학에서는 젊음이 허락하는 삶이 얼마나 싱그러운지 다시 보게 했다. 나도 그런 세월을 지냈었겠구나 하면서..

나의 여행기가 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환자들의 삶에 작은 용기가 되기를 바란다.

비주류의 삶을 택한 아이들 2012

아직 뜨거운 날씨지만 9월의 햇빛이 엷다. 미국에서는 노동절이 지나면서부터 가을이 시작된다.

이번 노동절에는 벼르고 벼르던 화분갈이를 했다. 작은 아이가 다섯 살 때였다. 유치원에 다닐 때 엄마에게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학교 바자행사에서 99센트를 주고 사다준 아기 종려나무가 있었다. 그 나무는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잘 살아주고 있다. 처음엔 내 손바닥만 하던 것이 이젠 나보다 키가 크다. 분갈이를 하면서 생명을 존중하는 마음을 행동으로 옮기며 살아 오고 있는 그 애와 그 애의 친구들을 생각했다.

둘째 딸과 그의 무리(?)들은 저희들 나름대로의 이데올로기에 치중하며 우리 기성세대의 스텐다드로 보았을 때 가난하게 산다.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와 사회의 평등을 중시하는 그들은 실상 가난하다기보다는 필요한 물질을 최소한으로만 소유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아마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 것에 대해선 신경을 쓰지 않고 산다는 것이 옳은 표현일지도 모른다.

대학시절에 그들 대부분은 요리된 음식이 제공되는 기숙사보다 자취하는 기숙사를 택했다. 이유인즉 자신의 취향대로 살겠다는 것이었다. 주로 동물 권리 때문에 채식주의자가 된 학생들이 많았다. 중간 상인과 대기업에게 이익금의 많은 부분을 빼앗기는 매사추세츠 지방의 농부들의 권익을 돕는다는 뜻에서 채소는 일주일에 한 번씩 서는 주말장터에서 구입하던 그들이다.

내가 좀 놀랐던 것은 대학에 이런 학생들을 배려하는 큰 맨션이 따로 있다는 것이었다. 부엌을 가보니 집채만한 설거지 기계와 냉장고가 있었다. 이들은 당번을 정해서 메뉴에 따라 재료를 사 들이고 만들고 설거지도 돌아가며 하고 있었다.

그 뿐 아니라 그들의 대부분은 극단주의자로 보아도 될 만큼 무서운게 없다. 재학중인 학교가 있는 보스턴에서 유엔본부가 있는 뉴욕까지 버스를 타고 가서 반전데모에 참가하는가 하면, 개중엔 신경 질병 연구비 기금 마련을 위해 보스턴에서 LA까지 자전거 횡단을 하던 젊은이들이다.

내 심경을 불편하게 하던 둘째 딸과 그 친구들은 공통점이 있었다. 자신의 삶에 매우 성실하고 또 남을 배려한다는 점이었다.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이렇듯 비주류의 삶을 선택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성인이 된 이들은 곳곳에서 역시 열심히 제 길을 걷고 있다. 최근에 들어보니 아무개는 피부과 의사가 되었고 여전히 사회 정의를 위해 봉사하고 있다고 했다. 네팔 어린이들을 위한 자선단체를 만들고 운영한단다. 또 다른 두 친구는 민권 변호사가 되어 하나는 워싱턴에서 다른 하나는 샌프란시스코에서 각각 활동하고 있다고 했다.

그들이 그려 가고 있는 삶의 그림은 흥미롭고 신선하다. 결혼식도 별스럽게 한 모양이다. 이번 여름 한 친구는 워싱턴DC 공원에서, 다른 친구는 태평양 해변에서 결혼식을 했단다. 친구와 가족들만 초빙된 결혼식은 신부나 목사없이 진행되었다고 한다. 양쪽 오빠와 형이 함께 식을 이끌었고 하객들은 주례의 선창에 따라 합창으로 그들의 결혼을 함께 인정했다고 한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검정 개는 검정 개끼리 논단다’ 하시던 말씀이 생각난다. 복합적인 의미가 있겠지만 친구는 내가 선택하는 것이라는 의미도 있을 것이다.

자녀들의 정신적 성장과 감성적 성숙을 위해서 기성 세대 부모들이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다시금 떠오르는 주말이었다. 기성세대의 부모도 차세대의 삶에 동참하고 싶으면 비록 위태로워 보일지도 모르는 그들의 행로를 참견 없이 그냥 지켜봐 주는 용기와 신뢰가 필요한 것 같다.

새로 얻은 나의 딸 2012

오늘 나는 셋째 딸을 얻었다. 이 아이에 대한 생각은 주말 내내 나를 혼잡스럽게 했다.

나는 이 아이를 만난 적이 없고 사진을 본 적도 없다. 미국 중부 백인들이 밀집해 사는 곳에 한국에서 입양되어 온 열 살 가까이 된 아이다. 오늘 기도 중에 이 아이를 내 아이처럼 영적으로 거둬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연은 이랬다. 몇 년 전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은 이 아이의 행동이 자연스럽지 못하고 주위에 대한 반응이 정상이 아닌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지금 알게된 것이지만 입양아를 관리하는 기관은 입양 첫 해엔 몇 번 입양가족을 방문하지만 장기 계획에 따른 확인방문은 1년 후에 한 번 하는 것으로 마친다고 한다.

소셜서비스국에서 이 아이가 입양된 가정을 급습했을 때 아이는 장난감은 커녕 책상도, 침대도 없이 방바닥에 깔린 매트레스 뿐인 공간에서 감금되다시피 살고 있었다고 한다. 또 아이의 양아버지는 성적(性的) 해소의 도구로 아이를 학대해 왔고 양어머니는 이 사실을 알면서도 묵인했다는 것이 더 충격을 주었다.

놀랍게도 법은 이 양부모들에게 너무 관대해 양부모는 겨우 3년의 감옥형을 받았을 뿐이다. 이야말로 미국판 ‘도가니’가 아니고 무엇이랴. 더욱 한심했고 분노스런 일은 파양해도 된다는 법의 해석이었다. 이 아이를 다시 한국으로 돌려 보내도 된다는 것이었다. 한국 누구에게로? 도대체 입양아가 물건이란 말인가.

이런 아픈 사례와 달리 세상에는 성공적인 입양 사례도 많다. 그들이 만들어 온 삶의 이야기는 가슴을 따뜻하게 한다. 얼마 전 프랑스 대선에서 승리한 집권당이 한국 입양아 출신 여성 •플뢰르 펠르랭 (Fleur Pellerin 한국명 김종숙)을 중소기업 디지털 경제장관으로 발탁했다는 이야기가 그랬다.

고아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있었지만 대다수의 고아를 만든 것은 전쟁이었다. 현대 역사에서는 두 번의 세계대전, 한국전, 베트남 전쟁, 크로아티아 전쟁등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플뢰르 펠르랭은 나이로 보았을 때 전쟁고아는 아니었던 것 같다.

2000년 미국 센서스에 의하면 18세 미만의 어린이 중에 2.5%에 달하는 200만명이 입양된 아이들이었고 이것의 두 배 정도되는 440만 명이 양부모 밑에서 자라는 아이들이라고 한다.

한국은 6•25 전쟁이 휴전 된 1953년 부터 2001년 사이에 15만명의 고아를 외국으로 입양시켰고 이 숫자의 반이 채 못되는 6만 2000명의 어린이가 자국민에게 입양되었다고 한다. 미군 병사들과의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들은 거의 대다수가 미국으로 왔다. 1953년 전후에 입양된 입양아라면 지금 55세에서 59세가 되었을 것이다.

•플뢰르 펠르랭의 성장과정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아시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특별히 한국에 대한 감정이 없다’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이 말은 많은 뜻을 함축하고 있다. 그녀도 아마 아픔의 시기가 있었을 것이고 치유의 시기를 지났을 것이다. 그 녀와 그 녀의 부모님들에게 참 잘 해 내었다고 박수쳐 주고 싶다.

이제 나의 셋째 딸도 아픔을 이기고 치유의 날에 꽃처럼 활짝 피어나고 세계를 향한 성공한 여성으로 ‘나는 세계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어서 오기 바란다.

또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도 각자의 신(神)에게 이 아이를 위해서, 아니 이런 이이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하고 싶다.